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오의 딸 데이바 소벨 컬렉션
데이바 소벨 지음, 홍현숙 옮김 / 생각의나무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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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갈릴레오에게 딸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더구나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인 갈릴레오가 마음의 안식처이자 유일한 위안을 자신의 딸에게서 찾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그의 딸 '마리아 첼레스테'야말로 갈릴레오가 이룩한 과학적 업적의 진정한 원동력이었을지 모른다.

후세인들이 갈릴레오의 업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의 소지품 중 발신자가 '마리아 첼레스테'로 된 124통의 편지를 발견하였다. 그 순간이야말로 오랜 역사속에서 망각되었던 갈릴레오의 딸이 부활하는 장면이었다. 반평생을 수녀원에서 지낸 마리아 첼레스테와 세기의 위대한 과학자가 10여년 동안 나눈 이 대화들엔 너무도 애틋한 감정이 배어 있다.

이미 <경도>라는 책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과학분야의 논픽션 작가 '데이바 소벨'이 이 엄청난 사냥감을 놓칠리 없었다. 데이바 소벨은 기존의 과학사가 간과해 온 과학자들의 인간적 체취을 묘사하는데 충실하고자 했다. 따라서 그녀는 갈릴레오의 일생과 과학적 업적 등 전체적 스토리를 흥미진진하게 연결하는 고리로서 마리아 첼레스테의 편지를 이용하였다.

이 편지들은 부녀간의 따뜻한 애정을 감동적으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문학적 완성도도 높아 읽는 이들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이 책의 제목이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아닌 '갈릴레오의 딸'로 설정된 것을 보면, 저자가 갈릴레오의 과학적 업적보다 오히려 그의 인간적 면모를 더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가지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데이바 소벨이 <갈릴레오의 딸>로 제목을 정한 또 다른 이유는 갈릴레오의 전기뿐만 아니라, 마리아 첼레스테의 전기까지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듯 하다. 10대 초반에 수녀원에 들어가 34세에 절명하기까지 근 20년을 수녀원에서 보낸 마리아 첼레스테는 세속과 차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뒷바라지하며 자신을 희생하는데 만족해 했다. 124통의 편지는 그녀가 수도생활을 통해 신앙적으로 성숙해가는 과정을 더없이 잘 묘사해 준다. 소녀시절의 그녀는 분명 아버지에 모든 것을 의존했지만, 성숙의 과정에서 갈릴레오를 깊은 믿음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아마 마리아 첼레스테는 자신이 후세에 이토록 빛을 보리란 생각은 꿈에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만한 자격이 충분하다! 고난과 궁핍에 둘러싸인 수녀원생활 속에서도 세속의 아버지를 뒷바라지하는 등, 현실감각을 절대 잃지 않은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녀는 세속세계와 신앙생활의 조화를 통해 그녀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만족감을 주었던 것이다.

비록 마리아 첼레스테 자신의 손으로 씌어 졌지만, 진솔한 감정을 여과없이 표현한 이 편지들은 서양 중세인들의 생활상이 어떠했는가를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그들도 가족간의 따뜻한 유대를 바탕으로 우리네와 별반 다를바 없는 감정으로 삶을 영위했다는 사실은 일종의 문화적 보편성을 설교하는듯 하다. 정말 우리 동양인들도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책이었지만, 그들 부녀의 삶이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다는 점에서 서글픔을 금할 수 없다.

첼레스테는 요절했고 갈릴레오는 파문되다시피 연금된채 죽음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교회가 갈릴레오를 재평가하고 지동설을 인정하기까지, 그는 무덤속에서 자그마치 350년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우리들의 염려와는 반대로 정작 당사자들인 그들 부녀는 진정한 기쁨을 누렸을지 모른다.

갈릴레오의 사후 100년이 지나 그의 묘를 이관하기 위해 파헤쳤을 때, 사람들은 누군가의 관이 갈릴레오의 것과 합장되었음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다름아닌 마리아 첼레스테의 관이었다. 어떤 경로로 그들이 함께 묻혔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 부녀는 한 묘에 묻힘으로써 영원한 안식처를 찾고, 과거의 숱한 고난을 너그러운 미소로 되돌아 보았을 것이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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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탱 게르의 귀향
내털리 데이비스 지음, 양희영 옮김 / 지식의풍경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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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기어와 죠디 포스터가 열연한 영화 '서머스비'를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아무리 닮은 사람이라지만, 어떻게 이웃과 가족 심지어는 아내까지 속아넘어갈 수 있었을까? 외모가 비슷할 지라도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미묘한 개성차이가 꽤 큰 법인데, 가족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내 생각에 좀 허황된 이야기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영화를 본 이래 몇 년이 지난 후 누군가가 '서머스비'의 원작격인 책이 나왔으며, 놀랍게도 그것은 역사서라는 것이었다. 역사서라면 실제 있었던 이야기! 나는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을까? 16세기의 프랑스 농촌 사람들은 자기 가족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감각이 무디었을까? 나는 의혹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문제의 책'을 잡았다.

그 책이 바로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의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었다. 마르탱 게르는 결혼한지 9년이 지난 후 24세의 나이로 가출했다가, 8년 만에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과 가족들은 그가 살아 돌아왔다며 기뻐했지만, 사실 그는 진짜의 재산을 노린 사기꾼이었다.

저자 데이비스는 사료를 토대로 가족들이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근거를 제시한다. 사기꾼이 외모상 진짜와 닮았다는 점, 진짜의 과거사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던 점, 8년 만에 귀향했기 때문에 그의 성장과정에서 외모상 변화가 있었으리라 추측된 점, 그리고 무엇보다 기다림과 재회의 감정이 이성적 사고를 마비시켜 그가 진짜임이 확실하다고 그들 스스로를 세뇌시켰던 점 등등이었다. 좀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지만, 그럴듯한 결론이었다.

하지만 내 의혹을 풀어준 후에도, 이 책의 놀라운 여정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사기꾼 가짜가 개과천선해 열심히 일하고 좋은 남편이 되어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등, 마치 동화를 읽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동화같은 스토리이다! 어떻게 이런 극적인 일들이 현실세계에서 연속적으로 발생할 수 있었을까?

더 극적인 장면은 진짜가 돌아오는 장면이지만, 더이상의 공개는 곤란할듯 하다. 이 이야기가 논픽션으로 출판된 이래 '기이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재판에 재판을 거듭했다는 점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사실에 대한 사람들의 경이로움을 짐작케해 준다.

하지만 놀라운 역사적 사실들은 대개 세대를 거치면서 과장되고 윤색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저자 데이비스는 허구로 오염된 기록물 속에서 과거의 진실을 가려내고자 도전한다. 그녀는 16세기의 프랑스 농촌사회에 다가갈 수 있는 사료를 토대로,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시대상을 완벽히 재현해 낸다. 또한 허구로 오염된 이 놀라운 이야기의 자료들 속에서, 허구를 제거함으로써 점차 진실에 접근한다.

저자 데이비스의 가장 뛰어난 공헌은 사기꾼의 재판을 담당했던 판사의 기록 - 이 놀라운 이야기의 첫번째 출판물 - 에서, 사실을 곡해한 판사의 의도를 정확히 포착하고, 그가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던 부분을 탁월한 역사적 상상력에 의해 메꾸고 있다는 점이다. 재판과정에서 아내가 사기꾼과 공모한 점, 그들이 처한 위기를 시대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극복하려 한 점 등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지적 만족과 의혹의 해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큰 여운을 남기는 책이다. 그것은 사기꾼의 죄가 발각되어 사형에 처해지는 부분에서 극에 달한다. 결론만 본다면 희극같지만, 독자들은 이 이야기가 비극이란 점에 모두 공감할 것이다. 사기꾼은 이미 마음을 고쳐 잡고, 선량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저자 데이비스는 오히려 그 점을 부각시킬 뿐 아니라, 사기꾼을 위한 변명에 힘쓰고 있다. 500여 년 전의 한 인물이 과거의 오명을 씻고, 역사의 무대에 떳떳이 설 수 있도록 말이다. 독자들은 우리시대의 영웅으로 부활한 500년 전의 한 사기꾼이야기 - 엄청 놀라운 이야기 - 를 엿보는 행운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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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c2
데이비드 보더니스 지음, 김민희 옮김 / 생각의나무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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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상 학교에서 공식을 배우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공식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나 역사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하나의 단순한 공식에 놀랍고도 드라마틱한 사연이 담겨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아마 이 책 'E=mc²'을 읽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하고도 남을 것이다. 우리가 문제를 풀기 위해 자유자재로 이용하는 공식도 인간의 삶과 마찬가지로 탄생기 성장기를 거치고, 위대한 천재들의 숨결과 열정을 함축하고 있으며, 역사적 격변과 시련을 견뎌왔다는 것을!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사용하는 공식은 역사의 시련 속에서 검증을 통과해온 것들이다. 심지어 어떤 공식이 등장할 무렵, 소수의 천재들은 그 공식에 의문을 제기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 공식이 일종의 진리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우리는 그 공식으로 쉽게 문제를 풀 수 있기에, 한편으론 행운아인 셈이다. 그야말로 거인의 무등을 탄 격이다! 우리는 외친다. '어떤 문제든 내게 덤벼 보라'고!

이 책 '데이비드 보더니스'의 'E=mc²'은 수 많은 공식 가운데 20세기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E=mc²의 전기이다. 이 공식은 아인쉬타인의 천재적 영감에 의해 하루아침에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에너지(E), 등호(=), 질량(m), 광속(c) 등에 매달려 그 개념을 정립하기에 이른, 수 많은 과학자들의 노력과 정열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인쉬타인은 이 분리된 기호(개념)들의 연관성 즉 E=mc²을 밝혀냄으로써, 공식에 생명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그는 공식의 창조주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만큼은 조연에 불과하다.

E=mc²이 아인쉬타인에 의해 탄생된 이래, 수 많은 과학자들이 이 공식에 함축된 의미를 밝혀내고자 치열한 경쟁에 돌입했다. 드디어 E=mc²이 성장기에 들어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적 비극인 2차 세계대전이 이 공식에 자양분을 공급하게 된다. 광속도(c)가 엄청나게 큰 수이기에 적은 질량(m)만으로도 막대한 에너지(E)를 얻을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원자탄 개발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원자탄 개발을 둘러싸고 벌이는 미국과 독일의 숨막히는 경쟁은 이 책의 압권 중 하나이다.

그러나 보더니스는 원자탄 개발에 앞장선 나찌 수하의 과학자들에 대해 엄정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댄다. 세기의 천재로 '불확정성 원리'를 밝혀내 노벨상을 수상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그 대표적 인물이고, 핵분열을 발견한 '오토 한'도 마찬가지다. 오토 한이 부각된 이유는 그에게 결정적 아이디어를 제공해준 '리제 마이트너'와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마이트너는 E=mc²의 성장에 크게 기여한 여성과학자임에도,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책의 저자 보더니스에 의해 부활돼 역사의 법정에 섰고, 과거의 위대한 업적을 인정받게 되었다.

보더니스는 그녀 외에도 역사의 빛을 보지 못했던 위대한 여성 과학자들을 재조명하고 있다. '에밀리 뒤 샤틀레' '리제 마이트너' '세실리아 페인' 등은 그 누구보다 E=mc²의 정립에 기여했지만, 성차별의 역사에 의해 역사속에 매몰돼 있던 인물들이다. 페미니즘적 과학사를 지향하는 보더니스는 그녀들의 구세주인 셈이다!

우리가 이 책의 놀라운 여정을 통해 깨달은 것처럼, E=mc²의 역사는 '지식 확장의 역사'이자 '우주의 시작과 종말의 역사'이다. E=mc²의 탄생과 의미추출 그리고 응용의 역사는 우리의 지적 세계가 확장되고 있음을 상징한다. 또한 E=mc²이 빅뱅에 의한 우주탄생과 블랙홀의 형성 및 태양의 종말 등 우주의 진화를 예언해 준다는 점에서, 우리의 세계는 앞으로도 E=mc²의 영역을 벗어나기란 힘들 것이다. 과학과 과학사를 즐기는 사람들, 정말 참신한 시간여행을 경험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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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와 상징 - 주술적-종교적 상징체계에 관한 시론 까치글방 137
미르치아 엘리아데 지음, 이재실 옮김 / 까치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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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문화의 태동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이성의 절대성과 인간문화의 보편성은 의심의 여지없이 타당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20세기의 역사는 이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면서, 특수하고 상대적이며 미시적인 주변상황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20세기에 등장한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의 상대성을 수용하며, 인간문화양식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위로부터의 거시사보다 아래로부터의 미시사에 더 매력을 느낀다. 그야말로 우리들은 20세기의 그늘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이미지와 상징'을 다루는 종교사가들은 여전히 인간에게는 보편적이며 절대적인 '그 무엇이 실존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의하면 우리가 사는 감각적 현상세계는 '실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실재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영원성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보존되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이 형이상학적이긴 하나, 존재론적 관점에서 인간이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그 무엇'에 대해 시사하고 있다. 그 무엇이란 바로 '이미지와 상징' 같은 것이다.

이미지와 상징은 인류가 탄생한 이래 세계도처에 걸쳐 명맥을 유지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란 점에서 보편성을 지닌다. 하지만 이들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의식구조의 본질에 대해 말해줄 뿐만 아니라,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철학을 부여하며, 세계도처의 인류가 교감하고 의식을 교류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정녕 추구해야 할 것에 대해 말해준다는 의미이다.

가령 상징의 보편성은 달의 형태변화로부터 순환의 이미지를 추출해내고, 조개로부터 여성 성기의 이미지를 얻으며, 물로부터 혼돈과 잠재성의 이미지를 생각하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그것은 어느 지역 어느 시대의 특수한 산물이 아니라, 인류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이미지이다. 때문에 인류는 이러한 이미지를 주술적-종교적 의식에 활용함으로써 우주의 리듬을 회복하고, 영혼의 안식과 위안을 얻는 것이다.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이미지와 상징'의 중대한 의의를 발견하고, 그 구체적 사례 및 의미와 역할에 대해 해명하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엘리아데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인간을 발견했다고 자부하는 서구인에 대해, 단순하고 삭막한 '지역주의자들'이라 비판한다. 그럼에도 그는 이미지와 상징이 시간적 공간적 경로를 통해 전파되었을 가능성 - 동시보편적으로 발생했다기 보다 - 즉 역사적 특수성을 굳이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지와 상징'은 인간의 한계상황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므로, 동일한 우주에 살고 있는 인류의 의식구조는 유사한 것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상징의 구조는 역사에 의해 새로운 의미가 덧붙여질 지라도, 불변하는 보편성을 지닌다고 단언할 수 있다. 가령 기독교는 기존 종교의 상징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지만, 근본적 변화는 아니었고 또한 상징의 보편성을 유지했기 때문에 세계적 종교로 성장했던 것이다.

인간은 비록 덧없이 짧은 생을 살다가는 존재이기에 어쩌면 실재하지 않는 그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류의 등장이래 면면히 이어져온 '이미지와 상징'은 보편적이며 실재하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시각은 다분히 철학적 존재론에 근거한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그러나 덧없는 세상을 등지고 종교적 수행 속에서 위안을 찾는 사람들은 분명 우리에게 무언가를 시사해 주고 있다.

비록 우리는 인도의 수행자들처럼 이러한 철학을 극단까지 밀고 나갈 수는 없지만, 현실세계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그에 참여하는 동시에, 삶의 철학으로서 상징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삶은 더 의미있고 값진 무언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징의 긍정적 기능에도 불구하고 우려되는 측면이 있다. 그것은 사이비 종교인들의 상징관이다. 그들은 상징의 의미를 깊게 음미하려 하지 않고, 곧이 곧대로 해석한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위험한 종교적 해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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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 일본 문화의 틀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윤식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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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내가 이 책을 읽으려던 목적은 일본의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자 함이었다. 물론 그것은 이 책이 역사서일 것이라는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이 책 '국화와 칼'은 일본에 대해 문화인류학적으로 접근한 책이었다. 문화인류학은 인간의 특이한 행동방식 속에서, 그러한 행동을 야기한 근원적인 동기를 찾으려 한다. 따라서 일본인들의 세계관을 면밀히 파헤치고자 하는 이 책 역시 일본인들의 언어, 친족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특이한 유형을 분석하여 그들의 의식구조에 관한 비밀을 벗겨내고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국 국무성의 의뢰를 받아 '베네딕트'에 의해 수행된 이 프로젝트는 일본에 설치될 미군정의 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고자 의도되었다. 전쟁기간 내내 지속된 일본군의 돌출적 행동이 서구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기에, 그 근원적 동인을 밝히는 것이 미국으로선 급선무였던 셈이다. 베네딕트에 의해 완결된 프로젝트로서 이 책 '국화와 칼'은 일본과 서구의 문화를 선명히 대비할 뿐만 아니라, 일본전통의 족쇄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유교문화권에 살면서도, 너무 가까이 있기에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동양적 세계관이다. 베네딕트가 그것을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은, 먼 거리에서 숲을 관조할 수 있었기 때문일런지 모른다. 사실 동양적 가치관인 충 효 은혜 의리는 우리와 너무 가까이 있기에, 그것들의 참된 의미가 간과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서양인의 시각에서 그것들은 두드러져 보이는 그 무엇일 수 있고, 소위 그들의 합리적 세계관에 비해 모순되는 것일 수도 있다.

베네딕트는 서구의 시각에서 볼 때, 일본인의 의식구조가 모순돼 보이는 이유를 그들의 '의리의 문화'와 '명예의 문화'에서 찾고 있다. 그것은 행위의 기준을 내면의 양심보다 외부의 시선에 두는 문화이다. 즉 서양인들의 행동기준이 양심을 따르는데 반해, 인본인들은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는데서 오는 수치심에 따라 행동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이다.2차 대전 패배 후 일본의 격렬한 저항이 예상됐지만, 그 예상이 빗나간 이유는 그러한 일본인들의 의식구조로서 설명될 수 있다. 즉 미군은 명예를 중시하는 일본인들에 대해 아무런 모욕감도 주지 않고 일본의 천황제와 계층제의 질서를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그들의 '알맞은 위치'를 보존해 주었다는 것 그리고 기회주의적인 일본인들의 행동방식 등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인 '국화'와 '칼'은 이와 같이 모순돼 보이는 일본인들의 의식구조를 예리하게 포착한 상징이다. 칼 자체는 본질적으로 공격성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칼의 녹을 제거하는 행위는 자기에 대한 책임을 상징하고 있다. 국화의 경우 고고히 피어나는 절개의 상징이자, 성장을 억제하는 국화꽃 철심은 억압의 상징이기도 하다. 따라서 철심을 제거함으로써만 일본인들은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 베네딕트가 일본인들의 이중적인 의식구조를 '국화와 칼'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들의 긍정적 면모 즉 자기 책임과 자유는 패망 후 일본의 재건을 약속한다는 점에서 희망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책이 출간되고 반 세기가 지난 현 시점에서 일본의 부흥을 보노라면, 2차 대전 후 미군정의 대일정책이 성공적이었다고 평할 수 있다. 물론 거기에는 베네딕트에 의해 저술된 이 책 '국화와 꽃'이 한 몫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미군정기의 한국에서는 한국인들의 의식구조에 접근하기 위한 어떠한 연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미군정의 태도는 대한반도 정책의 혼란과 실패를 유발할 뿐이었고, 결국 한반도의 분할로 귀결되었다. 우리로서는 몹시도 유감스런 일이었다.

사실 베네딕트의 '국화와 꽃'을 읽으면서 많은 의혹과 아쉬움이 남았던 대목은, 그녀가 조선의 역사와 한일관계의 역사에 대해 도외시하거나 무지함을 드러낸 부분들이었다. 당시 양국에 대한 미국의 인식 차이로 인해 현재 일본의 번영과 한국의 분단을 초래했다는 점은 우리로서는 너무도 쓰라린 대목이다. 현재 일고 있는 반미감정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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