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과 거짓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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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명절이 되면 할머니댁에 거르지 않고 찾아 갔다. 낯가림이 심하던 나는 사촌들과 잘 어울린다거나 숙모들틈에서 귀엽게 차례음식을 받아 먹는 재주는 없었다. 그저, 고역이었던 그 며칠동안이 재미없고 답답했다. 그래도 기억나는 게 있다면, 음식을 만들던 어른들의 손길이다. 고기전이나 동태전에 밀가루를 묻히면 바로 계란을 입혀 지글지글 익히던 손길들과 사과나 배를 빛이 나게 닦는 모습. 무엇보다도 밤을 깍던 할아버지의 모습. 무뚝뚝하시고 늘 세상과는 어울림없는 모습이던 할아버지의 밤깍던 모습은 조심스럽고, 깨끗했다. 먼저 손을 닦으시고 작은 칼로, 밤의 겉껍질을 깍아내시고 물에 담가 속껍질을 벗겨내시던 할아버지는 한 알의 밤톨을 깍으면서 수 십번이 넘는 손길로 밤알을 이리저리 만지시곤했다. 기독교인인 나는 이제 제사상에 절을 하지는 않지만, 아직도 할아버지의 그 손길만은 생생하다.

아마도, 그렇게까지 조심스러운 손길이셨던 까닭은 그것이 '제사 음식'이었기 때문일게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 소설과 '제사'는 아무 상관도 없다, 우선 밝히자면. 하지만 제일 먼저 나를 사로잡은 느낌은 '정갈함'이다. 꽉꽉 알갱이가 박힌 엿을 뚝뚝 덩어리로 끊어놓은 것처럼, 문장들은 단단하게 뭉쳐져있는 기분이랄까? 레이아웃이 그렇기도 했고, 내용이 그렇기도 했고. 공을 들여놓은 K시의 모습을 그려보며 내 고개는 K시의 낮은 산자락을 따라 함께 움직인다. 전경좋은 높은 건물위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밤의 모습을 보는 쓸쓸함도 함께 느껴진다. 이렇게 풍경속을 지나치다 만나는 사람들의 잘 짜여진 이야기의 흐름도 '정갈'하다.

삼대의 이야기가 서로 얽혀있으면서도, 끈끈한 관계로 붙어있으면서도 그 모양새가 깔끔하다고 할까? 이미 자신의 공간이 생겨버린, 두 형제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자신들을 묶고 있던 K시 속에서의 갈등과 화해, 그리고 숙명 따위의 이야기는 은희경 작가의 솜씨좋은 재주로 매끈하다. 이런 겉모양새를 떠나 조금더 작품 안으로 들어가 볼까?
K시는 떠나야 하거나, 남는 곳이다. 아니 남는 것이 아니라 '남겨져야' 하는 곳이다. 떠나고 싶었지만 떠날 수 없어서, 떠나고 싶지만 떠날 명분이 아무것도 없어서, 혹은 떠났지만 다시 쫓겨와야 했던 사람들이 모여 다시 떠나기를 염원하며 자리하는 곳이다. 그리고,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끊임없이 반목해야 했던 두 형제의 고향이다. 뭐라고 정의가 내려지지 않는데..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외적인 소설의 배경이 아니라 두 형제의 심리적인 배경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하나? 이 곳에서,이 형제들처럼 그리고 이 곳이 고향이었던 아버지들을 키워냈다.

영준과 영우, 너무 다른 모습으로 자랐지만 그저 또래 소년들처럼 바라는 것이 분명했던 그래서 같은 것을 바랬던 두 형제의 이야기는 다른 곳으로 뻗어 있다. 너무나 다른 시선, 같은 사건을 겪으면서도 달랐던 그들의 시선 중앙에는 결국 그들의 '아버지'가 있다. 형에 대한 아버지의 집착을 부러워했던 동생만큼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여유를 그리워하고, 동시에 미워했던 두 형제의 삶은 우리네 그것하고 많이 닮아있다.
고독이든 방황이든,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느끼는 벽앞에서 대처하는 거의 모든 수단이니까. 그래서 영준의 깊은 고독을 이해하는 순간 뻐근한 한 쪽 가슴이 느껴지고, 동시에 바람을 닮은 영우의 삶에 공감하는 순간 삶의 무게를 이해하게 되는 경험을 해버린다.

음.......
이 소설이 기존의 은희경 작가의 작품들과 다르게 평가받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냉소'의 시선이 사라졌다는 거다. 그 안에 뛰어들어 피터지게 싸우는 격렬함이 아니라, 어느 작품 어느 인물들이나 그저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기만 하는 그 태도는 다분히 냉소적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번 작품은 결국 '화해'라는 테마여서 인지 그 시선의 변화를 눈여겨 본다.
하지만, 나는 화해가 아니라 그저 '이해'의 시선만을 느낄 뿐이다. 이해, 그래 어쩌면 이 단어가 포함한 많은 덕목들이 따뜻함과 연결될 수도 있겠지만, 그저 '받아들임'이라는 느낌은 더 차갑다. 이 작품의 '이해'는 상대편에 대한 무조건적인 감싸안음의 모습이 아니라, 그저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랄까?
두 형제가 알아버린 아버지의 비밀 아니면 거짓말인 세 사람 혹은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과 작품안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인물들의 응시는 그렇게 다가온다.
서로의 삶을 바라보는 것. 그런 느낌. 정말 그저 느낌일 뿐인 이 감정.
어떤 깨달음이나 감정의 정화를 굳이 책에 대한 느낌으로 이야기해야 한다면,
어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응시'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의 테두리의 의지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거. 그렇게 바라보는 법을 찾은 두 형제는, 앞으로도 다를테지만 그걸로 충분한것처럼.

순간순간 휘두르는 날카로운 말솜씨는 여전하다. 둥글해진 것 같은 작가 특유의 서늘함은 불쑥불쑥 튀어나와 여전히 즐거웠다. 오랜시간 길게 곱씹어보지는 않아도, 그래도 나는 잠시동안 다른 사람의 삶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것의 여유를 잠시동안 배웠다. ...그래서, 다시 만난 작가가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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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2-17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해가 아니라 이해의 시선만 해도 그게 어딥니까.
저도 이 책 사뒀는데 못 읽고 있네요.
님의 리뷰 보니 빨리 읽고싶군요.ㅠ,.ㅠ

기다림으로 2005-02-17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로드무비님 말씀처럼 '이해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는 걸로 충분한 작품입니다. 저도 요즘 쌓여가는 책들속에 파묻혀있느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마스터 키튼 18 - 꿈을 캐는 사람 (완결)
우라사와 나오키 지음, 가쓰시카 호쿠세이 스토리 / 대원씨아이(만화)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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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가이버를 싫어했던 기억을 가진 사람이 내 주위에는 없다. 헝클어진듯 자유분방한 머리 스타일을 하고는 그만큼 꽤나 자유스러운 모습으로 이런 저런 일을 기가막히게 술술 해내던 그 사람을, 동경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말씀하셨지, 아니 아버지 였던가? 아무튼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소리와 함께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며 뚝딱뚝딱 뭔가를 참 잘도 만들었던 '맥가이버'
와, 대단해. 멋지다.
라는 막연한 동경과 함께, 맥가이버는 '어딜 가서도 분명 살아남을 불사신'이라고 믿게 되어버렸다.

초등학교 시절 내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 10년이 지나 다시 나타났다.
더 잘날 수도 없을 만큼 잘났고, 만능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만큼 만능의 모습을 하고는,
만나는 사람들의 신임은 모두 얻어내고는 사건의 중심에서 모든 일을 해결해버리고 마는...'키튼'
영국 특수 부대에서 그야말로 뛰어난 성과를 올리며 영웅이 되어버리고는, '내 관심은 오로지 고고학이야'라는 신념이 가득찬 얼굴로는 세계 이 곳 저 곳을 뛰어다니며 그 방대한 지식의 힘을 자랑하는 키튼은 ..보험조사원이 되어서 '미궁에 빠진, 손대기 어려운, 이런저런 이해관계가 얽혀든' 많은 사건들을 몸소 해결해버린다.
...키튼을 비꼬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다. 사실 내 눈으로 확인못했을 뿐이지 이런 사람이 지구 상에 하나쯤 존재한다고 해서 그걸 분개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단지 좀, 부러울 뿐이지.

이 작품은 이 '키튼'이란 인물을 내세우며, 유럽 역사와 사회 이 곳 저 곳을 두루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재미있다. 정말, 아주, 재미있다.
현재 연재되고 있는 '20세기 소년'이나 많은 논란을 만들어낸 '몬스터'의 작가답게, 그 철저한 정보 수집과 사실적인 배경들은 흥미와 호기심을 놓치지 않게 붙드는 힘을 가졌다.
게다가 앞서 말한 것처럼 '대단한 키튼'이란 인물의 캐릭터의 힘도 분명하게 설정해 놓아 '가식'이나 '거부감'이 없이 받아 들여진다. 
그리고, 작가 특유의 정치에 대한 관심 및 문제 의식을 심어 놓아 긴장감 속에서 일정한 방향성을 유지하게 만들기도 한다.
분하긴해도, 이런 종류의 작품을 만화로 만들 수 있는 나라가 현재 일본이다.
캐릭터와 드라마의 조화를 멋드러지게 살리면서도 속도감있는 진행으로 즐거움을 놓치지 않게 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작가의 생각'을 심어놓는 멋진 재주다.

이 책을 보고, 친구에게 처음 했던 말은
"있잖아. 너랑 나랑 사막에서 조난당해도 살아돌올 수 있는 방법을 배운 것 같아, 나."
였다. 키튼이 사막에서 돌아오는 장면을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나의 이 말에 적극 동감해주지 않을까?
이렇게 사실적인 내용 구성은 꽤나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몬스터'로 시작한 이 작가의 책을 읽고 나는 일본말을 얼른 제대로 마스터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이 사람과 이야기를 한 번 나눠봤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 작품 어디서나 '정의'와 '역사의식'이라는 커다란 흐름, 그리고 세계 정치와 불의에 대한 민감한 반응이 나를 꽤 많이 흔들어 놓았으니까.
작가와 작품을 완전히 동일시해서는 안된다는 걸 알지만, 정말로 이 사람과의 대화가 의미있지 않을까란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랄까?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일본인에 대한 반감' 때문일까? 묻고 싶다. 다른 나라에 대한 역사가 아닌 당신들의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고.. 싸우고 싶으냐고? 아니, 천만에. 하지만, 분명 이런 작품을 그려내는 작가가 왜곡된 역사의식을 갖고 있다면 너무, 슬플 것 같으니까.

이런 저런 이야기로 혹시 이 작가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다면, 당장 머리를 흔들어 버리고 내 리뷰따위는 던져버리고, 당장 책을 먼저 읽어 보기를 권한다.
'재미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작가의 매력을 놓치는 실수는 하지 않았으면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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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1-27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림으로님, 오랜만에 나오셨군요.
저도 우라사와 나오키 만화 좋아해요.
그의 만화는 재미도 있고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도 보이고
참 좋은 것 같아요.
리뷰 읽고보니 꼭 사고싶어지잖아요.
어디서 세일 안하나?ㅎㅎ
<몬스터>와 <20세기 소년>은 20프로인가 30프로 세일할 때 샀거든요.^^

날개 2005-01-27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스터키튼 좋아하는 분 참 많죠..^^ 전 그래도 맥가이버가 더 좋아요~~~!!
로드무비님, 마스터 키튼 굿모닝서점에서 30% 세일중입니다..^^*

기다림으로 2005-01-27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로드무비님^^ 역시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작가죠? 공동구매같은거 신청해 보는 거 어떨까요? ... 2명은 안되겠죠?
날개님의 좋은 소식~ 감사드려요. 그리고, 역시 맥가이버에 대한 애정을 가라앉히기는 힘들죠. 아무렴요..^^
 
체 게바라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9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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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유명한 일을 했는지, 사람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는지 알 수 없었다. '체 게바라' 라는 이름이 어느 틈엔가 자연스럽게 떠올랐지만 그 뿐이었다.
쿠바 혁명을 주도했던 사람이란다. 카스트로 정권이 성립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란다. 쿠바? 군인들이 무장한 채로 거리를 돌아다니고, 시가를 아주 잘 만드는 위험한 그..곳? 3차 대전의 위험이 생길뻔했던 그 사회주의 국가? ..호감이 없을 뿐더러, 관심도 없던 곳이다.

그런 내가 2005년을 시작하는 책으로 이 책을 선택했던 것은, 순전히 우리 목사님 때문이었다.
이제는 작년이 되버린 2004년 어느 날, 목사님께서 설교 시간에 '전사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남자를 아느냐'고 물어오셨다. 전사..? 게다가 그리스도? 이름만 알고 있던 체 게바라에 대해 이야기하시며 목사님은 '치열하게 저항하며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을 위해 사는 삶'에 대해 말씀하셨다.

단지, 그 이유였다. 누군가에 의해서 저렇게 평가 받을 수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떤 걸까? 그게 궁금했고, 2004년이 끝날 쯤 이 책을 주문하고야 말았다.

아르헨티나 사람이었고, 의사였고, 천식이 있었고, 보통의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던 영리한 청년이었던 그는 인생을 바꿔놓을 여행을 하고 만다.
쿠바 혁명에 뛰어들었고, 게릴라가 됐고, 몇 년에 걸쳐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일을 반복하며 마침내 82명으로 시작한 혁명이 성공하고 말았다.
쿠바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고, 외교 관계 역시 이전에 강대국 주도권을 되돌리려 노력하며 경제적으로 발판을 잡기위해 최선을 다했고, 겨우 성공한 쿠바 혁명의 발판을 집어 던지고 다시 게릴라가 됐다.

그래서?
나에게 묻는다면.
그래서, 어쩌라구? 그래서 체 게바라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거야? 그래서, 체 게바라라는 인물에게 빠져버린거야?
그렇게 묻는다면, 나는 조금 망설일거다.
그의 외적인 업적이란 것은 분명 대단했고, 세계 젊은이들을 열광하게했던 것도 사실이고, 지금도 기억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나는 그의 다른 면에 마음이 움직였다.

자신에 대한 완벽한 이상향에 도전했다는 점이 그렇다.
누구나 그렇듯이 사회의 문제 앞에서 분노하고 그 문제에 맞서 싸울 것을 다짐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결국에는 약한 의지의 문제일게다. 그는 직접 몸으로 겪은 사회 병든 곳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 이것은 내 말처럼, 혹은 당신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이런 강력한 추진력과 신념은 부러웠다.
쿠바 내에서 역시 마찬가지다. 평등한 인생을 꿈꿨던 그는, 생활 속 어느 곳에서나 그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칼같이 날카롭게 움직였다. 나태해지고 게으르지 않게 늘 깨어있었고, 죽음 한 가운데서도 자신의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정'이 가지 않는 사람이긴 하다. 완벽한 자기 관리에 힘썼던 그를 보노라면, 한숨이 나오기 까지 하니까.
하지만, 자신과 주위를 단련시키던 이 사람이 바라던 것은 '사회의 상처를 제대로 아물게 하는 것'이었다. 곪지 않고, 덧나지 않게 하기 위해 처음 치료부터 올바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의 모습은, 그렇기에 나를 반성시킨다.

신념을 가진다는 것은,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옳음을 찾아내는 것이다.
신념을 지킨다는 것은, 내가 사는 이 현재를 조금도 낭비하지 않고 맞선다는 것이다.
작가의 굉장한 집념으로 혹은 애정으로 이야기되는 체 게바라는,
억지로 신화를 꿈꾸지 않고, 과장되게 감동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실로 이야기되는 그의 삶에서 보여지는 낭비할 것 없었던 그 시간들은, 이상을 위해 현실을 치열하게 살았던 그 모습들은, 나의 신념의 흔들림을 보여준다.
2005년. 새롭게 시작되는 한 해 맞는 준비, 단지 깨끗하게 치운 방이나 큰 맘 먹고 끊은 학원 수강증이 아니라, 내 신념의 시작으로 마음먹길 원한다면 '체 게바라'를 만나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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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5-01-26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광하지 않는 리뷰인데도 믿음직한 느낌이 전해집니다.

기다림으로 2005-01-27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솜씨없는 제 글을 읽고, 그 마음을 건져내신 숨은아이님의 시선이 더 돋보입니다^^
 
야만의 시대 - 영화로 읽는 세계 속 분쟁
김성진 지음 / 황소자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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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극장에 갔을 때, 설경구 주연의 '역도산'의 예고 필름을 보았다. 그저 조금 통통해진 눈빛좋은 배우의 모습외엔 관심없던 영화였는데, 영화를 보고 나온 후에도 잠깐 본 예고편이 머릿속에 남았다.
"나는 한국인이고, 일본인이고 그런거 몰라.. 난, 세계인이다."
라는 대사였다. 아직 영화를 안 봤으므로, 영화에 대해서는 뭐라 말 할 수 없지만 그 외침에 섞인 절박함정도는 읽어 낼 수가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도 외치고 싶었다.
"나는 쿠르드족이고 체첸이고 IRA고 그런거 몰라..난, 세계인일뿐이야!!"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내 이웃이 나에게 총을 들이댈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서,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는 심장에 대해서, 결국에는 더러운 욕심을 위해 팽개친 양심에 대해서..... 얼마나 더 침묵할 수 있을까?
세계의 수호자라고 자처하는 강대국들과
지금 당장이라도 나라 한 두 개쯤은 거뜬하게 쥐고 흔들 자본가들과
신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는 신의 사제들과
또 다른 권력의 핵심에 서 있는 언론인이라는 사명을 가진 이들과
'세상의 중심'에 닿아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날카롭게 묻고 싶었던 이 질문을 받아야하는 진정한 사람을 이제야 찾아냈다.

'너는 언제까지 모르는체 할거냐?
책을 읽고 TV를 보며 분노하는 한 시간이 지나면, 아무 상관없어져버리는 너는
아무 상관없다는 이유만으로 양심의 가책마저 피해갈수 있는 너는
정의를 위해 살아야한다는 신념과는 별개로 살아갈 수 있는 너는
..언제가 되어야 그 침묵에서 벗어날거냐?'
누군가에 대한 정의로운 분노일지라도 그 분노보다 중요한 것은, 그저 '내 삶'이다. 내 삶의 돌아가는 모양조차 제대로 잡아내지 못한 주제에 다른 이에 대한 말뿐인 비난을 일삼는 것은, 창피하다.

슬펐고, 창피했고, 그리고 설익은 정의감으로 책을 읽어 내려갔다.

영화들을 골라내며, 그 영화 속의 상황과 세계의 분쟁들을 연결시키며 이해시키는 것이 이 책의 씌여진 목적일게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딱! 그 만큼의 역할은 무리없이 해내고 있다. 게다가 나처럼 국제 정치에 둔한 사람들이 읽기에 적합하다. 영화를 통해 분쟁의 원인이나 혹은 그로 인한 피해와 현재 상황, 이제까지의 진행, 굵직한 인물들과 그 틈에서 고통 당한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어설픈 감정을 드러내는 대신 '아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솜씨가 세련되진 않지만 공감할만하다.
가끔 어딘가에서 빌려쓴것처럼 조화가 안되거나, 붕 뜨는 글도 있지만..

'글을 읽는 즐거움'보다는 '사실을 아는 기회'를 가진다는 점에 더 큰 중심을 두고 싶고, 실제로 그렇게 읽었다. 대단히 문학사적인, 꽤나 잘 쓴..글이라는 칭찬을 붙일수는 없어도 이 책을 읽는 시간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환상이나 상상처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없겠지만, 사실을 눈 똑바로 뜨고 보는 것처럼 어려운 것도 없는 법이니까.
그리고, 이 놀랄만한 사실들에 더불어 나오는 영화들은 당장이라도 보고 싶을만큼 마음을 당긴다. 비디오 가게에서 흔하게 빌릴 수 있는 영화들부터, 절대로! 비디오 가게에서는 구할 수 없을 게 분명한 영화들까지.. 우리가 모른체 했던 곳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들은 많았다.

지리적인 이점이라든가 장기적인 국익이라든가 안정적인 정치적 기반이라든가..이런 걸 생각하지 않고 국제 정치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어떤 분이 나에게 해준 말씀처럼 "땅에 발을 대지 않고 걷고 싶은 허황된 욕심"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이상과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고, 존재하는 만큼 멀다는 사실을 아는 나 역시 전쟁 중에 뛰어들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똑같은 인간이랍니다. 우리는 사랑만으로 살 수 있어요. 모두 용서하고 화해해요."라며 두 팔벌릴 자신도 없다.
하지만, 욕심이라고 해서 자신이 없는 일이라고 해서..
포기해도 될 일이라고 누가 정했는가?

포기하고, 포기하지 않은 많은 이들의 흔적을 이 책 곳곳에서 찾아보며..나처럼 그저 몇 시간에 불과한 시간이라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을 일깨우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 혼자 다짐한다는 것이 어쩐지 쑥쓰러워서 끌어들여보고 싶은 어리광이랄까..
'가슴 속에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일어났다.' 나 이런 구절 유치하다고 생각했는데, 가끔 한 번씩 이렇게 뜨겁게 올라오는 유치함으로 차갑고 무관심한 내 심장을 덥히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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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5-01-07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림으로님의 기분이 짐작되는 것 같은데요. 좋은 리뷰, 추천.

기다림으로 2005-01-07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께서 짐작해주신 제 기분은, 진우맘님의 공감으로 굉장히 든든합니다. 누군가와 생각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일은 뭐랄까요..외로움을 덜어 준다고 해야하나요? ^^

감사합니다, 진우맘님~
 
데스 노트 Death Note 2
오바 츠구미 지음, 오바타 다케시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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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특별한' 존재에 대한 동경에서 시작된 상상에 사로잡히곤 한다. 어렸을 적 지구를 구하기 위해 늘 악당들 틈에서 줄기차게 싸움만했던 독수리 5형제가 되보기도 하며, 어떤 사건이라도 진실을 구해내고 마는 홈즈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하며, 반대로 매력적인 뤼팽을 꿈꾸기도 한다.
이들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할 많은 난관들과 어려움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특별해 질 수가 있다는 데 이런 것쯤이야 가뿐하게 감수해버리곤 한다.
왜?
그것은 지금 나의 자리가 평범하기 때문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평화로울 수 있는 이 삶의 테두리가 나쁘게 말하자면, '심심해질'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심심함'이 바로 이 만화를 만들어냈다. 무료한 사신이 자신의 노트를 인간세상에 던져놓고는 '음..이게 어떻게 되려나?'라는 단순 호기심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이 책으로 끌어 들였다.
동시에 앞에서 말한 '특별한' 존재가 되어버린 라이토를 보는 즐거움을 느껴버렸기 때문이랄까?

어쨌든, 이 만화. 제대로 건진 수작이다.
'얼굴과 이름을 아는 상대를, 말 그대로 내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사신의 노트'를 줍게 된 '심신 모두 권장할만한 건강함을 가지고 있는 지적이고 게다가 대담하기까지한 모범적인 고등학생'의 이야기.
소재부터 눈길을 끄는 데스노트는 그 매력을 이 곳, 저 곳에 잔뜩 흘려버리고 만다. 탄탄한 이야기 구성, 보일듯 말듯한 해결의 실마리, 박빙의 승부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독특한 두 인물의 대결구도, 끊임없이 머릿속을 가르는 질문들과 더불어 이제는 귀여워보이는 사신특유의 솔직함과 담백함.
...멋지다!

재미있고, 독특하며, 흡입력이 강한 만화라는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은 아마도..(과장을 조금 보탠다면)없지 않을까?

이 소재를 살려내는 이야기 전개의 가장 큰 획은 '라이토, L 둘 중에 누가 죽을 것이냐?'라는 외부적인 요소와 함께 '라이토의 선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라는 내부적인 물음일게다.
외부적인 요소는 기가막힌 추리소설이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잘 진행되고 있으니, 이 만화를 통해서 그저 즐겨보기를 바란다.
사신이 인간사회에 보내는 '인간은 정말 신기해'라는 궁금증 역시 흥미롭다. 사신이라는 그 냉혹한 말 뒤에서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때론 잔인하게 인간을 바라보는 사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꽤나 볼만하다.

이 만화를 보는 개개인에게 주어진 문제는 바로 '저 놈은 죽을만해, 당연히 죽어 마땅하지!'라고 모두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을 라이토의 능력으로 '죽여준다면' 이상적인 사회가 올 것인가? 아니 그 전에 그것에 대해 찬성해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다.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당연히 반대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형이라는 제도가 개인의 판단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므로. 자기 스스로를 '절대 선'으로 믿고 있는 이상 오류를 인정하지 않으며 아무 거리낌없이 '죽음의 처형'을 계속 집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될까, 이 만화?
사신의 호기심 하나에 바뀌어버린 한 아이의 인생과 그로인해 변해가는 인간사회의 모습.
스펙터클하며 손에 땀을 쥐게 하는..등등의 뻔한 소개말을, 이 작품 앞에 나도 쓰고 싶다.

아아..그리고, 어쨌든 나에게 이런 노트따위는 주지 않았으면.
남의 운명을 바꿔버리고 멀쩡할 수 없는 정신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고 싶은 욕망과 호기심을 가진 더 할 수 없이 '평범하고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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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2-17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는 날개님이, 오늘은 기다림으로님이......

이 책 사야만 하겠군요.

올해는 책 더 안사려고 했는데......^^

너무 읽고 싶게 쓰셨어요.

땡스투 눌러요.^^

날개 2004-12-17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너무 흥미진진해서.. 저는 좀 걱정입니다. 과연 이 작가는 라이토를 어떻게 하려고 하는걸까.. 하구요..

라이토와 같은 선택의 기회조차 나에겐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기다림으로 2004-12-17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로드무비님^^ 책 값이 만만치 않지요? 음..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올 하반기 가장 문제작이라는 표현이 정말 절묘한 작품입니다^^

맞습니다, 날개님. 라이토 이 녀석이 어떻게 될지...하지만, 끝이 어떻게 되든 그 과정에서 오는 즐거움을 놓치지 말아요, 우리^^(라는 말이 버거우신건 아니시죠?) 동감입니다. 그런 기회 앞에서 뭘..어쩌겠습니까?

진/우맘 2004-12-18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멋진 리뷰네요. 저 만화, 꼭 기억해 두겠습니다.

저도 사신 노트는 필요 없어요. 다만, 제 뱃살을 얼굴도 알고 이름도 아는 다른 사람에게 떼어 붙여줄 수 있는...뱃살 노트는 꼭 한 권 있었으면...ㅡ,ㅡ;;

기다림으로 2004-12-18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 너무너무 갖고 싶잖아요!! 그 노트...주우시면 저도 한 장 뜯어주세요..^^;;

팥없는붕어빵 2005-02-03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데요...뱃살노트...^ㅡ^;;;
만화에 나오는 인물이라서 그런지 라이토 정말 대단합니다..!!!
저로서는(그런 기회가 오지도 않겠지만..) 데스노트를 가지게 된다면..불행의 시작이라고 느껴질 것 같군요..
전 데스노트가 있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싶습니다..ㅡㅅㅡ;;

기다림으로 2005-02-05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팥없는 붕어빵'님. 어쩐지..조금 쓸쓸해 지는 이름인걸요^^ 팥이 없다니요!!
아..역시나 데스노트의 위력에는 조금쯤 움찔해버리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