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소설 특유의 불쾌함을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이다. 이 세상에는 이미 이지메를 소재로 한 무척 많은 소설이 있지만 거기에 이 책 한 권이 더해져야 한다면 그 이유는 바로 그 불쾌함 때문일 것이다. 작중 화자이자 주인공은 사시라는 신체조건을 빌미로 극심한 교내 괴롭힘에 시달린다. 그런 그에게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이지메를 당하는 중인 고지마가 다가온다. 거의 편지, 그다지 접촉은 없는 관계지만 둘은 가까워지는데, 친구보다는 포로수용소에서 만난 다른 국적의 포로들 같은 느낌이다. 같은 감정이지만 닿지 않는 언어를 쓰고 있는. 이는 괴롭힘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고지마와 괴롭힘의 시작점인 사시를 수술로 고칠 수 있는 화자의 입장차이로 발전한다. 소설 후반부로 가면서 고지마가 보이는 기괴한 행동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공식을 흔든다. 이 행동이 불쾌한 이유는 단지 기괴하기 때문이 아니라 앞서 있었던 화자와 모모세의 대화 때문이다. 괴롭히는 무리 중 하나인 모모세는 괴롭힘의 이유가 사시가 아니라 그저 그것이 즐겁고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화자에게는 왜 자신들을 칼로 찌르지 않는지 묻는다. 그에 대한 대답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차이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괴롭히는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고지마의 적극적 피해자 되기는 가해자의 언어를 가진 피해자, 가해자화 된 피해자이므로 불쾌하다. 피해자에게 피해자성을 요구할 수도, 그렇다고 가해자의 언어대로 따라갈 수도 없는 독자는 인간성의 바닥 같은 끈적한 불쾌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주로 일본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불쾌함이다. 결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너와 내 안에 그런 심연이 있다는 걸 알았고 그걸 들여다본 것으로 충분. 모모세의 말처럼 그 심연은 전쟁에도 예술에도 있다. 전범국 출신 소설에서 전쟁이란 단어가 등장할 때마다 유심히 보게 된다. 아 그런 생각으로 살고 있구나 하는 마음. 교실에서 국제사회까지 너무 나갔나? 하지만 왜, 라는 질문이 등장하는 무대마다 이 소설을 그 심연을 대답으로 들이밀고 있는 느낌이다.
음식 영화라면 역시 일본 영화다. 드라마도 그렇고. 지금까지 봐온 먹고 마시는 이야기들 중 기억에 남는 건 대부분 일본 것이다. 그래서 먹어본 적도 없는 일본 음식에 향수 비슷한 감각을 가지고 이건가? 하며 첫만남에 반갑게 먹어보고 실망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고... 안도하기도 하고...그런 영화와 드라마의 푸드 스타일리스트가 쓴 음식 이야기다. 그가 참여한 작품은 대부분이 봤음직한, 채널을 바꾸다가 스쳐지나가기라도 했을, 최소한 제목이라도 들어보았을 유명한 것들이다.그 작품들이 한국에서 인기가 많기도 했었고 또 가깝기도 하니까 이런저런 행사로 한국에 방문하는 이야기들도 있다. 외국인의 한국 음식 체험기는 언제나 재미있고 흥미롭고. 이야기마다 거기 나오는 음식의 레시피가 따라오는데 한국 음식을 만들 때 마늘 1톨, 2톨 이라는 준비물을 보고 이것은 재해석이구나!! 하는 생각. 마늘 한 통, 두 통이 아니라고요...?깔끔하고 산뜻한 느낌의 일본 음식들을 연달아 읽으면서 그간 영화와 드라마에서 봐왔던 따뜻한 느낌이 의외로 음식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음식이라면 손맛이 절대적 우위인데 일본 음식은 기술과 재료가 우선이다. 기술이 한편 정성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일본에는 재료는 다 똑같은데 왜 엄마가 비벼준 비빔밥보다 맛없지? 라는 개념이 없어서... 그래서 오히려 일본에서 음식 영화와 드라마를 만들기 좋지 않았을까? 음식이 온전히 음식으로만 존재하고 그 의도하는 분위기를 방해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면 내가 그동안 일본 영화와 드라마의 음식에서 느낀 향수같은 감정은 음식에 대한 게 아니라 거기 깔려있는 따스함, 다정함, 그리움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패티 스미스가 가장 좋나하는 소설이자 경전이라고 한다.패티 스미스에 매료되는 시대와, 그 매료되는 마음을 좋아하는 시대와, 패티 스미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가 있다. 지금이 그 중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정치적 올바름과 안면인식의 시대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좋다. 규율을 깨부수고 자유와 사랑만을 정언 명령으로 삼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편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장 주네를 여전히 즐겨 읽는 독자라면 괜찮을지도... 어쨌든 내 경우는 프랑스 문학 특유의 장벽도 있어 꽤 고전했다.주요 페미니스트 작품이라는 설명이 있는데 어떤 결인지 잘 모르겠다. 여성이 쓴 첫 범죄인의 삶이라는 점이? 이건 더 찾아봐야 할 부분...이런저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을 수 있는 매력은 소설의 시작부터 부서진 복사뼈로부터 나왔다. 뼈가 부서지더라도 담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욕망, 욕망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자유. 그를 묶어둘 규칙이나 법이 이 세상에 있긴 할까? 그 자유로움은 그가 무시한 엄격하고 가치있는 것들과 동등하게 문학이란 그릇에 담긴다. 그게 너무 좋다.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을 드나드는 쥘리앵.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이 완성되었다는 생각.
유명인의 추천사와 재미있을 거 같은 소재에 시작했는데 내용이 너무 고구마... 게다가 열린 결말... 왜인지 가독성도 떨어지고(번역이 이상하다는 느낌도 없는데)...인공지능 아기로 좋은 엄마의 자질을 연습한다는 설정도 굉장히 스트레스를 주었다. 엄마는 아기만 보면 무조건 애정을 산출하는 기계가 아니라고요! 한편으로는 단편적인 한 조각만 두고 순식간에 천하의 몹쓸 엄마를 만드는 요즈음의 커뮤니티 글과 댓글을 쓰는 사람들이 현실 인공지능 아기 역할을 수행중이란 생각이 들어서... 더 스트레스를 받았다.이런 류의 소설(디스토피아를 다룬)을 읽으면 현실과 비교하며 우리의 위험과 희망을 저울질해보는 게 보통인데 희안하게도 이 소설은 읽고 있자니 나의 부족한 엄마 자질을 공개비판 받는 기분이 크게 들었다. 양육노동을 하지 않거나 최소한 남성이라면 또 다른 기분으로 읽을 수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