<오늘> 2012년 3,4월호 신간 소개



<오늘>에서 책 소개를 한 지 1년이 지났습니다그동안은 딱딱한 글투를 고집했는데요새해를 맞으면서 뭔가 변화를 주고 싶더라고요그런데 12월호는 12월에 마감이니까정작 글 쓰는 저는 새해 맞는 기분도 안 나고 해서 그냥 그대로 갔어요허나이제 34월호에서는 꽃피는 봄을 맞는다는 핑계와 함께 좀 부드럽게 써보려 합니다독자분들 반응이 좋으면 계속 부드럽게 가려고요오홍홍.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 2 

CBS 기획 생각을담는집


문체를 바꾼 만큼첫 책도 뭔가를 바꾸는’ 걸로 소개할게요원래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은 기독교방송 CBS에서 기획하는 강연 및 방송 프로그램 제목입니다줄여서 <세바시>라고 하죠열정과 끈기또 새로운 생각으로 각자의 영역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분들을 모셔서 15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인데요이걸 책으로도 묶어 내고 있습니다저는 1권은 읽지 못했고 이번에 출간된 2권부터 읽었어요홍세화(<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저자), 박총(<복음과 상황편집장, <욕쟁이 예수저자), 하종강(노동운동가등 23인의 이야기가 마치 풍성한 뷔페처럼 펼쳐진 <세바시> 2권을 읽고 나니세상엔 아직 멋진 사람들이 많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NGO 운동가사회적 기업 대표예술가학자 등의 생생한 이야기가 언론에서 주로 만나는 별로 멋지지 않은 사건·사고 이야기와 너무 비교되는 거 있죠그래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마냥 <세바시>에 더 푹 빠져들게 된 것 같아요글로 읽는데도 강연자가 얘기하는 걸 직접 듣는 듯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고맘에 쏙 드는 꼭지는 첨부된 URL 인터넷 주소와 QR코드를 통해 동영상으로 만나기도 했어요영상과 비교해 보니 책은 더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 면이 좋았어요어쨌든 책으로든 영상으로든 꼭 맛보시길 바랍니다짧고 강하게 그냥 강추합니다. <세바시뷔페 메뉴 중 반 이상은 정말 맛나서 감동하실 거예요.




떠날 수 없는 사람들 

김성희김수박김홍모심흥아유승하이경석 보리


앞서 소개한 책은 세상을 바꾸려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어요그런데 그들은 왜 세상을 바꾸려 할까요가장 단순하고도 근본적인 이유는 세상에 바꿀 구석이 있기 때문일 거예요이 바꿀 구석은 이상과 현실을 기준으로 발견됩니다정말 좋은 무언가가 있어서 그 이상적인 방향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을 수도 있을 테고요현실이 너무 지옥 같아서 바꾸고 싶을 수도 있을 테지요둘은 얽혀 있어서 명확히 나누기는 어렵지만, <세바시>는 전자에 해당하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그래서 힘차고 희망차죠꿈꾸는 사람들을 보니 기분도 막 좋아지면서 세상을 바꾸고 싶어져요그런데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면 정반대의 이유로 세상을 바꾸고 싶어집니다이 책은 또 다른 용산집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만화 모음집이에요여기 참여한 만화가들 중 다수는 <내가 살던 용산>이라는 제목의 책에서도 용산 참사를 만화로 그렸던 분들인데요이번 책에서는 재개발 상황 속에서 고통 받는 다른 지역민들의 이야기를 다시금 그렸어요그러니까우리가 알고 있는 용산 참사는 재개발로 인한 여러 갈등과 문제가 돌출된 한 부분일 뿐이란 거죠만화를 보니 고양시 덕이동부천시 중3성남시 단대동 등 여러 재개발 지역들이 용산과 닮은꼴이더군요이 닮은꼴이 가장 비극적인 경과를 밟으면 지역 이름 뒤에 참사라는 꼬리말이 붙게 될 테지요이 책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함께 막자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도록 세상을 바꾸자고 그림으로 말하는 듯합니다희망찬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바꾸자고 하는 대신에 지금도 어딘가에서 눈물 흘리고 있는 우리 이웃의 아픔과 괴로움을 그림 속에 담아내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콩고콩고

배상민 자음과모음


마지막으로 소개할 책도 비슷한 맥락에서 얘기해 볼 수 있어요앞의 두 책이 논픽션인데 반해 이번 책은 픽션이라는 차이는 있죠하지만 이건 읽기에 따라 큰 차이가 아닐 수도 있어요허구도 실제 세계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서는 탄생하지 못하니까요아무리 <콩고콩고>가 서기 1만년을 무대로 해 막을 여는 SF 소설이라 해도 작가와 독자가 사는 실제 세계가 집필과 독서 과정에 끊임없이 개입할 수밖에 없죠특히 <콩고콩고>의 작가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SF의 얼개를 빌어 현대 세계의 인간사를 그려내고 있습니다소설 이야기는 길게 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짧게 배경과 인물에 대해서만 말씀드릴게요. <콩고콩고>는 크게 두 시대즉 2000년대 전후의 현대 세계와그 8000년 후의 미래 세계를 오가며 진행됩니다하지만 주인공들은 2000년대 전후의 현대인들이지요평범한 현대인들은 아니에요. ‘와 은 그들 스스로 진화된 인류라고 믿고 있는 꽤나 부담스러운 아이들이거든요김연아 같은 체형의 는 유서 깊은 사창가 집안에서 태어난 똑똑한 여자아이고아이큐 테스트를 할 때마다 78을 기록하는 머리 큰 아이 은 미혼모의 아들이에요창녀의 딸이라고 또 바보라고 세상에 왕따 당하는 이들 ?‘과 이는 작당하여 세상을 왕따 시킵니다체형부터가 미래 인류의 형상을 한 그들은 마치 영화 <X>의 돌연변이들처럼 진화한 미래인류이니 보통 사람들과는 이 다르다나요과연 더 진화한 이들 과 는 세계를 어떻게 바꾸려 할까요소외된 이들의 입장에 서서 바꿀 구석에 대해 현실과 이상’ 어느 한 쪽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입심 좋게 이야기하는 소설, <콩고콩고>입니다가볍게 읽는데 가슴은 무거워지는쓴웃음 나는 경험도 하실 수 있어요.



원블로그 주소: http://blog.naver.com/808thirty/11014698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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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2012년 1,2월호 신간 소개



지금은 없는 이야기

최규석 지음 사계절


<지금은 없는 이야기>는 만화가 최규석의 그림과 글로 탄생한 스무 편의 우화를 담고 있다어릴 적 이솝우화를 즐겨읽었던 나는 꽤나 오랫동안 기탁할 우자를 쓰는 우화(寓話)를 우화(愚話)로 잘못 알고 있었다이 어리석은(오해는 필시 우화 속 주인공들이 예외 없이 바보 같았던 데서 연유했을 것이다서로 먹지 못할 식사를 내놓았던 여우와 두루미도물고 있던 뼈다귀를 물에 빠뜨려 버린 개도벌거벗은 임금님도 어쩜 그리 바보 같았던지하지만 조금 커서는 알게 되었다현실에는 이보다 더한 바보들이 많단 것과이 세계가 정말 바보같이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그리고 우화는 그런 인간과 세계를 풍자하며 교훈을 안겨주는 이야기라는 것을.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대한민국 원주민>, <울기엔 좀 애매한등의 만화를 통해 어딘가 어긋난 세계의 안타까운 결과물들을 그려왔던 최규석은, ‘우화라는 이름을 담고 내놓은 새 책에서는 그 어긋난 세계의 바보 같은 점을 흥미롭게 폭로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선회했다만화가 최규석을 사랑했던 나이지만우화가 최규석의 새 책도 무척이나 반갑다편편마다 스타일을 바꾸어가는 그림체도 벌써 대가의 반열에 진입한 듯하며무엇보다 이야기 하나하나가 이솝이나 톨스토이에 비견할 만큼 강력하다불평불만 하지 말고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바보 같은 세상에 최규석이 던진 힘센 우화가 널리 퍼지길 희망한다그 중에서도 <가위바위보>는 지금 당장 들려주고 싶어서 못 견딜 정도다. “뭐든지 가위바위보로 결정하는 마을이 있었대그런데…….”


블로그로 만나는 제2의 인생 

정성욱·신충 지음 생각비행


바야흐로 1인 미디어 시대다블로그를 활용하는 건 기본이고, SNS 하나쯤 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처진 느낌이 들 정도다물론 시대의 흐름 같은 게 중요한 건 아니다내가 하고 싶지 않으면 그만이다하지만 마침 당신에게 이야기 하고 싶은 게 잔뜩 있다면좋아하는 뮤지컬이나 드라마에 대한 감상을내가 제일 맛있게 만들 수 있는 요리의 레시피를혹은 나만의 독서 기록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다면새해를 맞아 블로그 인생을 시작하는 거다그럴 때모든 걸 책으로 배우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블로그 입문서가 필요하다당연히입문자를 위한 실용서는 쉽고 상세해야 한다지나칠 만큼 친절해야 한다입문자는 포기가 빠르기 때문이다단순한 글 올리기 외에는 진즉에 포기했던블로그 개점휴업 2년차인 나 역시 입문자에 다름 아니었다. RSS라거나 트랙백이라거나 메타블로그 같은 말들을 들은 지는 오래 되었건만 귀에 익숙하다고 다 아는 말은 아니더라하지만 이제는 의미를 알 뿐만 아니라 구사도 할 수 있게 되었다다 지나칠 만큼 친절한 <블로그로 만나는 제2의 인생덕분이다국내 대형 블로그 사이트만 해도 네이버다음 등 다섯 군데나 되다 보니 사이트마다 블로그를 개설하는 방식도기능을 활용하는 방식도 각각 다르다그런데 이 친절한 책은 개설뿐만 아니라 중요한 기능 활용까지 모든 과정을다섯 사이트 각각 올컬러 사진을 통해 설명해 준다블로그를 하는 기쁨과 블로그 사회생활 에티켓도 저자의 넓은 정보력과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꼼꼼하게 알려 준다. SNS 맛보기 등을 다룬 부록도 튼실하다실용서는 써보고 하는 추천이 진짜일 터써본 사람으로서 보증한다새해를 맞아 블로그를 시작하는 데 안성맞춤인,쉽고 상세하고 친절한 블로그 입문서다.



희랍어 시간 

한강 지음 문학동네


누구나 힘겨운 순간이 있다.” 부정할 수 없는 이 먹먹한 참말은그러나 무엇도 설명해 주지 못한다위로도 되지 못한다.나의 아픔너의 아픔그들의 아픔이 누구나의 아픔으로 일반화 될 수는 없는 일이다아픔은 모두 다르게 아픈 거니까.하지만 때로 나의 아픔과 너의 아픔이또 그들의 아픔이 서로 만날 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달리 아프지만 함께 아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인해 일어나는 기적이 있는 것이다한강의 새 소설 <희랍어 시간>은 그녀의 아픔과 그의 아픔이 만나는 순간을 그렸다그 순간을 채우는 것은 여자와 남자가 나누는 독백이다여자와 남자는 각기 소중한 이들을 잃고 무너져 내리고 있다게다가 여자는 소리 내어 말할 수 없게 되었고남자는 곧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이런 몰락의 시간 가운데 있는 두 사람이소통불가능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두 사람이, <희랍어 시간>에 독백을 나눈다.’ 그 나눠지는 독백은 꺼져가는 불꽃처럼 차갑고 고대 희랍어처럼 새롭다꼭 그렇게눈물 나게 아름답다그리고 놀랍게도 그들이 나누던 독백이 그치는 순간함께 아프기 때문에 생겨나는 기적이 그 어디엔가 일어난다기적의 자리는 그와 그녀의 사이일 수도그들과 독자의 사이일 수도그 스스로 아파했던 독자와 세계 사이일 수도 있다그게 어디든,그렇게내가 아는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위로가 <희랍어 시간>에 나누어진다지금 너무 아픈 당신에게는 어쩌면피하고 싶지만 꼭 만나야 할그런 책일지도 모르겠다.


원글 링크: http://blog.naver.com/808thirty/110146967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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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삼, <쌉니다천리마마트>

1~4권(미완-연재 중), 미우



풍자만화의 새 지평을 연 김규삼의 네이버 웹툰 <쌉니다천리마마트>가 단행본으로 나왔다대형마트를 다룬 만화가 이렇게 재미날 수 있다니! 그것도 사업체 내 연애와 승진을 위한 악다구니를 그리는 게 아니라 마트가 그 자체로 품고 있는 정치-사회-경제적 부조리를 웃음으로 비틀고 메치며 웃긴다또 이 시대의 젊은 감수성과 잉여의 언어코드를 실시간으로 소화한 다양한 패러디가 매장 곳곳에서 펼쳐진다씁쓸한 현실을 계속해서 참고하며 웃음을 발명해내는 이 저렴하고도 엄청난’ 천리마마트 경영 원칙의 현실 도입이 시급하다


이를 위한 우리의 구호!


하나, 전국의 대형마트는 정복동식 경영을 실천하라

하나, 단행본을 대량매입한 후 마트 서점코너에서 반액대매출하고 직원교육 교재로 활용하라!



쌉니다 천리마마트 웹툰 바로가기

-> http://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212694&seq=1&weekday=fri


(원래 <싱크> 10호 싱크만화경 코너에서 소개했는데 그 내용을 약간 수정해 블로그에서도 소개합니다.)



원글 링크: http://blog.naver.com/808thirty/110147334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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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런 '프레이' 1 나이트런 '프레이' 1
박성규 지음, 김성민 원작 / 길찾기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만화, 폭력, 사랑.

 

1.


이 글을 쓰는 시점에 대해 먼저 밝히는 것이 필요하리라. 2012315일 오늘은 한미 FTA가 발효된 날이며, 제주 해군기지 건설 과정에서 구럼비 바위가 발파된 지 9일째 되는 날이다. 또 일부 웹툰에 대한 청소년유해매체물 결정 관련 사전 통지 및 의견제출 안내라는 긴 이름의 공문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의해 공지된 지 38일째다. 재능교육 해고 노동자들이 투쟁을 시작한 지는 1547일째, 4대강 사업이 첫 삽을 뜬지는 857일째. 이명박 대통령 가카의 임기 종료까지 345일이 남은 현재 굵직굵직한 갈등 중 극히 일부만 모아도 이 정도다. FTA 발효를 맞아 강정을 염려하며 방심위의 웹툰 유해물 지정에 대해 고찰하는 글을 쓰고 있는 나는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게 사는 건가 싶다. 문제 뒤에 또 문제.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득달같이 추가되는 새로운 문제. 아아하아아...”

 

이처럼 너무 많은 사안 가운데 살며 쓰다 보니 갈피를 잡기 어렵지만 확실한 것 한 가지. 이 모든 사안의 핵심은 폭력이다. 이 핵심 단어에 수식어를 붙여보면 다음과 같다. 공적 폭력, 국가적 폭력, 자본의 폭력, 제도적 폭력, 제국주의적 폭력. 조금 더 자세히 대상관계를 밝히면 이렇게도 쓸 수 있다. 비정규직에 대한 폭력, 문화예술에 대한 폭력, 인권에 대한 폭력, 자연에 대한 폭력, 지역에 대한 폭력, 전 국민에 대한 폭력.

 

그런데 이 글의 가장 주요한 사안인 방심위의 유해 웹툰 지정은 무려 폭력 예방을 위한 조치였다. 그들이 말하는 예방되어야 할 폭력은 학교폭력이다. 이 합성어를 마주하며 선생님의 학생에 대한 체벌과 구타가 떠오르는 이도 있을 것이나, 방심위의 이목은 그것을 향해 있지 않다. 그들에게 문제가 된 것은 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이다. 그리고 23편의 웹툰이, 그 폭력의 유발자로 지적되었다. 졸지에 잠재적 폭력 유발자가 되어버린 웹툰 작가들은 이를 웹툰에 대한 폭력으로 보고 집단적으로 반발했다.


<작가 노컷툰 릴레이 중 억수씨>

 

웹툰 작가들만이 아니라 다양한 논자들과 독자들이 그 반발에 함께하고 있다. 노컷툰 블로그를 중심으로 작가들의 설득력 있는 메시지가 담긴 만화가 연이어 게시되었으며, 또한 만화를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방심위의 조치에 반박하는 글을 기고하여 만화계에 힘을 보태고 있다. 이러한 그림과 글을 살펴보면 만화계가 상당히 논리정연하고 체계적으로 이 사태에 대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만화계는 1997년에 청소년 보호법에 크게 당했던 뼈아픈 과거에서 배운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젊은 웹툰 작가들을 포함한 만화계는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을 역량과 힘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로 방심위는 이렇다 할 액션을 취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억눌린 자들의 목소리가 훨씬 큰 판이다.

 

<독자 노컷툰>


방심위를 난감하게 하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학생들의 심성을 보호하여 부모님 마음을 안심시켜보려던 방심위의 행동에 부모님이 안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학생들이 제대로 뿔이 난 것만은 확실하다. 오호 통재라, 방심위가 학교폭력으로부터 보호하려 한 청소년, 고교 학생들이 노컷툰 블로그에 방심위의 결정에 반대하는 배너를 달고 있는 것이다.(<독자 노컷툰>) 이처럼 방심위가 집중포화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나까지 말을 보태려니 어르신들이 약간은 불쌍하기까지 하다. 이 분들은 사실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폭력에서 보호하려는 마음으로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하여, 이미 많은 작가와 논자들이 지적한 바 있는 조치 자체의 문제점은 생략하도록 하자. (노컷툰 블로그에 가보면 잘 정리되어 있다.) 나는 되려 그 그러한 조치를 취했던 그 분들의 사랑스러운 마음을 곡해하지 않고 직시하려 한다. 나는 방심위의 결정이 많은 이들이 지적한 것과 같이 정권 말기나 선거철에 으레 등장하는 어떠한 정치적 술수나 사회적 문제에 대한 희생양 만들기라고 보지 않으려 한다. 조선일보가 웹툰을 학교 폭력 유발매체로 지목한 데다 동급생들에게 폭력을 당하다 못해 자살한 청소년의 사연이 언론에 회자되어 여론이 들끓는 마당에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언 발에 오줌을 누셨던게 아니라고 보려 한다. (만약 그런 거였다 해도 이거 웬걸 발이 녹기는커녕 오줌줄기가 그대로 고드름이 되어 언 발 위에 떨어져버린 모양새니 측은하지 않은가.)

 

방심위는, 정말로 학생들을 보호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킨 그들의 조치는 사랑에서 출발한 행위였을지 모른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사랑의 표현인 이 조치가 그들의 사랑을 완성시키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조치가 가져올 결과를 상상해 볼 수 있다. 혹은, 조치가 없을 때 얻어질 결과를 상상하여 조치로 인해 막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도 있다. 사실상 이 두 가지 방법은 초점만 명확히 한다면 동일한 것으로, 하나를 생각하면 다른 하나가 따라오게 되어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초점은 만화 속의 폭력이다. 더 명확하게는, ‘만화 속의 폭력이 독자에게 미치는 효과이다. 바로 이것이 청소년들을 심히 사랑하는 방심위가 만화계에 폭력을 휘두르면서까지 막으려 했던 것이므로.

 

 


2.


폭력을 유발하는 웹툰을 금하려는 방심위의 사랑은 웹툰을 포함한 대중매체에 그려진 가상적인 폭력을 접한 청소년 독자가 현실 속에서 폭력을 저지를 공산이 높다는 가설을 전제로 하고 있다. 사실 이 가설은 꽤나 많은 연구를 통해 검토되었으나 정설로 확정되지는 않은, 그야말로 가설에 불과하다. 이와 함께 논의되는 다른 가설이 두 가지 더 있다. 하나는 대중매체 속의 폭력과 향유자의 폭력성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오히려 가상적 폭력이 향유자의 잠재된 폭력성을 대리 충족하여 현실 속에서는 덜 폭력적으로 만드는 효과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살펴본 바, 국내에서 좀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대중매체의 폭력이 청소년의 폭력에 유의미한 영향을 준다는 가설이다. 아마도 방심위 분들도 그 연구들을 근거로 하고 있을 듯싶다.

 

그런데 설문을 통한 통계학적 연구가 주종을 이루는 폭력적 매체와 폭력적 행동의 연관성에 관한 논문들을 살펴보면 의문이 가는 점이 한둘이 아니다. 특히 설문 문항이 유도심문처럼 구성되어 폭력적 영향을 시인하는 답변을 이끌어낸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필자가 확인한 논문들은 주로 TV나 게임의 영향에 관한 것이었는데, 질문 문항은 대개 다음과 같다. ‘게임을 하면서 게임에서처럼 누군가를 때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던 적이 있다.’ 답변자는 이에 전혀 아니다에서부터 매우 그렇다까지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다.(심지어 아니다는 하나만 주고 그렇다앞에 조금’, ‘매우등을 붙여 구성된 선택지도 있었다.) 답변을 하는 입장에서는 질문에 매일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렇게 통계를 내 보면 당연하게도 게임을 많이 한 집단의 답이 그렇다쪽에 더 많이 분포될 수밖에 없다. 게임 경험이 많은 만큼 더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며, 그러다보면 여러 생각 중 하나로 폭력적인 생각도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만약 다음과 같은 질문이었다면 어땠을까? 이 역시도 게임 경험이 많은 향유자에게서 더 많이 발견되지 않을까? ‘게임을 하면서 게임에서 미션을 수행하듯이 실제로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혹은 게임에서처럼 내 삶의 레벨을 높이고 싶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둘 다 매우 그렇다인데 말이다.

 

위와 같은 연구가 설문조사였던 데 반해, 실제 범죄 행위 통계를 통해 폭력적 TV 애니메이션 간의 영향관계를 조사한 예가 있어 소개할까 한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난 후, 이 군사정권은 아이러니하게도 폭력적인 연출이 포함된 TV 애니메이션의 방영을 금지했다. 809월을 기준점으로 그 이전까지 방영되었던 TV 애니메이션 중 요술공주 새리와 같은 작품만 남고 마징가’, ‘그랜다이저’, ‘독수리 오형제등은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정책은 1985년 어간까지 시행되었으며, 한국에서 TV 애니메이션이 방영된 것은 1970년부터이니 이 시기들에 일어난 청소년 범죄를 대조해보면 그 정책의 유효성을 파악할 수 있다. 당시에는 DVD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비디오(VCR)로 시청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으니, TV 애니메이션이란 단일 변인의 효과를 검토하기에 상당히 변별력 있는 분석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논문의 결론은 방심위 어른들께는 상당히 의외가 아닐 수 없다. 경찰청 통계자료를 통해 확인한 바, 청소년 범죄는 폭력적 애니메이션 금지기에 오히려 증가했다. 금지 이전 시기의 청소년 범죄 증가추세가 금지 이후의 증가추세와 거의 동일하므로, 폭력적 애니메이션의 금지가 더 많은 범죄를 불러왔다고 볼 수는 없으나 정책의 효과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결론은 충분히 타당하다. 세부적으로 볼 때, 단순 폭행보다 죄질이 높은 상해죄의 비율이 높아진 것도 특기할 만하다.(최성락 외, 폭력성 애니메이션 금지 정책의 효과에 관한 연구, 만화애니메이션연구』,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 2008.)

 

물론 학술적 연구 결과는 제한된 데이터에 의존해 도출된 것이므로,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 하지만 폭력적 TV 애니메이션 금지 정책의 효과에 대한 이러한 분석 결과를 통해 이번 방심위의 조치가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에 대해 회의적인 마음을 품을 수 있음도 물론이다. 사랑의 마음으로 폭력유발자웹툰을 금지하려 하셨던 방심위에게는 안타깝지만, 웹툰의 가상적 폭력과 청소년의 실제 폭력 사이에는 뚜렷한 연결고리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와 관련한 우리의 탐구는 끝나지 않는다. 웹툰 속의 폭력은 폭력적 영향만을 주거나 주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폭력을 그린 웹툰을 통해 폭력성만을 고찰하는 것이야말로 방심위에서 한 발짝도 더 나가지 못한 생각의 소산일 것이다. 방심위가 폭력을 그리는 웹툰으로부터 청소년들을 보호하게 될 때 벌어질 수 있는 결과는, 그려진 폭력에 청소년들이 얻게 될 모든 것들로부터의 보호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어야 할 질문은, “만화의 폭력은 어떻게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는가이다. 폭력적 웹툰이 검열당하고 1997년과 같은 자체검열의 역사가 반복되게 되면 바로 그 의미가 사라질 것이므로. 우리는 그 의미를 확인해야 한다. 물론 이 질문은 쉽게 대답될 수 있는 성격의 질문이 아니다. 허나, 구체적인 작품을 경유할 때에 그 작품에 해당하는 답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또 그 답은 만화 전체에 던진 동일한 질문에 대한 부분적인 답은 될 수 있을 테니, 한 작품을 통해 물어보자. 이를 위해 이 글은 (산 말고) 우주로 간다. 그리고 방심위의 사랑으로 인해 청소년들이 잃어야 할 어떤 가치가, 웹툰의 폭력에 있는지 확인해 볼 것이다.

 

 


3.


방심위가 지정 예고한 유해 웹툰 중 하나인 김성민 작가의 나이트런은 확실히 폭력적이다. 적어도 방심위의 폭력이 피가 낭자하는 잔인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나이트런이야말로 딱 들어맞는 작품이다. 게다가 포털사이트와 작가의 협의에 의해 18세 이상 구독 가능하게 설정된 다른 작품들과 달리 나이트런은 누구나 열람할 수 있도록 되어있으니, 청소년의 폭력성을 고심하는 방심위에게는 안성맞춤의 타겟이었을 것이다. (18세 이상 구독 가능한 웹툰까지도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 예고한 코미디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성토하고 있으므로 넘어가겠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수만 년 후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인간과 괴수의 전쟁을 그린 SF 대서사극 나이트런은 폭력적이므로 유해한가? 우리는 나이트런에서 폭력적이라는 것과 유해하다는 것 사이에 인과관계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역시나 이런 질문도 답이 안 나오긴 매한가지이므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나이트런의 폭력은 어떻게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는가?” 그리고 이를 조금 더 연장해서, “‘나이트런이 폭력을 통해 만들어내는 의미는 독자들에게 읽힐 가치가 있는가?”까지도 물어보자.

 

지금까지 연재된 나이트런의 분량은 상당한 편이다. 아마도 이 만화는 일본의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시리즈나 1986년부터 시작해 아직도 완결되지 않은 만화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나가노 마모루) 정도로 길어질 듯하다. 내용과 설정도 이런 걸작들에 뒤지지 않을 만큼 뛰어나다. 헌데, 이런 작품들보다 나이트런은 확실히 잔인하다. 유명한 미드(미국 드라마) ‘스파르타쿠스정도의 피가 튀는데다 죽어나가고 잘려나가는 신체의 수는 그보다 훨씬 많다. 괴수의 공격에 의해 수억 명의 인간이 몰살당하고 행성 하나가 통째로 죽음의 별이 되고 말았다는 우주 속 인류의 역사가 만화 속에서 그려진다.

 

<그림 1>

 

<그림 2-1>

 

그러나 한 도시가 파괴당하는 익명의 죽음들을 담은 컷(<그림 1>)보다 독자에게 더 잔인하게 느껴질 것은 구체적인 전투와 죽음의 순간이 묘사된 컷들이다. 누나를 구하러 달려오던 동생의 팔이 괴수에 의해 잘리는 장면(<그림2-1>)은 생생하게 잔인하다. 누군가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잔인할 수도 있다. 또 방심위처럼 우려하시는 어른의 눈에는 유해하게까지 보일지 모른다. 칼로 신체를 베는 모방범죄를 걱정하실런지도 모르겠다. 내 눈에는 전혀 그럴 리 없어 보이지만. 이보다 더 잔인한 장면도 널렸다. <그림 3>의 잘려나간 수족들을 보라. 이는 괴수와 인간의 싸움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싸움을 그린 장면이다. 이 도륙을 몸소 행한 은 되도록 생명을 앗아가지 않으려 관대하게도 수족만을 벤 것이지만, 잘려 날아다니는 신체를 보는 것은 여전히 처절하게 잔인하며 불쾌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잔인함에 압도되어 앞서 우리가 물으려 했던 것을 잊지 말자. 아니, 그 압도가 주는 감각에서부터 출발해 물어보자. 이러한 장면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런 폭력을 통해서만 얻게 되는 어떤 의미가 과연 여기에 있는가? <그림 1><그림 2, 3>들의 대비를 통해 이에 답할 수 있다. 도심의 폭파를 그린 <그림 1>은 분명 다른 그림들보다 더 많은 인명의 살상을 담고 있다. 우리는 이를 수이 상상할 수 있으나, 그림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의 순간이 조명되지 않은 까닭에 그것을 살갗에 소름이 돋을 만큼 지각할 수는 없다. 폭파되는 것은 건물이지 죽어나가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여겨질 지도 모른다. 미국과는 물리적 거리가 먼 우리에게, 9.11의 이미지가 테러 당한 무역센터와 솟아오르는 연기로 기억될 뿐, 사람의 눈물과 절규와 참혹한 주검의 장면으로 기억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반면,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묘사된 폭력 앞에서 우리는 그만큼 가깝게 폭력을 느낀다. 폭력의 힘을, 폭력의 인과를 더 실감나게 깨닫는다. 동생의 팔이 잘리는 비극을 눈앞에서 본 누나의 감정 상태에 공명하게 된다.(<그림 2-2>) 이는 폭력에 대한 분노와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스펙터클이며 생생한 폭력의 이미지다.


<그림 2-2>


그림 <2-3>


이런 점에서 <그림 2, 3>에 동일하게 채택된 검이라는 무기가 불러일으키는 효과는 더 상세히 설명되어야 한다버튼 하나만 누르면 대량 살상이 가능한 시대에방아쇠만 당기면 한 목숨을 빼앗는 것이 가능한 시대에우리는 이 웹툰을 통해 손가락이 아닌 온 몸으로 행하는 폭력을 눈으로 볼 수 있다. 원거리의 여러 사람들을 버튼으로 살상하는 것보다, 주먹으로 칼로 상하게 하는 것이 더 선택하기 어려운 일이다. 폭력을 가하는 그 순간의 표정이, 튀는 피가, 단말마의 비명이, 빠져나가는 생명이 지각된다. 온 몸으로 행할 때 폭력은 힘겹다. 가까운 대상과 주고받는 폭력은 어렵다. ‘이 인간에게 칼을 휘두르며 속으로 하는 생각들은 이를 명백히 드러낸다. 지키고픈 대상을 구하기 위한 길에서 다른 대상을 해할 수밖에 없는 고통이 을 짓누른다. 보통 아버지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베트남전에서, 5.18에 방아쇠를 당겼던 기억과 닿아있는 고통을 표현하기 위한 선택이 이 폭력적 묘사이다. (물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이 기억을 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을 테지만.) 더 큰 폭력은 더 큰 사랑이라는 듯이 그려지는 비극이 이 장면에 새겨져 있다. 덜 잔인하게 묘사되었더라면, 덜 생생하게 느꼈을 고통의 감각이 여기 칼로 그려진 것이다.



<그림 3>

 

따라서, ‘나이트런의 폭력적 장면들은 오히려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폭력으로 잃게 될 것과 폭력이 낳는 잔혹한 경과를 눈으로 확인하며 그 폭력적 상황 자체에 대한 반감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온 인류에 대한, 핵을 맞아 죽어간 히로시마 사람들에 대한, 고문당한 민주 열사에 대한, 내가 지키지 않으면 폭력 상황 속에 놓일지도 모를 내 친구에 대한 사랑의 작용이다. ‘잔인하다는 즉물적 감상을 느끼는 것에서 그치는 독자도 있을 것이나, 이는 오히려 잔인한 것을 잔인하다는 이유 하나로 배격하는 어르신들의 빗나간 사랑의 교육 때문이다. 서사와 그림 속에서 잘 표현된 폭력이라면 독자는 그 가상의 폭력에서 의미를 충분히 포착해 낼 수 있다. 특히 나이트런은 폭력을 통해 비폭력을 꿈꾸는 것으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을 만한 작품이다. 이렇게 볼 때 모방하기에 너무 잔혹한, 도저히 모방할 수도 없으며 모방하고 싶지도 않은 폭력은 방심위의 우려와 달리 폭력적으로 무해하며, 폭력적으로 유의미하다.

 

방심위의 조치가 사랑에서 출발한 것이라 해도,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앗아가는 사랑이라면 그것은 청소년들에게 폭력이다. 이 의미를 그릴 수 없게 될지 모르는 웹툰 작가들에게도 그것은 폭력이다. 그런 사랑을 거부함으로써만 만날 수 있는 의미가 있으므로, 그들은 지금, 싸우고 있는 것이다.

 


 

4.


처음 나열했던 여러 폭력들과 나이트런의 생생한 폭력은 명확한 차이를 지닌다. ‘나이트런이 폭력 상황 속에 있는 자들과 폭력을 가하는 자의 고뇌와 갈등을 표현하고 있는데 반해, 한미 FTA와 해군기지의 폭력에서는 폭력을 당한 자들의 아픔만이 표현된다. 여기에 가해자는 은폐되어 있다. 방심위 역시도 폭력을 가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행했고 웹툰 작가들은 그 가해자 없는 폭력에 아프다. 그러나 나이트런의 인물들, 특히 은 폭력 상황에서 해방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폭력을 저지르면서 자신의 폭력이 가져오는 결과들을 깊이 자각하고 스스로를 정의와는 거리가 먼 나쁜 놈으로 인식한다. 그것이 사랑과 닿아있는 것일지라도, 스스로의 폭력을 정당화하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하지만 지금 사회의 많은 폭력들, 특히 국가적 폭력은 국익을 위한다는 사랑의 이름으로, 자녀들을 보호한다는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다. 때리는 자는 스스로 때린다고 생각하지 않고 맞는 자들만 울부짖고 있다. 이런 문제적 상황 속에서 나는, 웹툰을 통해 청소년들이 접하게 될 폭력은 전혀 걱정되지 않는다. 걱정되는 것은 사랑을 내세운 어른들의 폭력이다. 우리 청소년들이 배울까봐 두려운 그들의 허울 좋은 사랑에, 나는 지금도 괴롭다.

 

- 제주도 강정에서

 



싱크 8호에 기고한 글.

싱크 SYNC 8호 - 10점
싱크 편집부 엮음/이미지프레임(길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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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리즈카와 용산과 강정 그리고 재현그 사이 어딘가.


 

1. 강정

 

(전략) 무인도인 범섬과 제주월드컵경기장, 한라산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오는 강정마을은 600여 가구에 1900여 명이 모여 사는 전형적인 농어촌 마을.

이 지역 주민들은 해군기지 논란을 지켜보다가 지난달 26일 마을 총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해군기지 유치를 결정했다.

- <제주도, 강정마을에 해군기지 수용>, 동아일보, 기사입력 2007-05-15 03:01:00 기사수정 2009-09-27 08:27:39


제주 강정마을이 해군기지 건설지역으로 결정된 5년 전 그 날 동아일보가 실은 기사를 보면 지금 강정마을을 뒤덮고 있는 해군기지 반대깃발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마을 총회를 거쳐, “만장일치로 해군기지 유치를 결정했다면서 왜 뒤늦게 반대를 외치는가? 이런 의문은 위 기사와 현재의 상황 사이의 모순을 감안할 때 분명 합리적이다. 그리고 이 합리적 의문은 전문시위꾼이라고도 불리는 시민단체’, 혹은 종북좌파세력의 공작에 의해 주민 일부가 반대를 외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거나, 더 심하게는 주민들은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데 육지에서 날아들어온 외부세력이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답으로 해소된다. 국내 최대 포털사이트가 제공하는 지식인 서비스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답변이다.

  

<그림1> 박건웅, <안보입니까?> 중 한 컷. http://ppuu21.khan.kr/146

  

그런데 <그림 1>은 이 만장일치” “마을 총회를 달리 그리고 있다. 만화는 마을 총회가 아닌 마을회의라 표현하며, 마을회의“80여명만이모여서 “2시간 만에 졸속으로 결정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물음표를 머리 위로 띄운 마을회의건물 밖 사람들도 그렸다. 이 그림과 동아일보기사 사이에 꽤나 큰 거리가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물론 사실관계로만 따지면 둘 사이에 모순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동아일보가 말했듯 마을 총회는 열렸고, 그 회의 결과가 해군기지의 유치를 만장일치로 결의하는 것으로 나온 것도 사실이다. 단지 그 회의에 모여 만장일치로 결의한 사람의 수가 “1900여 명가운데 단 “80여명만이었다는 사실을 동아일보가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의미상으로는 모순이 발생한다. <그림 1>이 추가적으로 제공한 정보로 인해 “80여명만만장일치가 되면서 강정마을 전체가 해군기지 유치를 결정했다는 의미는 거부되고 만다. 마을 전체의 민의가 아닌 일부의 민의만이 반영된 결정이었음이 폭로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림 1>동아일보가 아닌 다른 자료들에서는 조금 더 자세한 내용도 발견할 수 있다. 마을 향약은 주민총회를 하려면 7일간 공고를 하도록 정하고 있으나 해군기지 유치 결정을 내린 총회는 고작 4일간만 공고를 했다거나(그러니 마을 가 아닌 마을회의인 것), 수시로 하게 되어 있는 안내방송도 몇 차례 하지 않았다거나, 공고된 총회의 내용도 해군기지 관련 건이었다가 정작 회의 때는 해군기지 유치 건으로 바뀌었다거나 하는.(<제주에 해군기지가 결정됐다?>, 한겨레21664, 20070614) 이쯤 가면 동아일보마을 총라는 표현으로 담으려 했던 의미, 곧 절차적 정당성까지도 부정되고 만다.

 

이제 마을의 찬성이 마을 사람들 일부만의 찬성임이 드러나고 그 과정까지도 정당하지 못했음이 폭로되니, ‘뒤늦은 반대에 대한 의문은 더 이상 제기할 수가 없다. 의문이 정당하지 않으므로 그 의문에 대한 답이었던 외부세력의 개입을 주장할 논리적 개연성도 사라진다. 이런 논리적 선후관계를 따질 필요도 없이 한겨레21기사의 내용을 주장한 인물이 마을 주민이니 외부세력운운은 기각될 수밖에 없지만.

 

 

2. 산리즈카

 

재현(re-present)된 것은, 재현되기 전의 실재(존재, presence)와 다른 무엇이 되고 만다. 문자든 그림이든, 심지어 사진이나 영상이든 매체(medium)을 거치는 한 그 변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또한 동아일보기사에서처럼 변이와 함께 정치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의미가 재현 과정에서 삽입된다. 마치 영화 <라쇼몽>의 서로 다른 이야기들처럼, 우리는 말하면서 왜곡한다. 따라서 만약 진실을 추구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한 재현이 얼마나 실재에 가까운가를 확인하는 불가능한 작업이 아니라 재현()을 통해 실재에 최대한 근접하려 노력하는 심판관(<라쇼몽>의 마을 원님)의 태도일 것이다. 우리가 세 가지 재현들을 통해 강정마을의 회의에 담긴 진실을 어느 정도나마 확인했던 것처럼.

 

일본 산리즈카 마을의 공항건설 저지 투쟁을 담은 만화 <우리마을 이야기>(오제 아키라, 길찾기)는 이러한 재현의 문제를 뚜렷한 문제의식으로 담아낸 재현이다. 그 재현은 진실을 찾는 자에게 진실일 수 있는재현으로서 다가가기 위해 실재를 가정한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마을 이야기>는 실재와 재현의 차이를 계속해서 그려내는 재현 방식을 통해 진실이 어디에 있는가를 드러내려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권력관계가 뚜렷하게 포함되어 있다.

 

<그림 2>는 재현이 어떻게 실재를 대하는가를 절묘하게 그려내고 있다. 화자인 소년 뎃페이는 마을 주민으로, 만화 속에서 실재로 가정된 인물이다. 만화 안에서만큼은 뎃페이와 마을주민들이 실재이자 진실을 알고 있는 자들이다. 그런 뎃페이를 신문이 날아와 때린다. 그것도 입을 막으며 때린다. 실재의 발화를 막으며 실재의 현실을 재현하는 신문기사 제목은 통계적 수치와 분위기를 간결하게 전달하고 있다. 수치로만 존재하는 30%의 피폐한 삶과 반대 의지는 삭제한 체로, 현지 분위기가 호전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뎃페이로서는 동의할 수 없는 재현이다. 그에게 공항건설은 기정사실이 아니지만, 신문은 그렇게 전하고 있다. 뎃페이는 그런 신문을 손에서 놓아버릴 수밖에 없다.

 

(1-156~7)

 

<그림 3>에 이르면 실재와 재현 사이의 간극은 더 확연하게 벌어진다. 반대동맹은 공청회에서 반대의사를 분명히 전했으며, 공청회 후 거리에서 반대 퍼레이드를 벌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신문기사는 공청회가 무사히마쳤다고만 전할 뿐이다. 이 재현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재현 주체에 따라 無事에 담는 의미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신문의 입장에서는 몸싸움이 벌어지거나, 부상자가 나오는 일이 없으면 충분히 무사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일이다. 반대로 반대주민의 입장에서는 공청회가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나버린 것 자체만으로도 무사한 일이 아니며, 공청회 전후의 반대활동과 대표의 반대발언이 모두 에 해당할 테지만 말이다. 이런 반대주민들의 입장에서는 공청회가 무사히 끝났다는 신문의 재현은 17쪽에 걸쳐 그려진 주민들의 공청회 전후 사정을 모조리 삭제해 버리는 허탈하고 폭력적인 일이 되고 만다. 공청회 전에 반대주민들은 공청회를 기대하며 들떴고, 방청석에 반대동맹원은 한 명도 들어갈 수 없게 된 사실에 분개해 항의했지만, 이런 모든 주민들의 이야기도 재현되는 과정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1-200)

 

(1-204쪽, 1-206쪽)


1권의 이런 에피소드처럼 마을주민들의 실재와 신문 속의 재현을 대비하는 장면들이 <우리마을 이야기>를 관통한다. 온도 차이는 있다. 초반에 실재와 재현의 간극에 분노하던 인물들은 시간이 갈수록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하기 시작하며 심지어는 이용하기까지 한다. 요컨대 자신들이 재현당하는 처지에 있음을 분명히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재현하려 노력한다. 마을신문을 만들고, 선전지를 배포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과정들을 그려낸 <우리마을 이야기>는 그 자체가 재현의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재현의 폭력성을 재현해내고 있다.

 

산리즈카와 강정은 폭력적인 재현의 피해자라는 면에서 40여 년의 시간과 지리상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가까이 있다. 오히려 먼 것은 실재와 재현 사이의 거리이다. 196~70년대 산리즈카와 2천 년대 강정을 그린 동시대의 재현은 실재와 너무나 멀다. 언론의 보도는 시간적으로 사건과 가깝지만, 그 입장으로 인해 실재를 폭력적으로 재현하며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문정현 신부의 말대로, 산리즈카와 강정은 너무도 똑같다.” 재현의 폭력에 희생당한다는 면에서까지도.

 

 

너무도 똑같다.

이 만화에서 그려지는 산리즈카 마을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나라 제주의 강정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너무도 닮았다. 아니다. 새만금과 부안 핵폐기장, 미군부대에 땅을 내준 평택 대추리에서 서울 용산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국가권력에 의해 고통받았고 또 지금도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 바로 그것과 다르지 않다. - 문정현 신부의 추천사 첫머리

 

  

3. 용산

 

<우리마을 이야기>의 재현 전략이 마을주민인 뎃페이를 중심으로 한 가정된 실재를 중심으로 하고 있음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이는 마을주민보다 우위에 있는 권력의 폭력적 재현을 비판하며 다른 재현을 도모하기 위해 취해진 선택이었다. <내가 살던 용산>(김성희, 김수박, 김홍모, 신성식, 앙꼬, 유승하; 보리)도 주민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유사하다. 하지만 <우리마을 이야기>처럼 신문의 재현을 주민들의 가정된 실재와 부딪히게 만들며 대비하는 방식보다는 그저 철거민들의 삶을 재현하는 데 집중한다. 실재를 가정하며 언론의 재현과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맥락을 달리 해 다른 재현을 펼치는 것이다. 크게 보아 이는 산리즈카 마을 농민들의 저항과 언론보도가 매우 긴 시간 동안 이어졌던 데 반해 용산 철거민들의 저항은 단지 용산사태로만 보도되었다는 차이에서 기인한다. 25시간 동안 펼쳐졌고 순식간에 불타올라버렸던 2009120일의 용산사태 직후 재현된 언론보도는 대부분 남일당 망루를 배경으로 한 철거민들의 저항과 특공대의 진압, 그리고 그 모두를 종결시킨 화재 사건만을 다루었다. 반면 <내가 살던 용산>은 철거민 희생자 5인 한 사람 한 사람과 그 가족의 이야기를 사건 앞뒤로 배치하며, 폭력적 재현을 재맥락화 했다.




재맥락화 한 용산 철거민들의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진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왜 희생자들이 망루에 올랐는가하는 기초적인 사실이다. 희생자들이 철거민이 되기 전의 삶과 그 후의 삶 사이의 낙차를 통해 그 사실의 배경이 드러나고, 그들이 철거민으로서 져야 했던 경제적 부담과 용역과 경찰력으로부터 당해야 했던 물리적 폭력을 상세히 재현하는 것을 통해 그 불가피함이 설명된다. 언론이, 특히 보수언론이 사건만을 부각하며 외면하려 했던 삶을, <내가 살던 용산>은 용산에 살았던 사람들을 재현하는 것을 통해 복원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없었던들 철거민 희생자들은 단지 대테러 임무를 주로 하는 경찰특공대에 진압당한 테러리스트이며 폭력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한 범죄자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러한 재맥락화와 더불어 강조해야 할 것은, <우리마을 이야기><내가 살던 용산>이 함께, 종결된 줄만 알았고 이미 모든 재현이 마무리된 것만 같았던 대상들의 사연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이 만화들은 언론보도로 인해 은폐되는 것으로 끝났을지 모를 국가와 사기업의 이미지와 탄압당한 자들에 대한 이미지를 다시금 들여다 볼 수 있는 대안적 재현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특히 <내가 살던 용산>이 아니었던들, 국가 폭력은 그 가공할 위력을 뽐내며 보통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했을 테지만, 또 사기업의 용역 폭력은 없었던 일이 되어버렸을 것이지만, 이 만화 덕에 국가 폭력의 부당성과 사기업 폭력의 치졸함이 부각되어 일반 사람들의 입방아를 탈 가능성이나마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올해 서울인권영화제 폐막작이었으며 극장 개봉을 준비하고 있는 영화 <두개의 문>테러범으로 판결이 나버린 망루 위 철거민들과 대테러작전을 펼친 경찰특공대의 25시간을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요컨대, 중요한 것은 권력자의 재현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그와는 다른 재현을 제공하는 일이며, 재현물을 보는 독자들이 진실에 다가설 숨통을 틔어주는 일이다.


<두 개의 문> 이미지 출처: http://blog.naver.com/2_doors

 

 

4. 다시 강정

 

어떤 비극적 사건으로 일단락이 나지 않은 강정은 여전히 폭력적 재현 아래 현재진행형이다. 강정에 대한 폭력적 재현의 주체들은, 심지어는 재현하지 않는 폭력까지도 일삼고 있다. 지금 강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누구도 알지 못하게 하는 비재현의 폭력은 강정에 해군기지가 건설되면서 진행되어 온 시공사의 불법탈법과 용역의 광포, 공권력의 과잉진압 등을 은폐한다. 강정이 이슈가 되지 못하게 하여 사람들이 강정에 힘을 보태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원천부터 차단한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에서도 강정 사람들은 사진과 SNS와 유튜브 영상 등을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강정을 재현해내고 알리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산리즈카가 시대적으로 누리지 못했던 혜택을, 용산이 공권력의 급작스러운 투입으로 인해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던 대안을 강정은 누리고 시도하고 있다. 가능성은 열려있는 가운데, ‘만화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강정은 또 하나의 큰 가능성을 껴안고 있다. <우리마을 이야기><내가 살던 용산>이 모두 산리즈카와 용산에 연대한 작가들에 의해 뒤늦게 만화로 재현되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강정의 만화적 가능성은 특별하다. 사건이 끝나고 나서야 재현되었던 다른 두 지역과 달리 현재 많은 웹툰 작가들이 강정에 연대하고 있는 것(<그림 6, 7>(<"구럼비 발파 안돼", 만화가들도 화났다>, 머니투데이, 입력 : 2012.03.07 19:13)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도 물론 고무적이지만, 다른 엄청난 강점이 강정에는 있다.

 

<그림 6> 출처: 김한조씨 블로그(http://sanchokim.khan.kr/123)


<그림 7> 출처=강풀씨 트위터(@kangfull74)

 

 

 

바로 강정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몸으로 겪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만화가가 넷이나 있다는 사실이다. 그 중 두 명은 이미 프로로 활동했던 만화가와 에니메이터이다. 이들, 고권일과 김민수는 그들이 직접 겪은 일을 각각 만화와 에니메이션으로 만들어낼 계획이라고 하니, 그들의 재현이 선사할 진실이 기대된다. 하루빨리 강정의 투쟁이 승리로 마무리되어, 투쟁하느라 만화 그릴 여력이 없는 강정 만화인들이 작품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강정에 이미 한쪽 발을 들여놓은 나도, 그 날이 오면, 늘 재현당하기만 하던 실재들이 스스로를 재현하는 즐거운 일을, 기꺼이 비평해 보리라.

  

 
 

 

 

 

 

 

 

 

 

 

 

 

 

 

























싱크 SYNC 9호 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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