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번 양보해 이승만이 말한 자유와 박정희가 말한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가 반공 혹은 국가 억압 정당화의 논리만은 아니라고 한다면, 파시즘을 명백히 반대한다는 점을 법과 절차, 행정집행에서 명시해야 하고 국민, 국가, 민족의 입장에서 이를 배반한 사람을 엄격히 처벌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 이후 현재까지 쿠데타를 노골적으로 선동하는 발언을 하거나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위대에 테러를 행사하는 극우 세력에 대해 '자유민주적' 헌법 정신과 각종 형법을 적용해 처벌한 예가 없다. [자유민주주의는 어떻게 독재와 결부되었나]-53쪽
공적 정신을 가진 인간, 즉 일제 때부터 항일운동을 했다가 살아남은 사람이나 지역사회에서 신망이 있던 청년, 주민을 위해 일한 구장/반장, 행정 말단 지도자 일부가 자신의 권력과 돈을 지키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의 항일 경력과 해방 직후 지역 정치 참여는 공인으로서의 책임감과 사명감에 기초한 것으로, 이데올로기의 잣대를 들이대 판단할 행위가 아니다. 그래서 한국전쟁 전후 군경에 의한 학살은 흔히 생각하듯 한국 정치에서 '좌익의 소멸사'가 아니라, 친일 경찰과 군인에 의한 옛 항일운동가들의 수난사이자 우리 역사 최대의 공적 인간 소멸사라 해야 옳다. ['가짜 우익'은 어떻게 탄생했나]-76쪽
그렇다면 사설 용역업체를 공권력 행사에 동원하고, 그 전부터 용역의 폭력을 묵인한 채 시공업체가 절실히 원하는 일을 수행한 경찰을 어떻게 봐야 할까? 나는 앞의 경찰청 차장의 발언 속에 답이 있다고 본다. 이들이 도심 대로변에서 무장하고 있었다는 지적 말이다. 농성자들이 실제 시민들의 생명을 위협하지 않았다는 것을 경찰이 몰랐을 리 없다. 초점은 이들의 무장을 '인내를 갖고' 두고 볼 수 없기에 긴급히 해산시켜야 했다는 것이다. 즉 이들의 항의 농성이 모든 행인에게 보였고, 이는 정부의 법질서 확립이 실패했다는 사실이 온 천하에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의 무장 농성 자체가 행인에게 부각되어 공권력이 무력화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객관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주관적으로는 이명박 정부에 '테러'세력으로 간주되어 위협이 되었다. 이는 바로 산으로 피란 간, 거의 무장하지 않은 주민들조차 국가를 위협하는 빨치산으로 간주해 조속한 진압 대상으로 여겼던 제주 4.3 사건과 한국전쟁 시기 이승만 정권의 인식과 동일하다. [공권력에 대항하면 테러 세력인가]-106-107쪽
군사정권 시절 판사들에게는 이런 유형무형의 압박이 있었기에 세상 사람들은 사법부를 독재 권력의 피해자로 알고 있으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다. 당시 판사들이 소신에 의한 판결을 했다고 해서 신상의 위협을 느끼거나 지위를 박탈당할 정도의 심각한 불이익을 당한 것은 아니었으며,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더욱 그러하다. 노동자에게는 거의 예외 없이 가혹한 처벌을 내리는 한국 법원은 기업이나 사용자의 범법에는 대체로 관대한데,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정치 재판은 이제 계급 재판으로 변해가고 있다. [사법 정의 없는 정치 재판은 현재진행형이다]-203쪽
일본의 전후 세대는 한국이나 중국에서 과거사 반성을 요구하면, 왜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의 일로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묻는다. 이에 대해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교수는 일본인으로서 책임이 있다고 잘라 말한다. 그가 강조하는 일본인이란 혈통을 물려받은 일본인이 아니라 정치 공동체 구성원이라는 일본인이다. 정치 공동체 구성원인 모든 일본인, 즉 전후 세대는 일본 국가가 국민에게 주는 각종 혜택의 수혜자이고 주권자로서 일본의 정치에 참여하기 때문에 결정 과정에 책임이 있는 주체라는 것이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도 이 점을 강조하며 만약 일본 젊은이들이 과거 세대의 책임을 지지 않겠다고 말하려면 우선 식민지 지배로 얻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여권을 찢어버리고, 국민으로서의 특권을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난민이 될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 공동체의 일개 구성원도 이런 책임이 있는데, 과거 권력의 핵심에 있던 사람의 책임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권력의 논리]-22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