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통합 의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시골 지역에 살든 도시 빈민가에 살든 의학 공부를 하기 위해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날 필요가 없다. 지역 통합 의학교는 자기가 사는 곳에서 의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담장 없는 대학교"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이 지역 통합 의학교를 독특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역 통합 의학교가 "맨발의 의사"라 불리는 의료 보조원 양성을 위한 단기 연수 시스템인 것은 아니다. 지역 통합 의학교는 기존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유형의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베네수엘라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독특한 정책이다. 학생들은 매일 아침 바리오 아덴트로에 나가 진료하는 의사를 도우면서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공공 보건 의료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오후에는 일반적인 의과대학에서 받는 수업과 같은 의학 수업을 받는다.-18쪽
그러나 차베스 정부는 민영 보건 의료 서비스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과거의 보건 의료 시스템이나 전통적인 대학에서 의학을 교육하는 방식에 대해 간섭하지 않았다. 베네수엘라 국민의 20퍼센트에도 못 미치는 소수를 위한 보건 의료 서비스는 전과 마찬가지로 호세 선생처럼 베네수엘라 최고의 대학교에서 훈련받은 의사들이 전문가로 일하는 민영 병원에서 이뤄졌고 민영 보험 회사가 자금을 지원했다. (중략) 차베스 정부는 민간 기업의 활동에도 별다른 제약을 가하지 않았다. 가령 근사한 쇼핑몰을 건설하거나 20세기 특권의 상징인 고급 주택단지를 건설하는 건설업은 2003년 말부터 2008년까지 베네수엘라에 찾아온 경제 호황에 힘입어 미친 듯이 성장했다. 차베스 대통령이 집권한 후에도 민간 기업의 활동과 시민들의 개별적인 지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 대신 차베스 정부는 베네수엘라 전역에 보편적 일차 보건 의료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대안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특권층이 살아가는 세상과 나란히 존재하지만 기존과는 다른 또 하나의 세상을 창조해 국민 대다수의 삶의 질을 높이는 길을 택했다.-232쪽
자본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봉사하는 과정에서 희생해야 할 것도 있었다.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은 제1세계가 누리는 수준의 물질적인 부를 누릴 수 있다는 환상이었다. 아벨 프리에토 쿠바 문화 장관은 2004년 알레한드로 마시아 기자, 훌리오 오테로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쿠바 정부가 부유한 자본주의 소비사회가 누리는 물질적 부를 모든 국민에게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모든 가정에 수영장이 딸린 집과 별장, 자동차 2대씩을 줄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대신 쿠바는 정신적,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품위 있는 생활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쿠바는 개인의 성장과 자아실현이 가능한 문화를 조성해 나갈 것입니다. 그것은 삶의 질에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쿠바는 소비주의와 정반대되는 문화, 즉 물건 구입이 행복을 창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맞서는 문화를 구축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263쪽
한편 쿠바는 자본주의식 세계화에 대한 대안으로 사회주의적 국제주의를 주창했다. 그러나 쿠바의 국제주의는 군사적 의미에서의 국제주의가 아니었다. 쿠바의 국제주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국민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서 그것을 제공하려고 노력하는 개발도상국에서 탄생한 사상이었다. 자신이 주창한 국제주의를 신천하기 위해 쿠바는 의료 봉사단과 교육 봉사단을 구성해 질병과 맞섰고 문맹과 싸웠다. 이런 쿠바의 노력은 군사적으로 개입하거나 천연자원을 무분별하게 뽑아 쓰는 선진 자본주의국가의 행태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쿠바는 약소국이었기에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다른 나라들을 군사적인 차원에서 도울 힘이 없었지만 지난 500여 년 동안 자본주의 개발 모델을 추종했지만 아무런 혜택을 보지 못한 나라들의 귀감이 될 수는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쿠바는 한 세기 전 호세 마르티가 국제주의를 제안하면서 주창한 "모든 인류의 조국"이라는 정체성을 지향하게 되었다.-265쪽
오늘날 부유한 나라의 의사 협회는 세계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의사의 기술을 통제하고 자신들만의 기준으로 전문 의술의 영역을 제한해 아무나 의사가 될 수 없도록 규제하지만 쿠바 의사들은 의사의 수를 제한하는 데 관심이 없다. 쿠바 의사들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비용에 관계없이 치료해야 한다는 윤리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쟁이 심해지면 소득이 낮아질 것을 겁내지 않기 때문이다. 혁명을 일으키는 의사는 오히려 의사의 수를 늘려 아직까지 보건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보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의사의 특권이 높은 소득과 과시적 소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의사들이 봉사하는 지역사회로부터 받는 존경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지역사회는 이타적 정신으로 무장하고 보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모든 환자를 동등하게 대하고 지역사회 주민의 건강과 "안녕"을 증진하기 위해 지역사회의 다양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의사를 존경한다.-322쪽
자본주의 세계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이 느낀 공포는 많은 나라들이 21세기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만일 베네수엘라에 맞먹는 광물자원을 보유했고 베네수엘라와 마찬가지로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에서 1만 4천 달러 사이에 속하는 국가를 의미하는) "중간 소득" 국가로 분류되는데도 주민 대부분이 겪는 생활고가 10여 년 전 베네수엘라 주민 대부분이 겪은 생활고보다도 훨씬 극심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자원을 수출해 얻은 수입을 활용해 자신들의 경제와 사회의 운명을 직접 통제하려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328쪽
가정 의학 분야에 종사하는 의사 수를 늘리기 위해서는 선진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바로 무료 의학 교육 제공, 보편적이고 평등 지향적인 건강보험 마련, 도시 빈민가와 농촌 지역에 적절한 보건 의료 시설 구축이 그 조건이다. 아주 부유한 미국이라는 나라가 자기 나라 국민에게 보건 의료 서비스를 효과적으로 제공할 기회는 거부하면서 일차 보건 의료 시스템을 새로 구축하려는 가난한 나라의 노력에 훼방을 놓는 것이 바로 21세기 자본주의의 현실이다.-336쪽
쿠바와 베네수엘라는 보편적이고 평등한 보건 의료 서비스 전달 체계를 구축한다는 가장 까다롭고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숙제를 해결했다. 21세기 사회주의자 그리고 20세기 사회주의자 중 일부는 "행동으로 표현할 때" 혁명이 성취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지식인이나 정치 지도자들이 캄페시노 농민이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생산적인 협동조합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혁명을 일으키는 새로운 사회 구조와 경제 구조를 구축하는 일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고 구성원 사이에 신뢰 관계를 형성하는 훨씬 고된 노력이 필요하다.-3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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