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스마트'의 환상적 레토릭으로 가득 찬 세상의 표면 아래는 자본주의가 근본저긍로 풀 수 없는 실제적 모순들이 낳은 끔찍한 고통으로 가득 차 있게 마련이다. 스마트폰을 든 채 퇴근한 뒤에도 스마트하게 업무 처리를 하는 스마트한 회사원이 버린 쓰레기를 한 달에 80만 원 받으며 화장실에서 식사를 하는 비정규직 청소부 아주머니들이 치우는 그런 세상 말이다. 형용사 '스마트'를 파생시킨 동사 '스마트'의 어원이 '고통을 주다'라는 뜻인 고대 독일어 'smerzan(현대형은 schmerzen)'에서 온 것은 그래서 쉽게 넘길 일이 아니다.-99쪽
'폭력이 다른 폭력으로 잊혀지네'. 이 논리를 가장 잘 이용하는 것이 바로 권력이다. 뒤가 구린 권력일수록 범죄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5공이 출범할 때 등장한 '삼청교육대'는 대표적이다. 자신들의 폭력을 감추기 위해 그것보다 스케일이 작은 대중 속의 폭력을 부각시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세상이 약육강식 논리로 점철되어 갈수록, 그속에서 발생하는 폭력에 대해서는 엄정하다. 이 속에서 그 폭력을 만들어낸 질서, 더 크고 광범위한 '폭력의 질서'는 잊혀지거나 자연스럽게 변한다. '자본주의가 다 그렇지'라고 말하면서 오늘도 '전쟁 같은 삶'을 살아야만 하는 이 현실, 그속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비인간적 행태들이 '세상의 이치'가 되는 순간, 절도와 성폭행과 살인은 더욱더 '인면수심'으로 치부된다.-132-133쪽
'수치를 모르는 생존과 즐거움의 추구'가 주된 감수성이 된 사회는 가장 자유로운 듯 보이나 사실은 가장 억압적인 사회다. 신자유주의가 축조한 철저한 사익 중심 사회의 '바깥'은 없기에, 이 구조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도태된다면 살아날 방법 또한 없다. 모든 사람이 이 구조 속에서 알랑거리며 사는 한 생존할 수 있고 즐거울 수 있지만, 그 구조가 내친 사람이 다시 안으로 들어갈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지금은 붙어 있지만 나중에 내쳐지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극단적인 공포와 두려움을 일상으로 여기며 산다. 이 공포와 두려움이야말로 권력이 손대지 않고도 사람들을 통제하는 핵심적 수단이다. 각자가 각자를 통제하면서 움직이는 사회 전체, 이 끔찍한 체제에 균열을 내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그 균열은 단순한 정치적 계산에 따라 절대 생기지 않으며, 각자가 각자를 변화시키는 문화적, 아니 거의 종교적인 재탄생의 노력을 요구한다. 이 시대의 권력은 이미 '내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145쪽
이런 구도라면 한국에서 좌파가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오늘날 좌파를 규정짓는 가장 선명한 신념을 '신자유주의 반대'라고 한다면,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지지하는 80퍼센트 이상의 국민이 신자유주의를 찬성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차이는 '정도'와 '속도'의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의 독주를 막을 힘은 한국 좌파에게 없다. 서울시장 후보들 중 가장 진보적이고 지적이고 명민하고 유머러스하기까지 하던 노회찬이 3.3퍼센트의 대접을 받는다는 사실이 말해주는 것이 이것이다.-157쪽
여기에는 두 가지 모순이 있다. 첫째, 신자유주의와 민족/국민의 관계다. 신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최소한의 정부를 지향하는, 국가의 경제 개입을 부정하는 이념이다. WTO 질서와 IMF 구조조정이 공유하는 신자유주의적 질서는 국가 간 무역 장벽 자체를 없애는 것, 그리고 복지를 포함해 국가가 부과하는 규제를 최소화해 자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와 민족/국민은 이항 대립의 반대항에 가깝다. 그런데도 IMF를 통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과정에서 국민과 민족, 국가에 관한 엄청난 슬로건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다. 둘째, 민족/국민과 개인의 관계다. IMF 이후 경쟁 이데올로기가 현실을 살아가는 유일한 대안으로 광고되면서 '우리 국민은 할 수 있습니다' 같은 표현들이 넘쳐났지만, 실제 그 '국민'이라는 기표는 잘못된 것이다. 즉 '국민'이라는 기표가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개인'이다. 정부와 기업은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경쟁력 제고 독려를 하지만, 실제 그 일을 수행하는 것은 개인이고, 개인이 그 과정에서 실패했을 때 국민으로 복귀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개인으로 도태한다.-188쪽
이렇게 생각할 때,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노동' 또는 '노동사회'를 거부한다는 것은 혁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른 사람 밑에서 일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노동을 하게 되면 자신을 고용한 사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욕망을 어떻게든 절제하거나 다스리면서 살게 된다. 그것이 길어져 익숙해지면, 결국은 자신의 윗사람에게는 언제나 순응하고 복종하는 인간이 탄생한다.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시간이 많기 때문에 공상에 빠지고, 공상에 빠지다 보면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생각들을 하게 된다.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상상을 하고, 욕망을 품고, 그것을 실천에 옮긴다.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래서 위험하다. 기존의 질서에 흡수되지 않으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헛된 생각을 품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301쪽
이 시대 민주주의의 키워드인 '소통communication', 즉 이 궁핍한 삶의 많은 모순들이 상식적인 이야기를 풀어놓는 안철수 등 몇몇 멘토와 소통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일은 마크 주커버그와 스티브 잡스가 만들어낸 페이스북과 아이폰 시대의 놀라운 판타지다. 우리 시대의 '소통'은 기본적으로 시공간의 장벽을 제거해버린 네트워크 자본의 효과에 불과하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가능한 소통이라는 문화적이고 인문학적인 테마는 방대한 통신 네트워크의 건설을 통해 완벽한 시공간 압축을 이루어냄으로써 '상품'의 소비를 넘어 '소통' 자체의 소비로 이윤을 만들어내는 거대 네트워크 자본의 매혹적 카피일 뿐이다. 쉴 새 없이 트윗을 '날리고' 멘션을 보내고 '카톡'을 해도, 인간 본연의 실존적 고독은 줄어들지 않고 오직 지연되며, 네트워크 자본은 이 '지연'을 제공하며 그 시간을 이윤으로 바꾼다.-312쪽
소통은 사회를 뒤엎는 급진적인 정치의 힘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시대의 믿음이고, 자본주의 아닌 세상은 상상할 수 없는 사회가 지니는 부적이며, 도를 넘은 근본적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지노선이다. 소통만을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이 '쉬운' 분위기 속에서 갈등을 전면화함으로써 더 나은 체제를 만들려는 진정한 의미의 정치가 힘을 잃어버릴 때, 그때 정치는 '예능'이 된다. '닥치고 정치','달려라 정봉주' 등의 만화적인 슬로건, 역사도 이념도 없이 무조건 문호를 개방하는 정당, 자신의 세계관과 정책 구상을 보여주는 대신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시청자와 울고 웃는 유력한 정치인들이 그 예다. 이 모든 정치-예능들은 '사소하고 부드러운 것'(그래서 어디서나 잘 팔리는 것)들이 모든 딱딱하고 전투적인 것들을 제압해버린 이 탈정치 시대의 지배적 형식이 되었다. 다수의 삶이 이미 노예적으로 변해버린 상황에서 이 '휴먼정치예능 소통쇼'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아이러니는 어쩌면 자연스럽다. 이미 사람들은 자신이 자본이 지배하는 체제의 노예라는 생각을 하는 대신, 그 체제가 주는 작은 즐거움들을 누리는 게 더 행복하기 때문이다.-319-3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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