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물방울>로 보내는 편지


선배!

 

지난번 와인 잘 마셨어요. 맛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나눴던 대화만큼은 또렷하네요. 선배도 기억나시죠? 평사원 때와 대리 때가 다르고, 팀장급이 되니 또 다르더라며 승진 후 새로이 탐닉하고 있는 취미에 대해 흥겹게 얘기했었잖아요. 바로 그 취미 덕에 우린 평소 자주 가던 단골 호프가 아닌 와인 바에 갔고요. 제가 와인을 잘 몰라서 맞장구를 쳐드리진 못했고 그래서 대화가 길게 이어지진 않았지만 선배의 와인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로웠어요. 하지만 진국은 역시 와인 만화 이야기였죠. 둘 다 만화라면 사족을 못 쓰고, 마침 저도 <신의 물방울>을 <목욕의 신>과 대비한 글을 쓰려던 참이었으니까요.

 

사실 지금 쓰고 있는 이 편지도 그 대화의 연장입니다. 그때 <신의 물방울>을 10권 정도밖에 읽지 않은 채로 아이디어만 거칠게 늘어놓았다가 형에게 몇 가지 비판과 질문을 받고서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던 게 영 찝찝했거든요. 이제는 지금껏 나온 30권을 다 읽었고, 그만큼 생각도 많이 진행되었으니 그 찝찝함을 좀 덜어내고 싶네요. 아, 이것저것 해명하고 설명하기 전에 미리 고맙단 말씀 드릴게요. 선배의 비판과 질문 덕에 ‘신의 물방울’을 더 촘촘하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선배가 아니었다면 처음 그렸던 성긴 구도로 읽었을 거예요.

 

선배 말대로 <신의 물방울>은 만만치 않은 만화가 분명해요.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목욕의 신>의 손을 들어주기도 어렵겠어요. 지금 와서야 말이지만 비교는 해볼 수 있어도 굳이 승부를 낼 것까진 없으니 누가 이겼다 졌다는 말하지 않으려 해요. 둘 다 완결도 나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나온 분량만 가지고 심판을 하기도 어렵겠고요. 지금도 여전히 저는 <목욕의 신>에 더 큰 애착을 느끼지만, 그렇다곤 해도 <신의 물방울>을 폄하하고 <목욕의 신>을 드높이는 방식으로 제 애착을 표현할 필요는 없겠지요. 양자의 비교를 통해, 또 <신의 물방울>에 대한 비판을 통해 해볼 수 있는 몇 가지 얘기는 그 주제를 고찰하기 위함이지 <목욕의 신>을 상찬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 편지는 따라서 선배의 비판과 질문에 대한 대답이자, 제가 두 만화를 통해 얘기하고픈 두어 가지 주제에 대한 고찰이 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전자의 이유로 <신의 물방울>에 집중하게 될 것 같지만요.

 

처음 제가 <신의 물방울>은 상품에 만화적 이미지를 덧입히는 만화적 PPL이지만 <목욕의 신>은 무시당하던 노동 형태에 만화적 이미지를 부여해 노동 자체의 의의를 제고한다고 했을 때 선배는 지적했지요. 상품과 노동이라는 구분부터가 이상하다고. 맞아요. 정말 전적으로 선배 덕에 거칠었던 생각을 수정하고 정돈할 수 있었습니다. 상품과 노동은 바른 구분이 아닙니다. 와인이라는 상품도 노동생산물이고, 목욕관리(때밀이)라는 노동 형태도 달리 말하면 서비스라는 상품이지요. 헌데, 그렇다 해도 <신의 물방울>과 <목욕의 신>이 만화적 이미지를 부여하는 대상과 방식, 그리고 그 효과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는 건 달라지지 않아요. 이건 양자를 대비하며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해야 할 문제라, 오늘은 “만만치 않은” 신의 물방울에 집중해야 할 것 같네요. 그러면 상품/노동이라는 추상적 구분에서 와인과 와인 생산 및 소비로 더 구체적인 구분 하에서 이야기 해 볼 수 있을 테니까요.

 

<신의 물방울>은 30권이 넘어가는 장편인 만큼 그 양상이 단일하거나 균질하지 않습니다. 권별로, 에피소드 별로 차이가 있고 어찌 보면 뒤로 갈수록 진화하는 것도 같습니다. 그래도 <신의 물방울>의 와인에 대한 철학과 그 철학을 관철하는 논리를 단순명료하게 규정한다면 다음처럼 설명할 수 있어요. (이것 역시도 <신의 물방울>이 천박하지만은 않다는 선배의 힌트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전자는 교환가치보다 사용가치의 우위이고 후자는 사용가치=맛의 심미화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입니다. 1) 샤토 A(15만원)보다 샤토 B(2만원)가 더 높은 ‘가치’를 지닌다. 2) 샤토 A를 맛보았을 때 느껴지는 감동보다 샤토 B의 맛에서 느껴지는 감동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런 철학과 논리는 일반적인 자본주의 사회가 상품에 의미를 입히는 일반적 방식에 비해 진일보한 형태입니다. 가격이라는 교환가치를 최상이자 유일한 가치기준으로 보며 높은 가격의 제품이 낮은 가격의 제품보다 더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보는, 화폐를 매개로 한 상품의 물신화가 천박하단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문제는, 말할 필요가 없을 만큼 쉽게 논박할 수 있는 이 신화를 넘어선 신화를 <신의 물방울>이 제공하고 있다고 해서 그 의의를 인정해 줄 수 있냐는 거예요. 달리 말해, 몇 가지 에피소드에서 벌이고 있는 <신의 물방울>의 싸움은 너무 이기기 쉬운 대상과의 싸움이란 말입니다. 그 싸움이 담고 있는 것은 반자본주의도 아닐뿐더러, 자본주의의 여러 문제 중에서 가장 천박한 것 한 가지에 일정한 수정을 가하는 것일 뿐이에요. 선배가 말한 바 <신의 물방울>의 “만만치 않음”은 사실 이런 것이라 저는 생각해요.

 

와인의 명품인 5대 샤토만을 선호하는 다키스키ⓒ아기 타다시, 오키모토 슈



그러나 저렴하지만 정성들여 만든 와인을 맛본 다키스키는 페가수스를 타고 어린시절의 행복감을 경험하게 된다. 만화 '신의 물방울'은 이처럼 와인의 미적 경험을 만화적 심상풍경으로 표현해 내며, 와인을 예술로 고양시킨다. ⓒ아기 타다시, 오키모토 슈

 

또 비싼 샤토 A의 맛을 넘어서는 싼 샤토 B가 존재한다는 것을 강변하는 <신의 물방울>은 거기서 멈출 뿐 더 나아가지 않아요. 위의 예는 사실 와인의 가격을 결정하는 구조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예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옮기면, 애초에 교환가치로 사물의 가치를 규정하는 현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신의 물방울>은 비싼 와인과 싼 와인이 존재하는 상황, 즉 교환가치와 가치가 등가가 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교환가치가 높은 상품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닌다”는 사회적 통념을 “일반적으로 교환가치가 높은 상품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니지만, 때로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수정하는 거죠. 통념에 대한 반례는 제공하지만, 통념에 기댄 채로 수정할 뿐입니다. 따라서 반례가 되는 샤토 B는 사실 샤토 A보다 더 높은 가격을 지니기에 마땅한 것이 됩니다. 곧 가격이 상승할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하죠.

 

그래도 이런 면에서 <신의 물방울>은 싸지만 좋은(맛있는) 와인을 찾아내는 것으로 합리적인 와인 소비자들에게 일종의 돌파구를 제안합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와인을 만화 속에 등장시키는 <신의 물방울>의 장점으로 인해, 독자는 싸고 맛있는 와인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얻고 활용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1권에 등장했던 샤토 몽-페라(Chareau Mont-Perat) 2001년산은 코스트 퍼포먼스가 뛰어난 와인으로 현실에서 큰 인기를 끌었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수요가 늘어난 데 따른 가격 상승이었어요. 싸고 맛있는 와인을 <신의 물방울>이 찾아내지만, 그로 인해 싸고 맛있는 와인은 곧 비싸고 맛있는 와인이 되더란 말이죠. 돌파구는 사실 돌파구가 아니라 또 하나의 막다른 골목이란 말이에요. 결국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최선의 돌파구는 싸고 맛있는 와인을 계속해서 찾아내는 <신의 물방울>의 방식이 아니라, 싸든 비싸든 맛있는 와인을 사서 마실 수 있는 금력을 확보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가격(교환가치)과 관련해 생산과 유통의 문제가 아니라 소비의 문제에 더 치중하는 면에서, 즉 가격이 결정되는 과정보다 이미 결정된 가격 체계 안에서 현명하게 소비하는 것에 치중하는 면에서 <신의 물방울>은 분명히 아쉽습니다. 하지만, 맛이라는 사용가치와 관련해서는 생산과정을 상당히 부각시키고 있어요. 어떻게 해서 맛있는 와인이 탄생하는가를 “천•지•인”이라는 논리 속에서 구현하고 있으니까요. 선배가 말한 바, <신의 물방울>의 와인 철학입니다. 이로 인해 인간의 노동이 가치를 부여받아요. 天(빈티지: 시간(수확연도), 농작을 위한 기후환경)과 地(테루아르: 토양과 토질, + 포도나무)을 결정하는 자연의 힘 아래서 결국 와인을 만들어내는 마지막 힘인 人(도멘: 와인 생산자, 장인)이 포도와 최종 생산물인 와인의 가치를 매개하고 결정하게 되니까요. 세 요소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좋은 와인이 탄생하지 않지만, 풍년이 아닌 빈티지와 척박한 테루아르에도 불구하고 좋은 와인이 탄생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의 노력이란 걸 제1사도와 제2사도에 얽힌 이야기는 보여줍니다. 결국 <신의 물방울>이 담고 있는 것은 자연을 배경으로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생산을 중심으로 할 때 그것은 성실한 노력과 번득이는 감각과 아이디어이고 문화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행위는 그렇게 탄생한 와인 고유의 맛으로 열매 맺습니다. 이 모든 것이 노동으로 수렴하지는 않지만, 최종 생산물인 한 병의 와인을 통해 그 생산자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면에서 노동과 노동하는 사람이 소외당하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만화라는 매개를 통해 생산자와 소비자(독자) 사이를 이어주고 있다는 면은 분명 장점입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도 일정한 한계 속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 한계는 와인 소비자의 자리에 있어요. 제목 속에 ‘신’이라는 이상화된 타자를 담고 있는 것처럼, <신의 물방울>은 이데아를 전제한 가운데 펼쳐지는 인간의 '신적 고양'의 이야기입니다. 생산자의 이야기에서 그것은 자연과의 변증법적 합일로 완성되지만, 소비자의 이야기에서는 다른 방식이 됩니다. 소비자는 와인을 향유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단일한 정체성과 향유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아요. 두 주인공만 해도 그렇습니다. 와인 평론가 토미네 잇세가 와인에 대한 접근성이 높을뿐만 아니라 최고 수준의 지식과 교양을 지니고 있는 반면 와인의 세계에 막 발을 들인 평사원 칸자키 시즈쿠는 잇세가 지닌 것들과는 거리가 멉니다. 와인을 소비하는 데 드는 ‘돈’과 오랜 세월 동안 와인을 접한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시즈쿠는 희대의 평론가 칸자키 유타카의 적자로서 어린 시절부터 술의 형태가 아닌 방식으로 와인을 경험하는 훈련을 받아 후각과 미각이 잇세보다도 뛰어납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문학과 미술에 대한 조예도 남다르죠. 그래서 두 주인공의 와인 향유는 주변 사람들이 감탄하게 만듭니다. 시즈쿠와 잇세의 조력자들도 만만치 않은 향유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말이죠. 이들 모두의 동경과 승부의 대상은 칸자키 유타카입니다. 일본인으로서 세계 와인 시장에까지 영향을 미친, 완성된 평론가로 만화 속에서 와인 향유자의 이데아로 재현됩니다. 만화 속의 소비자들은 유타카(이데아)의 위치에 이를 때에야 신적 생산물인 와인의 참맛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생산자도 소비자도 소외되지 않는 거죠.

 

따라서, “일반적으로 교환가치가 높은 상품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니지만, 때로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신의 물방울>의 수정된 정식을 완성하고 그것을 보편 세계의 변화로 이끄는 것은 ‘유타카에 근접한 소비자’와 ‘유타카의 와인 미학’입니다. 그런 소비자일 때에야 가격과 상관없이 와인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향유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구도에서 저는 프리드리히 쉴러의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를 떠올렸습니다. 쉴러는 이 편지들에서 혁명(프랑스 혁명)으로도 완수하지 못했던 인간 총체성의 완성은 예술을 통한 감성의 고양을 수반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이상적 세계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이 이루어내는 것이고, 그런 인간은 예술의 교육을 통해 탄생한다는 것이지요. 플라톤에게서 이데아의 2차 모방물이라는 평가를 받던 예술은 쉴러에게서 진리와 본질을 담은 이데아로의 통로로 제고됩니다.

 


와인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가는 '신의 물방울'의 여정이 잘 표현된 장면.

하지만 이러한 화해적 가상은 개인의 의식 안에서만 이루어질 뿐, 세계의 자체의 문제는 외면한다. ⓒ아기 타다시, 오키모토 슈

 

 

만화 <신의 물방울> 속에서 신의 물방울, 즉 와인도 바로 그런 예술 중 하나가 됩니다. 그 예술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세계는 더 살만한 곳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의 물방울>의 세계는 부족하지만 바로 그런 곳처럼 그려집니다. 시즈쿠를 중심으로 한 인물들의 여정은 세계에 존재하는 문제를 와인이라는 예술을 통해 해결하는 과정이니까요. 직장인의 무료한 일상에서부터 부녀갈등, 이혼, 정리해고, 적대적 기업합병, 시한부인생,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까지 여러 고통의 문제들이 시즈쿠 일행이 찾아낸 와인을 통해 해결됩니다. 일상적 문제 상황 가운데 화해를 맛보게 해주는 것이 와인인 셈이지요. 또한 그 과정의 세부는 모두 인간적 유대감을 주축으로 보답 없는 증여(재능기부)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도를 찾아야 하는 와중에도 짬을 내어 이 아름다운 미션을 완수하고 나면, 사도에 대한 힌트가 서사적 보답의 형태로 주어집니다. <신의 물방울>의 서사의 주축은 이처럼 예술적 인간이 와인이라는 예술을 통해 타자에게 선사하는 화해, 그리고 그 예술적 인간 그 자신의 문제 해결과 발전 과정이라 할 수 있어요.

 

사뭇 아름다운 이 소비자의 서사는, 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예술적 가상입니다. 와인 소비로 인해 맛보는 행복감과 문제의 해결은, 만화 속에서 가능했던 것처럼 손쉽지 않다는 걸 선배도 아실 겁니다. 이런 해결은 아도르노의 표현에 따르면 “거짓된 축복”입니다. 고통스런 현실에 대한 화해적 태도와 거짓된 위안을 매개하는 예술은 세계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로 작품 안에서만 문제를 해결할 뿐입니다. 이 말은 <신의 물방울> 속에서 인간적 문제를 해결해내는 와인의 힘에 낭만적 기대를 품지 말자는 것도, 와인 따위 마시지 말자는 말도 아닙니다. 오히려 화해적 가상을 재현하는 만화와 그것으로 재현되는 와인이라는 두 개의 신의 물방울을 통해 새로운 사유로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선배를 만족케 한 <신의 물방울>이 제게는 불만족스런 것이었다면, 뒤집어 보면 선배에게도 그것이 만족스럽지 않게 될 여지가, 제게도 이것이 만족스러워질 여지가 있다는 것일 테니까요.

 

와인이라는 ‘신의 물방울’과 와인을 그려낸 만화 <신의 물방울> 모두가 제게는 부르주아를 위한 예술 형태로 이해됩니다. 그것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부르주아 미학을 만족시키고 있어요. 와인은 풍성한 맛과 향을 지니고 있으며 교양을 담고 있습니다. 만화도 와인의 매력을 풍성한 스토리와 섬세한 표현과 구성으로 잘 담아내고 있어요. 개인 능력의 자원이 되는 지성과 교양과 풍요가 현대 부르주아의 전유물이라면, 바로 그것이 <신의 물방울>의 주된 질료라 할 만 합니다. 특히 시즈쿠와 잇세라는 중심인물들의 계급적 위치는 부르주아를 주인공으로 한 세계를 구성해내고 있습니다. 잇세는 몰라도 어떻게 시즈쿠가 부르주아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28권부터 등장하는 크리스토퍼 왓킨스라는 인물을 비교항으로 놓고 볼 때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시즈쿠와 잇세가 그토록 힘겹게 찾아왔던 8병의 사도들을 단 몇시간만에 모두 찾아내는 왓킨스는, 부르주아 혁명 이전의 귀족에 해당하는 인물입니다. 현재 부르주아의 전유물인 지성과 교양과 풍요는, 사실 귀족들의 것이었어요. 부르주아들은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노력을 통해 귀족들의 전유물을 잠식해 그것들을 획득해 낸 것이지요. 결국 귀족과 왕족의 시대를 무너뜨린 것이 부르주아들의 시민 혁명이었음을 떠올려 볼 때, 귀족 왓킨스에 비해 평범한 시즈쿠와 잇세는 부르주아의 위치에 있습니다. 그들은, 칸자키라는 신흥 부르주아의 재능을 이어받은 부르주아로, 각각의 결점을 지니고 있지만 완성을 향해가는 자들인 것이지요. 칸자키의 12사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완벽하지 않지만, 부족한 면으로 인해 가치가 있는 와인들입니다. 그 부족함은, 부르주아들의 세계를 만들어낸 노력 그것으로 채워질 수 있으며 더 높은 차원의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전제가 되는 무엇이니까요.

 

이런 저의 독해가 선배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해요. 각자의 이데올로기적 시점에서 바라볼 때 나오는 다른 독해일 테니까요. 선배의 눈에는 아름다운 세계를 그려내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제게는 이미 함락된 귀족의 성채와 천박한 자본주의를 부수는 포즈를 담아 부르주아에게만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손쉬운 이야기라는 게 이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설명이 충분치 않을 수도 있어요. <신의 물방울>이 배제하고 있는 사람들과 삶을 더 잘 설명했어야 했는데, 충분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 같아요. 이 부분은 추후에 다른 작품을 통해서 더 잘 해보도록 할게요. 아마도 <목욕의 신>이 완결되고 나면 그 작품에 대한 면밀한 독해를 통해 다른 방식으로 해 낼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원래 쓰려고 했던 두 작품의 대비도, 두 작품 모두가 완결한 후로 미룰게요. 와인이라는 서구 부르주아의 예술상품이 아닌 한국 서민의 대중적 목욕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제 눈길을 끈 <목욕의 신>이지만, 선배 말대로 아직은 소재의 매력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그려지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일단은 그것이 화해적 가상이 아닌, 비화해적 가상으로서의 현대예술에 이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고 지켜보려 합니다. 다음을 기약해요.

 

 

<목욕의 신> 전반부에 제시된 문제 상황.

아직 이야기가 충분히 진행되지 않아서일 수 있으나, <목욕의 신>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계속해서 드러내고 있다. ⓒ하일권

 

 

 

마지막으로 <신의 물방울>이 제게 던져준 화두를 선배에게 말씀드리고 편지를 맺으려 합니다. 이건 지금껏 논했던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일 텐데요, 바로 예술에 대해 말하는 형식, 즉 평론입니다. 와인을 향유하면서 느끼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잇세와 시즈쿠의 사도 찾기의 여정은, 만화의 세계에 대해 ‘표현’하는 만화 평론가의 길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요. 더 많은 만화를 경험하고, 정말로 좋은 만화를 소개하고 표현하는 길을 계속 걸어 나가려는 저에게 이들의 와인 여정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더군요. 언젠가는 선배를 만족시킨 잇세와 시즈쿠보다 더 만족스러운 글을 써 볼게요. 아마도 그들과는 다른 방식일 테고, 또 그들의 아름다움과는 다른 아름다움이 표현될 테지만, 비화해적 가상을 예술의 본령으로 믿는 제게 만화는 그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깊이 있는 예술입니다. 개별 작품 가운데 그 가능성을 성취하고 있는 작품은 아직 많지 않다 해도 말이죠. 한 번 제대로 걸어보겠습니다. 지켜봐 주시고, 또 끊임없이 비판하고 질문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사는 세계가 자본주의 사회이고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가 지배적 이데올로기인 한, 선배의 말씀은 제게 지배적인 세계와 그 세계를 사는 사람의 텍스트 향유를 더 명확히 파악하게 도와줄 테니까요. 이번에도 그랬던 것처럼요. 감사해요 선배.

 

 

P.S. 조만간 같이 목욕하러 갑시다. <목욕의 신> 얘기를 조금이나마 준비해 둘게요. 바나나우유는 제가 쏩니다!^^

 

 




- 싱크 7호에 기고한 만화칼럼. 

이 때는 아직 <목욕의 신>이 완결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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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과 금>, 미완의 성장기

 

1.


88만원 세대의 전형이라 할 당신에게 청부 살인에 가담하라는 제의가 들어왔다병으로 죽어가는 대기업 회장의 죽음을 몰래조금 앞당기는 일이다손에 피를 묻힐 필요도 없고 게다가 무죄가 보장되어 있다이 부담 없는 살인의 대가로 당신이 받게 될 돈은 7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발을 들일 것인가뺄 것인가?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만화 <은과 금>은 이처럼 돈과 사람을 저울질하게 만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이야기의 중심인물은 은왕 긴지와 청년백수 모리타다긴지는 탁월한 지략을 지닌 사채업자로그가 지원하는 정치인이 일본 정계의 정점에 앉으면 자신은 경제계의 정점에서 거대기업들을 좌지우지하려는 야망을 지닌 인물이다모리타는 긴지가 선택한 파트너이자 후계자로은왕과 함께 활동하며 수련을 쌓아 장래에는 은왕을 넘어서는 금왕이 되려 한다은왕이라 불리는 인물과 금왕이 되려는 인물이 힘을 합쳐 시궁창 같은 세계에서 벌이는 돈의 투쟁이 <은과 금>에는 담겨있다. <은과 금>이 담은 투쟁이 돈의 투쟁인 이유는그것이 돈으로 돈을 제압하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으로라는 조사에 주목하기 바란다조사가 강변하듯그들에게 돈은 수단이다그리고 목적은 자아실현이다금권(金權)의 최고봉이라는.

 

이처럼 돈을 수단으로 하여 자아실현을 이룬다는 만화적 가정은우리가 현실 속에서 듣는 말들과 크게 모순되지 않는다돈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돈은 행복을 위해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등등은 그 현격한 예다돈의 목적 불합치성이 강조되고 있으며행복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는 말에는 수단으로서의 성격이 포함되어 있다그렇지만 동시에 현실 속에서는 돈이 수단의 자리에만 머무르지 않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돈을 위해 저질러지는 악()들을 우리는 목도해 왔다절도와 사기착취와 해고불법 상속과 분식회계 등등개인 간에고용인과 피고용인 간에그리고 공적으로 이루어지는 법적 죄와 도덕적 악은 돈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바로 <은과 금>의 긴지와 모리타도 고리대금업과 사기(도박)로 돈을 모으고 있지 않은가돈을 수단으로 한다는 그들은악으로 돈을 추구한다다시 으로그들에게는 악 역시 수단이다따라서 그들의 쟁투는 돈의 쟁투이자 악의 쟁투이다그들은 악으로 돈을 벌고돈으로 자아를 실현하려 한다이 글의 목표는 바로 이 만화적 도정의 서사를 검토하는 데에 있다.

 

 

2.


서두로 다시 돌아가 당신의 선택을 상기해 보자돈이었나사람이었나발을 들였는가뺐는가모리타는 동일한 제안 앞에서 돈을 선택하지 않았지만발은 들였다이는 사실 긴지의 시험으로모리타가 돈을 사람을 넘어서는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그랬기에 돈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을 거부한 모리타는 긴지의 시험에 합격했다돈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은 결국 돈에 의해 움직이며 돈을 위해 자기편을 배반할 수 있다반면 모리타는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움직일 줄 아는돈보다 사람을 위에 놓고 보는옳은 인간이다.(<그림 1>) 긴지에게 필요했던 것은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였고모리타야말로 적합한 인물이었다이렇게 모리타는 긴지에게 이끌려 돈과 악의 투쟁에 발을 들였다돈을 수단으로 볼 수 있는 두 인물 긴지와 모리타 듀오는 그렇게 함께 쟁투에 뛰어들기 시작했다.그리고 그들의 적은 주로 돈을 쥐고 있는 악한 자들이다.

 

 

<그림1> ⓒ후쿠모토 노부유키

 

이런 면에서 긴지와 모리타는 의적을 연상시킨다홍길동과 로빈훗 등의 의적 캐릭터의 방식은 강자에게 강자의 방식으로 대항하는 것이었다그 현대적 변용으로서 만화 <은과 금>이 채택한 것은 돈의 활용이라는 강자의 방식으로 재벌이라는 강자에 대항하는 것이다하지만 전통적인 인간주의적 의적과 달리 긴지와 모리타는 약자를 위해 베풀거나 기존 사회의 타자를 위한 이상세계 건립을 꿈꾸지 않는다적어도 드러나게 서술되는 것은 앞서 말했듯 금권의 최고봉에 오르는 것이다게다가 이들의 방식은 강자들보다 더 치밀하고 정교한 악이다살인만이 제외되었을 뿐강자들의 등을 치는 모습은 통쾌할 만큼 악랄하다이런 면에서 볼 때 이들은 현대극에서 자주 등장하는 악한 주인공의 형상과도 유사하다하지만 그렇다고 <하얀 거탑>의 장준혁으로 대표되는 악한 주인공들처럼 파국을 맞이하지는 않는다오히려 긴지와 모리타는 실패를 경험하지 않고 끊임없이 승리한다한때 청년백수였던 모리타는 그 과정에서 더 많은 돈과 더 치밀한 악을 활용하는 자로 성장한다.

 

이런 만화의 캐릭터 형상화와 서사 속에서선과 악의 대립구도도 수정된다. <은과 금>의 구도는 기본적으로 악과 악의 대립이다구체적으로는 인간적 악과 동물적 악의 구도에 가깝다돈과 악을 도구로 활용할 줄 아는 인간들이 돈과 악을 체화한 동물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다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은과 금>의 인간과 동물은 같은 자리에 있다긴지와 모리타가 벌이는 투쟁은 만화 속에서 포커마작내기격투 등으로 이루어지는데이 때 주인공과 적대자는 같은 장같은 게임의 룰 안에 있다이 게임은 이기는 자와 지는 자로 나뉘는 결과를 향해 치닫는다이 게임들은 돈을 걸고 이루어지며돈을 목표로 한다치밀한 악이 돈을 거머쥐기 위해 동원된다적어도 게임의 순간만큼은수단으로서의 돈이라는 인간적 개념은 정신의 작용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따라서 긴지와 모리타의 인간적 여정의 순간순간은 동물적이다특히 이 게임의 장에 새로이 진입한 인간’ 모리타는시간이 지날수록 동물적인 면에서 성장한다.

 

 

3.


 11권으로 구성된 <은과 금>의 서사가 막바지에 치닫는 10권에 이르러모리타는 은퇴한다그의 은퇴 사유는 악당들과 함께 있다 보면내 인격까지 변해버릴” 것이 두려워서였다그는 금왕이 되려던 자아실현의 꿈을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버려야 했다. <베가본드>(타케히코 이노우에)의 미야모토 무사시가 내려오지 못한 그 죽고 죽이는 나선을 내려온 것이다모리타는 긴지와 그 게임의 세계에서 발을 뺐다인간으로 남기 위해서.

 

이런 모리타의 발 들여놓음과 발 뺌만을 중심으로 본다면 이 만화는 성장소설(Bildungsroman)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헤르만 헤세의<데미안>을 대표적 예로 들 수 있는 성장소설은주요 인물의 자아와 세계에 대한 이해의 갱신을 그 요체로 한다. <은과 금>에서의 모리타의 경우도 발 들여놓음이 금왕이 되어보려는 자아실현의 꿈의 소산이었다면 발 뺌은 인간으로 남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라는 면에서 역시 자아에 대한 고민과 닿아있다세계에 대한 이해는 인간적 삶에 대한 깨달음으로자아의 문제와 뗄 수 없는 것이다이처럼 <은과 금>을 성장소설의 서사로 이해할 때모리타의 성장은 악운의 레벨 업이 아니라 그가 꿈꾼 자아실현이 인간됨의 포기로 이어진다는 모순을 깨닫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성장이 성장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은 것이 성장인 셈이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말에서 같은 기표가 다른 기의를 지시하듯이앞뒤의 두 성장은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이들은 돈과 악의 체계 안에서의 성장과 그 체계 밖으로 나가면서 시작되는 성장을 각각 지시한다따라서 시점의 차이에 따라 전후의 기표는 성장과 퇴행으로괴물화와 성장으로 달리 표현될 수 있다그러나 모리타를 바라보는 시점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오히려 중요한 것은 모리타를 바라보는 나의 시점이 어느 체계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고,내가 걷고 있는 과정은 어떤 성장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성장하거나 살아남기 위해서 인간됨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순간을 우리는 꽤나 자주 경험하거나 목도한다긴지와 모리타가 살인만큼은 피하면서 지키려 했던 인간됨이지만그것은 생명을 방어할 뿐 사람 그 자체를 지켜내지는 못하는 것이다그들의 승부는 결국 패자를 만들고 말았다폐인의 모습으로 묘사된 패자와 그 참혹한 모습에 놀라는 모리타가 한 컷에 담긴 <그림2>는 승부의 결과를 여실히 보여준다패자=폐인을 만들며 승자가 되거나승자가 되지 못하고 패자=폐인이 되거나결국 모리타는 승자가 되는 과정을 거듭하며 금왕으로 상징되는 피라미드의 정점에 다가가는 여정을 중단하고인간이라는 약자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그의 선택은 김예슬 선언에 상응하는 것이다그 선택 이후에 대한 의문이 김예슬의 삶에나 그의 삶에나 여전히 맴돌지만.

 

  

<그림 2> ⓒ후쿠모토 노부유키

 

은퇴 후 모리타의 삶에 대해 의문이 발생하는 것은그것이 성장하면 할수록 비인간적이 되어가는 어두운 세계의 영역이 과연 어디까지인가 하는 물음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과연 어두운 세계에 바깥이란 게 있는가또 설혹 가 완전히 어두운 세계를 벗어나는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내 밖에 여전히 존재하는 어두운 세계와 그 안에서 자아를 획득하며 잃어가는 사람들로 인해 가슴 아파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그래서 긴지는 모리타에게 말한다. “만약 악을 꺾는 것이 있다면그것은 즉그 이상의 악새로운 악당세대교체다그러니까 자네가 누군가를 구한다거나지켜주고 싶다면차라리 뛰어올라거악(巨惡)으로!” 그리고 그는 그의 길을 계속 간다. “재가 될 때까지.”

 

 

사족당연하게도 선한 자아와 선한 세계를 모두 얻을 길은 요원하다그것은 너무나 이상적이다하지만 자아를 악에 젖게 만들면서라도 그가 추구하는 세계를 얻으려 하는 긴지의 선택과악한 세계를 그대로 두고 최대한 멀리서 선한 자아를 되찾으려는 모리타의 선택 역시도 미완의 프로젝트이다결국 가장 쉬운 길그리고 많은 이들이 선택하는 길은 악한 세계에 맞는 악한 자아를 계발해 나가는 길이 되고 만다.이런 상황 속에서가장 쉬운 길에 머무르지 않으려는 우리의 노력은 흑과 백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하는 이분법적 문제를, ‘나는 얼마나 더 백에 가까운 회색이 될 것인가’ 그리고 검은 세계를 얼마나 더 하얗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로 치환해 버리는 것이 되고 말지 모른다하지만 결국 자아와 세계를 모두 잃지 않을 길은 그 길 뿐이다.

 

 

 

 

 

 

 

 

 

 

 

 

 

 

 

<싱크> 6호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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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C 5호] 판타지로 웃고 울기 - '신과 함께'

판타지로 웃고 울기 - <신과 함께>


힘없는 판타지


불의한 재벌을 국가()권력이 어떻게 비호하는지를... 눈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하나님 부처님 자연의 신이여 나에게 저 벽을 넘을 수 있는 초능력을....


2차 희망버스를 타고 김진숙 지도위원을 만나러 내려갔던 지인이 페이스북에 쓴 말이다부산 영도에 강림한 닭장차형 명박산성 앞에서그것으로 상징되는 넘을 수 없고 허물 수 없는 벽 앞에서 그녀는 신들에게 초능력을 바랐다힘없는 사람들이 불의하고 비참한 현실 속에서 기댈 것은 결국 초()현실적 힘이다.


그래서 초현실적 세계나 현상을 담은 판타지 장르는 유난히 현실을 전복하려 한다거의 모든 판타지의 내러티브 속에는 바꾸고 싶은 현실과 그 현실을 바꿀 초현실적 힘이 들어서 있다. <홍길동전>이 그랬고 <스파이더맨>이 그랬다. <해리포터>나 <엑스맨>, <반지의 제왕>도 크게 다르지 않다최근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초현실적 설정 역시 같은 맥락 속에서 읽을 수 있다재벌 3세 백화점 사장과 부모 잃은 가난한 스턴트우먼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 몸이 바뀌는 기적이 필요했던 것이다뒤집어 생각할 때 보이는 것은기적이 아니고서는 계급을 넘어선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높고 두터운 현실의 벽이다이처럼 영화든 드라마든 만화든 판타지 이야기 속에는 초현실적 힘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극복되지 않는 현실이 전제처럼 도사리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판타지 이야기가 범람하는 오늘날은 정말 살기 어려운 세상이다도저히 기적이 아니고서는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바꿀 수가 없다하지만 현실 속에서 기적이 일어날 공산은 없으니 이야기 속에서라도 기적을 일으켜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해보려는 것이 판타지의 시도다혹 판타지에 빠지는 것을 잉여나 오타쿠의 길이라 여겨 거부한다면 자기계발에 빠질 수밖에 없다하지만 자기계발을 통해 ’ 현실이야 어떻게든 바꾼다 해도 우리들의 현실은 바뀔 가망이 없다결국 내 입에 풀칠하거나 혼자 떵떵거리면서 우리의 문제에는 눈을 감아 우리를 그들로 치환하는 게 상책이다허나 상책을 선택하는 것이 부끄럽거나 못마땅하다면? ‘우리로서 연대하면서 어떻게든 현실을 바꾸어 나가거나다시 판타지로 돌아올 밖에.


하지만 판타지에 빠지는 것이 현실을 바꾸어 나가는 시도보다 저열한 무엇은 아닐 수도 있다둘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말했듯 애초에 판타지는 현실의 확고부동한 부정성을 깨닫는 데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나아가 때로는 판타지로 인해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가 힘을 얻기도 한다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마음먹은 대로 오늘은 이것 내일은 저것아침에는 사냥 낮에는 낚시 저녁에는 목축 밤에는 비평을 할 수 있다는 <독일 이데올로기>의 한 구절을 떠올려 보라그것은 마르크스가 상상 속에서 그린 공산주의의 결과적 장면이지만노동에 찌든 이들에게는 세계를 바꿔야 할 당위로 작동하기도 하지 않던가.


그러나 <신과 함께>의 판타지는 앞서의 판타지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일단 이야기 속에서 현실을 바꾸려는 힘이나 의지가 다른 판타지들에 비해 약한 편이다이 만화의 판타지적 요소들이 현실 즉이야기 속 이승과 괴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3부작 중 현재 완료된 두 편 모두 저승과 이승을 넘나들며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두 세계는 확고한 경계와 법으로 나뉘어 있다삶과 죽음의 경계를 사이로 이승에 속한 이는 저승에 영향을 미칠 수 없으며 반대도 마찬가지다두 세계를 넘나드는 저승사자들 역시도 사자(死者이송 업무 외에는 이승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규칙 아래 있다이 힘없는 신들은 적어도 원칙상으로는 이승의 부조리에 눈 감을 수밖에 없다따라서 이 이야기는 슈퍼히어로물이나 기적적 사건이 벌어지는 것과 같은 방식의 판타지는 될 수 없다하지만 <신과 함께>의 판타지는 어쩌면 슈퍼히어로물보다 더 강력한 방식으로 독자들 안에서 작동한다그리고 그 핵심은 웃기고 울리기에 있다.




웃고 울기


먼저 웃자. <신과 함께>의 웃음은 해학과 풍자에서 발생한다이야기가 웃음을 주는 방식을 논할 때 자주 함께 사용되어 비슷한 뜻으로 여겨지는 해학과 풍자는그 자체로는 웃음과 상관없는 요소를 새로운 맥락 안에 배치하는 것을 통해 웃음을 자아낸다는 면에서 유사하다예를 들어 커피숍이나 사대강 사업 자체는 웃기지 않지만이러한 요소들이 저승 안에도 존재한다면 그것은 웃음을 유발한다하지만 그 웃음의 질이나 웃는 독자가 느끼는 감상에는 차이가 있는데이것이 해학과 풍자의 결정적인 차이이다둘은 주체(독자)의 대상에 대한 거리를 기준으로 구분된다해학은 주체의 대상에 대한 거리를 좁히는 효과를 낸다앞서 든 예처럼커피숍이 저승에 헬벅스(Hellbucks)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은 웃음을 줌과 동시에 저승에 대한 친숙함을 이끌어낸다독자가 경험적으로 익숙한 것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가까이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반면 풍자는 대상에 대한 비판적 정서를 환기하면서 거리를 확인하게 하고 더 멀어지게 한다사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독자가 저승중심부를 관통하는 강인 삼도천이 하천 정비사업으로 물줄기가 직강화되었다는 내용을 접하게 되면그는 웃음과 동시에 사대강 사업에 대해 가졌던 비판적 정서를 감각하게 된다결과적으로는 저승에 대해서도 거리감을 느끼게 될 수 있지만대개는 원래 비판하던 하천 정비사업이 저승까지 망치고 있다는 식의 감상으로 이어지게 될 공산이 높다이 경우 거리가 멀어지는 대상은 사대강 사업이 된다더 극명한 예로불효자를 가두는 한빙지옥이 불효자 급증으로 넘치는 제소자들을 다 수용하지 못한다는 저승타임즈’ 기사는 불효자와 이승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해학과 풍자는 독자 안에서 어느 대상에 대한 거리를 좁히거나 넓히는데이 때 대상은 경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신과 함께속에서 대부분의 경우 해학은 저승이나 주요 인물들에 대한 (혹은 이야기 자체에 대한독자의 거리감을 좁히고풍자는 이승의 부정성을 인식시키며 이승 및 이승의 부정적 모습에 대한 거리감을 넓히는 방식으로 사용된다따라서 독자는 만화에 몰입하면 할수록 저승의 자리에서 이승을 바라보게 된다이 말은 독자가 이승보다 저승을 좋아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저승이 독자에게 이승을 바라볼 가상의 공간으로 작용하여이를테면 저승에서 확고하게 적용되는 권선징악과 같은 법칙이 독자에게 내면화된다는 뜻이다그 시선으로 이승을 바라보게 될 때독자는 그들이 바라본 구체적 대상에 따라 다음 댓글들과 유사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혀 뽑힐 정치인 많겠네” / “나 튜브 타면 어쩌지..” / “착하게 살아야겠어요.” 처음에는 가벼운 웃음이었던 것이 <신과 함께>의 세계에 익숙해질수록 타자를 바라볼 때는 냉소나 조소로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는 더 이상 웃을 수만은 없는 윤리적 태도로 변화한 것이다이것이 <신과 함께>가 만드는 웃음의 힘이다.


이제 울 때다앞서의 웃음은 모험담의 틀을 취했던 <저승편>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반해 울음은 <이승편>의 지배적인 정서다하지만 <저승편>에도 이승을 배경으로 한 장면들이 병렬되었는데이 이승 역시 눈물 나게 하는 곳으로 그려진다이는 저승을 이승(=근현대)처럼이승을 저승(=지옥)처럼 그리려고 했다는 작가의 의도와도 부합한다. <이승편>의 눈물을 살피기에 앞서 <저승편안에서 이승을 그린 장면을 먼저 보자.


<그림1> 신과 함께 저승편 65화 ⓒ주호민

 

<그림1>에서 흐느끼고 있는 인물은 죽은 유성연 병장이다그의 죽음과 그 후의 이야기를 여기서 구체적으로 다룰 수는 없다어쨌든 그는 저승으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며 울고 있다흐느낌만으로도 충분히 슬픈 이 장면은그러나 배경을 통해 비애감을 증폭한다지면에 근접한 창문과 전봇대에 기댄 쓰레기봉투를 담은 첫 두 칸미디엄숏 속에 창문을 담은 다음 칸그리고 실루엣으로 처리된 달동네의 풍경 속에서 차사들의 발목에 위치한 창문을 통해 말풍선이 흘러나오는 마지막 칸주거의 지옥(지하와 옥탑방)인 반지하는 거주자의 가난을 표현한다쓰레기봉투도 가난한 자의 삶을 은유하는 것만 같다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창문이다낮은 창문이 반지하임을 증거하듯 여러 칸에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이것이야말로 눈물이 흐르게’ 하는 이 만화를 가장 잘 표현해내기 때문이다.


<신과 함께>를 창문이라고 생각해 보자만화의 칸처럼 네모난 이 창문을 통해 보이는 것은 온통 가난한 자의 삶이다창문은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풍경을 바꿀 수 없다. <신과 함께>라는 창문은 적어도 이승을 그릴 때만큼은 한울동이라는 달동네의 풍경을 꾸준히 비춘다창문은 그러나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말풍선까지 통과시킨다보이고 들린다보고 듣는다그래서 눈물이 창문을 통해 흐를 수 있다보이는 이들의 슬픔이 보는 이들에게 전염되는 것이다.


여기서 아주 잠깐만 만화의 중요한 특징을 하나 짚고 넘어가자만화가 대중들에게 친숙한 매체로 자리 잡고또 정서적 이입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카툰화()의 효과가 크다스콧 맥클루드가 <만화의 이해>에서 말했듯독자는 실제에 가깝게 구체적으로 그린 그림일수록 그것을 독립된 특징을 지닌 타자로 인식하며보다 더 단순화한 그림일수록 그것에 독자 스스로 성격을 부여하고 더 쉽게 동일시하게 된다(그는 이것을 탈바가지 효과라고 불렀다). <신과 함께>의 화풍은 한 눈에 보아도 후자에 속하는 경우이다그래서 독자들은 그림 속 인물들을 작품 내에만 존재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그들이 만나고 경험하는 보통 사람들과 더 쉽게 연결하게 된다때로는 그림 속 인물에 독자 자신에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들을 대입하는 일도 일어나며자기 자신과 인물을 동일시하게 되기도 한다.


따라서 <신과 함께>라는 창문은 흔히 진실을 보는 창으로 비유되는 다큐멘터리와도 다르다다큐멘터리 속의 삶은 많은 경우 특수하고 개별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만화 속의 삶은 와 닿아 있는 우리들의 것혹은 적어도 보편일반의 한 부분으로 보일 가능성이 크다그래서 <신과 함께>의 창문을 통해 보는 유성연 병장은 군대에 있는 동생을 떠올리게 하고펑펑 울고 있는 동현이(<그림2>)는 어린 동생이나 조카심지어는 자신의 어릴 적 모습으로까지 보이게 되는 것이다그럴 때에 독자가 느끼는 것은 연민이 아니라 공감이다흐르는 것은 농도가 짙은순도 높은 눈물이다.




웃고 우는 만화적 리얼리즘의 판타지

 


<그림2> 신과 함께 이승편 19화 ⓒ주호민

 

독자의 눈물 젖은 공감은 <그림2>의 배경을 통해 통감(痛感)으로 이행한다이 배경은 동현이네를 퇴거시키기 위해 집에 들어온 용역들의 난동이라는 사건을 담고 있다잔뜩 어질러진 가재도구와 쏟아진 장독 그리고 그냥 발자국이 아닌 신발자국은 동현이의 눈물과 커다란 말풍선 소리와 겹쳐져 사건의 잔혹성을 환기한다이 짓밟힌 삶을 만들어 내는 사건은 이 장면에서뿐만 아니라 <이승편전반을 통해 구체적으로 묘사된다예를 들어 구청직원들이 철거를 위해 할아버지와 나눈 대화에서는 철거민 대책의 허구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아파트 지어질때까지 어디서 살란 거요아파트를 하루에 지을수는 없잖여.” / “그래서 주거이전비 구백만원을 드리는 겁니다.” / “구백만원으로 집을 구하라고...?”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대한민국에 환멸을 느끼고담벼락과 창문에 빨갛게 칠해진 나가라와 자진철거에 고물을 주워 생계를 유지하는 동현이 할아버지의 삶과 일주일 만에 발견된 오락실 할아버지의 주검을 겹쳐 연상하고사람도 아닌 가택신들의 죽음을 목격하며 눈물을 흘리고 분노한다면이미 그 독자는 통감의 역치를 초과해 버린 것일 테다.


게다가 그 독자는 이미 웃다가 저승의 법칙을 내면화했기에 울면서는 그 법칙으로 지옥 같은 이승의 부정성을 판단하게 될 것이다더더군다나 <신과 함께>의 서사를 이끌어 가는 신들(차사들과 가택신들)이 말이 안되잖아”, “지옥이 따로 없구만”, “내 동생은 어쩌란 말이야!”와 같이 독자의 감상을 대신 표현해 줄 때간섭해서는 안 되는 이승 사건에 결국 간섭할 때독자들은 신들의 통감에 다시 공감한다이것이 만드는 효과는 가히 화룡점정이라 할 만하다독자들은 초월적 위치에 있지만 이승에 간섭해서는 안 되는 신들의 시선으로 이야기 속의 사건과 인물들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이 신들처럼독자들도 다른 사람들의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러니 독자 스스로를 이입하고 있던 신들이 손해를 감수하고 현실에 참여할 때그것이 독자에게 호소하는 바는 뼈저리다끝까지 인간사에 간섭하지 않으려던 철융신이 인간의 삶이 자신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 몸을 사리지 않고 사건에 뛰어들었던 것에 비견할 만한 일이 독자에게도 일어나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 장면용산참사를 상징하는 여섯 명의 사자(死者)를 데리러 재개발 반대 농성장을 향하는 차사들의 저 실루엣(<그림3>)은 <이승편>이 연재되는 내내 타이틀로 제시되었던 것이다그랬기에 아무리 무딘 독자라고 해도 <신과 함께>라는 창문이 그동안 무엇을 비추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몰랐다 해도 다른 이들의 댓글을 통해서라도 눈치 챘을 것이고. <신과 함께>가 군데군데 배치했던 힌트들(용역 보스와 시공사 중역의 대화나 경찰과 용역의 공조관계 등)을 캐치한 섬세한 독자라면차사들이 밟고 있는 저 쓰레기더미의 근원까지도 파악했을 것이다그리고 어떤 독자는후경 속의 크레인이 개발의 랜드마크인 동시에 소금꽃의 투쟁처라는 것까지도 연상했을지 모른다이런 독자들이 <신과 함께>로 웃고 울다 탄생한다그것이 이 색다른 판타지의 힘이다.


편편마다 수천 개씩 달린 댓글을 독자에 대한 이해의 자료로 활용했지만 이 글이 상정하는 독자가 얼마나 존재할지 혹은 탄생했을지는 알 수 없다다만 가히 만화적 리얼리즘이라 할 이 판타지가 정말로 힘을 지닌다면그 힘은 독자를 성장하게 하는 힘까지도 포함한 것이어야 할 터다물론 그 힘은 <신과 함께>가 만화와 공론장의 역할까지도 겸하고 있는 웹툰이라는 두 멋진 형식의 힘을 손오공의 원기옥처럼 끌어 모아 쏘았기 때문에 분출되었다힘없는 신들이 쏘아올린 작은 원기옥이 어디까지 날아갈 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만약 이승이 조금이나마 더 살만한 곳이 된다면 그것을 이끈 아주 작은 지분은 <신과 함께>에 있을 것이다.



<그림3> 이승편 최종화 ⓒ주호민



 




싱크 5호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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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와 관련하여 쓴 글을 모아둔 공간입니다.


안 올려둔 글도 적지 않습니다. 틈틈이 올려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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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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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의 책. 선물한 것만도 서른 권은 족히 될 것 같다. 이 시절로부터 꽤나 많이 멀어졌지만, 난 여전히 아마추어리즘의 신봉자이자 한화 이글스의 숨은 팬. 이겨도 좋고 져도 좋고, 그저 게임이 마냥 즐거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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