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물방울>로 보내는 편지
선배!
지난번 와인 잘 마셨어요. 맛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나눴던 대화만큼은 또렷하네요. 선배도 기억나시죠? 평사원 때와 대리 때가 다르고, 팀장급이 되니 또 다르더라며 승진 후 새로이 탐닉하고 있는 취미에 대해 흥겹게 얘기했었잖아요. 바로 그 취미 덕에 우린 평소 자주 가던 단골 호프가 아닌 와인 바에 갔고요. 제가 와인을 잘 몰라서 맞장구를 쳐드리진 못했고 그래서 대화가 길게 이어지진 않았지만 선배의 와인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로웠어요. 하지만 진국은 역시 와인 만화 이야기였죠. 둘 다 만화라면 사족을 못 쓰고, 마침 저도 <신의 물방울>을 <목욕의 신>과 대비한 글을 쓰려던 참이었으니까요.
사실 지금 쓰고 있는 이 편지도 그 대화의 연장입니다. 그때 <신의 물방울>을 10권 정도밖에 읽지 않은 채로 아이디어만 거칠게 늘어놓았다가 형에게 몇 가지 비판과 질문을 받고서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던 게 영 찝찝했거든요. 이제는 지금껏 나온 30권을 다 읽었고, 그만큼 생각도 많이 진행되었으니 그 찝찝함을 좀 덜어내고 싶네요. 아, 이것저것 해명하고 설명하기 전에 미리 고맙단 말씀 드릴게요. 선배의 비판과 질문 덕에 ‘신의 물방울’을 더 촘촘하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선배가 아니었다면 처음 그렸던 성긴 구도로 읽었을 거예요.
선배 말대로 <신의 물방울>은 만만치 않은 만화가 분명해요.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목욕의 신>의 손을 들어주기도 어렵겠어요. 지금 와서야 말이지만 비교는 해볼 수 있어도 굳이 승부를 낼 것까진 없으니 누가 이겼다 졌다는 말하지 않으려 해요. 둘 다 완결도 나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나온 분량만 가지고 심판을 하기도 어렵겠고요. 지금도 여전히 저는 <목욕의 신>에 더 큰 애착을 느끼지만, 그렇다곤 해도 <신의 물방울>을 폄하하고 <목욕의 신>을 드높이는 방식으로 제 애착을 표현할 필요는 없겠지요. 양자의 비교를 통해, 또 <신의 물방울>에 대한 비판을 통해 해볼 수 있는 몇 가지 얘기는 그 주제를 고찰하기 위함이지 <목욕의 신>을 상찬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 편지는 따라서 선배의 비판과 질문에 대한 대답이자, 제가 두 만화를 통해 얘기하고픈 두어 가지 주제에 대한 고찰이 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전자의 이유로 <신의 물방울>에 집중하게 될 것 같지만요.
처음 제가 <신의 물방울>은 상품에 만화적 이미지를 덧입히는 만화적 PPL이지만 <목욕의 신>은 무시당하던 노동 형태에 만화적 이미지를 부여해 노동 자체의 의의를 제고한다고 했을 때 선배는 지적했지요. 상품과 노동이라는 구분부터가 이상하다고. 맞아요. 정말 전적으로 선배 덕에 거칠었던 생각을 수정하고 정돈할 수 있었습니다. 상품과 노동은 바른 구분이 아닙니다. 와인이라는 상품도 노동생산물이고, 목욕관리(때밀이)라는 노동 형태도 달리 말하면 서비스라는 상품이지요. 헌데, 그렇다 해도 <신의 물방울>과 <목욕의 신>이 만화적 이미지를 부여하는 대상과 방식, 그리고 그 효과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는 건 달라지지 않아요. 이건 양자를 대비하며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해야 할 문제라, 오늘은 “만만치 않은” 신의 물방울에 집중해야 할 것 같네요. 그러면 상품/노동이라는 추상적 구분에서 와인과 와인 생산 및 소비로 더 구체적인 구분 하에서 이야기 해 볼 수 있을 테니까요.
<신의 물방울>은 30권이 넘어가는 장편인 만큼 그 양상이 단일하거나 균질하지 않습니다. 권별로, 에피소드 별로 차이가 있고 어찌 보면 뒤로 갈수록 진화하는 것도 같습니다. 그래도 <신의 물방울>의 와인에 대한 철학과 그 철학을 관철하는 논리를 단순명료하게 규정한다면 다음처럼 설명할 수 있어요. (이것 역시도 <신의 물방울>이 천박하지만은 않다는 선배의 힌트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전자는 교환가치보다 사용가치의 우위이고 후자는 사용가치=맛의 심미화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입니다. 1) 샤토 A(15만원)보다 샤토 B(2만원)가 더 높은 ‘가치’를 지닌다. 2) 샤토 A를 맛보았을 때 느껴지는 감동보다 샤토 B의 맛에서 느껴지는 감동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런 철학과 논리는 일반적인 자본주의 사회가 상품에 의미를 입히는 일반적 방식에 비해 진일보한 형태입니다. 가격이라는 교환가치를 최상이자 유일한 가치기준으로 보며 높은 가격의 제품이 낮은 가격의 제품보다 더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보는, 화폐를 매개로 한 상품의 물신화가 천박하단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문제는, 말할 필요가 없을 만큼 쉽게 논박할 수 있는 이 신화를 넘어선 신화를 <신의 물방울>이 제공하고 있다고 해서 그 의의를 인정해 줄 수 있냐는 거예요. 달리 말해, 몇 가지 에피소드에서 벌이고 있는 <신의 물방울>의 싸움은 너무 이기기 쉬운 대상과의 싸움이란 말입니다. 그 싸움이 담고 있는 것은 반자본주의도 아닐뿐더러, 자본주의의 여러 문제 중에서 가장 천박한 것 한 가지에 일정한 수정을 가하는 것일 뿐이에요. 선배가 말한 바 <신의 물방울>의 “만만치 않음”은 사실 이런 것이라 저는 생각해요.
와인의 명품인 5대 샤토만을 선호하는 다키스키. ⓒ아기 타다시, 오키모토 슈
그러나 저렴하지만 정성들여 만든 와인을 맛본 다키스키는 페가수스를 타고 어린시절의 행복감을 경험하게 된다. 만화 '신의 물방울'은 이처럼 와인의 미적 경험을 만화적 심상풍경으로 표현해 내며, 와인을 예술로 고양시킨다. ⓒ아기 타다시, 오키모토 슈
또 비싼 샤토 A의 맛을 넘어서는 싼 샤토 B가 존재한다는 것을 강변하는 <신의 물방울>은 거기서 멈출 뿐 더 나아가지 않아요. 위의 예는 사실 와인의 가격을 결정하는 구조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예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옮기면, 애초에 교환가치로 사물의 가치를 규정하는 현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신의 물방울>은 비싼 와인과 싼 와인이 존재하는 상황, 즉 교환가치와 가치가 등가가 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교환가치가 높은 상품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닌다”는 사회적 통념을 “일반적으로 교환가치가 높은 상품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니지만, 때로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수정하는 거죠. 통념에 대한 반례는 제공하지만, 통념에 기댄 채로 수정할 뿐입니다. 따라서 반례가 되는 샤토 B는 사실 샤토 A보다 더 높은 가격을 지니기에 마땅한 것이 됩니다. 곧 가격이 상승할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하죠.
그래도 이런 면에서 <신의 물방울>은 싸지만 좋은(맛있는) 와인을 찾아내는 것으로 합리적인 와인 소비자들에게 일종의 돌파구를 제안합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와인을 만화 속에 등장시키는 <신의 물방울>의 장점으로 인해, 독자는 싸고 맛있는 와인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얻고 활용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1권에 등장했던 샤토 몽-페라(Chareau Mont-Perat) 2001년산은 코스트 퍼포먼스가 뛰어난 와인으로 현실에서 큰 인기를 끌었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수요가 늘어난 데 따른 가격 상승이었어요. 싸고 맛있는 와인을 <신의 물방울>이 찾아내지만, 그로 인해 싸고 맛있는 와인은 곧 비싸고 맛있는 와인이 되더란 말이죠. 돌파구는 사실 돌파구가 아니라 또 하나의 막다른 골목이란 말이에요. 결국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최선의 돌파구는 싸고 맛있는 와인을 계속해서 찾아내는 <신의 물방울>의 방식이 아니라, 싸든 비싸든 맛있는 와인을 사서 마실 수 있는 금력을 확보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가격(교환가치)과 관련해 생산과 유통의 문제가 아니라 소비의 문제에 더 치중하는 면에서, 즉 가격이 결정되는 과정보다 이미 결정된 가격 체계 안에서 현명하게 소비하는 것에 치중하는 면에서 <신의 물방울>은 분명히 아쉽습니다. 하지만, 맛이라는 사용가치와 관련해서는 생산과정을 상당히 부각시키고 있어요. 어떻게 해서 맛있는 와인이 탄생하는가를 “천•지•인”이라는 논리 속에서 구현하고 있으니까요. 선배가 말한 바, <신의 물방울>의 와인 철학입니다. 이로 인해 인간의 노동이 가치를 부여받아요. 天(빈티지: 시간(수확연도), 농작을 위한 기후환경)과 地(테루아르: 토양과 토질, + 포도나무)을 결정하는 자연의 힘 아래서 결국 와인을 만들어내는 마지막 힘인 人(도멘: 와인 생산자, 장인)이 포도와 최종 생산물인 와인의 가치를 매개하고 결정하게 되니까요. 세 요소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좋은 와인이 탄생하지 않지만, 풍년이 아닌 빈티지와 척박한 테루아르에도 불구하고 좋은 와인이 탄생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의 노력이란 걸 제1사도와 제2사도에 얽힌 이야기는 보여줍니다. 결국 <신의 물방울>이 담고 있는 것은 자연을 배경으로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생산을 중심으로 할 때 그것은 성실한 노력과 번득이는 감각과 아이디어이고 문화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행위는 그렇게 탄생한 와인 고유의 맛으로 열매 맺습니다. 이 모든 것이 노동으로 수렴하지는 않지만, 최종 생산물인 한 병의 와인을 통해 그 생산자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면에서 노동과 노동하는 사람이 소외당하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만화라는 매개를 통해 생산자와 소비자(독자) 사이를 이어주고 있다는 면은 분명 장점입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도 일정한 한계 속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 한계는 와인 소비자의 자리에 있어요. 제목 속에 ‘신’이라는 이상화된 타자를 담고 있는 것처럼, <신의 물방울>은 이데아를 전제한 가운데 펼쳐지는 인간의 '신적 고양'의 이야기입니다. 생산자의 이야기에서 그것은 자연과의 변증법적 합일로 완성되지만, 소비자의 이야기에서는 다른 방식이 됩니다. 소비자는 와인을 향유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단일한 정체성과 향유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아요. 두 주인공만 해도 그렇습니다. 와인 평론가 토미네 잇세가 와인에 대한 접근성이 높을뿐만 아니라 최고 수준의 지식과 교양을 지니고 있는 반면 와인의 세계에 막 발을 들인 평사원 칸자키 시즈쿠는 잇세가 지닌 것들과는 거리가 멉니다. 와인을 소비하는 데 드는 ‘돈’과 오랜 세월 동안 와인을 접한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시즈쿠는 희대의 평론가 칸자키 유타카의 적자로서 어린 시절부터 술의 형태가 아닌 방식으로 와인을 경험하는 훈련을 받아 후각과 미각이 잇세보다도 뛰어납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문학과 미술에 대한 조예도 남다르죠. 그래서 두 주인공의 와인 향유는 주변 사람들이 감탄하게 만듭니다. 시즈쿠와 잇세의 조력자들도 만만치 않은 향유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말이죠. 이들 모두의 동경과 승부의 대상은 칸자키 유타카입니다. 일본인으로서 세계 와인 시장에까지 영향을 미친, 완성된 평론가로 만화 속에서 와인 향유자의 이데아로 재현됩니다. 만화 속의 소비자들은 유타카(이데아)의 위치에 이를 때에야 신적 생산물인 와인의 참맛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생산자도 소비자도 소외되지 않는 거죠.
따라서, “일반적으로 교환가치가 높은 상품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니지만, 때로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신의 물방울>의 수정된 정식을 완성하고 그것을 보편 세계의 변화로 이끄는 것은 ‘유타카에 근접한 소비자’와 ‘유타카의 와인 미학’입니다. 그런 소비자일 때에야 가격과 상관없이 와인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향유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구도에서 저는 프리드리히 쉴러의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를 떠올렸습니다. 쉴러는 이 편지들에서 혁명(프랑스 혁명)으로도 완수하지 못했던 인간 총체성의 완성은 예술을 통한 감성의 고양을 수반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이상적 세계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이 이루어내는 것이고, 그런 인간은 예술의 교육을 통해 탄생한다는 것이지요. 플라톤에게서 이데아의 2차 모방물이라는 평가를 받던 예술은 쉴러에게서 진리와 본질을 담은 이데아로의 통로로 제고됩니다.
와인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가는 '신의 물방울'의 여정이 잘 표현된 장면.
하지만 이러한 화해적 가상은 개인의 의식 안에서만 이루어질 뿐, 세계의 자체의 문제는 외면한다. ⓒ아기 타다시, 오키모토 슈
만화 <신의 물방울> 속에서 신의 물방울, 즉 와인도 바로 그런 예술 중 하나가 됩니다. 그 예술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세계는 더 살만한 곳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의 물방울>의 세계는 부족하지만 바로 그런 곳처럼 그려집니다. 시즈쿠를 중심으로 한 인물들의 여정은 세계에 존재하는 문제를 와인이라는 예술을 통해 해결하는 과정이니까요. 직장인의 무료한 일상에서부터 부녀갈등, 이혼, 정리해고, 적대적 기업합병, 시한부인생,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까지 여러 고통의 문제들이 시즈쿠 일행이 찾아낸 와인을 통해 해결됩니다. 일상적 문제 상황 가운데 화해를 맛보게 해주는 것이 와인인 셈이지요. 또한 그 과정의 세부는 모두 인간적 유대감을 주축으로 보답 없는 증여(재능기부)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도를 찾아야 하는 와중에도 짬을 내어 이 아름다운 미션을 완수하고 나면, 사도에 대한 힌트가 서사적 보답의 형태로 주어집니다. <신의 물방울>의 서사의 주축은 이처럼 예술적 인간이 와인이라는 예술을 통해 타자에게 선사하는 화해, 그리고 그 예술적 인간 그 자신의 문제 해결과 발전 과정이라 할 수 있어요.
사뭇 아름다운 이 소비자의 서사는, 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예술적 가상입니다. 와인 소비로 인해 맛보는 행복감과 문제의 해결은, 만화 속에서 가능했던 것처럼 손쉽지 않다는 걸 선배도 아실 겁니다. 이런 해결은 아도르노의 표현에 따르면 “거짓된 축복”입니다. 고통스런 현실에 대한 화해적 태도와 거짓된 위안을 매개하는 예술은 세계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로 작품 안에서만 문제를 해결할 뿐입니다. 이 말은 <신의 물방울> 속에서 인간적 문제를 해결해내는 와인의 힘에 낭만적 기대를 품지 말자는 것도, 와인 따위 마시지 말자는 말도 아닙니다. 오히려 화해적 가상을 재현하는 만화와 그것으로 재현되는 와인이라는 두 개의 신의 물방울을 통해 새로운 사유로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선배를 만족케 한 <신의 물방울>이 제게는 불만족스런 것이었다면, 뒤집어 보면 선배에게도 그것이 만족스럽지 않게 될 여지가, 제게도 이것이 만족스러워질 여지가 있다는 것일 테니까요.
와인이라는 ‘신의 물방울’과 와인을 그려낸 만화 <신의 물방울> 모두가 제게는 부르주아를 위한 예술 형태로 이해됩니다. 그것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부르주아 미학을 만족시키고 있어요. 와인은 풍성한 맛과 향을 지니고 있으며 교양을 담고 있습니다. 만화도 와인의 매력을 풍성한 스토리와 섬세한 표현과 구성으로 잘 담아내고 있어요. 개인 능력의 자원이 되는 지성과 교양과 풍요가 현대 부르주아의 전유물이라면, 바로 그것이 <신의 물방울>의 주된 질료라 할 만 합니다. 특히 시즈쿠와 잇세라는 중심인물들의 계급적 위치는 부르주아를 주인공으로 한 세계를 구성해내고 있습니다. 잇세는 몰라도 어떻게 시즈쿠가 부르주아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28권부터 등장하는 크리스토퍼 왓킨스라는 인물을 비교항으로 놓고 볼 때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시즈쿠와 잇세가 그토록 힘겹게 찾아왔던 8병의 사도들을 단 몇시간만에 모두 찾아내는 왓킨스는, 부르주아 혁명 이전의 귀족에 해당하는 인물입니다. 현재 부르주아의 전유물인 지성과 교양과 풍요는, 사실 귀족들의 것이었어요. 부르주아들은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노력을 통해 귀족들의 전유물을 잠식해 그것들을 획득해 낸 것이지요. 결국 귀족과 왕족의 시대를 무너뜨린 것이 부르주아들의 시민 혁명이었음을 떠올려 볼 때, 귀족 왓킨스에 비해 평범한 시즈쿠와 잇세는 부르주아의 위치에 있습니다. 그들은, 칸자키라는 신흥 부르주아의 재능을 이어받은 부르주아로, 각각의 결점을 지니고 있지만 완성을 향해가는 자들인 것이지요. 칸자키의 12사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완벽하지 않지만, 부족한 면으로 인해 가치가 있는 와인들입니다. 그 부족함은, 부르주아들의 세계를 만들어낸 노력 그것으로 채워질 수 있으며 더 높은 차원의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전제가 되는 무엇이니까요.
이런 저의 독해가 선배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해요. 각자의 이데올로기적 시점에서 바라볼 때 나오는 다른 독해일 테니까요. 선배의 눈에는 아름다운 세계를 그려내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제게는 이미 함락된 귀족의 성채와 천박한 자본주의를 부수는 포즈를 담아 부르주아에게만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손쉬운 이야기라는 게 이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설명이 충분치 않을 수도 있어요. <신의 물방울>이 배제하고 있는 사람들과 삶을 더 잘 설명했어야 했는데, 충분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 같아요. 이 부분은 추후에 다른 작품을 통해서 더 잘 해보도록 할게요. 아마도 <목욕의 신>이 완결되고 나면 그 작품에 대한 면밀한 독해를 통해 다른 방식으로 해 낼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원래 쓰려고 했던 두 작품의 대비도, 두 작품 모두가 완결한 후로 미룰게요. 와인이라는 서구 부르주아의 예술상품이 아닌 한국 서민의 대중적 목욕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제 눈길을 끈 <목욕의 신>이지만, 선배 말대로 아직은 소재의 매력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그려지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일단은 그것이 화해적 가상이 아닌, 비화해적 가상으로서의 현대예술에 이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고 지켜보려 합니다. 다음을 기약해요.
<목욕의 신> 전반부에 제시된 문제 상황.
아직 이야기가 충분히 진행되지 않아서일 수 있으나, <목욕의 신>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계속해서 드러내고 있다. ⓒ하일권
마지막으로 <신의 물방울>이 제게 던져준 화두를 선배에게 말씀드리고 편지를 맺으려 합니다. 이건 지금껏 논했던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일 텐데요, 바로 예술에 대해 말하는 형식, 즉 평론입니다. 와인을 향유하면서 느끼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잇세와 시즈쿠의 사도 찾기의 여정은, 만화의 세계에 대해 ‘표현’하는 만화 평론가의 길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요. 더 많은 만화를 경험하고, 정말로 좋은 만화를 소개하고 표현하는 길을 계속 걸어 나가려는 저에게 이들의 와인 여정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더군요. 언젠가는 선배를 만족시킨 잇세와 시즈쿠보다 더 만족스러운 글을 써 볼게요. 아마도 그들과는 다른 방식일 테고, 또 그들의 아름다움과는 다른 아름다움이 표현될 테지만, 비화해적 가상을 예술의 본령으로 믿는 제게 만화는 그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깊이 있는 예술입니다. 개별 작품 가운데 그 가능성을 성취하고 있는 작품은 아직 많지 않다 해도 말이죠. 한 번 제대로 걸어보겠습니다. 지켜봐 주시고, 또 끊임없이 비판하고 질문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사는 세계가 자본주의 사회이고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가 지배적 이데올로기인 한, 선배의 말씀은 제게 지배적인 세계와 그 세계를 사는 사람의 텍스트 향유를 더 명확히 파악하게 도와줄 테니까요. 이번에도 그랬던 것처럼요. 감사해요 선배.
P.S. 조만간 같이 목욕하러 갑시다. <목욕의 신> 얘기를 조금이나마 준비해 둘게요. 바나나우유는 제가 쏩니다!^^
- 싱크 7호에 기고한 만화칼럼.
이 때는 아직 <목욕의 신>이 완결되지 않은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