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열대 한길그레이트북스 31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박옥줄 옮김 / 한길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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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에서 태어난 레비스트로스는 프랑스에서 교원 자격증을 취득한 후,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철학을 전공했던 그는 어째서 인류학란 모험의 길을 택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1940년대 프랑스의 사상계를 주도했던 실존철학에 대한 반발에서 였을 것이다. 그에게 실존철학은 너무도 추상적이고 사변적이어서 인간의 본질을 찾아내기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 느껴졌을 가능성이 있다.

때마침 '마르셀 모스'를 읽고 충격을 받은 레비스트로스는 태고의 원시적 삶을 간직한 열대밀림의 사회가 인간의 본질에 무언가를 시사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남미의 밀림을 택했고, 거기에서 현대문명과 단절돼 있던 원시인들을 접촉할 수 있었다.

레비스트로스의 모험은 결코 안정이 보장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 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책 <슬픈 열대>는 원주민들과 접촉해 인간의 본질을 추적하고자 했던 레비스트로스의 치열한 투쟁을 자전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하기 위해, 그는 여행의 전과정을 자신의 내면적 갈등에 투사함과 동시에 원시인들의 삶을 교차시킨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을 추적하고자하는 그의 사색은 여행의 출발 전부터 시작되어, 자신의 실존적 상황에 대한 집요한 의문으로부터 추적해 들어간다. 이 때문에 그의 여행담은 한 폭의 수채화같은 문학적 묘사와 대조를 이루는 내면적 고독이 절묘하게 결합돼 있다.

결국 레비스트로스는 원주민들의 무리와 합류하는데 성공하고, 그들의 삶을 면밀히 관찰해 나간다. 그는 종족의 계보를 살피고, 위계구조와 주거 및 생활양식, 종교형태, 먹거리, 예술 등 그들의 모든 것을 놓지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재료들은 레비스트로스의 선배들이 축적했던 연구를 기반으로 재구성되며, 그 과정에서 기존의 오류들이 바로 잡히기도 한다.

이 과정이 그에게 만족스러운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슬픔의 이미지와 뒤범벅되는 것이 우리의 눈에 들어온다. 그것은 저주스러운 현대의 문명이 그들에게 끼쳤던 영향으로 인해, 그들 고유의 색을 잃어갈 뿐만 아니라 멸종의 위기에 봉착했다는 관찰로부터 온 것이다. 이러한 슬픈 열대의 상을 뒤로 한채 레비스트로스는 밀림을 떠나지만 그와 동시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것은 인간의 본질을 추적하기 위해 접촉한 원주민들의 삶과 양식이 그 형태를 달리할 뿐, 현대문명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원주민들이 야만적으로 보이는 것도 그 나름의 이유를 가진다는 사실이었다. 이 책 37장의 '신이 된 아우구스투스'의 희곡을 구상한 대목은, 민족학자로서 그의 '좌절'과 '삶에 대한 관조'와 '사회로의 귀환을 열망'하는 복합적인 감정이 절묘하게 뒤범벅돼 있다.

이런 회의 속에서도 그는 인간사회의 확고한 기반을 발견하고자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민족학이 우리의 문명 속에서 그 기반을 찾아낼 수 없음을 깨우쳐준 것에 만족해 한다. 어쩌면 그가 터득한 깨달음이란 다름 아닌 불교의 '공사상'이 아닐까 싶다. 챠웅사원을 답사하며 느낀 그의 마지막 감정에는,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어느 학자의 의연한 모습이 우리에게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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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이산의 책 10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주원준 옮김 / 이산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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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너선 스펜스'를 '역사를 연주하는 시인'이라 부른다. 내가 지어낸 그의 애칭이다. 왜냐하면 그는 역사적 사실을 무미건조하게 나열하며 평가하는 기존의 역사가와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스펜스의 역사는 소설과 시가 어우러진 한 편의 문학처럼 서정적이다. 거기에다 드라마틱하기까지 하다.

때문에 스펜스 쓴 역사가 과거에 과연 실제로 있었을까하는 의구심마저 인다. 하지만 그에 의해 재구성된 과거가 분명 '사실 그대로이다'란 것을 깨닫게 되고, 그의 탁월한 구성력과 문장력에 놀라게 된다. 어떻게 역사를 이처럼 극적이고 문학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까? 과거의 사실을 전혀 훼손하지 않고 재미있게 구성하는 방법을, 어째서 기존의 역사가들은 깨닫지 못했을까?

하지만 어떤 찬사로도 스펜스의 '심미주의적 역사학'을 평가하기엔 역부족이다. 나는 분명 스펜스에 매혹되어 그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서평자로서의 자질을 상실한 셈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마무리짓기 위해, 스펜스의 '매혹의 강'을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써야겠다.

중국학의 거장으로서 스펜스가 보여주었던 역사와 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은, 그의 또 다른 역작인 '천안문'과 '칸의 제국'을 통해 유감없이 발휘된 바 있다. 이 책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은 역사적 인물의 전기란 점에서 그의 기존 작품과 차별화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얼핏 제목만 보아 한 개인의 전기에 국한된 것 같지만, 그 이상의 의의가 있는 '스펜스의 야심찬 프로젝트'이다. 왜냐하면 마테오 리치가 살았던 시대를 '통시적이고 공시적으로' 완벽히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책은 그의 전기를 다룰 뿐만 아니라, 16세기의 이탈리아 포르투갈 인도 중국의 역사가 교차하고 서양근대의 종교사와 근대중국의 사회종교사가 중첩되어 있다.

이러한 시대상은 마테오 리치의 시각을 통해 일차적으로 접근되지만, 최종적으로 스펜스의 관점을 통해 재여과된다. 물론 그 여과과정에서 스펜스의 문학적 심미안이 가미되며, 또한 역사학자로서 그의 탁월한 혜안이 덧붙는다.

스펜스의 이 야심찬 시도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스토리를 전개해나가는 구성력에 있다. 스펜스는 중국에서 마테로 리치를 일약 명사로 부각시켰던 그의 기억술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테오리치가 그의 '기억의 궁전' - 이 지점에서 스펜스는 마테오 리치의 관념의 영역을 탐색한다 - 에 배치했을 법한 이미지를 매개로, 스펜스는 스토리의 큰 틀을 짜고 있다. 바로 이 이미지에 따라 동서양의 종교가 충돌하는 장엄한 서사시가 펼쳐진다.
그의 기억의 궁전을 채웠을 법한 상징적 이미지의 한자는 바로 '무(군대와 전쟁의 의미)' '요(필요와 당위의 의미)' '리(이익의 의미)' '호(좋아하다의 의미)의 네가지이다. 이것들은 리치의 기억술을 과시하기 위한 단순한 상징 이상의 것이다. 바로 이 네가지의 이미지를 주제로 마테오리치 생애의 긴 여정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가령 '무'의 이미지는 해상전쟁을 둘러싼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스토리의 매개체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요'의 이미지는 신앙을 비롯한 종교문제, '리'의 이미지는 무역과 조공을 비롯한 경제문제, '호'의 이미지는 성모마리아 및 동서양간 종교의 충돌 과정을 다룬다. 스펜스의 작품은 언제 읽어도 참신하다. 특히 이 작품은 전기의 새로운 시도이자, 새 지평을 연 수작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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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와 구더기 -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 현대의 지성 111
카를로 진즈부르그 지음, 김정하.유제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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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서술하는 학자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가지고 있다. 어떤 이는 감각적인 필치로서 역사의 심미주의를 추구하거나, 어떤 이는 탁월한 방법론으로서 뛰어난 개가를 올리기도 한다. 아마도 전자가 역사와 문학을 경계를 넘나들며, 역사를 스케치하는 조너선 스펜스라면, 후자는 단연코 진즈부르크에게 그 영예를 수여해야 할 것이다.

미시사라 불리우는 그의 역사학적 접근방식은 역사의 중심으로부터 접근하는 기존의 연구방법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아래로부터 그리고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해 전체의 핵심구조에 접근해 간다. 마치 셜록홈즈가 길거리의 담배꽁초에서 사건의 핵심 단서를 포착해내듯, 알려지지 않은 아주 사소하고 미세한 부분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실타래를 풀어나가듯' 사건을 질서정연하게 배열한 후, 문제의 해결에 다다른다. 따라서 탐정과도 같은 진즈부르크의 역사적 접근방식은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비록 과거를 살았던 옛 사람들의 이야기는 소설처럼 드라마틱하지 않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그의 방식만은 추리소설처럼 극적이고 흥미진진하다.

서양 중세사의 영역에 속한, 이 역사 이야기는 이탈리아의 농부이자 방앗간 주인인 메노키오를 작품의 주인공으로 설정한다. 진즈부르크의 메노키오는 '셜록홈즈의 담배꽁초'와 동일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메노키오로부터 사건의 단서를 풀어나가기 때문이다. 그가 매우 사소한 것에서 시작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의 야심은 대단하다. 왜냐하면 평범한 중세농부의 이야기로부터 실타래를 풀어나가, 중세농촌 사회의 핵심적 구조를 파헤치는데 목표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진즈부르크는 이탈리아 방앗간 주인인 메노키오 관련 자료를 중세교회의 종교재판 기록으로부터 찾아냈다. 그는 메노키오에 관한 기록을 꼼꼼히 훑어본 후, 메노키오의 언술과 소장장서 및 독서법까지 추적할 수 있었다. 메노키오의 독서법은 매우 중요한 단서인데, 왜냐하면 그의 독특한 사상체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서를 바탕으로 진즈부르크는 메노키오 즉 이탈리아 농부의 사상체계의 형성이, 바로 중세 농촌사회의 오랜 전통인 구전문화를 바탕으로, 기록문화를 재구성했기에 가능했다고 진단한다. 방앗간 주인을 통한 미시적 접근으로부터 시작해, 구전문화에 기초한 진보적 현실적 반기득권적 농민문화의 오랜 전통 즉 거시적 구조체가 드러나고 있다. 사소한 시작이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마치 양쯔강에서 펄럭인 나비의 날개짓이 뉴욕에 태풍을 몰고 오듯!

정말 놀라운 결말이다. 마치 반전이 백미인 뛰어난 스릴러물을 보는 것과 같다. 방앗간 주인으로부터 시작해 중세사회의 핵심구조를 파헤친, 진즈부르크는 '역사를 추적하는 탐정'이라 불릴 만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이러한 역사학적 시도가 이탈리아에서 1970년대 초부터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서양에서 미시사의 태동과 궤를 같이 한다.

반면에 한국의 현실은 어떤가? 여전히 한국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은 정치경제사에 몰두하고, 정치상층 인물로부터 시작하려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한국사학은 너무도 진부하고 보수적으로 느껴진다. 서양이 일찍부터 주목해 왔던 일상사 심성사 미시사의 영역은 한국에서 아직도 미개척된 상태로 남아 있다. 아마 일반인들이 한국사를 외면하는 것은 상당부분 그러한 이유에 기인한듯 싶다.

그렇다면 역사의 대중화, 한국사의 대중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의 과제는 자명해졌다. 선택 역시 더욱 명료해 졌다. 기존의 접근방식을 고수해 역사를 학자군의 지적놀음으로 남겨둘 것인지, 아니면 '아래로 부터의 역사'를 추구함으로써 역사가 일반 대중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가도록 할 것인지의 여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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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속: 종교의 본질 - 학민글밭 4
멀치아 엘리아데 지음 / 학민사 / 198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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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인들과 원시인들에 비해 현대인들은 어떤 점에서 우월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아마 많은 사람들은 현대인들이 소유한 '합리성'이라고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합리성으로 말미암아 우리 선조들은 무지몽매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고도의 과학을 발전시킴으로써 산업화에 성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현대인은 고대의 종교적 인간이나 원시인들의 삶과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더 나아가 '합리성'으로 대표되는 우리 '인식의 틀'은 저들의 주술, 종교행위, 식인풍습에 대해 야만성과 미개함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그러나 야만적으로 느껴지는 그들의 삶과 세계관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삶의 방식을 우리 선조들이 포기했기에 현대인들은 진정한 자유를 상실하게 된 허무한 존재들이라 한다면 과연 지나친 억측일까?

이 책 '성과 속'의 저자인 탁월한 종교학자 '멀치아 엘리아데'는 이에 대해 단호히 거부하는 입장을 피력한다. 우리의 삶이 가진 근본적인 결함들을 그 근거로 내세우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째서 현대인들의 삶이 원시인보다 못하다고 보았을까? 엘리아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먼저 현대인들이 고대의 종교적 인간이나 원시인들과 어떻게 다른지 추적해 보자. 현대인들은 원시인들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성화된 삶과 종교적 세계관을 완전히 거부함으로써, 자신을 비극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었다. 그들은 원시인들의 삶과 사고방식이 산업화와 기술발전에 장애가 된다는 신념아래, 과거의 원시적 삶을 포기하고 종교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산업화와 기술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더 커다란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대가란 무엇일까? 먼저 현대인들의 합리적 세계관이 가진 모순부터 짚고 넘어가자. 우리들의 합리적 시각은 원시인들이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제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일상 삶에 과거의 원시적 잔재가 남아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이다. 그 사례들은 장례식 결혼식 입사식 집뜰이 집의 구조 등등 일일히 열거할 수도 없을 정도다.

이러한 과거의 유습을 우리가 늘상 지니고 있는 까닭은, 분명 그것도 효율적 측면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원시적 종교적 잔재가 어째서 이로운 측면이 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 엘리아데는 답한다. 원시인들은 현대인들이 불결하다고 느끼는 그들의 삶을 성화함으로써, 우주를 창조하는 신들의 작업에 동참할 뿐만 아니라, 이로부터 절대적 자유를 획득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이 모두를 폐기한 대가로 점점 규제에 속박되고 위안을 얻지 못하는 허무한 존재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예를 들어 원시인들의 성행위는 풍요를 위한 신적 결합의 모방이었지만, 현대인들의 성행위는 은밀하고 규제가 따르는 것이 돼 버렸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에 무엇이 필요한가? 자유를 상실한 그들이 구제될 방법은 전혀 없는 것일까? 놀랍게도 엘리아데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원시인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열린 마음으로 세계에 대한 지평을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즉 현대인들의 삶이 원시인들의 세계이자 신들의 창조행위와 마찬가지로, 우주적인 맥락으로 위치되기 위해 '상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현재의 삶을 포기하고 원시인들의 삶을 모방하기 보다, 원시인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정신적 지평의 확장을 뜻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현대인과 원시인 간의 화해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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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제와 프랑스 혁명 - 프랑스혁명200주년기념총서 2
또끄빌 지음, 이용재 옮김 / 일월서각 / 198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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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이 단계는 구체제의 봉건주의적 생산양식을 혁파하고 부르주아지의 주도에 의한 자본주의 및 시민사회의 확립을 주된 과제로 설정하였다. 구체제의 봉건제도를 혁파한다는 점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은 나름대로의 진보성을 띤 것이었다. 사회주의의 이론가들 역시 이 혁명의 역사적 필연성과 진보성 등에 의의를 부여한 바 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전형적인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모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신생 개발국가들의 혁명은 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른바 인민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된 제3세계 및 아시아 제국가들의 혁명은 해당 국가들의 후진성으로 인해, 자본주의가 미성숙된 상태에서 곧바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이행하는 경로를 거쳤다. 북한 중국 베트남의 혁명 역시 인민민주주의 경로를 거쳤고, 산업화의 과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더불어 긴급한 과제로 부상하였다. 프랑스혁명(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과 달리 이 혁명의 특징은 혁명의 주도권이 부르주아지에서 프롤레타리아트로 넘어갔다는 점, 노농동맹을 통해 진보적 개혁정책(토지개혁 등)이 실시된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민민주주의혁명이 프랑스혁명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고찰로 부터 영감을 받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책은 프랑스혁명의 실제와 이론을 생동감있고 조리있게 펼쳐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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