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러건트 유니버스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승산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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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물리학의 세계로 통하는 문은 너무도 좁다. 수학적 지식으로 무장된 과학자들에게만 통행증이 발급되기 때문이다. 그곳은 특권을 지닌 물리학자들만의 공간으로, 수학적 지식이 없는 일반인들은 감히 접근조차 불가능한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알려져 왔다.
일반상대성이론의 발표 당시 전세계에서 그것을 이해한 사람은 12명 남짓이며, 양자역학을 완전히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확신한다고 '리처드 파인만'은 언급한 바 있다. 파인만의 견해는 이론물리학의 세계가 내로라는 물리학자들에게도 만만치 않은 영역임을 단적으로 시사한다. 하물며 수학적 지식이 거의 없는 일반대중에 있어서랴!

하지만 구세주처럼 나타난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일반대중들에게 희망찬 복음을 전한다. '무언가를 전문용어 없이 일상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 '물리학에 대한 이해의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가 이론물리의 수학적 공식을 일상언어로 전환하는 능력에 있음을 시사한다. 러더퍼드의 이 말은 일반대중들에게 암흑처럼 느껴지는 이론물리의 세계에 한 줄기 빛을 던진다.

하지만 그러한 깨달음만으로는 부족하다. 반드시 누군가에 의해 실천되어야만 한다. 바로 이 시점에서 초끈이론을 전공한 '브라이언 그린'이란 젊은 물리학자가 그 과업에 도전하였다. 그는 쉬운 언어로 '우아한 우주'를 설명하여, 물리학의 세계로 통하는 문호를 대중들에게 개방하고자 시도하였다.

브라이언 그린은 뉴튼의 고전물리학으로부터 최첨단 초끈이론에 이르는 환상적인 여정에, 수학의 문외한인 우리들을 초대한다. 그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그리고 초끈이론의 세계에서 상식적 세계관은 허물어진다고 강조한다. 진리는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곳에 웅크리고 있다고 폭탄선언하며!

그 사례는 특수상대성이론을 통한 시간여행, 일반상대성이론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휘어진 공간,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불가사의, 초끈이론을 통해 증명된 숨겨진 차원 등 이루 열거하기 조차 힘들 정도다.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가 사는 시공간에서 늘상 일어나는 사실 자체이며, 브라이언 그린의 아주 쉬운 언어를 통해 묘사된다.

이론물리의 세계에서 브라이언 그린이 우리를 안내한 종착지는 초끈이론의 세계이다. 그 곳은 그린의 전문영역으로서, 그에 의하면 초끈이론이야말로 통일장이론(우주에 존재하는 기본적 힘인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을 아무런 모순 없이 하나의 체계아래 통합할 수 있는 근본이론)의 유력한 후보라는 것이다. 사실 통일장이론을 정립하기 위해 위대한 천재 아인슈타인이 매달렸지만, 실패로 끝난 바 있다. 하지만 브라이언 그린과 함께 우리는 일반상대성이론의 세계를 이미 관람한 터여서, 아인슈타인의 무등을 타고 초끈이론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우리의 안내자 브라이언 그린은 이 환상적인 여정의 타이틀을 '엘러건트 유니버스' 즉 '우아한 우주'로 정했다. 그 발상은 양자적 미시세계로부터 거시 우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무한한 우주를 단순한 수학공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그린의 확신을 반영하고 있다. 물론 이론물리세계의 언어인 수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 우리는 그 세계의 아름다움을 완벽히 체험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린의 설명이 곁든 슬쩍 엿보기를 통해 필요한 만큼의 지적 호기심은 얼마든지 충족시킬 수 있다.

이 놀라운 환상체험을 통해, 우리는 이론물리학의 세계로 통하는 좁은 문이 브라이언 그린에 의해 확장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어느 누구의 도움없이도 과거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던 곳을 활보할 수 있게 되었다. '물리학의 대중화'에 기여한 브라이언 그린! 그는 '리처드 파인만'과 더불어 물리학의 전도사로 불릴 충분한 업적을 이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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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林火山 2009-01-20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Naver Opencast의 "風林火山의 분야별 대표 도서 소개"(http://opencast.naver.com/BK175)라는 캐스트의 캐스터 風林火山이라고 합니다. 이 글을 제 캐스트에 발행했는데, 혹시라도 발행을 원치 않으시면 '캐스터에게 한마디'에 적어주시거나, itmedusa@gmail.com으로 메일 주세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베이징 이야기 이산의 책 20
린위탕 지음, 김정희 옮김 / 이산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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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문화의 요람인 중국의 수도 베이징은 일반서민과 외국인들에게 좀처럼 문호가 개방되지 않았던 곳이다. 서기 천 년 이후 북방민족의 점령아래 있었던 북경은 중국의 고도이자 궁정이 안치된 성역으로서 일반인들의 접근이 제한되었고, 중국내전 이후에는 공산당의 근거지로서 외국인들의 출입이 봉쇄된 바 있다. 물론 개방의 물결이 휘몰아친 후 상황이 개선되었지만, 지금은 뜻하지 않게 '사스의 공포'로 다시 장막이 드리워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의기소침해 할 필요는 없다! 북경에 들어가는 다른 경로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린위탕'의 '베이징 이야기'가 그 유서 깊은 도시의 비밀을 속속들히 파헤쳐 버렸다. 베이징을 알고싶어 하는 사람들, 베이징에 갈 수 없는 사람들, 베이징 여행을 기약하고 있는 이들에게 감히 이 책을 권한다.

이 책 <베이징 이야기>를 단순한 기행문이나 견문록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은 커다란 오산이다. 베이징을 소개하는 린위탕의 시도는 참신하고 다각적인 접근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 시도는 베이징의 풍경을 묘사한 기행문, 자연의 서정성을 음미한 문학작품, 건축과 예술에 서린 사연을 서술한 역사스케치, 자연과 예술의 심미성을 추구하는 미학의 요소를 두루 아우른다. 따라서 이 책을 읽노라면, 마치 베이징의 정원인 원명원이나 이화원의 아름다운 회랑을 거니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다. 이 환상적인 체험은 린위탕의 서정적이고 절제된 필치에 의해 더욱 매료되고 만다.

베이징에 대한 린위탕의 실험이 다양한 쟝르를 통해 시도될 지라도, 혼동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베이징의 사람들, 베이징의 자연, 그리고 사람과 자연의 정서가 교감되는 지점인 베이징의 예술로 저자의 시선이 좁혀지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린위탕은 베이징의 사람과 자연 그리고 양자를 연결하는 예술을 기행문 문학 역사학 미학 속에 녹여버렸던 것이다!

베이징은 소박하고 담백한 보통 사람들, 즉 왕조의 교체와 정치적 격변 속에서 꿋꿋이 제자리를 지켜온 서민들의 숨결이 살아 있다는 점에서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베이징은 그냥 보아 넘기기엔 좀 특별한 아니 환상적인 구석이 있다. 그곳은 후미진 거리와 싸구려 음식점 그리고 은밀한 홍등가가 서민들의 삶과 밀착된 곳이지만, 궁정사회의 수려한 건축과 빼어난 예술품이 안치된 곳이기도 하다. 즉 최하층 삶으로부터 최상층 삶에 이르기까지 문명발전단계의 극과 극이 연결돼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들은 최고의 문학과 최고의 예술은 서민들의 정서를 대변한 것이어야 한다는 무의식적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이 책에 삽입된 다 수의 화보들은 우리의 그러한 의지를 허물어 뜨린다. 베이징의 화려하다 못해 사치스러운 예술세계는 인간의 기교가 더이상 어떻게 정교해지고 서정적이며, 더 완벽한 미를 추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회의를 불러 일으킨다. 나는 '베이징의 예술세계를 체험한 이가 유럽의 예술세계를 경험한다면, 금방 식상해 하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베이징은 분명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도시이다. 누구라도 아마 한 번 쯤은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만약 기회가 생겨 베이징에 가게 된다면 출발 전날 밤, 꼭 '린위탕'의 '베이징 이야기'를 읽길! 이 책은 분명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고, 건축과 예술의 세계에 대한 당신의 심미안을 높여줄 것이다. 베이징의 아름다운 세계를 사전 지식없이 마주친다면, 그 역사적 순간은 허무한 것이 될 것이다! 세상에 그런 비극이 또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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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치의 부리 - 갈라파고스에서 보내온 '생명과 진화에 대한 보고서'
조너던 와이너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추천 / 이끌리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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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이후 최근까지 지속된 진화론-창조론 논쟁은 지루한 소모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체계적 논리와 이론적 심미성을 가졌음에도, 진화론은 사변세계의 벽에 갇혀 있었다. 따라서 창조론자들은 공허한 말장난이라 진화론을 비판했고, 진화론자들 역시 증거없는 논리로서 반박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한 그 지루한 논쟁의 와중에서 다윈이 남긴 희미한 빛은 비록 암흑같은 무지의 세계를 환하게 비추지 못했을 망정, 꺼지지 않고 지속되기에 충분했다.

그 후 진화의 역사상 몇 차례의 도약이 있었고, 이제 다윈의 후계자들은 그의 무등을 타고 올라설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다윈이 보지 못했던 것, 다윈이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생생한 진화의 증거까지 제시할 수 있다. 더 이상 진화론은 가설이 아니다. 그것은 가설의 족쇄를 풀고, 사실 자체로서 당당하게 우리 앞에 부활한 것이다.

이 책 '조너던 와이너'의 <핀치의 부리>는 진화론에 관한 생생하고 현장감있는 증거들의 보고이다. 종래 출판되었던 진화론 관련 저작들은 진화가 너무도 점진적이어서 긴 시간동안 겨우 미미하게 변화하며, 따라서 화석을 통해서 확인할 수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핀치의 부리>는 그러한 견해를 단호히 거부한다. 진화는 우리의 뒷뜰에서도 항상 일어나며, 우리는 그것을 생생히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핀치의 부리>는 그러한 사실을 정확한 데이터로 입증해주는 생생한 증거이다!

진화론에 대한 지루한 논쟁이래, 이 소식은 모든 갈증과 체증을 단번에 풀어줄 정도로 경이로운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어떤 찬사로도 부족한 책 임에 틀림없다. 나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눈먼 시계공'과 더불어 가장 탁월한 진화론 관련 저작에 이 책을 위치시키고 싶다. 또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와 더불어, 이 책이 과학의 대중화에 기여할 21세기 고전의 반열에 자리매김될 것으로 확신한다.

조너던 와이너가 이 책을 통해 강조하는 것은 진화가 수 세대에 걸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한 세대에도 수 차례 발생한다는 자연선택의 역동성에 관한 것이다. 그것이 정지해 보이는 이유는 자연선택의 밀고 당기는 힘에 의해 평형이 지속되는듯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심한 관찰자들은 자연의 혼란스런 광경과 시끄러운 소음에 빈혈을 느낄 지경이다! 실제로 그들은 진화의 역동성과 격렬함이 늘 그들을 어지럽힌다고 호소한다. 이러한 진화의 역동성은 기존의 점진적 진화에 대한 가설보다 훨씬 아름답게 와 닿는다.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인간의 겸손, 즉 진리를 터득해 갈수록 점점 숙연해지라는 인간의 겸손에 관한 것이다. 조너던 와이너는 지구 생명의 탄생이래 진화의 계보의 맨 윗자리를 인간이 차지한다고 믿는 오해와 자만심을 버리라고 충고한다. 학습을 통해 기술과 문화를 습득하는 행위는 결코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닐 뿐더러, 동물세계의 경쟁과 자연선택의 법칙은 예외없이 인간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인류는 결코 이 행성을 구성하는 다른 종의 동료들보다 특별한 존재도 특권을 부여받은 존재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행성의 앞선 주인이었던 다른 종과의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 증산을 위한 농약과 살충제의 살포는 오히려 해충의 군비경쟁을 가속화시키지 않았던가? 우리가 그들의 영역권을 인정해줌으로써만, 비로소 그들도 우리의 영역과 지분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종을 통제하려는 인간의 헛된 시도를 재고해야 한다는 이 책의 강한 메세지는 우리를 더욱 숙연하게 한다.

<핀치의 부리>는 심오한 자연의 이치를 추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지루하지 않다. 무엇보다 일반의 비전공자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쓰여졌다는 점이 이 책의 최대 장점이다. 또한 자연의 진리에 접근하기 위해, 다윈 후계자들의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소개함으로써 극적인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고, 그 속에서 인류임을 자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읽어야할 명저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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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열대 한길그레이트북스 31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박옥줄 옮김 / 한길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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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에서 태어난 레비스트로스는 프랑스에서 교원 자격증을 취득한 후,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철학을 전공했던 그는 어째서 인류학란 모험의 길을 택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1940년대 프랑스의 사상계를 주도했던 실존철학에 대한 반발에서 였을 것이다. 그에게 실존철학은 너무도 추상적이고 사변적이어서 인간의 본질을 찾아내기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 느껴졌을 가능성이 있다.

때마침 '마르셀 모스'를 읽고 충격을 받은 레비스트로스는 태고의 원시적 삶을 간직한 열대밀림의 사회가 인간의 본질에 무언가를 시사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남미의 밀림을 택했고, 거기에서 현대문명과 단절돼 있던 원시인들을 접촉할 수 있었다.

레비스트로스의 모험은 결코 안정이 보장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 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책 <슬픈 열대>는 원주민들과 접촉해 인간의 본질을 추적하고자 했던 레비스트로스의 치열한 투쟁을 자전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하기 위해, 그는 여행의 전과정을 자신의 내면적 갈등에 투사함과 동시에 원시인들의 삶을 교차시킨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을 추적하고자하는 그의 사색은 여행의 출발 전부터 시작되어, 자신의 실존적 상황에 대한 집요한 의문으로부터 추적해 들어간다. 이 때문에 그의 여행담은 한 폭의 수채화같은 문학적 묘사와 대조를 이루는 내면적 고독이 절묘하게 결합돼 있다.

결국 레비스트로스는 원주민들의 무리와 합류하는데 성공하고, 그들의 삶을 면밀히 관찰해 나간다. 그는 종족의 계보를 살피고, 위계구조와 주거 및 생활양식, 종교형태, 먹거리, 예술 등 그들의 모든 것을 놓지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재료들은 레비스트로스의 선배들이 축적했던 연구를 기반으로 재구성되며, 그 과정에서 기존의 오류들이 바로 잡히기도 한다.

이 과정이 그에게 만족스러운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슬픔의 이미지와 뒤범벅되는 것이 우리의 눈에 들어온다. 그것은 저주스러운 현대의 문명이 그들에게 끼쳤던 영향으로 인해, 그들 고유의 색을 잃어갈 뿐만 아니라 멸종의 위기에 봉착했다는 관찰로부터 온 것이다. 이러한 슬픈 열대의 상을 뒤로 한채 레비스트로스는 밀림을 떠나지만 그와 동시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것은 인간의 본질을 추적하기 위해 접촉한 원주민들의 삶과 양식이 그 형태를 달리할 뿐, 현대문명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원주민들이 야만적으로 보이는 것도 그 나름의 이유를 가진다는 사실이었다. 이 책 37장의 '신이 된 아우구스투스'의 희곡을 구상한 대목은, 민족학자로서 그의 '좌절'과 '삶에 대한 관조'와 '사회로의 귀환을 열망'하는 복합적인 감정이 절묘하게 뒤범벅돼 있다.

이런 회의 속에서도 그는 인간사회의 확고한 기반을 발견하고자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민족학이 우리의 문명 속에서 그 기반을 찾아낼 수 없음을 깨우쳐준 것에 만족해 한다. 어쩌면 그가 터득한 깨달음이란 다름 아닌 불교의 '공사상'이 아닐까 싶다. 챠웅사원을 답사하며 느낀 그의 마지막 감정에는,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어느 학자의 의연한 모습이 우리에게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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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이산의 책 10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주원준 옮김 / 이산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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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너선 스펜스'를 '역사를 연주하는 시인'이라 부른다. 내가 지어낸 그의 애칭이다. 왜냐하면 그는 역사적 사실을 무미건조하게 나열하며 평가하는 기존의 역사가와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스펜스의 역사는 소설과 시가 어우러진 한 편의 문학처럼 서정적이다. 거기에다 드라마틱하기까지 하다.

때문에 스펜스 쓴 역사가 과거에 과연 실제로 있었을까하는 의구심마저 인다. 하지만 그에 의해 재구성된 과거가 분명 '사실 그대로이다'란 것을 깨닫게 되고, 그의 탁월한 구성력과 문장력에 놀라게 된다. 어떻게 역사를 이처럼 극적이고 문학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까? 과거의 사실을 전혀 훼손하지 않고 재미있게 구성하는 방법을, 어째서 기존의 역사가들은 깨닫지 못했을까?

하지만 어떤 찬사로도 스펜스의 '심미주의적 역사학'을 평가하기엔 역부족이다. 나는 분명 스펜스에 매혹되어 그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서평자로서의 자질을 상실한 셈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마무리짓기 위해, 스펜스의 '매혹의 강'을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써야겠다.

중국학의 거장으로서 스펜스가 보여주었던 역사와 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은, 그의 또 다른 역작인 '천안문'과 '칸의 제국'을 통해 유감없이 발휘된 바 있다. 이 책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은 역사적 인물의 전기란 점에서 그의 기존 작품과 차별화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얼핏 제목만 보아 한 개인의 전기에 국한된 것 같지만, 그 이상의 의의가 있는 '스펜스의 야심찬 프로젝트'이다. 왜냐하면 마테오 리치가 살았던 시대를 '통시적이고 공시적으로' 완벽히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책은 그의 전기를 다룰 뿐만 아니라, 16세기의 이탈리아 포르투갈 인도 중국의 역사가 교차하고 서양근대의 종교사와 근대중국의 사회종교사가 중첩되어 있다.

이러한 시대상은 마테오 리치의 시각을 통해 일차적으로 접근되지만, 최종적으로 스펜스의 관점을 통해 재여과된다. 물론 그 여과과정에서 스펜스의 문학적 심미안이 가미되며, 또한 역사학자로서 그의 탁월한 혜안이 덧붙는다.

스펜스의 이 야심찬 시도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스토리를 전개해나가는 구성력에 있다. 스펜스는 중국에서 마테로 리치를 일약 명사로 부각시켰던 그의 기억술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테오리치가 그의 '기억의 궁전' - 이 지점에서 스펜스는 마테오 리치의 관념의 영역을 탐색한다 - 에 배치했을 법한 이미지를 매개로, 스펜스는 스토리의 큰 틀을 짜고 있다. 바로 이 이미지에 따라 동서양의 종교가 충돌하는 장엄한 서사시가 펼쳐진다.
그의 기억의 궁전을 채웠을 법한 상징적 이미지의 한자는 바로 '무(군대와 전쟁의 의미)' '요(필요와 당위의 의미)' '리(이익의 의미)' '호(좋아하다의 의미)의 네가지이다. 이것들은 리치의 기억술을 과시하기 위한 단순한 상징 이상의 것이다. 바로 이 네가지의 이미지를 주제로 마테오리치 생애의 긴 여정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가령 '무'의 이미지는 해상전쟁을 둘러싼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스토리의 매개체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요'의 이미지는 신앙을 비롯한 종교문제, '리'의 이미지는 무역과 조공을 비롯한 경제문제, '호'의 이미지는 성모마리아 및 동서양간 종교의 충돌 과정을 다룬다. 스펜스의 작품은 언제 읽어도 참신하다. 특히 이 작품은 전기의 새로운 시도이자, 새 지평을 연 수작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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