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금지된 공간 내가 소망한 공간 - 금지와 소망이라는 실로 책의 그물을 엮고 생각의 집을 지은 한 여자의 이야기
서윤영 지음 / 궁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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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이달의 추천도서 중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 관련 에세이를 고른 것이었는데 기대 이상의 수확이었다. 게다가 기대하지 않았던 페미니즘적 시각!! 저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많아서, 전작들을 읽었다면 저자에게 더 관심이 많이 생겼을테니 좀 더 재밌게 읽었을 수 있겠다만은. 

 

 '내 서재'의 필요성이라니. 외동딸로 태어난데다가 늘 내겐 독립된 공간이 있었고, 그 공간이 내게 서재의 역할을 했기에 그다지 인지하지 못했었는데,  '여자의 서재'라는 것이 그다지도 불온하게 다가올 수 있다는 걸 이 책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난 결혼을 하게 된다면 남편의 서재(혹은 작업실)와 내 서재를 따로 둔다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자의 이야기를 보면 주위에서의 면박이 만만치 않은가보다.



새로 유행하기 시작한 인터넷 쇼핑몰에서 두 사람이 함께 쓸 2인용 기다란 책상과 책장을 주문하여 배송을 기다리던 날들이 좋았다. 마침내 그것들이 도착하여 서재라 부르는 방안에 들여놓고 각자 처녀이고 총각이던 시절에 쓰던 컴퓨터를 올려놓을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하지만 의자 두 개를 책상 앞에 나란히 두고 막상 그곳에 앉아보았을 때, 무언가가 몹시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사람이 컴퓨터 게임을 할 때 또 한 사람은 그 옆에서 책을 읽는다? 한 사람이 일기를 쓸 때 또 한 사람은 그 옆에서 못 다 한 회사 업무를 한다? 그때서야 우리는 깨달았다. 침실은 함께 쓸 수 있어도 서재는 함께 쓸 수 없다는 것을. 한 그릇에 담긴 라면을 젓가락 하나로 나누어 먹듯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절대 공유가 아니 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당시 우리 집 서재는 화장실과 같았다. 한 사람이 변기 위에서 일을 볼 때 다른 한 사람이 그 옆에서 이를 닦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네가 먼저 쓸래? 아니 내가 먼저 쓸게, 합의하에 반드시 나누어 사용하는 화장실.

-pp.37~38  3. 함께 쓰는 침실, 따로 쓰는 서재



여성의 지위향상을 주택 내에 반영하기 위해 현재 아파트에서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본래 여성의 공간이라 여기는 곳을 더 크고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다. 주방의 면적이 증가하는 것과 동시에 고급 가전제품이 들어차기 때문에 이제는 '주방'이라는 말조차 어울리지 않게 되어버렸고, 대면형 주방 및 아일랜드 식탁 등으로 거실의 영역까지 침범하고 있다. 물론 안방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안방 내 전용화장실은 물론, 과거 중대형 아파트에서나 가능하던 파우더룸, 드레스룸이 소형 아파트에까지 부가되고 있다. 다시 말해 안방과 주방을 강화하는 것으로 여성의 향상된 지위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결국 여성의 자리는 안방과 주방이요 그녀의 본질은 가사와 육아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다산능력을 보여주는 가슴과 엉덩이를 상대적으로 크게 보이기 위해 코르셋으로 허리를 졸라매는 18세기 여성복식과 무엇이 다른가.

-pp.93 8.그녀들이 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정해진 아파트 면적에서 주방을 넓히는 방법은 단 하나, 거실과 주방을 한데 붙여 계획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대면형 주방이니 개방형 주방이니 하면서 집안에서 부엌이 가장 크고 화려하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바로 보이는 곳에 커다란 주방을 만들어놓고 가전제품을 잔뜩 늘어놓고, 이제 남편도 가사분담을 해줄 것이고 이것이 여성의 지위향상을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강요되고 있는 니캅이 아닐까. 누가 최초로 씌워주었는지 모르는 그것을 이슬람 여성의 정체성이라 여기며 스스로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매일 아침 제 손으로 굳건히 쓴다는 점에서, 아울러 그것을 벗으면 큰일이 나는 줄 알지만 그러나 벗어버려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부엌은 우리 사회의 니캅이다.

-p.172 15.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베일



임신과 육아의 장소인 침실, 가사의 장소인 주방 외에 정보와 지식의 습득을 위한 서재, 사회적 교류를 위한 응접실은 본디 여성에게는 금지된 공간이었다. 아울러 서재의 외연적 확장이라 할 수 있는 도서관, 응접실의 확장된 형태라 할 수 있는 다방과 찻집도 금지의 대상이었다. 또한 생존을 위해 필요한 정규적인 식사가 아닌, 사교와 교류 및 정신의 고양을 위한 식음행위(술, 담배, 커피, 차 등 모든 기호식품)도 여성에게는 금지의 대상이었다. 나아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가정을 지켜야 하는 여성의 본분을 행여 망각할 수 있는, 남편이 아닌 남자를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행위도 엄중히 금지되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여성에게 금지된 공간에서, 여성에게 금지된 음식을 먹으며, 여성에게 금지된 행위를 했다.

 열다섯 살의 소녀가 마흔다섯의 장년으로 성장하기까지 30년의 세월을 돌이켜보면, 본디 여성에게는 금지된 공간의 확보와 그 영역으로의 틈입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는 서로 긴밀히 교직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게 금지되었던 공간을 내가 그토록 소망했던 이유이자, 또한 나의 집에 서재와 응접실을 두려 했던 이유였다.

-p.228 19. 내게 금지된 서재, 내가 소망한 응접실



그외에도 나이가 들 수록 이전에 읽었던 책들의 감회가 새로운 느낌들을 이야기하면서 공감하기도 했고. 난 어지간히 좋아하는 책이 아니면 다시 읽지 않는 편인데, 그럼에도 예전에 포기하고 덮어두었던 책들이 나이를 더 먹고 다시 펼쳐보면 완전히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몇 번 있었다.

 

여튼, 저자는 백 권을 읽으면 한 권을 토해내듯 쓸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 또한 참 축복받은 능력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도 쥐어짜는 것이 아니라 토해내듯 뭔가를 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요즘 글을 쓰다보면 소진되는 느낌이 자꾸 들어서 말이다. 매일 비슷한 형식의 글을 쓰다 보니 내 글이 매너리즘에 젖은 것 같다. 어휴. 그걸 좀 상각시켜보겠다고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데, 어째 빠져나가는 게 더 많은 듯..



+

[서재 결혼시키기]나 [방의 역사]도 이 책에 이어 읽으면 재미질듯.

서재 결혼시키기는 매번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고 못 읽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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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 가장 절실하지만 한 번도 배우지 못했던 일의 경제학
류동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5월
구판절판


그야말로 기발하고 창조적인 인문학적, 예술적 상상력이나 기존의 모든 권위를 끝까지 의심해보는 사회과학, 자연과학의 물음을 요구하는 공부가 아니라 이미 정리된 형태로 주어진 지식 체계를 빨리 익히고 그 체계가 요구하는 정답을 찾아내는 공부에 가까울수록 퀴리 부인처럼 흡수력이 왕성한 두뇌를 갖추는 것에 못지 않게 얼마나 체제 순응적인 특성을 갖추고 있느냐도 중요해진다. 체제 순응적이란 말은 사회 구성원들이 외적으로 강제되는 여러 가지 규칙이나 제한 등을 곧이곧대로 고분고분하게 따른다는 뜻이다.-29쪽

공장이나 회사의 규격화된 노동에 적응을 잘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며 학교 교육으로써 길러지리라고 기대되는 미덕이다. 바로 노동자를 훈육(discipline)하는 것, 즉 길들이는 것이다. 징병제가 실시되는 한국 사회에서 군대가 이러한 능력을 극단적인 형태로 양성하는 공간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속된 말로 '까라면 까',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능을 조직의 윗선에 맡겨버린 채 자신은 정해진 대로 움직이고 행동하는 이른바 '구상과 실행의 분리'는 그렇게 이루어진다. 비판적 사고를 키우기 힘든 주입식 교육, 객관식 문제를 통한 줄을 세우는 교육, 자신의 적성이나 흥미에 상관없이 '전투'능력을 키워야 하는 군대, 이 모든 것은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이 되어 지루함을 잘 참을 수 있도록 길들여진 노동력을 양성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33~34쪽

더욱이 교육은 동시에 그 사회를 지배하는 신념 체계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도 수행한다. 알튀세르가 말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의 역할이다. 잘 길들 준비가 되어 있는 노동력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배 계급이 사회를 자기 입맛에 맞도록 유지할 수 있는 관건이 된다.-34쪽

예를 들어 1960년대에는 순수 인문학을 공부했건 회계학을 공부했건 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꽤 높은 수준의 학벌자본으로 간주되었다. 더구나 대학 졸업자가 취업할 수 있는 좋은 일자리도 생각처럼 많지는 않았다. 약간 모순적이지만 '인텔리 백수'가 되더라도 상대적으로는 그다지 잃은 게 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은 '좋은' 일자리와 그렇지 못한 일자리의 격차가 매우 크다. 더욱이 대학 졸업자가 충분히 많다. 말하자면 노동시장에서 공급이 과잉 상태다.그렇기 때문에 같은 대학 졸업자 중에서도 '성능'이 뛰어난 노동을 고르려는 수요자의 의도가 먹혀들 수 있다.-78쪽

사실 조직의 논리에 순응하는 것이야말로 개개인으로는 모두 좋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조직이나 제도 전체적으로는 어이없이 불합리한 결과를 가져오는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도 국가 전체가 광기에 휩싸여 움직일 때 그저 묵묵하게 자기 맡은 일만 하는 이들이 모여 전쟁이나 대량학살의 비극적인 결과를 낳은 예는 일일이 지적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가족의 일원, 출신 지역의 일원, 국가의 일원으로 불릴 때 그 부름에 일일이 정당성을 따져 거절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더구나 그것이 먹고사는 문제와 관련되어 거절은 곧 먹고사는 길이 막힌다는 의미일 때, 우리는 쉽게 생계형 순응자가 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건 회장이건 권력자의 옳지 못한 지시에 당당하게 맞섰다가 오히려 패기를 높이 평가받아 출세하는 젊은이 이야기는 미니시리즈 드라마에나 나오는 판타지에 불과하다.-83쪽

임금이 생계비라는 측면보다는 그때그때 일한 대가라는 관점이 강화하는 흐름은 고용의 형태가 유연해진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내일 자를지도 모를 노동자에게 생계비라는 개념으로 임금을 지불하고 싶은 고용주는 없기 때문이다. 의도하건 하지 않았건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갖기도 한다. 그때그때 한 일에 대해 그때그때 대가를 지불하였으므로 갑자기 해고를 하더라도 도덕적 부채감을 가질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용 형태를 유연화하는 것과 임금에 대한 관점의 변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강화하는, 말하자면 아귀가 잘 맞아 떨어지는 제도 형태인 셈이다.-124~125쪽

임금이 그때그때의 노동에 대한 그때그때의 보상이라는 원칙이 강화되는 것과는 오히려 반대로 노동 계약은 주어진 시간 동안 주어진 장소에서 일하는 것이라는 전통적 원리는 무너져버린다.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가 말하는 '사회적 공장'이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지적한다. 자본은 이제 작업장 안에서의 시간뿐만 아니라 생활 속의 시간, 개인적 삶의 시간까지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131쪽

월급에서 근로소득세나 의료보험료를 비롯한 각종 공제 금액이 먼저 빠져나가고 남은 돈만 내 손에 들어오듯이 명목상으로는 내 월급이지만 내 자유의지와 무관하게 빠져나가는 '노동력 재생산 비용'은 없을까? 원인과 결과가 뒤바뀌어 소비 지출이 먼저 설정되고 이를 충족하지 못하면 노동력 재생산이 불가능하게 된 것은 아닐까? 여가를 즐기며 소비하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일하기 위해 소비해야 하고 다시 그 소비를 충당하기 위해 일해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의 답은 명확하다. 이미 개인의 자발적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사회구조적으로 강제되는 지출이 정해져 있다. 이것이 바로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이 그다지 풍요로워진 느낌이 들지 않는 이유이자 그 생활을 현상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돈을 벌고 일을 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168쪽

모든 고용된노동은 어느 정도 감정노동의 요소를 포함한다. 시쳇말로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남의 돈 먹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노동으로서 만들어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라 할 '지루함을 참아내기', 체제에 순응적으로 되기 자체에 이미 엄청난 감정노동의 요소가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감정노동과 그렇지 않은 노동을 구분하는 일은 어쩌면 작위적일 수도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일이라는 본질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동시장의 조건이 노동자에게 어려워질수록 감정노동의 정도는 심해진다. 해고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 상사나 경영자에게 잘 보여야만 정규직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감정노동의 강도는 세질 수밖에 없다.-176쪽

그럴듯해 보이는 연구원에게도 어김없이 감정노동은 필요했다. 사소한 예를 하나 들자면 매주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이나 영자 신문 경제 기사 따위를 모아 회장님이 승용차 안에서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글자 크기는 14포인트로 키우고 한눈에 내용 파악이 가능하도록 요점 정리하듯 보고서를 만드는 일이었다.-187쪽

모두가 CEO가 되기만을 꿈꾸지만 현실은 노동자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소비자라는 정체성이 종종 압도한다. 자영업자의 문제는 개인사업자, 프리랜서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비정규직 노동의 문제다. 이러한 점은 물리학적 원자들의 세계처럼 노동이 실종되고 사람이 사라진, 가치판단을 배제하는 경제학에 의해 이론적으로 합리화되는 동시에 현실적인 경향으로서 강화되고 있다.-236쪽

비록 일거에 구조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더구나 그 방법을 찾아낼 전망조차 없다 하더라도 먼저 개인적 차원에서부터 노력할 수밖에 없다. 의지적 낙관이 필요한 지점이 바로 여기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불가능하다. 한두 사람이라도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때, 언젠가는 그 꿈들이 모여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다.-240쪽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발전하면서 경제적 거래가 가지는 인적 속성은 점점 희미해지고 물적 속성 사이의 관계, 계약관계 그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제 사람 대 사람의 관계보다는 물 대 물, 성문화한 명시적 조항들로 규정할 수 있는 계약만이 문제가 되는 세상으로 변화한다. 앞서 '관계에서 거래로'라고 말한 변화다. 이에 더해 이제 '일' 자체가 익명화한다. 그것이 무엇이건 이름을 잃는다는 것은 환원할 수 없는 개별성의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ㅇㅇ아빠'에서 'ㅇㅇ호 아저씨'로, 그리고 다시 '출입카드 소지자'로의 변화다.-265쪽

스스로 가치도, 믿을 만한 근거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런 글을 쓴다. 기사 내용과 별 상관이 없어 온갖 악플이 달리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선정적인 제목을 달아 기사를 내보낸다. 돈이 되기 때문이다. 돈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밥값을 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떄로 우리는 자신의 의지나 신념, 보람과 기쁨 따위는 묻어둔 채 체념 속에서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어쩌면 우리가 자신의 일에서 보람을 찾고 타인의 일에 대해 배려할 수 있으려면 적극적으로 무엇무엇을 하는 것 못지 않게 소극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생각해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편이 현실적일지도 모른다. 물론 개인이 애쓴다고 해서 이러한 일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구조를 깨뜨릴 수는 없다. 그렇지만 아무도 깨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 구조는 그대로 유지되며 강화될 것이다.-2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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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좀비를 만났다 - TED 과학자의 800일 추적기 지식여행자 시리즈 2
웨이드 데이비스 지음, 김학영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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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움직이는 시체`로서의 좀비가 아니라, 좀비의 역사/사회/문화적 맥락을 제대로 소개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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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보 활보 - 초보 장애인활동보조의 좌충우돌 분투기
정경미 지음 / 북드라망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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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랑 같이 활동하면서 내가 얼마나 남의 말 듣기 싫어하는 신체인가를 알았다. S의 말에 따라 내가 S의 손발이 되어 움직이는 것. 이건 내가 다른 신체가 되는 변화이다. 오랫동안 한 번도 나 자신을 떠나 본 적이 없는 고집불통의 내 몸은 그 변화를 두려워한다. 어떻게든 S의 말을 안 듣고 피해 달아나려고 한다. 그게 청소든 뒷정리든... 커피 타 달라고 하는데 가스레인지를 닦고 있는 것. 이건 분명 딴청이다. 니 말을 안 들을 수는 없는 상황이긴 한데, 어떻게든 정면에서 부딪치는 건 피해 보고 싶다는 가련한 저항!-24쪽

H는 올해 마흔아홉 살이다. 그 나이면 일반적으로 결혼해서 애들 다 키우고 노년을 준비하는 시기이다. 그런데 H는 이 시기의 대부분을 장애인 보호 시설에서 살았다. 그러다 1년 반 전에 시설에서 나왔다. 사람들이 나이를 물을 때면 H는 농담처럼 "17개월 됐어요"라고 대답한다.
마흔아홉 살 난 신생아라니... 너무 늦게 태어난 것 같다. 하지만 이때의 출생을 생물학적 삶의 시작이 아니라 사회적 삶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자기의 삶'을 시작한 지 17개월이면 매우 이른 것도 같다. 노자는 백발이 성성한 나이 여든에 태어났다고 하지 않는가. 죽을 떄까지 이런 저런 세상의 틀 속에 갇혀 온전한 자기의 삶을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H는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혼자서는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 앉을 수도 없는 몸으로 "내 힘으로 살겠다"며 지금까지 자신에게 익숙한 삶을 훌훌 털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으니 용기가 대단하다.-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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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디씨 - 디시, 잉여 그리고 사이버스페이스의 인류학
이길호 지음 / 이매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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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인들과 달리 디시인들이 거부하는 것은 이 마지막 언표다. 왜냐하면 디시인들의 인지 체계 속에서, 또한 디시의 구조적 양상들 속에서 "모든 사람은 서로 완벽하게 평등하기" 때문이다. 이 타협 불가의 원칙은 카페인의 인지 구조 속 언표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역사카페의 구성원들을 모두 다음과 같이 묘사한 어느 역사갤러의 발언을 기억하자. "귀족인양 착각하는 놈들+노예근성에 쩔어 이 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귀족들을 수호하려는 의지가 가득 찬, 정신까지 노예 같은 평민들." 카페의 체제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단순히 그 카페 안에서 자신의 등급을 높이는 것에 관심을 둔다. 물론 이것이 그 자체로 어떤 심각한 의미를 가진다기보다는, 그저 사람들에게는 지금 등급에서 접근이 제한된 게시판의 글들을 읽고 싶다거나 자료를 열람하고 싶다는 욕망, 또는 상위 등급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피선거권을 확보하고 싶다는 바람 등과 연결되는 인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런 "단순 열망"에 디시인들은 화를 낸다."글이나 리플을 남기는 평민들은 그 지식특권층의 빠들이다"라는 어느 역사갤러의 지적을 상기하자.-260쪽

디시인들에게서 혼돈은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형태이다. 이들은 무엇보다 권력의 분화라는 구조적 질서 자체에 의문을 던진다. 카페의 운영 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이 디시에 처음 와서 느끼는 그 정제되지 못한 형태의 (무)규칙과 (무)질서는, 디시인들에게서는 바로 그 카페 같은 양상을 띠지 않기 위해서, 다시 말해 '막장화'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수호돼야 할 가치로 이해된다. 즉 이곳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그 혼란은 방종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엄격한 "의지"의 표현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다"라는 공리의 말뿐이 아닌 실천, 그들 나름대로의 강력한 비타협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타협하는 순간, 곧 이 특이한 집단은 붕괴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서 디시에서 '재생산'의 문제를 논의하며 언급한 "친목금지"의 규정을 이 지점에서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중략) 이곳에서는 바로 그 수직적 분화의 출현 가능성이야말로 집단의 "막장화"를 의미하는 것이다.-262~263쪽

우리가 민주적 양식이라 부르는 체제에서도 수직적 분화의 양상은 그대로 존재한다. 위계질서와 지위의 배열은 선행돼 있다. 선거는 단지 그 주어진 자리들에 누구를 앉힐 것인가를 정하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 기존의 '왕의 자리'는 사람들에게 정기적으로 그 합법성의 인정을 요구하는 민주적 선출자의 자리로 대체됐다. 이제 오히려 사람들은 자신의 투표 행위들을 통해 스스로 수직적 분화의 출현과 유지를, 그것의 존재를 매번 인정하고 수용하게 된다. (중략)
문제가 없는가? 이른바 민주적 양식 속에서 이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왜냐하면 "너희들이 뽑았기 때문이다." 또는 그 체제 속에서 사람들이 "인정"했기 때문이다. 디시인이 비웃는 것은 바로 이런 논리다. 즉 디시인들은 이런 양식에 대해 단호히 "문제가 있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수직적 분화의 출현은 그 자체로 재앙이기 때문이다." 또는 디시라는 양식 속에서 사람들은 그것(수직적 분화의 출현)을 인정하지 않았다.-267~268쪽

우리가 여기에서 의도하는 바는 사실 분명하다. 우리는 이런 논리, 즉 관리자나 매니저 등 수직적 분화 구조에서 최상층에 놓여 있는 직위의 사람들에게 특정한 권력을 부여하는 것은 집단에 있을 수 있는 혼돈과 무질서를 몰아내고 집단 속 사람들의 안전과 평화를 적절히 지키려는 것이라는 바로 그 논리가 우리에게 이미 충분히 익숙하다는 점을 상기시키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국가state의 논리"이다. 사회의 수호자로서 국가라는 괴물("리바이어던")이 출현하게 되는 것에 관한 오래된 이야기다.-298쪽

이른바 반국가적 양식 속에서 디시인들은 자신의 "대표자"를 거부한다. 따라서 그들이 진정으로 거부하는 것은 일종의 "의회 민주주의"다. 즉 디시인들은 이른바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제도화된 정치 체계를 거부한다. 디시에서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재현representation'의 형상이 출현하는 것에도 반대할 것이다. 사람들은 차라리 반재현으로서 혼돈 그 자체를 지지한다. 디시인들은 "반국가적 혼돈"의 옹호자들이다. 이 맥락에서 그들은 진정으로 "민주주의적"이라 할 만한 어떤 속성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단순히 어떤 "민주적 양식"(대표 또는 재현에 따른)하고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다. 그들은 민주주의적 혼돈Democratic Chaos:DC의 수호자들이다.-310~311쪽

이제 막갤은 유순한 갤러리가 되었으며 그것은 운영자의 입장에서 일종의 '치유'로 볼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은 "막갤의 멸망"을 증언했다. 그리고 지금, "변방" 코갤이 "주류" 코갤로 부상한 이 시점에서 "무분별한 유입종자의 난입"으로 또한 "코갤의 멸망"을 예언하는 목소리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일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코갤마저 폐쇄되면 코갤에 모여 있던 악성 바이러스들이 디시 전역으로, 나아가 인터넷 전반으로 퍼져 나가게 될 것이다." 그나마 한 곳에 모여 있던 '그들'이 그곳을 벗어나면 사이버스페이스 전체가 "막장화"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코갤은, 그리고 디시는 최후의 견제 장치 같은 것이다.-380쪽

말하자면 '증여'와 '반친목'은 어떻게 공존하는가? 또한, 인류학적 용어로 표현할 때, 이곳에서 기본적으로 '공계적'인 성격의 집단구성의 형태는 어떤 방식으로 '동족화' 경향과 조우하는가? 존재의 표현으로서 사람들의 증여가 집단 전체를 향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존재의 외적 분리를 의미하는 집단 안 분화를 거부하며, 따라서 각각의 개별적 증여는 분화된 관계들의 형성("친목")에 저항해야 한다. 증여는 특정의 개인들이 호혜성의 원칙 아래에서 서로 간 배타적으로 맺는 관계 유지의 수단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스스로 그런 메타적 관계들의 도입을 저지하고, 이런 맥락에서 '증여'는 처음부터 '반친목'과 공존한다. 그 '반친목적 증여'는 모든 폐쇄적 연결고리의 사슬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능동적이고 발산적이다.그것은 이제 디시 전체의 범위로 확장돼 하나의 이름을 획득한다.-3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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