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시대 - 영화로 읽는 세계 속 분쟁
김성진 지음 / 황소자리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극장에 갔을 때, 설경구 주연의 '역도산'의 예고 필름을 보았다. 그저 조금 통통해진 눈빛좋은 배우의 모습외엔 관심없던 영화였는데, 영화를 보고 나온 후에도 잠깐 본 예고편이 머릿속에 남았다.
"나는 한국인이고, 일본인이고 그런거 몰라.. 난, 세계인이다."
라는 대사였다. 아직 영화를 안 봤으므로, 영화에 대해서는 뭐라 말 할 수 없지만 그 외침에 섞인 절박함정도는 읽어 낼 수가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도 외치고 싶었다.
"나는 쿠르드족이고 체첸이고 IRA고 그런거 몰라..난, 세계인일뿐이야!!"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내 이웃이 나에게 총을 들이댈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서,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는 심장에 대해서, 결국에는 더러운 욕심을 위해 팽개친 양심에 대해서..... 얼마나 더 침묵할 수 있을까?
세계의 수호자라고 자처하는 강대국들과
지금 당장이라도 나라 한 두 개쯤은 거뜬하게 쥐고 흔들 자본가들과
신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는 신의 사제들과
또 다른 권력의 핵심에 서 있는 언론인이라는 사명을 가진 이들과
'세상의 중심'에 닿아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날카롭게 묻고 싶었던 이 질문을 받아야하는 진정한 사람을 이제야 찾아냈다.

'너는 언제까지 모르는체 할거냐?
책을 읽고 TV를 보며 분노하는 한 시간이 지나면, 아무 상관없어져버리는 너는
아무 상관없다는 이유만으로 양심의 가책마저 피해갈수 있는 너는
정의를 위해 살아야한다는 신념과는 별개로 살아갈 수 있는 너는
..언제가 되어야 그 침묵에서 벗어날거냐?'
누군가에 대한 정의로운 분노일지라도 그 분노보다 중요한 것은, 그저 '내 삶'이다. 내 삶의 돌아가는 모양조차 제대로 잡아내지 못한 주제에 다른 이에 대한 말뿐인 비난을 일삼는 것은, 창피하다.

슬펐고, 창피했고, 그리고 설익은 정의감으로 책을 읽어 내려갔다.

영화들을 골라내며, 그 영화 속의 상황과 세계의 분쟁들을 연결시키며 이해시키는 것이 이 책의 씌여진 목적일게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딱! 그 만큼의 역할은 무리없이 해내고 있다. 게다가 나처럼 국제 정치에 둔한 사람들이 읽기에 적합하다. 영화를 통해 분쟁의 원인이나 혹은 그로 인한 피해와 현재 상황, 이제까지의 진행, 굵직한 인물들과 그 틈에서 고통 당한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어설픈 감정을 드러내는 대신 '아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솜씨가 세련되진 않지만 공감할만하다.
가끔 어딘가에서 빌려쓴것처럼 조화가 안되거나, 붕 뜨는 글도 있지만..

'글을 읽는 즐거움'보다는 '사실을 아는 기회'를 가진다는 점에 더 큰 중심을 두고 싶고, 실제로 그렇게 읽었다. 대단히 문학사적인, 꽤나 잘 쓴..글이라는 칭찬을 붙일수는 없어도 이 책을 읽는 시간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환상이나 상상처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없겠지만, 사실을 눈 똑바로 뜨고 보는 것처럼 어려운 것도 없는 법이니까.
그리고, 이 놀랄만한 사실들에 더불어 나오는 영화들은 당장이라도 보고 싶을만큼 마음을 당긴다. 비디오 가게에서 흔하게 빌릴 수 있는 영화들부터, 절대로! 비디오 가게에서는 구할 수 없을 게 분명한 영화들까지.. 우리가 모른체 했던 곳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들은 많았다.

지리적인 이점이라든가 장기적인 국익이라든가 안정적인 정치적 기반이라든가..이런 걸 생각하지 않고 국제 정치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어떤 분이 나에게 해준 말씀처럼 "땅에 발을 대지 않고 걷고 싶은 허황된 욕심"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이상과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고, 존재하는 만큼 멀다는 사실을 아는 나 역시 전쟁 중에 뛰어들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똑같은 인간이랍니다. 우리는 사랑만으로 살 수 있어요. 모두 용서하고 화해해요."라며 두 팔벌릴 자신도 없다.
하지만, 욕심이라고 해서 자신이 없는 일이라고 해서..
포기해도 될 일이라고 누가 정했는가?

포기하고, 포기하지 않은 많은 이들의 흔적을 이 책 곳곳에서 찾아보며..나처럼 그저 몇 시간에 불과한 시간이라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을 일깨우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 혼자 다짐한다는 것이 어쩐지 쑥쓰러워서 끌어들여보고 싶은 어리광이랄까..
'가슴 속에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일어났다.' 나 이런 구절 유치하다고 생각했는데, 가끔 한 번씩 이렇게 뜨겁게 올라오는 유치함으로 차갑고 무관심한 내 심장을 덥히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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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5-01-07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림으로님의 기분이 짐작되는 것 같은데요. 좋은 리뷰, 추천.

기다림으로 2005-01-07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께서 짐작해주신 제 기분은, 진우맘님의 공감으로 굉장히 든든합니다. 누군가와 생각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일은 뭐랄까요..외로움을 덜어 준다고 해야하나요? ^^

감사합니다, 진우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