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인문학 - 인문학과 싸우는 인문학
최진석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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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 나오는 르네상스 문화의 찬연함, 특히 '휴머니즘의 전성시대'란 순전히 근대 역사가들에 의해 '창안된 전통'에 다름 아니다. '르네상스 휴머니즘'이란 어디까지나 '근대의 신화'요, 근대의 휴머니즘이 자신의 기원으로 참칭한 상상의 이미지란 것이다. 비(非)실용과 비(非)정치로서 휴머니즘의 신화는, 그 이면으로 지극히 실용적이고 정치적인 비호를 받으며 융성했다.-69쪽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인 인문학의 본래 과업은 권력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지원이었다. 예컨대, '정신문화'를 창달한다는 미명 하에 인문학이 주로 복무했던 분야는 국가적, 사회적 폭력을 정당화하고 변호하는 일이었다. 이런 사례들이 여실히 보여주는 것은, 인문학이 노정하는 도덕적 자질의 도야나 삶에 대한 이해는 곧잘 공동체 혹은 국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개인의 육성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수렴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人) 사이(間)의 현상으로서 문화는 곧 공동체와 사회, 국가라는 관점으로 빨려 들어가 전용된다. 따라서 인문학은 개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동시에 그가 속한 공동체(국가)의 발전을 견인하는 동력원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난다. 인문학의 원리로서 인간성의 계발(휴머니즘)이 추구되었고, 그 목적은 개인과 공동체(국가)를 이어주는 문화적 가치의 함양과 육성으로 귀결되었다고 말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74쪽

인문학이 동일성(identity)의 서사에 복무할 때, 그것은 권력의 시녀 이상으로 정의될 수 없다. 순응주의의 덫에 갇힌 채,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노정하기보다는 기성의 서사를 공고히하고 재생산하는 데 착취될 따름이다. 전체 집단이 공유하며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 통념만 가시화하기 때문에 불편하고 낯선 것, 이질적이며 외래적인 것에 대해 강한 적개심과 말살 의지만 다지기 마련이다. 부강한 국가를 갈망할수록, 이견(異見)을 못 참고 가차없는 처로티를 내려치는 일이 그토록 흔한 것도 이상한 노릇이 아니다. "애들이 무슨 권리가 있냐?"(청소년 인권) "천부의 성별을 혼란시키는 게 잘하는 짓이냐?" (성소수자 인권)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데?"(여성과 폭력) "정상인과 병신을 어떻게 똑같이 대접하나?"(장애인 인권) "국가를 위해 노동자들이 인내해야지!"(노동자의 차별과 단결) "군대도 안 가는 게 인간이냐!"(종교와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 "그저 보라는 것만 봐라!"(검열과 표현의 자유) "미국 사람과 동남아 사람이 똑같으냐?(인종차별의 문제) "그냥 죄다 죽여버리면 편할 텐데!"(제노사이드)-87쪽

이처럼 분할의 체제 안에서 분배된 구획선들을 유지하고 할당된 자리에서 몫의 분배를 다루는 것은 '치안(la police)'이지 정치가 아니다. 정치는 이처럼 권리의 유무를 가르는 분할선을 침범하면서 주어지지 않은 권리를 주장하고, 주어지지 않은 몫을 주장하는 것이며, 말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 말할 자격을 주장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예를 들면, 생사여탈권마저 왕에게 있었다는 점에서 자신의 신체에 대한 어떤 권리도 갖지 못했던 평민들이 자신들의 신체권을, 생명을 지속할 권리를 주장하며 싸우기 시작했을 때, 이전 시대와 '근대'를 분할하는 하나의 선을 넘게 되는 지점에서 우리는 정치를 발견한다. 인간의 권리라는 '보편적' 권리가 선언되었음에도 실제로는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았던 여성들이 자신들에게 참정권을 달라고 주장할 때, 또한 우리는 비로소 치안과 다른 것으로서 정치가 시작되었음을 알고 있다.-159쪽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는 자격 없는 자가 자격 있는 자와 동등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격이 없는 자가 없는 자격을 주장하는 것이고, 권리가 없는 자가 없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가령 체류 자격을 상실한 이른바 '불법 체류자'기에 추방해야 한다는 입장이 '치안'에 속한다면, 반대로 '불법 체류자'가 체류할 자격을 주장하는 것,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국민'이란 이름 아래 보이지 않게 된 존재자들이 가시적인 영역으로 침범해 들어오는 것이며, 국민과 비국민을 가르는 경계를 횡단하는 것이다.-160-161쪽

(인)문학적 실수ㅡ방황은 인문학자뿐 아니라 현장 사람들에게 일어나야 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현장의 삶은 인문학자의 개념을 기다리는 날것의 삶이 아니다. 법으로부터 추방되었기에 그들은 더욱더 법에 호소하고, 권리를 박탈당했기에 그들은 더욱더 권리에 얽매이며, 지배 권력의 폭력에 희생되었기에 더욱 지배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중략)

인문학은 그런 사람들을 국가와 법 바깥의 사막, 이념적이고 제도적인 목표의 바깥, 그 실수-방황의 사막으로 추방시켜야 한다. 돈과 권력(권리), 자본과 국가라는 진리-목적의 땅에서 탈주케 해야 한다.-196-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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