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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
마쓰오카 세이고 지음, 김경균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들은 흔히 자기 소개서를 작성하면서 취미로 독서를 적는다. 좀 삐딱하게 해석하면 심심할 때 이것저것 다 해보다가 할 게 없으면 책이나 읽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알게 모르게 자리한 우리 통념에 저자는 독서가 밥을 먹듯 옷을 입듯 일상의 일부라고 말한다. 독서에 부담감을 갖지 말고 출근하면서 옷을 골라 입듯이 끼니때마다 뭘 먹을까 고민하듯이 일상에서 책을 즐기라고 한다.

이 책은 일본에서도 독서광으로 잘 알려진 마쓰오카 세이고의 독서론을 대담 형식으로 꾸민 책이다. 일본판 원서와 달리 번역자와 나눈 대담도 수록되어 있다. 세이고는 ‘맥락적 편집 독서’를 강조한다. 편집 공학의 측면에서 독서 방법을 탐색한다. 상품을 사고파는 시장처럼 의미를 주고받는 ‘의미의 시장’에서 독서의 본질을 밝히고 있다. 책장 곳곳에 독서를 정의한 말들은 어릴 때 소풍 갖다가 찾는 보물찾기와 같은 재미를 느끼게 한다. 

독서는 자신의 취향이나 개성을 찾아가는 길이라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책을 읽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모르기에 알려고 하기 때문이란다. 그러기에 책 읽기는 ‘무지에서 미지’로 떠나는 여행이라는 설명에 이르러서는 무릎을 딱 치고 말았다. 무지에서 유지로가 아니라 무지에서 미지로 떠나는 여행! 읽으면 읽을수록 책을 찾게 되니 말이다. 독서는 참 중독성이 강하다. 독서력을 유지하려면 다양한 분야를 꾸준히 접하면서 독서의 리듬을 유지하라는 말은 수행하는 수도승마저 연상케 한다. ‘책을 읽다가 싫증이 생기면? 계속해서 책을 읽어라!’(『김영민의 공부론』, 165쪽)는 것이다. 

책을 ‘지식의 덩어리’로만 여기며 교양 문화를 경시하는 세태를 비판하는 세이고의 목소리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최근 우리 대학가에도 인문학을 통폐합하거나 인문학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다. 지식 정보화 시대를 맞아 자기계발에만 힘써 몸값을 올리는데 혈안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네 삶은 문화(文化)를 향기롭게 누리지 못하고 문화(文禍)로 만들어 버리는 꼴이 된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 가치를 높이는 데는, 사람의 무늬를 탐구하는 인문학이 당장 쓸모 없이 보일 것이다. 점점 괴물처럼 변모하는 자본주의는 탐욕을 부추겨 인간마저 상품으로 만들어 값을 매긴다. 인간은 이기적이면서도 이타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한쪽으로 치우쳐 있을 때 균형을 잡으려 애쓰기도 한다. 수많은 결과 겹으로 이루어진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세상은 허무와 냉소가 가득할지 모른다. 독서는 사람 냄새를 찾는 길이며 더불어 사는 지혜를 익히는 ‘오래된 미래’다. 

책의 운명과 인류의 운명은 한 배를 타고 있는지 모른다. 독서마저 양극화를 맞은 디지로그의 시대, 메마른 감성에 단비 같은 독서가 일상에 뿌리 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책을 선물하고 책을 함께 읽는 문화에 주목한다. 책을 권하고 함께 나누는 사회를 의미한다. 부부, 가족, 친구, 연인, 동료 사이에서 책을 함께 즐기는 문화가 꽃 피기를 바라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아직 척박하기만 하지 않은가. 지식이 지혜로 이어지지 않아서일까? 아직 답을 모르겠다. 어쩌면 법정 스님의 말씀처럼 부부가 결혼해서 산문집과 시집을 서로 골라 나누어 읽고, 자식에게 유산으로 물려준다면 가능할지도.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자연스레 책을 놀잇감처럼 접한다. 궁금해서 읽고 재미있어서 또 읽으며 호기심은 끝 간 데 없이 실타래를 풀어낸다. 하지만 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성적만이 살 길이라는 듯 성적을 잘 받으려고 벼락치기 시험공부에만 힘쓴다. 고3 때는 자신의 성적에 따라 미래의 남편이나 아내가 결정된다고 공갈이나 협박 같은 얘기도 듣는다. 우정과 연애는 사치라며 어른이 되면 맘껏 할 수 있으니 시험공부나 하란다. 그러나 마르틴 발저의 말대로 사람은 읽은 대로 만들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독서하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우리 사회는 분명 병든 게 틀림없다. 아무리 자기 잘난 맛에 산다지만 남 잘난 것마저 깎아내리기 바쁘다면 문화(文禍)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결국 ‘체독(體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배운 대로만 살아도 세상은 좋아질 테니까. 몸으로 익히지 못한 앎은 신기루와 같기에. “책에 읽히지 말라”던 법정 스님의 목소리가 그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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