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과 금>, 미완의 성장기
1.
88만원 세대의 전형이라 할 당신에게 청부 살인에 가담하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병으로 죽어가는 대기업 회장의 죽음을 몰래, 조금 앞당기는 일이다. 손에 피를 묻힐 필요도 없고 게다가 무죄가 보장되어 있다. 이 부담 없는 살인의 대가로 당신이 받게 될 돈은 7억.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발을 들일 것인가, 뺄 것인가?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만화 <은과 금>은 이처럼 돈과 사람을 저울질하게 만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야기의 중심인물은 은왕 긴지와 청년백수 모리타다. 긴지는 탁월한 지략을 지닌 사채업자로, 그가 지원하는 정치인이 일본 정계의 정점에 앉으면 자신은 경제계의 정점에서 거대기업들을 좌지우지하려는 야망을 지닌 인물이다. 모리타는 긴지가 선택한 파트너이자 후계자로, 은왕과 함께 활동하며 수련을 쌓아 장래에는 은왕을 넘어서는 금왕이 되려 한다. 은왕이라 불리는 인물과 금왕이 되려는 인물이 힘을 합쳐 시궁창 같은 세계에서 벌이는 돈의 투쟁이 <은과 금>에는 담겨있다. <은과 금>이 담은 투쟁이 돈의 투쟁인 이유는, 그것이 돈으로 돈을 제압하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으로’라는 조사에 주목하기 바란다. 조사가 강변하듯, 그들에게 돈은 수단이다. 그리고 목적은 자아실현이다. 금권(金權)의 최고봉이라는.
이처럼 돈을 수단으로 하여 자아실현을 이룬다는 만화적 가정은, 우리가 현실 속에서 듣는 말들과 크게 모순되지 않는다. 돈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돈은 행복을 위해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등등은 그 현격한 예다. 돈의 목적 불합치성이 강조되고 있으며, 행복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는 말에는 수단으로서의 성격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현실 속에서는 돈이 수단의 자리에만 머무르지 않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돈을 위해 저질러지는 악(惡)들을 우리는 목도해 왔다. 절도와 사기, 착취와 해고, 불법 상속과 분식회계 등등. 개인 간에, 고용인과 피고용인 간에, 그리고 공적으로 이루어지는 법적 죄와 도덕적 악은 돈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바로 <은과 금>의 긴지와 모리타도 고리대금업과 사기(도박)로 돈을 모으고 있지 않은가? 돈을 수단으로 한다는 그들은, 악으로 돈을 추구한다. 다시 ‘으로’다. 그들에게는 악 역시 수단이다. 따라서 그들의 쟁투는 돈의 쟁투이자 악의 쟁투이다. 그들은 악으로 돈을 벌고, 돈으로 자아를 실현하려 한다. 이 글의 목표는 바로 이 만화적 도정의 서사를 검토하는 데에 있다.
2.
서두로 다시 돌아가 당신의 선택을 상기해 보자. 돈이었나, 사람이었나? 발을 들였는가, 뺐는가? 모리타는 동일한 제안 앞에서 돈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발은 들였다. 이는 사실 긴지의 시험으로, 모리타가 돈을 사람을 넘어서는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돈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을 거부한 모리타는 긴지의 시험에 합격했다. 돈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은 결국 돈에 의해 움직이며 돈을 위해 자기편을 배반할 수 있다. 반면 모리타는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움직일 줄 아는, 돈보다 사람을 위에 놓고 보는, 옳은 인간”이다.(<그림 1>) 긴지에게 필요했던 것은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였고, 모리타야말로 적합한 인물이었다. 이렇게 모리타는 긴지에게 이끌려 돈과 악의 투쟁에 발을 들였다. 돈을 수단으로 볼 수 있는 두 인물 긴지와 모리타 듀오는 그렇게 함께 쟁투에 뛰어들기 시작했다.그리고 그들의 적은 주로 돈을 쥐고 있는 악한 자들이다.
<그림1> ⓒ후쿠모토 노부유키
이런 면에서 긴지와 모리타는 ‘의적’을 연상시킨다. 홍길동과 로빈훗 등의 의적 캐릭터의 방식은 강자에게 강자의 방식으로 대항하는 것이었다. 그 현대적 변용으로서 만화 <은과 금>이 채택한 것은 돈의 활용이라는 강자의 방식으로 재벌이라는 강자에 대항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인간주의적 의적과 달리 긴지와 모리타는 약자를 위해 베풀거나 기존 사회의 타자를 위한 이상세계 건립을 꿈꾸지 않는다. 적어도 드러나게 서술되는 것은 앞서 말했듯 금권의 최고봉에 오르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의 방식은 강자들보다 더 치밀하고 정교한 악이다. 살인만이 제외되었을 뿐, 강자들의 등을 치는 모습은 통쾌할 만큼 악랄하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들은 현대극에서 자주 등장하는 ‘악한 주인공’의 형상과도 유사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얀 거탑>의 장준혁으로 대표되는 악한 주인공들처럼 파국을 맞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긴지와 모리타는 실패를 경험하지 않고 끊임없이 승리한다. 한때 청년백수였던 모리타는 그 과정에서 더 많은 돈과 더 치밀한 악을 활용하는 자로 성장한다.
이런 만화의 캐릭터 형상화와 서사 속에서, 선과 악의 대립구도도 수정된다. <은과 금>의 구도는 기본적으로 악과 악의 대립이다. 구체적으로는 ‘인간적 악’과 ‘동물적 악’의 구도에 가깝다. 돈과 악을 도구로 활용할 줄 아는 인간들이 돈과 악을 체화한 동물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은과 금>의 인간과 동물은 같은 자리에 있다. 긴지와 모리타가 벌이는 투쟁은 만화 속에서 포커, 마작, 내기, 격투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때 주인공과 적대자는 같은 장, 같은 게임의 룰 안에 있다. 이 게임은 이기는 자와 지는 자로 나뉘는 결과를 향해 치닫는다. 이 게임들은 돈을 걸고 이루어지며, 돈을 목표로 한다. 치밀한 악이 돈을 거머쥐기 위해 동원된다. 적어도 게임의 순간만큼은‘수단으로서의 돈’이라는 인간적 개념은 정신의 작용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긴지와 모리타의 인간적 여정의 순간순간은 동물적이다. 특히 이 게임의 장에 새로이 진입한 ‘인간’ 모리타는, 시간이 지날수록 동물적인 면에서 성장한다.
3.
총 11권으로 구성된 <은과 금>의 서사가 막바지에 치닫는 10권에 이르러, 모리타는 은퇴한다. 그의 은퇴 사유는 악당들과 함께 있다 보면“내 인격까지 변해버릴” 것이 두려워서였다. 그는 금왕이 되려던 자아실현의 꿈을, 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버려야 했다. <베가본드>(타케히코 이노우에)의 미야모토 무사시가 내려오지 못한 그 “죽고 죽이는 나선”을 내려온 것이다. 모리타는 긴지와 그 게임의 세계에서 발을 뺐다. 인간으로 남기 위해서.
이런 모리타의 ‘발 들여놓음’과 ‘발 뺌’만을 중심으로 본다면 이 만화는 성장소설(Bildungsroman)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헤르만 헤세의<데미안>을 대표적 예로 들 수 있는 성장소설은, 주요 인물의 ‘자아’와 ‘세계’에 대한 이해의 갱신을 그 요체로 한다. <은과 금>에서의 모리타의 경우도 ‘발 들여놓음’이 금왕이 되어보려는 자아실현의 꿈의 소산이었다면 ‘발 뺌’은 인간으로 남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라는 면에서 역시 자아에 대한 고민과 닿아있다. 세계에 대한 이해는 인간적 삶에 대한 깨달음으로, 자아의 문제와 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은과 금>을 성장소설의 서사로 이해할 때, 모리타의 성장은 악운의 레벨 업이 아니라 그가 꿈꾼 자아실현이 인간됨의 포기로 이어진다는 모순을 깨닫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성장이 성장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은 것이 성장인 셈이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말에서 같은 기표가 다른 기의를 지시하듯이, 앞뒤의 두 성장은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이들은 돈과 악의 체계 안에서의 성장과 그 체계 밖으로 나가면서 시작되는 성장을 각각 지시한다. 따라서 시점의 차이에 따라 전후의 기표는 성장과 퇴행으로, 괴물화와 성장으로 달리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모리타를 바라보는 시점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모리타를 바라보는 나의 시점이 어느 체계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고,내가 걷고 있는 과정은 어떤 성장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성장하거나 살아남기 위해서 인간됨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순간을 우리는 꽤나 자주 경험하거나 목도한다. 긴지와 모리타가 살인만큼은 피하면서 지키려 했던 인간됨이지만, 그것은 생명을 방어할 뿐 사람 그 자체를 지켜내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들의 승부는 결국 패자를 만들고 말았다. 폐인의 모습으로 묘사된 패자와 그 참혹한 모습에 놀라는 모리타가 한 컷에 담긴 <그림2>는 승부의 결과를 여실히 보여준다. 패자=폐인을 만들며 승자가 되거나, 승자가 되지 못하고 패자=폐인이 되거나. 결국 모리타는 승자가 되는 과정을 거듭하며 금왕으로 상징되는 피라미드의 정점에 다가가는 여정을 중단하고, 인간이라는 ‘약자’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그의 선택은 김예슬 선언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 선택 이후에 대한 의문이 김예슬의 삶에나 그의 삶에나 여전히 맴돌지만.
<그림 2> ⓒ후쿠모토 노부유키
은퇴 후 모리타의 삶에 대해 의문이 발생하는 것은, 그것이 성장하면 할수록 비인간적이 되어가는 어두운 세계의 영역이 과연 어디까지인가 하는 물음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과연 어두운 세계에 바깥이란 게 있는가? 또 설혹 ‘나’가 완전히 어두운 세계를 벗어나는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내 밖에 여전히 존재하는 어두운 세계와 그 안에서 자아를 획득하며 잃어가는 사람들로 인해 가슴 아파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긴지는 모리타에게 말한다. “만약 악을 꺾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즉, 그 이상의 악, 새로운 악당, 세대교체다. 그러니까 자네가 누군가를 구한다거나, 지켜주고 싶다면, 차라리 뛰어올라. 거악(巨惡)으로!” 그리고 그는 그의 길을 계속 간다. “재가 될 때까지.”
사족. 당연하게도 선한 ‘자아’와 선한 ‘세계’를 모두 얻을 길은 요원하다. 그것은 너무나 이상적이다. 하지만 ‘자아’를 악에 젖게 만들면서라도 그가 추구하는 ‘세계’를 얻으려 하는 긴지의 선택과, 악한 ‘세계’를 그대로 두고 최대한 멀리서 선한 ‘자아’를 되찾으려는 모리타의 선택 역시도 미완의 프로젝트이다. 결국 가장 쉬운 길, 그리고 많은 이들이 선택하는 길은 악한 ‘세계’에 맞는 악한 ‘자아’를 계발해 나가는 길이 되고 만다.이런 상황 속에서, 가장 쉬운 길에 머무르지 않으려는 우리의 노력은 흑과 백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하는 이분법적 문제를, ‘나는 얼마나 더 백에 가까운 회색이 될 것인가’ 그리고 ‘검은 세계를 얼마나 더 하얗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로 치환해 버리는 것이 되고 말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자아와 세계를 모두 잃지 않을 길은 그 길 뿐이다.
<싱크> 6호에 기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