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디씨 - 디시, 잉여 그리고 사이버스페이스의 인류학
이길호 지음 / 이매진 / 2012년 3월
품절


카페인들과 달리 디시인들이 거부하는 것은 이 마지막 언표다. 왜냐하면 디시인들의 인지 체계 속에서, 또한 디시의 구조적 양상들 속에서 "모든 사람은 서로 완벽하게 평등하기" 때문이다. 이 타협 불가의 원칙은 카페인의 인지 구조 속 언표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역사카페의 구성원들을 모두 다음과 같이 묘사한 어느 역사갤러의 발언을 기억하자. "귀족인양 착각하는 놈들+노예근성에 쩔어 이 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귀족들을 수호하려는 의지가 가득 찬, 정신까지 노예 같은 평민들." 카페의 체제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단순히 그 카페 안에서 자신의 등급을 높이는 것에 관심을 둔다. 물론 이것이 그 자체로 어떤 심각한 의미를 가진다기보다는, 그저 사람들에게는 지금 등급에서 접근이 제한된 게시판의 글들을 읽고 싶다거나 자료를 열람하고 싶다는 욕망, 또는 상위 등급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피선거권을 확보하고 싶다는 바람 등과 연결되는 인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런 "단순 열망"에 디시인들은 화를 낸다."글이나 리플을 남기는 평민들은 그 지식특권층의 빠들이다"라는 어느 역사갤러의 지적을 상기하자.-260쪽

디시인들에게서 혼돈은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형태이다. 이들은 무엇보다 권력의 분화라는 구조적 질서 자체에 의문을 던진다. 카페의 운영 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이 디시에 처음 와서 느끼는 그 정제되지 못한 형태의 (무)규칙과 (무)질서는, 디시인들에게서는 바로 그 카페 같은 양상을 띠지 않기 위해서, 다시 말해 '막장화'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수호돼야 할 가치로 이해된다. 즉 이곳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그 혼란은 방종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엄격한 "의지"의 표현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다"라는 공리의 말뿐이 아닌 실천, 그들 나름대로의 강력한 비타협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타협하는 순간, 곧 이 특이한 집단은 붕괴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서 디시에서 '재생산'의 문제를 논의하며 언급한 "친목금지"의 규정을 이 지점에서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중략) 이곳에서는 바로 그 수직적 분화의 출현 가능성이야말로 집단의 "막장화"를 의미하는 것이다.-262~263쪽

우리가 민주적 양식이라 부르는 체제에서도 수직적 분화의 양상은 그대로 존재한다. 위계질서와 지위의 배열은 선행돼 있다. 선거는 단지 그 주어진 자리들에 누구를 앉힐 것인가를 정하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 기존의 '왕의 자리'는 사람들에게 정기적으로 그 합법성의 인정을 요구하는 민주적 선출자의 자리로 대체됐다. 이제 오히려 사람들은 자신의 투표 행위들을 통해 스스로 수직적 분화의 출현과 유지를, 그것의 존재를 매번 인정하고 수용하게 된다. (중략)
문제가 없는가? 이른바 민주적 양식 속에서 이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왜냐하면 "너희들이 뽑았기 때문이다." 또는 그 체제 속에서 사람들이 "인정"했기 때문이다. 디시인이 비웃는 것은 바로 이런 논리다. 즉 디시인들은 이런 양식에 대해 단호히 "문제가 있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수직적 분화의 출현은 그 자체로 재앙이기 때문이다." 또는 디시라는 양식 속에서 사람들은 그것(수직적 분화의 출현)을 인정하지 않았다.-267~268쪽

우리가 여기에서 의도하는 바는 사실 분명하다. 우리는 이런 논리, 즉 관리자나 매니저 등 수직적 분화 구조에서 최상층에 놓여 있는 직위의 사람들에게 특정한 권력을 부여하는 것은 집단에 있을 수 있는 혼돈과 무질서를 몰아내고 집단 속 사람들의 안전과 평화를 적절히 지키려는 것이라는 바로 그 논리가 우리에게 이미 충분히 익숙하다는 점을 상기시키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국가state의 논리"이다. 사회의 수호자로서 국가라는 괴물("리바이어던")이 출현하게 되는 것에 관한 오래된 이야기다.-298쪽

이른바 반국가적 양식 속에서 디시인들은 자신의 "대표자"를 거부한다. 따라서 그들이 진정으로 거부하는 것은 일종의 "의회 민주주의"다. 즉 디시인들은 이른바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제도화된 정치 체계를 거부한다. 디시에서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재현representation'의 형상이 출현하는 것에도 반대할 것이다. 사람들은 차라리 반재현으로서 혼돈 그 자체를 지지한다. 디시인들은 "반국가적 혼돈"의 옹호자들이다. 이 맥락에서 그들은 진정으로 "민주주의적"이라 할 만한 어떤 속성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단순히 어떤 "민주적 양식"(대표 또는 재현에 따른)하고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다. 그들은 민주주의적 혼돈Democratic Chaos:DC의 수호자들이다.-310~311쪽

이제 막갤은 유순한 갤러리가 되었으며 그것은 운영자의 입장에서 일종의 '치유'로 볼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은 "막갤의 멸망"을 증언했다. 그리고 지금, "변방" 코갤이 "주류" 코갤로 부상한 이 시점에서 "무분별한 유입종자의 난입"으로 또한 "코갤의 멸망"을 예언하는 목소리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일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코갤마저 폐쇄되면 코갤에 모여 있던 악성 바이러스들이 디시 전역으로, 나아가 인터넷 전반으로 퍼져 나가게 될 것이다." 그나마 한 곳에 모여 있던 '그들'이 그곳을 벗어나면 사이버스페이스 전체가 "막장화"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코갤은, 그리고 디시는 최후의 견제 장치 같은 것이다.-380쪽

말하자면 '증여'와 '반친목'은 어떻게 공존하는가? 또한, 인류학적 용어로 표현할 때, 이곳에서 기본적으로 '공계적'인 성격의 집단구성의 형태는 어떤 방식으로 '동족화' 경향과 조우하는가? 존재의 표현으로서 사람들의 증여가 집단 전체를 향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존재의 외적 분리를 의미하는 집단 안 분화를 거부하며, 따라서 각각의 개별적 증여는 분화된 관계들의 형성("친목")에 저항해야 한다. 증여는 특정의 개인들이 호혜성의 원칙 아래에서 서로 간 배타적으로 맺는 관계 유지의 수단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스스로 그런 메타적 관계들의 도입을 저지하고, 이런 맥락에서 '증여'는 처음부터 '반친목'과 공존한다. 그 '반친목적 증여'는 모든 폐쇄적 연결고리의 사슬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능동적이고 발산적이다.그것은 이제 디시 전체의 범위로 확장돼 하나의 이름을 획득한다.-3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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