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와 베네수엘라의 공공의료시스템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건 학부 교양으로 라틴아메리카 관련된 수업을 들을 때였다. 다큐로 간단하게 소개된 공공의료 시스템의 내용은 이 책을 요약한 것이었는데, 흥미가 생겨 더 자료를 찾으려고 해도 그땐 이 책이 없을 때라 궁금한 마음을 품어두기만 했었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을 보고 오!! 단숨에 읽어내리게 되었다.



'담장 안으로'라는 이름의 공공의료 시스템 '바리오 아덴트로'는 공중보건의가 있는 1차진료소를 거점으로, 전국 구석구석에 진단과 예방을 중심으로 한 공중보건정책을 펼치는 것이다. 의사가 턱없이 모자랐던  초기에는 이들이 치료 중심의 활동을 했지만, 의사들이 마을 주민의 삶에 밀착하여 생활 습관을 개선하고 예방사업을 진행함으로써 말 그대로 공중보건 중심의 1차 진료소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사업은 쿠바에서 시작된 것으로,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세계의 압박에서 살아남고 동맹을 늘려가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다.


한편 쿠바는 자본주의식 세계화에 대한 대안으로 사회주의적 국제주의를 주창했다. 그러나 쿠바의 국제주의는 군사적 의미에서의 국제주의가 아니었다. 쿠바의 국제주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국민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서 그것을 제공하려고 노력하는 개발도상국에서 탄생한 사상이었다.

자신이 주창한 국제주의를 신천하기 위해 쿠바는 의료 봉사단과 교육 봉사단을 구성해 질병과 맞섰고 문맹과 싸웠다. 이런 쿠바의 노력은 군사적으로 개입하거나 천연자원을 무분별하게 뽑아 쓰는 선진 자본주의국가의 행태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쿠바는 약소국이었기에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다른 나라들을 군사적인 차원에서 도울 힘이 없었지만 지난 500여 년 동안 자본주의 개발 모델을 추종했지만 아무런 혜택을 보지 못한 나라들의 귀감이 될 수는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쿠바는 한 세기 전 호세 마르티가 국제주의를 제안하면서 주창한 "모든 인류의 조국"이라는 정체성을 지향하게 되었다.

-p.265


최근 쿠바의 교육이나 의료, 협동조합 모델 등을 조명하는 책이 많아진 걸 보면 '모든 인류의 조국'을 지향하고 있는 그 정책이 빛을 보고 있는 듯.


요런 시리즈들이 검색해보면 꽤 많이 나와 있다.













또한 이 의사들은 오후에는 의학교의 학생들을 교육하고 실습하는 선생이 된다. 대도시의 비싼 의대 역시 존재하지만, 이와 별개로 평생교육처럼 문턱이 낮은, 그러나 과정과 수료가 어려운 의학교가 곳곳에 생겨나 바리오 아덴트로의 공중보건의 자리를 채워 줄 의사들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초기에는 쿠바의 의사들이 베네수엘라의 바리오 아덴트로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후학을 재생산하고, 임무를 다한 쿠바의 의사들은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평화의 군대"라고 부른다.


지역 통합 의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시골 지역에 살든 도시 빈민가에 살든 의학 공부를 하기 위해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날 필요가 없다. 지역 통합 의학교는 자기가 사는 곳에서 의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담장 없는 대학교"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이 지역 통합 의학교를 독특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역 통합 의학교가 "맨발의 의사"라 불리는 의료 보조원 양성을 위한 단기 연수 시스템인 것은 아니다. 지역 통합 의학교는 기존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유형의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베네수엘라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독특한 정책이다. 학생들은 매일 아침 바리오 아덴트로에 나가 진료하는 의사를 도우면서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공공 보건 의료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오후에는 일반적인 의과대학에서 받는 수업과 같은 의학 수업을 받는다.

-p.18


가정 의학 분야에 종사하는 의사 수를 늘리기 위해서는 선진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바로 무료 의학 교육 제공, 보편적이고 평등 지향적인 건강보험 마련, 도시 빈민가와 농촌 지역에 적절한 보건 의료 시설 구축이 그 조건이다.

-p.336



이 책은 쿠바 식의 의료 시스템에 반발하여 미국으로 망명하는 의사가 있다는 점, 턱없이 적은 봉급에 베네수엘라의 보건의들이 불만의 목소리를 낸 적이 있다는 점을 담담하게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의 문을 두드리고, 졸업한 뒤에 보건의가 되어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동네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의사의 특권이 높은 소득과 과시적 소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의사들이 봉사하는 지역사회로부터 받는 존경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지역사회는 이타적 정신으로 무장하고 보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모든 환자를 동등하게 대하고 지역사회 주민의 건강과 "안녕"을 증진하기 위해 지역사회의 다양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의사를 존경한다.

-p.322



자본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봉사하는 과정에서 희생해야 할 것도 있었다.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은 제1세계가 누리는 수준의 물질적인 부를 누릴 수 있다는 환상이었다. 아벨 프리에토 쿠바 문화 장관은 2004년 알레한드로 마시아 기자, 훌리오 오테로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쿠바 정부가 부유한 자본주의 소비사회가 누리는 물질적 부를 모든 국민에게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모든 가정에 수영장이 딸린 집과 별장, 자동차 2대씩을 줄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대신 쿠바는 정신적,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품위 있는 생활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쿠바는 개인의 성장과 자아실현이 가능한 문화를 조성해 나갈 것입니다. 그것은 삶의 질에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쿠바는 소비주의와 정반대되는 문화, 즉 물건 구입이 행복을 창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맞서는 문화를 구축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p.263


'존경'을 먹고산다니, 얼마나 이상적인 이야기인가. 하지만 의사가 되고 싶은 사람이 미국처럼 빚을 떠안고 시작하게 되거나, 한국처럼 돈이 없으면 점점 입학 자체가 어려워지는 상황과는 분명 시작 자체가 다를 것이다.


남의 제도가 더 좋아보이기도 하고, 이 책과 내가 놓치고 있는 어두운 면도 분명 많겠지만... 적어도 진주의료원이나 카프병원처럼 국공립 의료원이 문닫고 있는 한국에 살면서 '왜 우리는?'하고 한번쯤 생각해볼 수 있었다(물론 노답).


보면서 엘 시스테마도 떠올랐다. 역시 베네수엘라의 공공 음악교육 사업으로, 빈민가의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고 교육과정에 흥미를 갖게 한 사업이다. 바리오 아덴트로와는 다르게 차베스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에 호세 안토니오 아브라우 박사의 노력으로 베네수엘라에 자리를 잡고 큰 성공을 이룬 사례. 이 또한 공공영역이 얼마나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명료하게 보여준 좋은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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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7-22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권을 누리도록 한다면
교육이 아닐 테지요.

함께 나눌 뜻으로
법도 의학도 철학도 문학도 예술도
가르치면서 배우리라 느껴요.

브륀 2013-07-23 11:48   좋아요 0 | URL
정말 맞는 말씀이에요. 함께 살기 위해 배우는 것인데 말이에요.
 
결혼해도 똑같네 Plus 결혼해도 똑같네 3
네온비 글 그림 / 애니북스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1,2권 구매자를 위해 박스도 준다니. 상냥해..! 작가님이 독자들 신경쓰는 마음이 느껴져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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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뒤집는 의사들 - 베네수엘라 공공 의료 혁명 바리오 아덴트로
스티브 브루워 지음, 추선영 옮김 / 검둥소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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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통합 의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시골 지역에 살든 도시 빈민가에 살든 의학 공부를 하기 위해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날 필요가 없다. 지역 통합 의학교는 자기가 사는 곳에서 의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담장 없는 대학교"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이 지역 통합 의학교를 독특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역 통합 의학교가 "맨발의 의사"라 불리는 의료 보조원 양성을 위한 단기 연수 시스템인 것은 아니다. 지역 통합 의학교는 기존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유형의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베네수엘라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독특한 정책이다. 학생들은 매일 아침 바리오 아덴트로에 나가 진료하는 의사를 도우면서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공공 보건 의료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오후에는 일반적인 의과대학에서 받는 수업과 같은 의학 수업을 받는다.-18쪽

그러나 차베스 정부는 민영 보건 의료 서비스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과거의 보건 의료 시스템이나 전통적인 대학에서 의학을 교육하는 방식에 대해 간섭하지 않았다. 베네수엘라 국민의 20퍼센트에도 못 미치는 소수를 위한 보건 의료 서비스는 전과 마찬가지로 호세 선생처럼 베네수엘라 최고의 대학교에서 훈련받은 의사들이 전문가로 일하는 민영 병원에서 이뤄졌고 민영 보험 회사가 자금을 지원했다. (중략)
차베스 정부는 민간 기업의 활동에도 별다른 제약을 가하지 않았다. 가령 근사한 쇼핑몰을 건설하거나 20세기 특권의 상징인 고급 주택단지를 건설하는 건설업은 2003년 말부터 2008년까지 베네수엘라에 찾아온 경제 호황에 힘입어 미친 듯이 성장했다. 차베스 대통령이 집권한 후에도 민간 기업의 활동과 시민들의 개별적인 지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 대신 차베스 정부는 베네수엘라 전역에 보편적 일차 보건 의료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대안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특권층이 살아가는 세상과 나란히 존재하지만 기존과는 다른 또 하나의 세상을 창조해 국민 대다수의 삶의 질을 높이는 길을 택했다.-232쪽

자본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봉사하는 과정에서 희생해야 할 것도 있었다.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은 제1세계가 누리는 수준의 물질적인 부를 누릴 수 있다는 환상이었다. 아벨 프리에토 쿠바 문화 장관은 2004년 알레한드로 마시아 기자, 훌리오 오테로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쿠바 정부가 부유한 자본주의 소비사회가 누리는 물질적 부를 모든 국민에게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모든 가정에 수영장이 딸린 집과 별장, 자동차 2대씩을 줄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대신 쿠바는 정신적,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품위 있는 생활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쿠바는 개인의 성장과 자아실현이 가능한 문화를 조성해 나갈 것입니다. 그것은 삶의 질에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쿠바는 소비주의와 정반대되는 문화, 즉 물건 구입이 행복을 창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맞서는 문화를 구축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263쪽

한편 쿠바는 자본주의식 세계화에 대한 대안으로 사회주의적 국제주의를 주창했다. 그러나 쿠바의 국제주의는 군사적 의미에서의 국제주의가 아니었다. 쿠바의 국제주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국민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서 그것을 제공하려고 노력하는 개발도상국에서 탄생한 사상이었다.
자신이 주창한 국제주의를 신천하기 위해 쿠바는 의료 봉사단과 교육 봉사단을 구성해 질병과 맞섰고 문맹과 싸웠다. 이런 쿠바의 노력은 군사적으로 개입하거나 천연자원을 무분별하게 뽑아 쓰는 선진 자본주의국가의 행태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쿠바는 약소국이었기에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다른 나라들을 군사적인 차원에서 도울 힘이 없었지만 지난 500여 년 동안 자본주의 개발 모델을 추종했지만 아무런 혜택을 보지 못한 나라들의 귀감이 될 수는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쿠바는 한 세기 전 호세 마르티가 국제주의를 제안하면서 주창한 "모든 인류의 조국"이라는 정체성을 지향하게 되었다.-265쪽

오늘날 부유한 나라의 의사 협회는 세계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의사의 기술을 통제하고 자신들만의 기준으로 전문 의술의 영역을 제한해 아무나 의사가 될 수 없도록 규제하지만 쿠바 의사들은 의사의 수를 제한하는 데 관심이 없다. 쿠바 의사들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비용에 관계없이 치료해야 한다는 윤리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쟁이 심해지면 소득이 낮아질 것을 겁내지 않기 때문이다. 혁명을 일으키는 의사는 오히려 의사의 수를 늘려 아직까지 보건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보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의사의 특권이 높은 소득과 과시적 소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의사들이 봉사하는 지역사회로부터 받는 존경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지역사회는 이타적 정신으로 무장하고 보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모든 환자를 동등하게 대하고 지역사회 주민의 건강과 "안녕"을 증진하기 위해 지역사회의 다양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의사를 존경한다.-322쪽

자본주의 세계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이 느낀 공포는 많은 나라들이 21세기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만일 베네수엘라에 맞먹는 광물자원을 보유했고 베네수엘라와 마찬가지로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에서 1만 4천 달러 사이에 속하는 국가를 의미하는) "중간 소득" 국가로 분류되는데도 주민 대부분이 겪는 생활고가 10여 년 전 베네수엘라 주민 대부분이 겪은 생활고보다도 훨씬 극심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자원을 수출해 얻은 수입을 활용해 자신들의 경제와 사회의 운명을 직접 통제하려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328쪽

가정 의학 분야에 종사하는 의사 수를 늘리기 위해서는 선진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바로 무료 의학 교육 제공, 보편적이고 평등 지향적인 건강보험 마련, 도시 빈민가와 농촌 지역에 적절한 보건 의료 시설 구축이 그 조건이다. 아주 부유한 미국이라는 나라가 자기 나라 국민에게 보건 의료 서비스를 효과적으로 제공할 기회는 거부하면서 일차 보건 의료 시스템을 새로 구축하려는 가난한 나라의 노력에 훼방을 놓는 것이 바로 21세기 자본주의의 현실이다.-336쪽

쿠바와 베네수엘라는 보편적이고 평등한 보건 의료 서비스 전달 체계를 구축한다는 가장 까다롭고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숙제를 해결했다. 21세기 사회주의자 그리고 20세기 사회주의자 중 일부는 "행동으로 표현할 때" 혁명이 성취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지식인이나 정치 지도자들이 캄페시노 농민이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생산적인 협동조합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혁명을 일으키는 새로운 사회 구조와 경제 구조를 구축하는 일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고 구성원 사이에 신뢰 관계를 형성하는 훨씬 고된 노력이 필요하다.-3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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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 우리가 알지 못한 유럽의 속살
원종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단순 연대기 나열이 아니라 사건과 저자의 견해가 적절히 어우러져 술술 읽힌다. 굵직한 사건 위주로 다뤘는데도 신기하게도 흐름이 끊기지 않는다. 간만에 졸지 않고 읽은 유럽 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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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 우리가 알지 못한 유럽의 속살
원종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12월
품절


로마와 기독교 사상은 기본적으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로마의 사상은 현실에서의 명예로운 삶을 강조하지만 죽은 후의 내세나 구원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스와 로마에는 수많은 신화가 존재하지만 지옥이나 천국 등 지상에서 인간이 한 일에 대한 상벌 관련 내용은 거의 없다. 신들의 세계를 믿지만 그곳은 인간 세상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모략과 협잡과 고통과 분란이 가득한 곳일 뿐이다.
사후의 보상 체계가 없는 이런 내세관에 의지해 삶을 버텨내려면 교육과 법, 시민으로서의 자부심, 다양한 계급을 만족시킬 사회 시스템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이런 요소들이 조금만 약해지면 바로 흔들리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승의 삶에 대한 상벌 기준을 분명히 하는 기독교는 과거에 비해 약해진 로마의 사상적 기초를 크게 흔들어놓을 수밖에 없었다.-60~61쪽

선과 악을 일도양단해서 구별하려는 경항은 전근대적인 관점이다. 인간성의 현실을 인식하고 중용을 좇아 균형을 취해 나가는 반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도취에 의한 그릇된 선의 신념은 스스로의 중요성과 성취에 대한 과장을 통해 만들어지고 공고해진다. 이런 유아적인 도취는 냉엄한 현실에 마주쳐 스스로가 야기한 실수와 실패를 인정하고 배우며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서서히 극복될 수 있는데 이는 개인/종족/문명/국가 차원에 함꼐 적용되는 진리다.
현대 미국의 가장 큰 문제는 일천한 역사로 말미암아 아직 이런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엄청난 부와 정치적 성공신화에서 비롯된 미국인의 낙관주의와 로맨티시즘, 영웅주의는 세상에 대한 그들의 무지와 더불어 스스로를 21세기의 철부지로 전락시키고 있다. 성숙할 기회를 갖지 못한 자아는 실패나 오류를 건강하게 받아들일 힘이 없기 때문에 작은 문제 앞에서도 두려움에 떨고 공격적으로 변하는 불안 상태를 유발하게 된다. 이것이 21세기 미국이 십자군을 운운하게 되는 배경이다.-130쪽

다만 혁명이라는 것은 실제로 이렇게 시작되고 전개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온갖 전설적인 혁명가의 영웅담에도 불구하고 권부와 국민이 실제로 그 명분의 기치하에 질서정연한 정면대결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어느 한쪽의 두려움에 의한 과도한 행동과 주위를 둘러싼 긴장감과 공포,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움직이는 권력지향의 인물들과 이상주의의 열정과 충동에 의해 상황이 좌지우지되는 것이 혼란스러운 혁명 상황의 진실에 가깝다. 거기에 평소 같으면 별 문제도 없을 일이 일촉즉발의 긴장감 속에서 방아쇠로 작용하고 이어 수백, 수천명의 피를 뿌리면서 걷잡을 수없이 퍼져 나간다. 상황이 상황을 끌어나가고 피가 피를 부르며, 혁명 자체는 거대한 불덩이처럼 스스로 타오르게 되는 것이다.-250~251쪽

이런 일을 피할 수 없는 것은 혁명 자체가 그 자신의 열정과 피를 먹고사는 생물과 같아서 중앙에서 통제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고, 또 현실적으로 혁명을 수행하는 지역 단위의 말단 인력까지 지성과 전략, 신념으로 무장한 지식인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교육이나 의식수준이 중앙의 간부들에 비해 낮고 혁명의 열기, 감정과 권력의 유혹을 조절하고 자신의 공격성을 통제할 이성이나 자각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들이 이렇게 된 것은 그간 무의식 속에 숨겨져 있던 계급적 분노의 감정이 혁명의 명분이라는 필터를 거쳐 잔인함을 정당화시키는 기저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물론 우익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2000명의 사회주의자를 처치했다며 스스로를 백색 테러리스트로 불렀던 주먹 황제 김두한도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이 있었기에 거리낌없이 학살을 저지를 수 있었다. 인간은 동물적인 공격성을 본능으로 품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언제나 이런 행동을 할 가능성에서 자유롭지 않다.-270~271쪽

그렇게 만든 세상에 슈퍼맨은 영원히 책임을 질 수 있을까. 신이 아닌 한 그도 나이가 들고 언젠가 죽는다면 이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무엇보다도 인간의 판단과 결정의 권리, 합의를 통해 문제를 풀어나가는 합리적인 민주주의를 향한 문명의 노력은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자칭 구세주에 의해 본의 아니게 행복한 돼지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뜬금없이 슈퍼맨을 예로 든 것은 소명의식과 오만함 사이를 넘나드는 이른바 선한 힘의 부정적인 속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제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인간이나 인간이 만든 것은 결코 완벽할 수 없다. 어떤 개인도 체제도 계급도 인류의 구세주가 될 수 없고, 명분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그런 믿음을 갖는 순간 모든 것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슈퍼맨은 존재할 수도 없지만 존재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나는 '초인의 오류'라고 부른다. 세계 역사 곳곳에서 등장하는 이런 사람들, 이런 활동은 서로 달라 보이고 역사에서의 평가도 제각각이지만 기본적으로 공통적인 지점에 있다. 그 오류는 작게는 스스로의 몰락을 부채질하고 크게는 주변 사람에게 엄청난 고통을 지운다.-330쪽

이런 상황을 보면 제2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된 독일의 행보는 유럽 정복의 야욕보다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노력으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처음에는 영국과 프랑스 역시 독일을 소련에 대한 방패막이로 삼고자 이런 움직임을 묵인했다. 하지만 독일이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를 공격하자 화급히 태도를 바꾸어 3일 만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까지 독일은 자신들과 관련 없는 땅을 공격하지 않았다.
나치 독일을 옹호하고자 하는 말은 아니다. 그들의 실제 목표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국토를 회복한 후 유럽 전체로 손을 뻗치려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개전과 그에 대한 독일의 책임 부분과 관련되어서는 승자의 편에서 기록되는 역사라는 일반 법칙이 일정 부분이나마 적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독일은 기존의 자기 땅을 되찾기 위한 국지전을 벌였고 실제 이 전쟁들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어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게 한 계기는 그들을 서유럽 전선으로 끌어들인 영국과 프랑스였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424~425쪽

그들을 비판하면서도 한편 냉정하게 인식해야 할 것은 현실에서 순수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부 개인이 그런 성향을 보일 수도 있지만 일정 규모를 넘어서는 집단에서는 불가능하다. 모든 조직적인 광기에는 그것을 합리화하는 명분이 있는 법이다. 나치 탄생의 본질은 악마 히틀러보다는 제1차 세계대전 패망에 따른 자존심 높은 게르만인의 절망에서 찾아야 한다. 이 절망에는 당시 유럽과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국제 정세와 전승국의 지나친 욕심이 상당 부분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한때의 신성로마제국이자 유럽의 정신적/물질적 리더였던 독일인에게 부가된 패전의 멍에는 너무나 컸고, 여기에 대한 피해의식이 나치를 낳은 측면이 적지 않다. -430쪽

순수악 개념은 철저히 중세적인 것이고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일도양단하는 태도는 전형적인 가톨릭 도그마의 접근법이다. 악한 인간과 악한 행동은 존재하지만 그들을 순수한 악으로 단순화해서 보는 순간 우리는 그들과 전혀 다른 존재라는 착각에 빠져든다. 증오와 편견은 아직 우리 인간과 문명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고, 이 감정들은 적절한 조건이 주어지면 언제든지 표출될 준비가 되어 있다.-431~4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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