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칼 세이건 지음, 이상헌 옮김 / 김영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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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일명 '과학의 전도사'로 지칭되고 있는 '칼 세이건'은 미국을 대표하는 지성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과학 역사 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저술활동으로써,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미신적 사이비과학을 척결하는데 생애를 바쳤다. 그의 기념비적 대작인 '코스모스'는 가장 위대한 과학서적의 하나로서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랐으며, 죽음의 문턱에 접어든 말년에 저술된 이 책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과 '에필로그'는 과학에 대한 끝없는 애착과 열정을 통해 과학의 대중화를 마지막으로 부르짖은 노작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제갈공명이 죽은 후 그의 목각인형이 적들을 몰아냈듯, 세이건은 말년의 노작들을 통해 사이비과학과 최후의 결전을 선포했던 것이다.

칼 세이건이 주창하는 '과학의 대중화'는 한 명의 위대한 과학자보다, 과학적으로 깨인 다 수의 대중들을 양산해낼 수 있는 사회제도적 구조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노벨상 수상자를 여럿 배출해왔으되, 인구의 대다수가 과학맹인 미국은 더이상 희망이 남아 있는 국가가 아니다. 생각해 보라! 대다수의 국민이 과학보다 UFO, 비과학적 종교, 점성술, 심령술, 빅풋, 네스호의 괴물, X-File류의 드라마에 관심을 가진다면 과학적 사고방식이 들어설 자리는 얼마나 좁아지겠는가? 세이건은 대중의 흥미를 자극하는 이러한 사이비과학들의 헛점을 논리적으로 공격할 뿐만 아니라, 과학의 대중적 보급을 위해서도 드라마틱한 과학사적 발견이나 자연과 우주의 경이로움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자고 제안한다. 그에 있어 진정한 유토피아는 다 수의 국민이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무장하고 합리적으로 일을 해결하는 사회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과학만이 유일한 대안인가? 과학이 세이건에게 신앙과도 같은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일까? 과학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 종교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 증가하는 것은 과학에 치명적 결점이 존재하기 때문은 아닐까? 물론 과학에도 결점은 존재한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이 원자폭탄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고 게놈프로젝트가 생명에 대한 조작의 가능성을 뒷받침했듯, 분명 과학에도 윤리가 수반되어야함을 역사는 명백히 입증해 주었다. 그래서 종교인들과 과학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신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주제에 어째서 과학은 종교를 비판하려 드는가?'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종교는 자체의 결점을 시정하기 위해 열린 마인드를 유지해 왔던가? 세이건은 과학과 종교와 같은 사이비과학의 본질적 차이를 열린 마인드에서 찾고 있다. 과학은 모든 이들에게 문호가 개방돼 있고, 오류수정의 메커니즘이 과학 내에서 가동하고 있으며, 자신을 회의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무엇보다 겸손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신적 사이비 과학은 어떤가? 그것들은 언제나 독선으로 가득차 있고 자신에 대한 공격을 논리적으로 대응하기보다,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할 뿐이다. 진화론 지동설이 교황청에 받아들여 지기 까지 수세기를 허비하지 않았던가?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에서 과학이 어둠 속을 밝히는 영원한 촛불로 남을 것인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과학보다 더 나은 패러다임이 언제 등장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보건데 과연 과학보다 세계를 더 잘 해석하고 더 성공적인 패러다임이 존재해 왔던가? 종교전쟁으로 수 십 만의 사람들이 죽어갈 때, 과학은 새로운 식량과 기술의 개발로 수 많은 아사자들을 구출해내지 않았던가? 과학 역시 많은 오류를 범해왔지만, 그 자체 내에 자신의 오류를 시정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가동되는 이상, 그리고 과학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현존하지 않는 이상 아직도 과학은 유효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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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7-12-24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을 대체할 패러다임, 이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을까요? 과학은, 우주나 자연이 움직이는 방향과 법칙을 설명하는 방법입니다. 그 원리를 이해하려는 학문을 대체하겠다니, 뭘로 대체를 한다는 건가요? 마치, 경제 연구에 있어서 경제학을 대체할 패러다임을 찾겠다든가, 소설에서 문학을 대체할 패러다임을 찾겠다던가, 그런 말처럼 들리는데요?

가을 2007-12-26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저처럼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도 드물 것 같아요. "과학의 종말"이란 책을 읽고 제가 썼던 서평을 권해드리고 싶군요. 사실 저는 '리처드 도킨스' 같은 이른바 환원주의자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추종자거든요. 종교인들이 주로 쓰는 저의 표현을 님께서 잘 짚어내신 것처럼, 저 역시 과학처럼 우주 자연을 해석할 수 있는 학문은 여태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만약 등장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과학이겠죠. 님의 지적은 정말 일리 있는 지적이고, 저 역시 님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좋은 지적 감사드립니다. 시간되면 꼭 님의 서재에 들르겠습니다^^
 
마녀의 문화사
제프리 버튼 러셀 지음, 김은주 옮김 / 다빈치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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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이야기는 서양 중세 역사의 단골메뉴이다. 그러나 중세의 소외집단으로서 문둥병자, 유대인, 창녀 등과 함께 중세의 암흑기를 뭉뚱그려 설명할 때 종교와 결부된 부차적 지위에서 조명받았을 뿐, 그 자체로서 마녀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서적은 드물다. 이 책은 마녀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싶어하는 독자들에게 매우 유익하다. 물론 그것이 마녀의 실존여부에 관련된 것이든, 혹은 중세의 역사에서 점했던 마녀의 사회적 위치와 역할에 관한 정보이든 말이다. 칼세이건은 그의 노작'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에서 마녀를 실존하지 않았던 역사의 희생양으로 설정함으로써, 과학의 대중적 보급과 마녀신앙의 허구를 결부시킨 바 있다. 물론 이 책 '마녀의 문화사'는 마녀의 실존여부보다도,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마녀가 가지는 사회사적 의의를 규명하는데 목적을 둔다. 마녀는 중세의 종교적 권력이 강화하는 과정에서 설정된 희생양이었지만, 그러한 전통이 중세를 끝으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어느 사회에서나 기득권을 가진 계층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희생양을 설정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서양 중세기의 마녀사냥과 너무도 흡사한 방식으로서 마녀사냥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이다. 냉전시기의 매카시즘은 빨갱이 사냥을 빙자한 마녀사냥 몰이로서 너무도 유명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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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수업 - 영원한 세계 명작 11
알퐁스 도데 지음, 가나 명작 기획팀 옮김 / 가나출판사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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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퐁스 도데는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이다. 그의 감각적인 단편소설들은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별'은 몇 해 전 고등학교 국정 국어교과서에 실려 가장 인기있는 작품 중의 하나로 읽혔고, '마지막 수업'은 오래 전 국민(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기억이 있다. 무심코 배우며 읽었던 도데의 작품들에서 어딘지 모를 이데올로기적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 '별'은 그야말로 순수문학이라 할 수 있지만, '마지막 수업'의 경우는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 과정에서 어느 초등학교와 한 학생의 창을 통해 본 애국심을 테마로 다루고 있다. 물론 그 작품 자체야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러한 작품을 국어 교과서 그것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어야 했던 사정은 과거 우리 나라의 이데올로기 및 이념과 분리돼 생각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별 역시 순수문학을 지향한 듯 하지만, 정치적 무관심성을 은연중 강조한 군사독재의 이데올로기와 연계돼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소설자체의 결함에 의해서라기 보다, 소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점에 의해 초래된 것이다. 그럼에도 순수문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도데의 소설은 너무도 아름다운 이야기들에 틀림없으며, 예민한 감수성을 자극하기에 더도 없이 훌륭한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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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동학농민혁명의 쟁점
이달순 외 / 집문당 / 199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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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에 대한 명칭상의 변화는, 역사적 시각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변화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최초로 등장했던 '동학난'은 말 그대로 동학교도들이 일으킨 반란 정도로 치부되었다. 전제군주적 지배세력의 입장에서 동학교도들의 봉기는 그들의 정권안위에 위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방이후 4.19혁명이 발발하고 진보세력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동학은 혁명으로서의 지위 즉 '동학혁명'이라는 영예의 칭호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러 동학은 '갑오농민전쟁'이라는 객관적 평가를 받고 있다. 혁명의 기본요소인 지배계급의 변화, 기존 지배정권의 전복 등이 동학에 의해 야기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이러한 이유로 혁명으로서의 지위보다는 진보적 농민전쟁으로서의 위상에 더 적합하다는 논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교도들이 봉기과정에서 내걸었던 기치들을 살펴보면, 부르죠아혁명이나 프롤레타리아혁명에서 내걸려지는 구호들과 유사한 요소들을 보게 된다. 공화제사상 남여평등 신분차별의 극복 지주소작관계의 시정 내지 폐지 등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그렇다면 동학교도의 봉기가 단지 실패로 돌아갔다는 이유에서, 이 사건이 혁명의 위상에서 미달된 것일까? 이 책을 통해 동학혁명의 현재적 의의를 되새겨볼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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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수령제 사회주의
스즈키 마사유키 / 랜덤하우스코리아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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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사회를 압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다양한 이론들이 창출된 바 있다. 그 중 와다하루끼는 유격대국가란 틀로서 북한사회를 특징지움으로써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간략히 설명하면 김일성을 유격대의 지도자로 인민들을 유격대원으로 설정함으로써 최고지도자를 정점에 위치시킨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설정한 바 있다. 이보다는 덜 참신하지만 이미 보편적으로 알려진 것이 바로 북한사회를 수령제로 파악한 스즈키 마사유키의 견해이다. 물론 현대의 많은 소장학자들은 북한의 수령제를 정치적 현상뿐만아니라 현재의 경제구조를 초래한 중대한 이정표로 규정짓는 등, 그 이론을 풍요화하는데 기여하였다. 물론 마사유키의 수령제사회론이 현재에 와서 매우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북한사회를 바라보는 틀로서 유용하며, 연구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수정주의로 알려진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에 관한 연구도 지금에 와서 많은 이들이 식상하게 느껴지겠지만, 처음 등장할 때 얼마나 많은 반향을 일으켰는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어쨋든 그러한 아이디어를 고안해낸 마사유키의 공헌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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