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 1일
토요일 번개치듯 어쩌다 만난 일대일 만남, 4월 중순 이후 몇분씩 길어진 저녁통화가 있긴 있었다. 또래모임으로 워낙 뭉쳐다니면서 열몇명의 아이들이 깔깔대고 다녔던 때였다. 우리 또래에 장군 이순신이 있었으면 우리 모임을 학익진이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우린 그때 교회에서 공동체를 통하여 친구들을 통하여 믿음의 기초를 세워가며 신앙생활의 장애물을 포위하고 이겨나가려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와중에 김선영을 보면 언제부턴가 마음이 설레고 한편으론 불편하고, 말은 통하는 것 같은데 서로 어려워한 구석도 있고 그랬다.
“… 요즘 얘가 왜 이러나 당황스럽고…”
그건 역습이었다. 동숭동 <르샤>에서였다. Le chat. 프랑스어로 고양이를 뜻한다는 건 고등학교 불어선생님이 가르쳐주었었다. 참고로 프랑스어에는 남성명사가 있고 여성명사가 있다. 고양이는 남성명사다. 왜 남성명사인지는 묻는다면 유지윤 누나를 연결시켜 드릴 용의가 있다. 그 커피숍에서 어느 ‘남자고양이’가 중대한 고비에 처해 정신이 하얘졌다. 커피숍 외벽 내벽이 온통 하얀색으로 꾸며진 곳이기도 했다. 그래도 철저한 고증과 완벽한 기획 끝에 고백해보리라 마음먹었던 시나리오는 어느새 저멀리 물건너가고 있었다. 짝사랑하고 있던 나의 마음은 여전했지만, 그 당시의 내 생각이란 고백의 시기가 연말쯤 가야 될 수 있겠지 하는 정도였다. 거절의 두려움도 컸겠다. 또한 나는 부서의 GBS리더장, 선영이는 새가족반 팀장이어서 벙어리 3개월, 귀머거리 3개월, 장님 3개월로 살아야 마땅한 때라고 스스로 묻고 답하던 때였다. 그렇죠, 하나님?
완곡어법으로 돌아온 질문에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어쩌지 못하면서도 그때의 솔직한 심정을 진지하게 고백하게 되었다. 무엇이라 논리정연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던 것, 기다린 것과 기다려야 하는 것을 횡,설,수,설, 이야기했다. 심지어 그 자리에서 우리 어머니가 너를 두고 넉달 가량 기도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까지 하고 말았다. 오, 주여!
침묵. 이제 선택의 칼은 김선영이 쥐고 있었다. 연이은 침묵. 최근 이 아이에게 있었던 몇가지 일을 두루뭉술 끄집어내며 말을 조심스럽게 시작한 김선영은 나와의 몇번의 데이트가 최근에 자신의 심경에 미친 파급을 잔잔히 얘기해주었다. 그 말의 끝자락에, 최근 들어온 어떤 선에 대하여 만나는 사람 있다며 반려한 말과 나를 세번 이상 만나고 있음에 비중을 둔 말이 우리가 사귀는 사이로 거듭날 수 있는 축포가 되어주었다. 내가 커피숍을 나오자 마자 한 첫 마디 때문에 나는 아직도 가끔, 김양에게 놀림을 당한다.
“그럼 손잡아도 되는 거야?” 우리 연애는 그렇게, 최소한 나에겐 민망하게 시작되었다.
(2008년 4월 청년2부 <2야기>회지 게재/ 임윤정 청탁을 받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