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영화라면 역시 일본 영화다. 드라마도 그렇고. 지금까지 봐온 먹고 마시는 이야기들 중 기억에 남는 건 대부분 일본 것이다. 그래서 먹어본 적도 없는 일본 음식에 향수 비슷한 감각을 가지고 이건가? 하며 첫만남에 반갑게 먹어보고 실망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고... 안도하기도 하고...그런 영화와 드라마의 푸드 스타일리스트가 쓴 음식 이야기다. 그가 참여한 작품은 대부분이 봤음직한, 채널을 바꾸다가 스쳐지나가기라도 했을, 최소한 제목이라도 들어보았을 유명한 것들이다.그 작품들이 한국에서 인기가 많기도 했었고 또 가깝기도 하니까 이런저런 행사로 한국에 방문하는 이야기들도 있다. 외국인의 한국 음식 체험기는 언제나 재미있고 흥미롭고. 이야기마다 거기 나오는 음식의 레시피가 따라오는데 한국 음식을 만들 때 마늘 1톨, 2톨 이라는 준비물을 보고 이것은 재해석이구나!! 하는 생각. 마늘 한 통, 두 통이 아니라고요...?깔끔하고 산뜻한 느낌의 일본 음식들을 연달아 읽으면서 그간 영화와 드라마에서 봐왔던 따뜻한 느낌이 의외로 음식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음식이라면 손맛이 절대적 우위인데 일본 음식은 기술과 재료가 우선이다. 기술이 한편 정성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일본에는 재료는 다 똑같은데 왜 엄마가 비벼준 비빔밥보다 맛없지? 라는 개념이 없어서... 그래서 오히려 일본에서 음식 영화와 드라마를 만들기 좋지 않았을까? 음식이 온전히 음식으로만 존재하고 그 의도하는 분위기를 방해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면 내가 그동안 일본 영화와 드라마의 음식에서 느낀 향수같은 감정은 음식에 대한 게 아니라 거기 깔려있는 따스함, 다정함, 그리움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패티 스미스가 가장 좋나하는 소설이자 경전이라고 한다.패티 스미스에 매료되는 시대와, 그 매료되는 마음을 좋아하는 시대와, 패티 스미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가 있다. 지금이 그 중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정치적 올바름과 안면인식의 시대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좋다. 규율을 깨부수고 자유와 사랑만을 정언 명령으로 삼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편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장 주네를 여전히 즐겨 읽는 독자라면 괜찮을지도... 어쨌든 내 경우는 프랑스 문학 특유의 장벽도 있어 꽤 고전했다.주요 페미니스트 작품이라는 설명이 있는데 어떤 결인지 잘 모르겠다. 여성이 쓴 첫 범죄인의 삶이라는 점이? 이건 더 찾아봐야 할 부분...이런저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을 수 있는 매력은 소설의 시작부터 부서진 복사뼈로부터 나왔다. 뼈가 부서지더라도 담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욕망, 욕망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자유. 그를 묶어둘 규칙이나 법이 이 세상에 있긴 할까? 그 자유로움은 그가 무시한 엄격하고 가치있는 것들과 동등하게 문학이란 그릇에 담긴다. 그게 너무 좋다.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을 드나드는 쥘리앵.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이 완성되었다는 생각.
유명인의 추천사와 재미있을 거 같은 소재에 시작했는데 내용이 너무 고구마... 게다가 열린 결말... 왜인지 가독성도 떨어지고(번역이 이상하다는 느낌도 없는데)...인공지능 아기로 좋은 엄마의 자질을 연습한다는 설정도 굉장히 스트레스를 주었다. 엄마는 아기만 보면 무조건 애정을 산출하는 기계가 아니라고요! 한편으로는 단편적인 한 조각만 두고 순식간에 천하의 몹쓸 엄마를 만드는 요즈음의 커뮤니티 글과 댓글을 쓰는 사람들이 현실 인공지능 아기 역할을 수행중이란 생각이 들어서... 더 스트레스를 받았다.이런 류의 소설(디스토피아를 다룬)을 읽으면 현실과 비교하며 우리의 위험과 희망을 저울질해보는 게 보통인데 희안하게도 이 소설은 읽고 있자니 나의 부족한 엄마 자질을 공개비판 받는 기분이 크게 들었다. 양육노동을 하지 않거나 최소한 남성이라면 또 다른 기분으로 읽을 수 있을지도.
내 또래의 사람들은 대형참사로 지난 시절을 불러올 수 있다. 성수대교는 초등학생 때, 삼풍백화점은 중학생 때 각각 무너졌고 대학생 때는 대구에서 지하철 화재가 있었다. 그때가 방학이었는데 고향인 대구에 가 있던 후배가 누나는 왜 내 생사확인 전화도 안 해요? 하고 나중에 한 연락이 대형참사가 나와 닿아있다는 최초의 자각이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트라우마가 된 세월호 침몰이 있다. 엄마가 된 나는 매일 울면서 뉴스를 봤다. 처음으로 정치학이 아닌 현실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평화시민혁명으로 대통령을 바꿀 때는 효능감 같은 것도 느꼈던 것 같다. 이게 마지막었다면 세월호의 상처는 아물 수 있었을까?하지만 안타깝게도 참사는 다시 일어났다. 축제를 즐기던 청년들이 산채로 숨이 막혀 세상을 떠났다. 밤이 늦도록 뉴스에서 사망자가 늘어나는 것을 무력하게 보고 있었다.이때 느낀 절망감을 사실 아직도 극복하지 못했다. 1년이 넘도록 유가족도 지인도 아닌 나는 그때 무너진 생활을 다시 복구시키지 못하고 있다. 옅어진 줄 알았던 세월호의 슬픔도 겹쳐진다. 아이 하나 청년으로 키우는 일, 일상을 즐기는 일도 복불복으로 실패하는 게 이 세상이란 생각에 우울하고 허무한 마음이 여전하다.이전에는 대형참사가 나와 닿아있는 줄 몰랐고, 세월호 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이태원 참사는 그 시간의 축적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는 절망감과 정말로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1년 넘는 시간이 흘렀다는 데서 오는 공포를 준다.그런 혼란스러운 마음에 필요한 게 이런 책이었다는 것을 읽고나서 깨닫는다. 참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우연, 어쩌다 일어난 재수없는 사건이 아니라 작은 균열로 시작되어 시스템 전체가 붕괴된 결과임을 인터뷰와 취재, 국내외와 과거, 현재를 넘나드는 정치사례, 그리고 참고 도서를 오가며 조목조목 짚어낸다. 이렇게 밑바닥을 들여다보고 나니 좀 차분해진다. 그렇다면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이 참사가 우연이 아니라 잘못된 정치를 넣은 결과값이라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기자가 사실을 전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되는 어수선한 요즘이다. 쉽게 욕하고 마는 해로운 기자와 그의 글과는 달리 이런 책은 참사의 씻김굿이고 이를 쓴 기자는 이 사회의 만신이다. 기자와 그의 작업이 봉합과 회복의 시작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