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도 안 한 데다가, 그래서 잔뜩 바가지욕을 몰아 먹은 데다가, 시험전날도 밤새 인터넷하고 당일 아침엔 8시까지 늦잠을 잔 경우가 되니, 어제까지의 항전결심은 온데간데 없고... 본능적으로 토요일 아침의 강렬한 휴식의 유혹에 시험응시를 포기하는 마음으로 굴러갔지만... 아내의 택시 불호령에 반신반의하며 집을 나서야 했고... 입실시간 거의 맞추어 고사장에 기어들어가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몹쓸 경험도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다. 공부를 안 하고 시험을 보는 일의 처참함을 어디 가서 몇만원에 할 수 있을 것인가.
1교시만이라도 내가 낼 수 있는 최선의 답을 써보자고 덤벼든 게 작전상 좋았다. 그러나 계산문제는 거의 건드릴 수 없었다. 하하. 1년전 열공했던 PER도 그 간단한 공식이 명확해지는 데 5분 이상이 걸려야 했다. (이게 1교시 문제였는지도 가물가물하다. 분명 3교시는 아니다.) d1의 개념을 캐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 실업률의 분모가 무엇인지 헷갈려야 했고, 방금 전 네이버로 검색해보고 한 문제 더 틀린 걸 알게 되는 현실.
어제까지의 상상으로는 시험의 난이도가 1교시<2교시<3교시라 겁먹고 있었고 체력의 저하와 맞물리게 되면 이 끔찍한 90분씩 두 게임을 어떻게 견디나 하는 게 오전 11시쯤 걱정이었으나.. 오히려 뒷 교시로 갈수록 시험은 더욱 공격적으로 덤벼볼 만했다. 잘 몰라서 그랬지. 3교시는 33문제가, 솔직히 느낀 바대로 말하자면, 문제 안에 답이 있는 경우가 더러 있어 성실하게 한 문제 한 문제 집중할 수 있었다. 3시 30분 벨소리를 들으며 난 OMR 카드를 제출할 정도로 간만에 몰두하였다.
현충일날 까페베네에서 서너시간 공부 설렁설렁한 거 가지고 달콤한 결과를 바라겠나. '(부분합격으로라도) 붙으면 어쩌지?' 이런 생각이 든 건 그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들인 정성만큼 기대하는 게 바람직한 법이다. 스스로에게 민망해하면서도, 10KM 마라톤에 처음 참가해 완주하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은... 더불어 2교시 후 점심시간에 동기와 만나서 한달여만에 식사할 수 있었던 일, 시험 끝나고 안동교회 작은 다실에서 상국이와 정주 자매 잠시 만난 일... 이런 소소한 사건이 같이 어우러진 것으로도 충분히 오늘 하루의 보람을 되새길 만 했다.
또 무슨 문제가 있었지? 어떤 개념의 보완이 필요했더라? 당좌비율, 연결재무제표... 내일은 메모도 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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