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과 거짓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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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명절이 되면 할머니댁에 거르지 않고 찾아 갔다. 낯가림이 심하던 나는 사촌들과 잘 어울린다거나 숙모들틈에서 귀엽게 차례음식을 받아 먹는 재주는 없었다. 그저, 고역이었던 그 며칠동안이 재미없고 답답했다. 그래도 기억나는 게 있다면, 음식을 만들던 어른들의 손길이다. 고기전이나 동태전에 밀가루를 묻히면 바로 계란을 입혀 지글지글 익히던 손길들과 사과나 배를 빛이 나게 닦는 모습. 무엇보다도 밤을 깍던 할아버지의 모습. 무뚝뚝하시고 늘 세상과는 어울림없는 모습이던 할아버지의 밤깍던 모습은 조심스럽고, 깨끗했다. 먼저 손을 닦으시고 작은 칼로, 밤의 겉껍질을 깍아내시고 물에 담가 속껍질을 벗겨내시던 할아버지는 한 알의 밤톨을 깍으면서 수 십번이 넘는 손길로 밤알을 이리저리 만지시곤했다. 기독교인인 나는 이제 제사상에 절을 하지는 않지만, 아직도 할아버지의 그 손길만은 생생하다.

아마도, 그렇게까지 조심스러운 손길이셨던 까닭은 그것이 '제사 음식'이었기 때문일게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 소설과 '제사'는 아무 상관도 없다, 우선 밝히자면. 하지만 제일 먼저 나를 사로잡은 느낌은 '정갈함'이다. 꽉꽉 알갱이가 박힌 엿을 뚝뚝 덩어리로 끊어놓은 것처럼, 문장들은 단단하게 뭉쳐져있는 기분이랄까? 레이아웃이 그렇기도 했고, 내용이 그렇기도 했고. 공을 들여놓은 K시의 모습을 그려보며 내 고개는 K시의 낮은 산자락을 따라 함께 움직인다. 전경좋은 높은 건물위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밤의 모습을 보는 쓸쓸함도 함께 느껴진다. 이렇게 풍경속을 지나치다 만나는 사람들의 잘 짜여진 이야기의 흐름도 '정갈'하다.

삼대의 이야기가 서로 얽혀있으면서도, 끈끈한 관계로 붙어있으면서도 그 모양새가 깔끔하다고 할까? 이미 자신의 공간이 생겨버린, 두 형제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자신들을 묶고 있던 K시 속에서의 갈등과 화해, 그리고 숙명 따위의 이야기는 은희경 작가의 솜씨좋은 재주로 매끈하다. 이런 겉모양새를 떠나 조금더 작품 안으로 들어가 볼까?
K시는 떠나야 하거나, 남는 곳이다. 아니 남는 것이 아니라 '남겨져야' 하는 곳이다. 떠나고 싶었지만 떠날 수 없어서, 떠나고 싶지만 떠날 명분이 아무것도 없어서, 혹은 떠났지만 다시 쫓겨와야 했던 사람들이 모여 다시 떠나기를 염원하며 자리하는 곳이다. 그리고,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끊임없이 반목해야 했던 두 형제의 고향이다. 뭐라고 정의가 내려지지 않는데..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외적인 소설의 배경이 아니라 두 형제의 심리적인 배경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하나? 이 곳에서,이 형제들처럼 그리고 이 곳이 고향이었던 아버지들을 키워냈다.

영준과 영우, 너무 다른 모습으로 자랐지만 그저 또래 소년들처럼 바라는 것이 분명했던 그래서 같은 것을 바랬던 두 형제의 이야기는 다른 곳으로 뻗어 있다. 너무나 다른 시선, 같은 사건을 겪으면서도 달랐던 그들의 시선 중앙에는 결국 그들의 '아버지'가 있다. 형에 대한 아버지의 집착을 부러워했던 동생만큼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여유를 그리워하고, 동시에 미워했던 두 형제의 삶은 우리네 그것하고 많이 닮아있다.
고독이든 방황이든,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느끼는 벽앞에서 대처하는 거의 모든 수단이니까. 그래서 영준의 깊은 고독을 이해하는 순간 뻐근한 한 쪽 가슴이 느껴지고, 동시에 바람을 닮은 영우의 삶에 공감하는 순간 삶의 무게를 이해하게 되는 경험을 해버린다.

음.......
이 소설이 기존의 은희경 작가의 작품들과 다르게 평가받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냉소'의 시선이 사라졌다는 거다. 그 안에 뛰어들어 피터지게 싸우는 격렬함이 아니라, 어느 작품 어느 인물들이나 그저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기만 하는 그 태도는 다분히 냉소적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번 작품은 결국 '화해'라는 테마여서 인지 그 시선의 변화를 눈여겨 본다.
하지만, 나는 화해가 아니라 그저 '이해'의 시선만을 느낄 뿐이다. 이해, 그래 어쩌면 이 단어가 포함한 많은 덕목들이 따뜻함과 연결될 수도 있겠지만, 그저 '받아들임'이라는 느낌은 더 차갑다. 이 작품의 '이해'는 상대편에 대한 무조건적인 감싸안음의 모습이 아니라, 그저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랄까?
두 형제가 알아버린 아버지의 비밀 아니면 거짓말인 세 사람 혹은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과 작품안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인물들의 응시는 그렇게 다가온다.
서로의 삶을 바라보는 것. 그런 느낌. 정말 그저 느낌일 뿐인 이 감정.
어떤 깨달음이나 감정의 정화를 굳이 책에 대한 느낌으로 이야기해야 한다면,
어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응시'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의 테두리의 의지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거. 그렇게 바라보는 법을 찾은 두 형제는, 앞으로도 다를테지만 그걸로 충분한것처럼.

순간순간 휘두르는 날카로운 말솜씨는 여전하다. 둥글해진 것 같은 작가 특유의 서늘함은 불쑥불쑥 튀어나와 여전히 즐거웠다. 오랜시간 길게 곱씹어보지는 않아도, 그래도 나는 잠시동안 다른 사람의 삶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것의 여유를 잠시동안 배웠다. ...그래서, 다시 만난 작가가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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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2-17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해가 아니라 이해의 시선만 해도 그게 어딥니까.
저도 이 책 사뒀는데 못 읽고 있네요.
님의 리뷰 보니 빨리 읽고싶군요.ㅠ,.ㅠ

기다림으로 2005-02-17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로드무비님 말씀처럼 '이해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는 걸로 충분한 작품입니다. 저도 요즘 쌓여가는 책들속에 파묻혀있느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