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제7회 젊은작가상의 대상을 김금희 작가가 수상했습니다. 김금희 작가와 정영수 작가가 소설에 관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자유롭게 틀을 넘나드는 대화를 소개합니다. | 문학동네 출판사 제공
우리는 때때로 즐겁고
매일 슬프고 늘 화가 나
―그러니까 우리는 ‘해방의 글쓰기’를 하는 게 어떻겠니?
정영수
아무래도 이 인터뷰는 망한 것 같다. 내가 어쩌다 이 인터뷰를 맡게 되었을까…… 어쩌다가 금희 선배와 길고 긴 대화를 나눈 후 ‘특별히 재미난’ 인터뷰 글을 써야 하는 처지가 되어서 주말에 쉬지도 못하고 노트북 앞에 붙박여 앉아 있게 되었을까…… 시간을 거슬러오른다…… 이 일의 시작은 내가 미국에서 돌아온 날, 마침 항공기의 앞바퀴가 인천의 안개 자욱한 활주로에 닿았을 때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부터 시작되었다, 라고 쓰면 있어 보이겠지. 하지만 사실이 그러한 것이다. 그 전화에서 들려온 한 여인의 목소리는 “영수씨 있잖아요, 그러니까 올해 젊은작가상……”이라며 말을 시작했는데 그래서 나는 내가 그 상을 받게 되었다는 줄로 알고 아주 짧은 순간 애써 설레는 마음을 가다듬었지만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번에 대상을 수상한 김금희 작가의 인터뷰를 맡아달라는 얘기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내가 젊은작가상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가정(?)해보았을 때보다 더 놀라고 말았다. 아니, 대체 내가 왜…… 그 인터뷰는 전통적으로 전년도 대상 수상자가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번에는 콘셉트가 달라졌나…… 그러니까 전년도 수상자가 아니라 내년도 수상자가 올해 수상자를 인터뷰하는 것으로…… 예상표절과 같은 원리인 것인가…… 양자역학 같은 건가……라는 미친 생각을 한 건 아니고…… 아무튼 지면이 지면이니만큼 헛소리는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나도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금희 선배가 인터뷰어로 나를 지목했다는 것이다. 선배와 만나자마자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한 사정이 있었고 ○○○○하고 ○○○○하고 ○○○○한 이유도 있지만 그것보다 왠지 내가 인터뷰 글을 재미있게 잘 쓸 것 같아서, 라고 대답했다(듣고 싶은 말만 들어버렸다).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재미있게라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에 사로잡혀버리고 말았는데 그러니 이 글이 이상해진다면 어느 정도 금희 선배 탓도 있는 셈이다.
나는 선배와 이른바 ‘트친’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실제 만남에서 나눈 대화보다 트위터에서 나눈 대화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녀를 ‘금희님’이라고 부르고 그녀는 나를 ‘수수님’(내 트위터 닉네임이다)이라고 부른다. 물론 그녀와 실제 세계(?)에서도 몇 번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여러 사람들이 함께 있는 자리여서 심도 깊은 대화는 거의 나눠보지 못했고 서로에 대한 호감을 표현하는 정도의 피상적인 대화만 나눴을 뿐이다. 그러나 트위터에서는 위트 있는 멘션과 웃짤과 귀여운 동물짤과 ‘마음’을 주고받는 이른바 ‘트절친’(내가 방금 만든 말이다)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 생각해보면 인터뷰를 하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우리는 그래서 수요일 저녁, 서교동 모 일본풍 경양식 레스토랑에서 함박스테이크와 닭다리살톳파스타를 나눠 먹으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이 글의 서두에서 이 인터뷰가 망한 것 같다고 말한 이유는 그녀와의 대화가 너무 재미있었던 나머지 내가 기본적으로 해야 할 질문들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쩌다가 글쓰기라는 이 쾌락적이면서 고통스러운 주이상스적 숙명에 빠져들게 되었나, 또 당신은 어쩌다가 「너무 한낮의 연애」를 쓰게 되었으며 그것을 쓸 때 가장 염두에 두었던 것은 무엇인가, 젊은작가상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과연 젊은작가상은 계속되어야 하는가, 정영수의 소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매우 필수적이며 중요한 질문들 말이다. 나는 능숙한 인터뷰어가 그러하듯이 처음에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 인터뷰이의 긴장을 풀어주고자 쓸데없는 이야기들로 대화를 이끌었는데 한 시간 반이나 되는 식사시간 동안 이곳에는 쓸 수 없는 정말로 쓸데없고 사적인 이야기만 잔뜩 나누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시간을 지나오면서 나는 그동안 그녀에 대해 꽤나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그녀가 겉보기만큼(그리고 어쩌면 그녀의 소설만큼?) 부드럽고 유순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그녀의 소설은 인간에 대한 온정 어린 시선과 깊은 관심, 유머러스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문체 같은 걸로 가득차 있지 않은가. 그런데 사실 그녀는 자기는 늘 화를 품고 있으며 매우 공격적이며 누구에게라도 적개심을 드러낼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다. 거기다가 감정 기복도 심해서 사실상 조울증 말기에 가까운 정신 상태로 살아가고 있단다. 나는 나 또한 그랬기 때문에 반가워서 호들갑을 떨었고 우리가 삶에 대해 느끼는 이 분노의 근원과 분출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저녁식사 시간이 다 지나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내게 내 안에 있는 분노와 적개심과 파토스를 소설로 해방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고 나는 그녀에게 홍대입구역 인근에 있는 친절한 정신과의원을 추천해주었다. 선배는 이미 한약을 많이 먹어보았다고 했는데 나는 그것이 왠지 그녀와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인간이 있는데 양방을 믿는 사람과 한방을 믿는 사람이다. 나는 철저히 양방을 신봉하며 선배는 철저히까지는 모르겠으나 한방의 보다 내밀하며 근본적인 접근 방식을 믿는 듯했다. 선배의 소설 또한 양방보다는 한방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막 포스트모던하고 그런 스타일은 또 아니니까……). 나는 여전히 현대 의학의 신속하고 강력한 힘을 신뢰하는 편이지만 그녀의 길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소설 이야기를 아예 안 한 것은 아니었다. 저녁식사를 하며 주로 나눈 이야기의 주제는 바로 몇 줄 위에 언급한 바 있는 ‘해방’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선배에게 등단 직후의 글쓰기와 지금의 그것 사이에 가장 달라진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물었다. 그녀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그중 대표적인 게 바로 그 ‘해방’이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단 그 이야기부터 하기로 하자. 그녀는 말했다. 한마디로…… 소설을 막 쓰게 됐어. 무슨 뜻인지…… 알지? 나는 선배에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무슨 뜻인지 아마도…… 알겠지…… 여하간 나는 그녀의 말을 귀담아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인터뷰의 제목대로, 우리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때때로 즐겁지만 자주 슬프며 늘 화가 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소설을 쓰려고 앉으면 뭔가 정갈하고…… 품격 있고…… 절제되었으며…… 미학적으로 탁월하면서도…… 웅숭깊은…… 소설만 쓰게 된다는 것이 우리의 문제라는 게 결론이었다(몰라, 되는대로 막 말해버리자). 나도 막 흐트러지고 품격 없고 무절제하고 음험하면서도 파토스 넘치고 되바라지고 발칙하면서도 위험한 소설을 쓰고 싶다! 하지만 나의 동방적으로 예의 바르고 신사적인 성정이 그렇게 하지를 못하게 나를 제어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해방시키고 싶어, 라고 내가 말하자 선배는 마치 민중-권력-쟁취-투쟁, 같은 구호식으로 해방! 해방! 하고 외치며 나를 독려해주었다.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어. 내가 선배에게 물었다. 뭔데? 나는 굳이 가방에서 「너무 한낮의 연애」의 복사본을 꺼내 그중 한 부분을 짚어 보였다. 미리 밑줄을 그어둔 구절이었다. “무언가가 오고 있었다. 그래, 쓰나미, 쓰나미, 실연의 쓰나미!” ……그러니까…… 이런 문장을 쓰는 게…… 해방이라는 거라면…… 선배…… 난 아무래도 못할 것 같아…… 그거…… 해방…… 금희 선배는 말했다. 맞아, 그게 해방이야. 그게 와야 돼. 쓰나미, 쓰나미, 해방의 쓰나미!
우리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합정역 메세나폴리스 쪽으로 향했고, 지하에 아주 넓은 공간이 있는, 새로 생긴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알고 보니 우리는 일본풍 레스토랑에서 함박스테이크와 닭다리살톳파스타를 앞에 두고는 문학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기품 있는 카페에 와서 김이 뽀얗게 피어나는 레몬티와 향기로운 피스타치오 마카롱을 앞에 두고 앉으니 본격적으로 우리의 고품격 문학 이야기가 시작된 것을 보면 말이다. 정말로 고품격……이었는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어쨌든 나는 곧 문학동네에서 출간될 금희 선배의 두번째 소설집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문학동네에서 제공한 자료를 살펴보면 2014년과 2015년 두 해 사이에 단편소설을 아홉 편 발표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선배의 말을 들어보니 실제로는 열 편을 발표했단다. 나는 조금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재고가 많은가봐? 라고 물었는데 그녀는, 내가 말이야…… 없는 게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재고야…… 라고 대답했다. 이게 바로 해방의 힘인가? 해방의…… 발표의 쓰나미! 선배는 물론 그중에 마음에 드는 것도 있고 들지 않는 것도 있는데 대체로는 발표하고 나면 다들 이번에도 망했구나, 라고 생각하지 않나? 하고 내게 말했는데 나는 딱히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기 때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물론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보니 선배도 정말 망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1990년대(계속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녀는 이 나라 문학의 벨 에포크가 바로 그 시기였다고 여기는 듯했다) 자신을 전율케 했던 작품들에 비하면 자신의 발표작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는 겸손의 말이었다. 나는 그 시절의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금희 선배의 소설도 충분히 좋다고 생각해, 라고 생각만 했는지 진짜로 말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질문을 이어가 그렇다면 「너무 한낮의 연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내심 대상을 받을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묻지는 않았고 다른 소설에 비해 특히 더 나은 것 같으냐는 질문을 했다. 선배는 사실 자신은 「세실리아」에 더 마음이 간다고 했다. 「세실리아」는 「너무 한낮의 연애」를 발표하기 두 계절 전에 발표한 단편인데 거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더 많이 풀어놓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소설가는 어느 정도 그런 면이 있지 않나? 자신의 이야기가 더 많이 들어간 소설에 애정을 준달까? 나도 그런 의미에서 내가 최근에 발표한 「하나의 미래」에 제일 애정이 간다고 말했다. 선배는 인터뷰하다 말고 왜 뜬금없이 네 소설 얘기니? 라고 하지 않고 다정한 말투로 그 소설을 읽었으며 심지어 좋았다고 말해주었다. 자기는 그 소설이 재미있으면서도 슬펐다고 했다(라고 이야기한 것을 나는 확실히 기억했을뿐더러 심지어 여기에 쓰고 말아버렸다……). 그래서 나도 「세실리아」를 읽고 슬펐다고 했던가 안 했던가, 그래서 너도 울고 나도 울고 그런 분위기가 연출되었던가 안 되었던가. 아무튼 나는 「너무 한낮의 연애」를 발표 직후 읽었다. 『21세기문학』 2015년 가을호에 실렸는데 누군가가 먼저 읽고 좋다고 내게도 읽어보라고 했던 것이다. 나는 읽고 나서 정말로 그러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내 마음에 든 부분은 양희가 필용에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그것도 그다지 적절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타이밍에 “나 선배 사랑하는데”라고 무심하게 말한 부분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필용은 양희에게 별 관심이 없었지만 마치 그 말 자체를 사랑하게 된 것처럼 매일 그녀에게 ‘지금도 사랑함’을 재확인하고 양희는 매일 “사랑하죠, 오늘도”라고 대답하는 식이다. 어제도 사랑했고 오늘도 사랑하지만 내일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수 있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내게는 지극히도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나는 선배에게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딱히 영업 비밀은 아니었는지 그녀는 순순히 말해주었는데 어느 날 자신과 별로 친하지도 않은 어떤 사람이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나 김금희씨 소설 좋아하는데”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이미 그 말을 했다는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었을 테지만 자신에게는 묘한 울림이 남았단다. 반말도 존댓말도 아닌 것이…… 호감의 표현인 것은 같은데 뭔가 시원치도 않고…… 기억이 분명하진 않지만 평론가였던 것 같다는데, 나는 그가 지금도 금희 선배의 소설을 좋아하는지도 궁금해졌다. 나중에 어떻게든 정체를 밝혀낸 뒤 만나서 물어봤는데 소설 속 양희처럼 “아, 금희씨 나 안 해요, 사랑”이라고 대답하면 재미있겠지, 킬킬킬, 하고 혼자 좋아해버리는 것이다……
너무 사적인 이야기를 많이 나누다보니 어느덧 시간이 흘러흘러 자정을 향해가고 있었기에 나는 마무리 느낌으로 선배의 소설관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지면이 지면이니만큼 이 정도 거시적인 질문으로 마무리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나는 선배에게 우리가 하는 일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졌다. 던져버리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작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은 대체로 이것이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나는 늘 궁금해하고야 만다. 마음 같아서는 소설을 쓰는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가 하고 있는 행위의 정체를 물어보고 다니고 싶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소설관을 열심히 실토하고 나서야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금희 선배가 말하는 자리이니 그녀의 답을 듣기로 한다…… 선배는 소설가라는 직업에 사명감을 품고 있고 소설이라는 매체에도 큰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출판시장이 아주 오래전에 비하면 찌부러지긴 했지만(그녀의 표현이다) 소설은 여전히 적은 돈으로 가장 빨리,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매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쓴다는 행위가 자신에게 내적 성찰과 해방감을 가져다줌은 물론(오늘의 테마는 누가 뭐라 해도 ‘해방’인 것이다!) 읽는 이에게도 쾌감과 함께 깊은 사유의 온기를 전해주니 이 어찌 좋지 아니한가…… 이렇게 말한 금희 선배는 꽤 잘 살고 있는 편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그런 일을 매일 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마지막으로 두 질문만 더 하고 싶었다. 그런데 카페 종업원이 와서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었다고 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그 넓은 카페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우리 둘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준비한 질문지의 마지막에 적어둔 추상적이면서도 거창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선배가 곰곰이 생각을 가다듬고는 무언가 대답을 하려 했을 때 다시 종업원이 찾아와서 더이상은 기다릴 수가 없다고 했다. 하긴 우리가 얼마나 거시적인 대화를 나누든 그들도 퇴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퇴근은 소중한 것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자정이 다 된 시간, 밤거리로 나왔다. 어쨌든 우리는 집으로 가야 하므로.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가야 하는 건널목 앞에 서서 파란불이 두 번 켜지는 동안 또다시 매우 사적이며 음험한 이야기를 나누고는 가야 하는 길을 갔다. 못다 한 거시적인 이야기는 내년에 다시 만나서 했으면 좋겠다고, 여운을 남기며. 예상표절적으로…… 아니면 양자역학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