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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
마쓰오카 세이고 지음, 김경균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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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람들은 흔히 자기 소개서를 작성하면서 취미로 독서를 적는다. 좀 삐딱하게 해석하면 심심할 때 이것저것 다 해보다가 할 게 없으면 책이나 읽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알게 모르게 자리한 우리 통념에 저자는 독서가 밥을 먹듯 옷을 입듯 일상의 일부라고 말한다. 독서에 부담감을 갖지 말고 출근하면서 옷을 골라 입듯이 끼니때마다 뭘 먹을까 고민하듯이 일상에서 책을 즐기라고 한다.

이 책은 일본에서도 독서광으로 잘 알려진 마쓰오카 세이고의 독서론을 대담 형식으로 꾸민 책이다. 일본판 원서와 달리 번역자와 나눈 대담도 수록되어 있다. 세이고는 ‘맥락적 편집 독서’를 강조한다. 편집 공학의 측면에서 독서 방법을 탐색한다. 상품을 사고파는 시장처럼 의미를 주고받는 ‘의미의 시장’에서 독서의 본질을 밝히고 있다. 책장 곳곳에 독서를 정의한 말들은 어릴 때 소풍 갖다가 찾는 보물찾기와 같은 재미를 느끼게 한다. 

독서는 자신의 취향이나 개성을 찾아가는 길이라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책을 읽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모르기에 알려고 하기 때문이란다. 그러기에 책 읽기는 ‘무지에서 미지’로 떠나는 여행이라는 설명에 이르러서는 무릎을 딱 치고 말았다. 무지에서 유지로가 아니라 무지에서 미지로 떠나는 여행! 읽으면 읽을수록 책을 찾게 되니 말이다. 독서는 참 중독성이 강하다. 독서력을 유지하려면 다양한 분야를 꾸준히 접하면서 독서의 리듬을 유지하라는 말은 수행하는 수도승마저 연상케 한다. ‘책을 읽다가 싫증이 생기면? 계속해서 책을 읽어라!’(『김영민의 공부론』, 165쪽)는 것이다. 

책을 ‘지식의 덩어리’로만 여기며 교양 문화를 경시하는 세태를 비판하는 세이고의 목소리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최근 우리 대학가에도 인문학을 통폐합하거나 인문학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다. 지식 정보화 시대를 맞아 자기계발에만 힘써 몸값을 올리는데 혈안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네 삶은 문화(文化)를 향기롭게 누리지 못하고 문화(文禍)로 만들어 버리는 꼴이 된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 가치를 높이는 데는, 사람의 무늬를 탐구하는 인문학이 당장 쓸모 없이 보일 것이다. 점점 괴물처럼 변모하는 자본주의는 탐욕을 부추겨 인간마저 상품으로 만들어 값을 매긴다. 인간은 이기적이면서도 이타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한쪽으로 치우쳐 있을 때 균형을 잡으려 애쓰기도 한다. 수많은 결과 겹으로 이루어진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세상은 허무와 냉소가 가득할지 모른다. 독서는 사람 냄새를 찾는 길이며 더불어 사는 지혜를 익히는 ‘오래된 미래’다. 

책의 운명과 인류의 운명은 한 배를 타고 있는지 모른다. 독서마저 양극화를 맞은 디지로그의 시대, 메마른 감성에 단비 같은 독서가 일상에 뿌리 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책을 선물하고 책을 함께 읽는 문화에 주목한다. 책을 권하고 함께 나누는 사회를 의미한다. 부부, 가족, 친구, 연인, 동료 사이에서 책을 함께 즐기는 문화가 꽃 피기를 바라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아직 척박하기만 하지 않은가. 지식이 지혜로 이어지지 않아서일까? 아직 답을 모르겠다. 어쩌면 법정 스님의 말씀처럼 부부가 결혼해서 산문집과 시집을 서로 골라 나누어 읽고, 자식에게 유산으로 물려준다면 가능할지도.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자연스레 책을 놀잇감처럼 접한다. 궁금해서 읽고 재미있어서 또 읽으며 호기심은 끝 간 데 없이 실타래를 풀어낸다. 하지만 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성적만이 살 길이라는 듯 성적을 잘 받으려고 벼락치기 시험공부에만 힘쓴다. 고3 때는 자신의 성적에 따라 미래의 남편이나 아내가 결정된다고 공갈이나 협박 같은 얘기도 듣는다. 우정과 연애는 사치라며 어른이 되면 맘껏 할 수 있으니 시험공부나 하란다. 그러나 마르틴 발저의 말대로 사람은 읽은 대로 만들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독서하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우리 사회는 분명 병든 게 틀림없다. 아무리 자기 잘난 맛에 산다지만 남 잘난 것마저 깎아내리기 바쁘다면 문화(文禍)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결국 ‘체독(體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배운 대로만 살아도 세상은 좋아질 테니까. 몸으로 익히지 못한 앎은 신기루와 같기에. “책에 읽히지 말라”던 법정 스님의 목소리가 그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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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종말시계>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석유 종말시계 - '포브스' 수석기자가 전격 공개하는 21세기 충격 리포트
크리스토퍼 스타이너 지음, 박산호 옮김 / 시공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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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가 산업화를 거치면서 인류는 석유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며 현대 문명을 일구어 왔다. 지식 정보화 시대지만 여전히 현재 인간의 삶은 알게 모르게 석유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살림을 꾸려간다. ‘악마의 눈물’이라고도 말하는 석유는 인간의 탐욕을 부추겼고 지난 1세기 반 동안 ‘검은 황금’에 눈이 멀었다. 그러는 동안 인간은 지구가 스스로 정화하지 못할 만큼 오염 물질을 배출했다. 이젠 지구의 운명마저 위태로워졌다. 지구 생명체가 병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포브스>지 수석 보도기자로 활동 중인 크리스토퍼 스타이너는『석유종말시계』에서 화석에너지 시대가 저무는 21세기 미래생활을 가상으로 그려낸다. 앞으로 최소 10~20년 내에 유가가 1갤런 당 2달러씩 점차 상승하면서 -어림잡아 1갤런을 4리터로, 1달러를 1,200원 정도로 환산해 볼 때, 1리터당 600원씩 상승하는 상황- 인류가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에너지 위기상황을 가정하여 미래상황을 묘사한다.

 

저자는 유가가 앞으로 오르면 올랐지 더 이상 내려가지 않는다고 진단한다. 석유 생산량이 정점에 이르렀고 인도, 중국 등의 경제 성장과 맞물려 석유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기존 석유 기반시설의 노후와 석유 생산비용마저 증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뒤 저자가 프롤로그에 밝힌 대로 유가 인상에 따른 실질적인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사고 실험을 펼친다. 유가 상승은 앞으로는 지금처럼 살 수 없다고 인류에게 변모를 꾀하라고 압박할 것이라 말한다. 의식주는 물론이요 가족 생활양식에 이르기까지 변화는 전방위에 걸쳐 일어난다. 때론 건강한 생활을 누리는 등 좋은 변화도 있지만 항공 산업이 사라지는 등 충격적 변화도 보게 된단다.

 

하지만 저자가 그려본 석유 이후 시대 모습 중에는 선뜻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며 몇 가지 간과한 부분도 있다. 먼저 차세대 전력망 체계로 주목받는 ‘스마트 그리드’ 기술업체로 유태인 출신이 설립한 기업 ‘베터 플레이스’를 부각한 점은 의아스럽다. 저자의 성(姓)으로 짐작컨대 유태인이기에 유독 관심을 둔 것은 아닌지. 다음으로 송도 신도시를 미래 도시의 본보기로 언급한 점은 미국 기업이 참여했기 때문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차라리 생태도시의 대명사로 알려진 브라질의 ‘꾸리찌바’와 같은 도시가 세계 곳곳에서 현재 진행 중인데도 왜 언급하지 않았을까. 그러니 ‘미국적인, 너무나 미국적인’ 시각에서 미래 사회를 조명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석유 이후 원자력이 에너지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다는 전망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아무리 안전하다고 호언장담해도 방사능 폐기물 문제는 언젠가 지구와 인류 생존에 걸림돌이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오히려 21세기 신에너지 자원으로 주목받는 하이드레이트(Hydrate)에 대해 언급해야 하지 않을까. 기술적 한계 탓에 아직은 대량생산을 할 수 없지만 매장량은 200~500년 정도에 달한다고 한다. 또한 석유와 달리 온실효과를 일으키는 이산화탄소 발생량이 적다는 점에서 녹색에너지 시대에 도달하기 전까지 대체 에너지로 손색이 없다고 한다. 옆으로 새는 이야기지만 일본이 호시탐탐 독도를 노리는 이유로 독도 밑 바다에 매장된 하이드레이트와 관련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지막으로 지구촌에서 맏형 격인 미국이 기후변화 협약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점은 비판해야 했다. 유가가 상승하면 자연히 소비가 줄고 환경도 좋아진다는 식으로 장밋빛 전망을 내놓아서는 안 된다. 자국 산업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지구 온난화 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모습을 비판하지 않는다면 언론사 기자로서 지켜야할 사회적 책무에 소홀한 것이다.

 

미래 사회는 효율이 높고 공해가 없는 에너지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산업 폐열을 재활용하는 등 절약정신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닌 생존을 위한 보편윤리로 자리 잡을 것이다. 전기 자동차뿐만 아니라 전기 트럭, 전철 등 청정에너지 생활은 널리 뿌리를 내릴 것이다. 결국 인류는 자연에서 얻어 자연에 아무 탈 없이 다시 돌려주는 녹색에너지 시대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지구를 환경으로 여겨 인간이 개발해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해서는 이제는 안 된다. 지금부터라도 생태지혜, 이른바 ‘에코지능’을 길러야 할 때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지구라는 생명체가 인간과 공감하고 공생하도록 일깨우는 생태교육도 필요한 시점이다. 바야흐로 ‘녹색 혁명’이 요구되는 시점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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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비타 악티바 : 개념사 17
이국운 지음 / 책세상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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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사람들은 말한다. 착하디 착한 사람을 만나면 당신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흔히들 또 말한다. 악하디 악한 사람과 부딪히면 그래, 법대로 하자고. 도대체 법이 무엇이기에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은 것일까? 우리 일상에서 헌법을 이야깃거리로 삼는 경우는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지금껏 살면서 헌법 전문(全文)을 온전히 읽어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지난 1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은 헌법 재판소에서 벌어지는 정치쇼(?)를 자주 보아왔다. 행정수도 이전 문제, 대통령 탄핵 재판, 언론법 절차 문제 등 우리 사회의 갈등을 최종으로 판가름 짓는 곳이 헌법 재판소였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헌법 제 1조가 노래에 담겨져 불렸다. 바람결에라도 들으면서 민주공화국과 주권의 의미를 스스로 물었다.

자연스레 ‘헌법을 정치적 사고와 실천의 중심에 놓으려는 입장’(39쪽), 즉 헌정주의를 심각히 성찰해 봐야할 시기다. 법학자로서 저자는 헌정주의의 역사를 되짚으며 표상정치를 극복하려는 세련된 기획으로서 헌정주의를 이야기한다. ‘정치를 필요로 하는 사태에 대하여 표상의 형태로 정치를 제공하는’(21쪽) 표상정치는 두 얼굴을 지닌다. 표상정치는 많이 먹으면 죽지만 적당히 먹으면 건강해지는 투구꽃을 닮았다. 동일성의 논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표상정치는 표상에서 배제되어 주변부에 머무는 경우가 발생하는 한계를 지닌다. 그러기에 완전한 정치 형태라 볼 수는 없다. 그래서 표상정치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 헌정주의의 개입이 필요한 것이다. 

저자는 동서양에서 펼쳐졌던 고전적 헌정주의를 검토한 후 그 한계를 지적한다. 그런 뒤 16세기 서양에서 벌어진 종교혁명을 계기로 이루어진 헌정주의의 근대적 혁신을 톺아본다. 자연권, 사회계약, 의회주의, 법의 지배 등 근대 헌정주의에 내재한 혁신의 논리들이, 헌법에 주권을 명시하는 결과를 낳는 과정을 면밀히 살핀다. 그리고서 자유와 민주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 근대 헌정주의의 성과와 한계를 검토하면서 20세기 후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서로 으르렁거리며 팽창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문제를 언급한다. 

이처럼 표상정치와 헌정주의의 관계를 역사의 흐름에 따라 조명하면서 저자는 ‘우리가 헌법의 본질을 묻게 되는 것은 권력의 정당성을 ‘깊이’ 문제 삼으려는 맥락’(19쪽)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국민들의 뜻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상황이 빈번해지면서 불만이 점차 쌓여갔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가 언급하는 ‘헌법의 주어 찾기’는 시의적절하다. 결국 헌정 권력은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아우르는 것이기에 삶의 다원성을 바탕으로 한 다차원의 지역화된 민주적 자치 구조, 즉 표상정치의 단위를 여러 단위로 복수로 설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헌법 정치의 패러다임을 준수에서 정상화로 전환하는 일인 것이다. 결국 자유와 민주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접점을 찾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동일성의 정치가 아닌 ‘차이의 정치’를 실현하는 일인 셈이다.

책의 분량은 비록 적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결코 녹록지만은 않다. 헌정주의의 역사를 거슬러 오르며 자유민주주의를 밑거름으로 한 우리 시대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동아시아, 특히 조선의 성리학적 헌정주의를 검토한 이후에는 서구 근대 헌정주의에만 치중하여 살펴본다. 동서양의 비교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문고판 총서에 이를 다 담아내기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아쉬움은『교양으로 읽는 법 이야기』(김욱, 인물과사상사)나 『중국 법률사상사』(장국화, 아카넷)로 달래야겠다.

헌정주의의 개념사를 훑어보고 나니 공화주의가 궁금해진다. 골치 아프게 익힌 만큼 머리가 야들야들할 때 공화주의에 대한 공부로 옮아가야겠다. 최근 공화주의를 다룬 국내 저자의 저서들이 몇 권 출간되었다. 이 책과 같은 총서에 속한『공화주의』(김경희, 책세상)와 최근 출간된『공화국을 위하여』(조승래, 길)를 읽는다면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 담긴 의미를 깊고 넓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에 살고 있는 시민으로서 성숙을 바란다면 골치 아픈(?) 공부라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다 싶다. 우리 후손에게 이 나라를 살기 좋은 나라로 물려주려 싶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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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5기 신간 평가단을 모집합니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서평단 1기 모집 때부터 관심을 갖고 참여해 보려했었다. 막상 실천에 옮기려니 평소 관심에 둔 책이 아니라 서평단 담당자가 임의로 선정한 책을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쉽사리 떨칠 수 없었다. 그래서 서평단 참가를 미루고 미루다가 작년 가을쯤 개인적 신념을 송두리째 뽑히고만 사건을 겪고 독서 치료와 글쓰기 치유를 이유로 참여했다.  

 

어느덧 3개월 동안 12권의 인문 , 사회, 과학 서적을 읽었고 서평을 작성했다. 평소엔 관심을 두지 않았던 주제를 담은 책을 만나며 느끼는 설렘, 인문 B조에 속한 책벗과 글로 나누는 기쁨, 신간평가단 담당자와 소통하는 즐거움 등 예상치 못한 보람을 복 터지게 누렸다.  또한 서평 데드라인을 지켜려고 애쓰다 보니 마치 사선(死線)을 넘나들듯 마감시한이 주는 압박은 즐거운 긴장감을 맛보게 했다. 가장 큰 수확은 사는 게 퍽퍽하다고 잊고 살았던 사유의 책무를 깨친 점이다. 반복되는 일상에 매몰되지 않으려면 부단히 사유해야 한다는 점은 평생 가슴에 새기고 실천해야 하리라. 

 
가장 기억에 남은 책은 강신주의『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이다. 인문학의 위기를 목청껏 외치는 현실에서 강신주 같은 저자는 대중과 소통할 수 있도록 인문학의 문턱을 과감히 낮추었다. 서구 현대철학에 바탕을 두면서 우리 현대시에서 읽어내는 그 이론의 속살, 그 속살을 어루만지면서 암호문처럼 난해한 현대철학을 이해하는 데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소통하려는 노력과 참신한 기획에 높은 점수를 주어도 아깝지 않다.
 

 

 

  

 

12권의 책 중에서 5권을 꼽으라면 우선 맹목적으로 우상을 따르는 현실에서 부단히 사유와 실천으로 지식인의 참모습을 보여주신 리영희 선생을 조명한『리영희 프리즘』. 두 번째는 의술을 넘어 인술을 펼치는 명의들의 애환과 생명의 경이로움을 보여준『명의2』. 세 번째는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소수자의 의미를 일깨워 준『역사의 공간』. 네 번째는 표상정치의 관점에서 헌정주의의 역사를 살핀『헌법』. 마지막으로 앞서 높이 평가했던『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라는 책을 꼽을 수 있겠다.

 

끝으로 내 마음에 새긴 한 구절. ‘생활은 간소히, 하지만 생각은 높게’(『리영희 프리즘』, 235쪽). 그동안 생활은 복잡하게 생각은 낮게 살아왔던 삶을 성찰할 수 있었다. 사람의 무늬를 톺아보는 인문학을 배우며 말과 행동이 함께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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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인간의 신비를 재발견하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과학, 인간의 신비를 재발견하다 - 진화론에 가로막힌 과학
제임스 르 파누 지음, 안종희 옮김 / 시그마북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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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신비하고 경이롭다.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남자든 여자든 늘 아이가 보여주는 모습에 놀라움과 감탄을 금치 못한다. 아이를 기르면서 육아 문제로 티격태격 싸우다보면 어느새 이 신비롭고 경이로운 체험을 잊고 살아간다. 일상생활에 치이다보니 작고 사소하지만 소중한 것들을 잊어간다. 

자연도 신비하고 경이롭기는 마찬가지다. 겨우내 헐벗은 나무도 봄이 오면 새싹을 틔운다. 새들도 나뭇가지 하나씩 주둥이로 물어다가 튼튼하고 따듯한 둥지를 틀며 새 생명을 낳고 키운다. 하늘 끝까지 닿을 듯한 초고층 건물에 견주어 봐도 새 둥지는 정교함이 뒤처지지 않는다. 세상 곳곳이 경이로 가득차 있다.

지난 20세기를 거치면서 자연과학과 과학기술은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이루었다. 어릴 적 꿈꾸던 광선검이나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아직은 실현되진 않았지만 조만간 우리 두 눈으로 볼 날도 머지않았다. 곧 3D TV도 보급되어 널리 쓰이게 될 터이니 또 한 번의 영상혁명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냄새도 느낄 수 있는 TV도 우리 안방을 차지하게 될 터이다. 1980년 흑백영상에서 다채로운 색깔을 담은 영상으로 변모한 컬러 TV를 체험한 유년시절을 떠올려 보더라도 지금 우리 시대는 가히 혁명적인 기술문명을 이루어내고 있다. 요즘 다들 들고 다니는 휴대전화로 TV는 물론 무선 인터넷까지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자연과 생명이 펼치는 신비와 경이를 과학이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특히 진화과학이 오만과 독선에 가까운 태도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가정하에서 세계를 해석’(7쪽)했기 때문에 이러한 신비와 경이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연선택을 바탕으로 하는 다윈을 위시한 진화과학자들은 인류가 직립하여 두뇌의 역량을 키우고 언어를 사용하는 등 ‘인류의 발달에 대한 수수께끼’를 다 설명하려 한다는 것이다. 신유전학과 신경과학은 유전자와 두뇌의 비밀을 파헤치고 있지만 정작 의식, 자유의지, 기억, 이성과 상상력, 자아와 같은 비물질적인 세계를 규명하는 데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유물론 혹은 물질주의에 바탕을 둔 진화과학은 물질과 비물질의 이중세계, 육체와 정신의 이중성을 아우르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즉, 유물론 측면에서 바라보는 진화과학은 생물의 생명형성력과 인간의 영혼까지 밝힐 수 있다고 오만과 독선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주로 리처드 도킨스, 대니엘 데넷, 에드워드 윌슨과 같은 학자들이 극단적으로 물질주의나 환원론을 추구하면서 영혼과 정신 같은 비물질의 실체마저 규명하려는 오만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한다. 결국 유물론이나 물질주의를 벗어날 때만이 비로소 생명과 인간의 신비를 제대로 풀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화과학계에서 리처드 도킨스과 같이 다윈의 논의를 극단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진화과학 강경파를 겨냥한 비판은 동의하지만 스티븐 제이 굴드와 같이 다윈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진화과학 온건파가 내놓은 논의마저 오만과 독선에 빠져 있다는 판단으로 오해할 듯 하기에 선뜻 동의할 수 없다. 진화과학자들이 '인간 생명에 대한 경이감조차 느끼지 못한다'(7쪽)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저자가 비판하는 리처드 도킨스도 "우리는 너무나 아르답고 너무나 멋진 무한한 형태에 둘러싸여 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무작위적이지 않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직접적인 결과다. 그것은 마을 유일의 게임, 지상 최대의 쇼다."(『지상 최대의 쇼』, 김영사 : 565쪽)라고 생명에 대한 경이감을 표현하고 있음을 외면하고 있다. 어차피 자연과학은 유물론 혹은 물질주의에 바탕을 둘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다윈 혁명이라고 말할 만큼 진화과학은 인류와 생명의 신비를 풀어내는 데 기여한 바가 크다. 다윈이 발표한 진화론은 한계가 분명히 있으며 이를 극복하려고 연구들로 최근 유전자-문화 공진화 이론도 등장하는 상황이다. 다윈을 완전히 폐기해야 하는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라며 진화 회의론에 빠져 지적 설계를 옹호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자세는 옳지 않다.

끝으로 번역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우선 번역자는 게놈과 유전체를 섞어서 사용하고 있다. 게놈을 유전체로 번역하고자 한 점은 높이 사지만 그 취지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다음으로 양육(nuture)과 짝을 이루어 말하는 ‘자연(nature)’(261쪽)은 ‘본성’으로, ‘실재(reality)’는 ‘실체’로 번역해야 의미를 제대로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패러다임 변화’(350쪽)는 ‘패러다임 전환’으로 고쳐야 하지 않을까. 또 파운드와 같은 화폐단위는 가급적이면 우리가 쓰는 원화로 표기해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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