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이름 

 

 아득한 옛날에 우리 나라 사람은 이름과 성을 따로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느 사람에게 그냥 어느 이름이 있었을 뿐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이웃 중국에서 사람들이 성과 이름을 따로 지닌 것을 보고 '성명' 제도를 채택했다고 한다.  

 '모밀 국수'의 경우에 모밀이 국수를 꾸미듯이, '김철수'의 경우에 '김'이 '철수'를 꾸민다. 따라서 '김철수'의 뜻은 '김'씨 집안의 '철수' 또는 '김'이라는 성을 가진 '철수'가 된다. 이 세상에서 철수가 아주 많을 터인데, 그 가운데에서도 김씨 집안의 철수를 들추기 위해서 '김철수'라고 말한다. 그러니 '김철수'라는 성명의 속 알맹이는 철수이다. '김철수'의 '김철수' 됨에는 '김'됨보다는 '철수'됨이 훨씬 더 본질적이다. 

 우리 나라에서 사용될 수 있는 이름의 종류는 거의 무한대에 가까우나 성의 수효는 한정되어 있다. '김'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의 수효가 너무나 많아서, 누가 그를 '김'이라고 부름은 그를 '한국인'이라고 부름하고 아주 크게 동떨어지지 않는다. 누가 그를 김 선생이라고 불렀다고 해서 이름을 기억하는 공적의 인정을 크게 받지 못한다. 그가 '철수'라는 이름을 기억해야만 그의 김철수에 대한 높은 관심도가 인정된다. 

 옛날에는 누가 손아랫사람인 '김철수'를 부를 때에, 그가 '너'이면 '철수야'라고 불렀다. '김철수'가 부르는 사람의 생각에 높은 사람이면 '김 선생님'이라고 불렀으되, 존대의 대상이지만 꽤 가까운 사람이면 '철수 씨'라고 불렀다. '철수 씨'라고, 상대방을 존대하면서도 가깝게 생각하면서 부르던 경우가 성인끼리 하는 호칭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옛날의 '철수 씨'는 이제 '미스터 킴'으로 바꾸인다. 또 그 자리에서 '순애 씨'는 '미스 킴'이 되고, 그가 시집간 다음엔 '미세스 팍'이 된다. 다만 이 '미스 킴'은 경상도 지역의 도시에선 '김 양'(일본말)이 되기도 한다. (또 경상도 지역의 도시에서는 '철수야'가 '김 군아'가, 그리고 '순애야'가 '김 양아'가 되기도 한다.  

 서양에서의 '미스터', '미세스' 또는 '미스'는, 우리 나라에서의 경우와는 달리, 누구를 '아무개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할 만큼 사이가 멀고 높은 예의를 갖추어야 할 경우에 사용된다. 그 말들의 뜻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는 전도되어서 '씨'를 갈음하게 되었다. 많은 한국인들이 서양 사람과 서양말로 하는 대화 속에서 서양말들을 이 전도된 뜻을 두고 사용하기 때문에 그들을 당황시키기도 한다. 

 이와 같은 서양말이나 일본말이 우리 나라 말 속에 들어와서 어휘를 풍부하게 했다면 불평할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말들의 한국어 속에서의 사용은 거기에 해당하는 한국어를 죽이거나 변질시킨다.  

 나는 '김철수'가 자기의 본래 이름인 '철수 씨'를 빼앗기고 '미스터 킴'이 된 것을 불쌍히 여긴다. 그리고 내가 그를 '철수 씨'라고 부를 때에 시대 감각에 뒤진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한스럽다.  

천구백칠십오년, 배움나무 

<뿌리깊은 나무의 생각> 한창기 지음/ 윤구병 외 엮음 (휴머니스트 출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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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균윌 > 7시 40분, 김기자의 세계

1. 월차를 내서 가기를 잘했다.  마포에서 일산, 일산에서 다시 상암동... 

알차게 하루를 쓰려고 무진장 노력한 과정의 보답이었지 싶다.

2. 이런 데 처음 와봤다는 초등학교때 친구는  

경제에 대해 다각도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물론 이런 강연회에 가끔씩 와야겠다는 즐거운 다짐도 내게 털어놓았다.

3. 김원장 기자는 실물이 나았다. 책의 홍보용 사진현수막을 떼어내고 싶었다.  

말씀도 달변에, 예를 드는 것도 쉽게 전달되었다. 나중에 화가되지 마시고 선생님 되시는 게...

4.  사실 20명도 채 안되는 사람 두고 강연듣기엔 참 아까운 자리였다는 생각이다.  

 동영상을 빨리 올려주셨으면 좋겠다.  

 참고로 이준구 교수님 동영상은  

 덕분에 시청 잘 했음을 밝혀둔다. 알라딘에 감사드린다. 

5. 증권투자에 대한 항간의 이야기 중 이런 게 있다. 

투자자는 두가지 감정만 잘 다스리면 된다는. 정답은 탐욕과 공포! 

나는 강연회 내내 이 두 단어가 자꾸 맴돌았다. 

6. 주택에 대해 과도한 지출을 삼가라는 직언은 마치 큰형이 자기 친동생에게 해주는 진심으로 들렸다. 

7. 친구가 싸인받기 창피해해서 그 친구 책에 내가 싸인을 받아주었다 . 

생산과 분배를 수식하는 형용사가 맘에 들었다. 

8. 김원장 기자 명함을 하나 입수해왔다. 나중에 기념으로 기사 제보 꼭 한번 해야겠다.  

9. 해냄출판사에 감사드린다.  

이런 강연회 뒤 참석자 모두가 기념사진 한방 찍는 시간이 있었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싶다. 

10. 오마이뉴스 기자들이 밤늦게까지 고생하시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바른 언론으로 꿋꿋이 버텨주었으면 하는 바램 한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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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이 나왔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건져올린 월척 메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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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음 둘이 되어 거침없는 슬픔 찾아오네
이제와서 꿈속을 해매어본들 어디에도 너는 없을거야
i saw something 너의 달콤했던 말
i saw something 너의 영원한 미소 그리워
이 순간들을 다시 헤아려보니 그래도 내게 기쁨이 더 많았어
영원한 것은 없다 생각하지는 말아요
우리 기억속에 남은 순간을 믿어요

한 마음 둘이 되어 달콤했던 순간 사라지네
이제와서 꿈속을 해매어본들 어디에도 너는 없을거야
i saw something 너의 달콤했던 말
i saw something 너의 영원한 미소 그리워
이 순간들을 다시 헤아려보니 그래도 내게 기쁨이 더 많은 날이었어
나 항상 너를 뺏길 것 같아 애써 모든 일들을 가리려고만 했지
그 아픈 속을 다시 헤아려보니 그래도 내게 기쁨이었었네

i saw something 너의 달콤했던 말
i saw something 너의 힘을 낸 고백
i saw something my peach alive
이제 모두 영원한 순간이 되려하네

i saw something
i saw some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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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5월 1일    

 토요일 번개치듯 어쩌다 만난 일대일 만남, 4월 중순 이후 몇분씩 길어진 저녁통화가 있긴 있었다. 또래모임으로 워낙 뭉쳐다니면서 열몇명의 아이들이 깔깔대고 다녔던 때였다. 우리 또래에 장군 이순신이 있었으면 우리 모임을 학익진이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우린 그때 교회에서 공동체를 통하여 친구들을 통하여 믿음의 기초를 세워가며 신앙생활의 장애물을 포위하고 이겨나가려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와중에 김선영을 보면 언제부턴가 마음이 설레고 한편으론 불편하고, 말은 통하는 것 같은데 서로 어려워한 구석도 있고 그랬다.

“… 요즘 얘가 왜 이러나 당황스럽고…”

  그건 역습이었다. 동숭동 <르샤>에서였다. Le chat. 프랑스어로 고양이를 뜻한다는 건 고등학교 불어선생님이 가르쳐주었었다. 참고로 프랑스어에는 남성명사가 있고 여성명사가 있다. 고양이는 남성명사다. 왜 남성명사인지는 묻는다면 유지윤 누나를 연결시켜 드릴 용의가 있다. 그 커피숍에서 어느 남자고양이 중대한 고비에 처해 정신이 하얘졌다. 커피숍 외벽 내벽이 온통 하얀색으로 꾸며진 곳이기도 했다. 그래도 철저한 고증과 완벽한 기획 끝에 고백해보리라 마음먹었던 시나리오는 어느새 저멀리 물건너가고 있었다. 짝사랑하고 있던 나의 마음은 여전했지만, 그 당시의 내 생각이란 고백의 시기가 연말쯤 가야 될 수 있겠지 하는 정도였다. 거절의 두려움도 컸겠다. 또한 나는 부서의 GBS리더장, 선영이는 새가족반 팀장이어서 벙어리 3개월, 귀머거리 3개월, 장님 3개월로 살아야 마땅한 때라고 스스로 묻고 답하던 때였다. 그렇죠, 하나님?

 완곡어법으로 돌아온 질문에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어쩌지 못하면서도 그때의 솔직한 심정을 진지하게 고백하게 되었다. 무엇이라 논리정연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던 것, 기다린 것과 기다려야 하는 것을 횡,,,, 이야기했다. 심지어 그 자리에서 우리 어머니가 너를 두고 넉달 가량 기도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까지 하고 말았다, 주여!

 침묵. 이제 선택의 칼은 김선영이 쥐고 있었다. 연이은 침묵. 최근 이 아이에게 있었던 몇가지 일을 두루뭉술 끄집어내며 말을 조심스럽게 시작한 김선영은 나와의 몇번의 데이트가 최근에 자신의 심경에 미친 파급을 잔잔히 얘기해주었다. 그 말의 끝자락에, 최근 들어온 어떤 선에 대하여 만나는 사람 있다며 반려한 말과 나를 세번 이상 만나고 있음에 비중을 둔 말이 우리가 사귀는 사이로 거듭날 수 있는 축포가 되어주었다. 내가 커피숍을 나오자 마자 한 첫 마디 때문에 나는 아직도 가끔, 김양에게 놀림을 당한다.


그럼 손잡아도 되는 거야? 우리 연애는 그렇게, 최소한 나에겐 민망하게 시작되었다
 

(2008년 4월 청년2부 <2야기>회지 게재/ 임윤정 청탁을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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