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는 사람들 - 자서전과 이력서로 본 북한의 해방과 혁명, 1945~1950
김재웅 지음 / 푸른역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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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를 미시사적 관점에서 재구성, 권력자가 아닌 대중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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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을 찾아서 1 이산의 책 6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김희교 옮김 / 이산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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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역사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 관련 이슈가 온통 우리 주위를 감싸고 있다. 정부는 과거의 역사적 과오를 시정하고 공정히 평가하고자 과거사 관련 위원회를 설치해 운영 중이고, 방송에서는 연일 사극이 흘러넘치며, 서점도 시장 수요에 부응하고자 역사서 출판에 여념이 없다. 인터넷 검색 순위에서도 자주 역사문제가 오르내리는데 이를테면 어떤 유물이 발굴되고, 사극의 내용이 어떤 점에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거나, 심지어 역사문제로 인해 대일 대중관계 등 국제 외교가 악화되고 있다는 소식도 종종 들려온다.

그야말로 총성 없는 전쟁이 따로 없다. 역사문제는 각 나라의 정통성뿐만 아니라 때론 이해관계와 직결되므로 영토 다툼처럼 한 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각국의 공식사관 자체가 왜곡으로 치닫곤 한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태왕사신기”나 “주몽” 같은 우리의 사극도 민족의 화려했던 과거를 떠올려주고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때문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그러한 과도한 애국주의와 민족주의가 역사를 바라보는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시각을 제약한 측면도 없지 않다. 사극과 역사소설은 흥행에 주요 목표를 둘 뿐만 아니라 사실 묘사에서 덜 제약적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그들을 쉽게 끌어 모을 수 있지만 역사서는 좀 다른 편이다.

아무래도 역사가들이 지은 책은 사실의 객관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좀 밋밋한 감이 없지 않다. 그것은 대개 밋밋한 사실 나열에 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극이나 역사소설의 드라마틱한 구성방식과 대조를 이룬다. 그래서 학자들의 역사서는 서점 구석 한 켠에서 먼지에 묻힌 채 몇 년이고 관심을 가져줄 주인을 기다린다. 반면 역사소설은 서점 문 앞에서 “베스트셀러”라는 푯말 아래 가장 먼저 손님을 맞는다. 이런 사실은 역사의 대중화를 지향하는 사가들을 좌절케 한다. 그러나 모든 역사서가 푸대접을 받는 것만은 아니다.

중국사 전문가인 “조너선 스펜스”의 책들을 둘러봐라! 그의 책은 결코 먼지에 덮혀 있지 않으며, 깨끗이 단장한 채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스펜스의 역사는 다른 학자들의 그것과 어떻게 다를까? 가장 큰 차이는 그의 이야기가 결코 지루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소설처럼 클라이맥스가 있는 하나의 완벽한 스토리 전개방식을 역사와 접목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픽션을 읽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픽션의 전개방식을 역사에 도입하고 있다 해서 그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오해는 절대 금물이다. 그는 어느 대가 못지않게 공부를 많이 한 학자로서 타고난 감수성을 잘 활용해 역사서술의 새로운 방법론을 개척했을 뿐이다. 그의 역작《반역의 책》과 《신의 아들》은 추리소설을 방불케 하는 흥미진진한 스토리 전개를 구사함으로써 나 같은 마니아들의 혼을 쏙 빼놓은 바 있다. 당연히 위의 두 책은 사실관계를 전혀 훼손하지 않는다. 다만 그 사실을 바라보는 스펜스의 시선이 독창적일 뿐이다!

사실 스펜스의 독창성은 탁월한 문학적 감수성과 심미안에서 가장 빛을 발한다. 역사와 문학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역사학의 심미주의”를 추구하는 그의 방식은 독자들로 하여금 경탄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그가 즐겨 이용하는 재료들은 역사와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당대 중국의 문학작품들이다. 스펜스는 역사를 서술해가는 과정에서 적시적소에 문학작품의 조각들을 끼워 넣는다. 그가 선택한 시나 소설의 조각들은 이른바 시대정신을 더없이 잘 반영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 기막힌 조화를 이루어 시와 문학이 공존하는 아름다운 역사로 재탄생한다. 때문에 나는 그를 “역사를 연주하는 시인”이라 부른다. 그의 작품《천안문》을 읽어 봐라! 누구라도 그가 연주하는 역사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다!

스펜스의 작품은 모든 게 다 그렇듯 독창적 실험정신의 산물이다.《강희제》에서 그는 모든 역사학자들이 까무러치게끔 일인칭 주인공 시점을 선택했다. 달리말해 그 작품에서 내레이터는 스펜스가 아니라 강희제이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스펜스가 소설가이지 무슨 역사학자냐고 질타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완벽히 사료를 섭렵했기 때문에, 강희제의 내면세계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고 그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덤덤히 말하게 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마테오리치 : 기억의 궁전》의 독창성도 놀라움 자체이다. 기억력으로 유명한 마테오리치의 내면세계, 즉 그의 기억의 저편 어딘가 놓여 있을지 모를 다양한 이미지를 매개로 그의 전기와 아울러 당대의 세계사를 나란히 엮어나가는 방식은 그야말로 전기의 새 지평을 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 작품이 실험의 연속이었고 그 독창적 실험을 통해 독자들을 경탄하게 한, 아니 경탄을 넘어 경악시킨 조너선 스펜스야말로 이 시대 가장 위대한 역사가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중국과 중국의 풍경 그리고 중국의 역사를 돋보이게 하는 요소는 비단 역사 유물 유적 그리고 역사적 인물과 사건에 국한되지 않는다. 참신한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역사가의 열정과 고뇌가 없다면, 결국 과거의 진실도 망각 속에 묻혀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중국은 꽤 운이 좋은 편이다. '조너선 스펜스'라는 이 시대 최고의 역사가를 만났기 때문이다. 조너선 스펜스와 중국과의 만남! 그 만남은 그 둘 모두에게 윈윈게임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 관심 있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희망과 꿈을 안겨주고 있다.

그러면 이 시대 가장 위대한 거장의 가장 위대한 작품은 무엇일까? 그를 아는 이라면 아마도《현대중국을 찾아서》를 꼽기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명문대인 버클리가 history101에 선정했을 정도로, 이 책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역사책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현대중국을 찾아서》는 스펜스의 모든 장점과 독창성이 녹아든 역작이다. 하지만 그의 다른 저작과 달리 이 책은 명조부터 현대까지를 아우르는 통사이기 때문에, 절제와 차분함이 깊게 스며 있다. 마치 오랜 기간의 중국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는 여행가처럼, 스펜스의 새로운 면모인 성숙함과 중국에 대한 진지한 애정이 느껴진다. 사실 그의 이전 작품들은 너무도 도발적이지 않았던가!

사실과 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역사를 스케치하는 그의 작업은 미를 추구하는 예술가들의 열정과 유사한 면이 있다. 스펜스의 중국사, 그중에서도《현대중국을 찾아서》는 묘한 여운을 남겨, 독자로 하여금 마치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이의 관조적 태도를 견지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이 작품은 통사가 무미건조할 수밖에 없다는 편견을 무참히 날려버린다. 스펜스는 번영을 경험한 후 곧장 허물어져가는 명왕조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당연히 그 시절을 반영하는 한시가 인용되고, 그 한시는 명나라의 흥망성쇠를 감미롭게 비유하고 있다. 그는 그 시기에 쓰인 모든 자료들 즉 소설 시 편지 따위에서 드러나는 리얼리즘적 요소를 포착해 역사적 사건의 적시적소마다 연결시킨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시기의 번영과 외세 침략에 의한 중국의 쇠락이 마치 꿈처럼 감미롭게 묘사된다. 그러나 꿈처럼 덧없이 흘러온 역사는 근현대의 격변기에 이르러 장엄한 대서사시로 도약한다!

광활한 영토와 무수한 인구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은 사람을 흡입하는 매력이 있다. 이에 더하여 삼국지 수호지 같은 거대한 스케일의 고전작품은 중국의 역사를 더욱 장대하고 화려하게 장식한다. 그러나 중국의 진정한 대서사시가 픽션이 아닌 역사적 사실 자체에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할 것이다. 2만 5천 리에 달하는 ‘대장정’이야말로 중국의 장엄한 대서사시라 할 만하다. 소박하며 명석한 통찰력을 지닌 마오쩌둥, 훌륭한 인품을 지녔으며 중국외교의 기틀을 다진 저우언라이, 아편중독자에서 홍군 총사령관에 오른 주더로 대표되는 혁명가들의 이야기는 삼국지의 스케일에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 더구나 그들은 유비와 제갈량 같은 지략가들도 실패했던 대륙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만다.

스펜스는 중국사의 클라이맥스라 할 만한 20세기의 격변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지만, 역사적 진보의 진정한 가치인 자유와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적 요소를 끊임없이 탐색한다. 따라서 마오쩌둥과 대립한 장제스가 그러한 가치를 내팽개치고 인민들의 지지를 상실하자, 단호히 그를 비판한다. 그렇다고 마오쩌둥과 그의 동지들이 구상하고 건설한 사회주의 중국을 스펜스가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옌안에서 순수문학을 추구하려다 좌절을 겪은 딩링의 경우처럼, 마오의 중국이 허용한 문학의 자유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묘사할 수 있는 자유에 다름 아니었다. 이제 사회주의 중국을 비판할 수 있는 자유는 허용되지 않고 오로지 옹호하는 자유만 허용되므로, 스펜스는 진정한 자유가 실종되었다고 진단한다.

중국에 무한한 애정을 품고 있다 해도, 스펜스가 끊임없이 비판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자유와 민주주의적 가치들이 억압되고 천안문사태에 이르러 탄압의 절정에 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그러한 가치들을 상징하는 중국의 진정한 영웅들인 후야오방과 저우언라이에 대한 인민들의 진심 어린 추모를 감동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자신이 지향하는 세계관을 보다 명확하게 제시한다. 스펜스는 과거를 아름답게 연주할 뿐만 아니라, 자유와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 가치를 척도로 냉정히 평가한다. 중국 인민들을 향한 진지한 애정이 없었다면, 그의 역사는 차라리 문학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을 향한 그의 진지한 고민과 열정 그리고 애정은 그의 “문학 같은 역사”를 “비전 있는 역사”로 격을 높인다. 그것이야말로 스펜스가 이 시대 최고의 역사가인 또 하나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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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제국 -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생물의 세계를 탐험하다
칼 짐머 지음, 이석인 옮김 / 궁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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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생충은 온갖 악한 이미지를 뒤집어쓴 존재로 와 닿는다. 사전적 의미로 기생충은 “다른 생명체에 기생해 양분을 섭취하여 살아가는 생물의 총칭”이다. 그런 존재는 인간사회의 특정한 부류를 절묘하게 비유할 수 있는 상징으로서 적격이다. 이를테면 나찌의 시각에서 유대인이 그러했고, 현실 사회주의국가의 시각에서 지주와 자본가 기업주들이 그러한 존재였다. 물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사채업자들과 유흥업소에서 돈을 뜯는 불량배들을 즐겨 기생충에 비유하곤 한다.

  그러한 사회 저변의 인식은 기생충에 대한 생물학자들의 시각에서 비롯되었다. 기생충을 연구해온 학자들은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완벽히 퇴화해 진화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존재”로 바라보았다. 인간의 눈에 그들은 아무런 노력 없이 비열하게 남의 성과를 가로채는 생명체쯤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생태계에 기여하는 바가 전혀 없고, 생태계의 분업체계로부터 이탈해 그 자양분에 의존하는 “절대 악”으로 인식돼 왔다.

  과연 그러한 기존의 시각이 옳았을까? 아니면 기생충으로부터 좀 더 들어볼 어떤 변명거리라도 남았을까? 이 책 ‘칼 짐머’의『기생충 제국』은 바로 후자 편에 서서, 기생충에 대한 인간의 온갖 왜곡된 편견을 바로잡고자, 그들의 모든 비밀을 들춰내고 있다. 칼 짐머는 놀라운 기생충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며,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왜곡되게 기생충을 바라보았는지를 생생히 고발한다.

  사실 이 놀라운 기생충의 본질이 드러날 무렵, 할리우드에서는 외계생명체를 다룬 영화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에일리언”과 “히든”이 대표적 작품인데, 여기에서 인간을 무참히 유린하는 외계생명체들은 놀랍도록 완벽한 존재들이다. “에일리언”의 등장인물 ‘애쉬’는 ‘리플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지금껏 무엇과 상대하고 있는지 몰라. 그렇지? 완벽한 생명체야! 그 구조적인 완벽함은 오직 그것이 지닌 적개심만이 견줄 만하지. 나는 그 순수함을 찬양해! 그 완벽한 외계 생명체는 인간을 숙주로 삼아 성장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간을 조종하기까지 한다.

  사실 외계 생명체에 대한 비관론은 저명한 천체물리학자 ‘칼 세이건’을 통해『코스모스』에서 통렬히 비판되었다. 칼 세이건은 그러한 외계인 상은 인간의 편견이 빚어낸 산물일 뿐이라고 강조하며, 그것을 조장한 매체로 공상과학 소설과 특히 영화를 지목하였다. 한편 20세기 중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생물학자들은 “에일리언”과 “히든”의 외계 생명체가 일정정도 기생충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음을 간파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물가로 유도하는 메디나선충, 게의 번식을 자신의 번식행위로 전환하는 소낭충, 새에게 잡아먹히도록 숙주인 달팽이를 유도하는 흡충, 숙주를 새에게로 옮기고자 물고기를 물 위쪽으로 유도하는 기생충 등은 기생충이 숙주를 지배하고 조종하는 대표적 사례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기생충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오류투성이였음을 입증하나, 기생충이 사악한 존재라는 점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칼 짐머는 기생충에 대한 인간의 기존 인식이 왜곡되었다는 점을 넘어, 기생충의 긍정적인 면까지 탐색하기에 이른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항체를 구성하는 “백혈구 보체 대식세포 B세포 T세포” 등은 기생충과의 군비경쟁을 통해, 병원균을 박멸하는 가공할만한 무기로 진화할 수 있었다. 또한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소 같이 생명에 필수적인 요소가 기생 박테리아로부터 기원했으며, 인간과 동물의 성(性) 역시 기생충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 차원에서 진화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더 나아가 최신연구는 인간과 동물이 지닌 두뇌의 발달을 기생충과 연관 짓기에 이르고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기생충이 격렬한 진화의 역사에서, 당당하게 숨은 주역의 역할을 맡아 왔음을 간파할 수 있다. 또한 기생충은 절대적으로 악한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실타래를 잣는 보이지 않는 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근래 들어 기생충의 유용성에 대한 다양한 근거들이 보고되고 있다. 기생충이 외부에서 유입된 해충을 억제할 수 있다는 점, 약재로 쓰일 수 있다는 점, 생태계의 건강성을 파악하는 지표로서 이용될 수 있다는 점 등이 대표적이다.

  뿐만 아니라 기생충은 숙주와 소모적 군비경쟁을 지양하고, 온건한 관계를 지향함으로써 양자 간의 건강한 공존을 모색하고 있다. 사실 기생충이 소멸해가고 있는 오늘 날, 인간의 면역계는 전혀 해롭지 않은 꽃가루에도 과민하게 반응한다. 재채기와 장염 및 아토피 같은 알레르기 현상이 바로 면역계의 자해행위 즉 기생충의 소멸이 초래한 현상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러한 기생충의 혜안을 배워야 한다. 인간 역시 지구에 기생하는 생명체인 이상, 지구의 생태계와 건강한 공존을 모색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칼 짐머는 “기생충 제국”이란 흥미진진한 여정을 통해, 기생충에 대한 인간의 편견을 바로잡아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위상을 진화역사의 숨은 주역으로 위치 지우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현명한 생활방식을 본받는 길만이 인류가 직면한 위기를 타개하는 해결책이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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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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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철한 지성의 상징, 다윈의 후계자, 무신론자, 환원론자...... 이러한 표현들은 '리처드 도킨스'에게 지겹도록 따라붙는 수식어이다. 도킨스는 다윈과 헉슬리를 잇는 진화론의 신봉자, 좀 짓궂게 표현하자면 '진화론의 3대 교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존 호건'의 "과학의 종말"에 따르면, 그는 우주에 또다른 생명체가 탄생해 진화해 왔다 해도, 지구의 진화 메커니즘을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할 만큼, 진화론의 논리적 아름다움에 매료된 인물이다.

 도킨스는 더 나아가 진화생물학계의 역사에서 진화론을 능가하는 패러다임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의 전망에 따르면 진화생물학계에 남아 있는 앞으로의 과제는 진화론의 거대한 틀 내에서, 부분적 내용을 채워나가는 용접이나 납땜질 식의 소소한 '퍼즐 맞추기' 작업만이 기다릴 뿐이라고 예견한다. 적어도 진화론은 그에게 종교였던 셈이다! 그의 이런 오만할 정도의 자신감이 많은 적들을 만들어내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도킨스는 이 시대 최고의 '과학의 전도사'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문자가 탄생한 이래 가장 논리적으로 글을 쓴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코 도킨스를 지목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의 논리적 완성도는 그가 어떤 거짓말을 하고 있다 해도, 모든 이들을 믿게 할 정도다! 그의 "눈먼 시계공" "확장된 표현형" "이기적 유전자"를 읽어 보라! 소름이 돋을 정도로 천재성이 번득이는 그의 작품들은 진화생물학의 진수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하나 같이 당대의 세계관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충격을 몰고왔던 도킨스의 작품들은 놀라움 그 자체이다. 그중에서 가장 강력한 충격파를 몰고와, 진화생물학계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뒤바꾼 작품은 단연 "이기적 유전자"이다!

 그렇다면 "이기적 유전자"의 세계로 충격적인 지식여행을 떠나보자. 20세기 초중반까지만 해도 진화의 메커니즘에서, '개체의 이익'은 가장 근본적인 전제로 간주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이해의 폭이 확대될 수록, 그 전제에 대한 회의와 불신이 커져만 갔다. 이를테면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집단을 지키려하는 꿀벌의 이타성은 개체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으로 말하자면, 생면부지의 사람을 구하고자 종종 자신의 목숨까지 내던지지 않던가?

 논리적 모순에 직면한 진화생물학계는 더 나은 이론체계를 필요로 했다. 그것은 개체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생명체나, 이타성을 발휘하는 생명체 모두에게 모순되지 않을 만큼 포괄적이며 논리적 완성도를 갖춘 이론틀이어야 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도킨스는 몇몇의 선행연구를 근거로, 개체의 이익이 아닌 유전자의 이익 즉 "유전자의 자기 복제와 보존"이야말로 생명의 궁극 목적이자 진화의 전제라는 혁명적인 이론을 정립했다. 그 이론은 꿀벌과 인간의 이타적 행동이 개체의 이익이 아닌, 동일 유전자 집단의 이기적인 증식과 보존에 기여할 수 있다는 명쾌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지금은 진부한 감도 없지 않으나,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설은 진화생물학계의 수많은 모순을 바로잡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도킨스의 충격 발언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과연 인간의 몸이란 무엇인가라는 도발적인 물음을 던지기에 이르렀다. 놀랍게도 그는 인간의 몸이란 이기적 유전자의 자기복제와 보존에 유리하도록 프로그램된 기계에 다름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좀 극단적으로 비유해서 우리의 몸체가 '로버트 태권브이'라면, 유전자는 태권브이를 조종하는 소년 '훈이'였던 셈이다!

 도킨스의 이론이 제시되었을 무렵, 사람들이 얼마나 커다란 충격에 빠졌을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결국 인간들은 "이기적 유전자"라는 미물에 놀아난 셈이었고, 인간의 숭고한 도덕성도 그 미물들의 생존전략에 따른 진화의 산물로 생겨났으니! 심지어 어떤 학자는 유전자로부터 독립된 자신의 주체성을 천명하고자, 독신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사실 도킨스와 마찬가지로 '매트 리들리'가 "이타적 유전자"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듯, 진화의 산물로서 등장한 인간의 덕성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자연과학이 이기적 유전자 이론으로 사회과학의 권위에 치명상을 입혔다 해도, 자연과학이 직면한 딜레마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대안은 바로 사회과학에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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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사이언스 클래식 4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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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우리 인간에게 무엇일까? 이 주제만큼 인간에게 오랫동안 골머리를 썩여온 의문도 없었을 것이다. 이 사실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우주를 바라보는 관점은 시대에 따라, 계층에 따라 그리고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차이를 보여왔다. 현대의 점성술사들은 물론이고 고대인들은 별들의 운행과 별똥별 그리고 혜성을 관찰한 후 길흉화복을 점쳤다. 일반인들의 경우, 우주를 꽤 낭만적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알퐁스 도데는 ‘별’이란 작품을 통해 별자리에 얽힌 신화를 아름답게 그려냈고, 과거 우리 선조들도 달을 바라보며 절구를 찧는 토끼를 연상했다.

그러나 현대과학은 우주를 바라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첨단망원경을 비롯한 우수한 장비, 화학적 분석법의 발달, 컴퓨터 시뮬레이션, 일반상대성이론, 우주항공술의 발달 등으로, 우주에 얽힌 미스테리는 점점 신비의 영역에서 이탈하고 있다. 적어도 현대인들은 우주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자 하며, 우주자연의 현상을 현대물리학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해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인들이 우주에 대해 품었던 꿈과 낭만을 포기해야 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보라! 우주는 암흑의 공간 속 군데군데에, 타오르는 불덩이(별)들이 아주 이따금씩 박혀 있는 불모의 공간이 결코 아니다. 그곳에는 지구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무수한 별들의 삶과 죽음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지는 매우 역동적이고 항상 변화하는 너무도 아름다운 인류의 고향이다!

칼 세이건이야말로 우주를 바라보는 현대물리학의 냉철한 관점에, 아름다운 낭만과 따사로운 휴머니즘을 불어넣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우주가 낯선 미지의 세계가 아닌, 우리의 고향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1996년 칼 세이건은 자신이 그토록 동경한 우주로 영원한 여행길에 올랐다. 그를 존경했던 후배 과학자들이 훗날 그의 업적을 기려, 화성탐사선 패스파인더호가 안착한 곳에 ‘칼 세이건 기념 기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칼 세이건이 떠났다고, 우주에 꿈과 낭만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의 불멸의 역작, ‘코스모스’가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것이기 때문이다!

‘코스모스’는 아름답고도 광할한 우주 여행기이자, 인간내면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칼 세이건은 태양계의 다양한 행성으로 여정을 안내할 뿐만 아니라, 그 행성에 얽힌 비밀을 이해하고자 했던 과학자들을 소개한다. 우주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인간들의 열정, 그들이 바라본 우주, 그리고 그들이 우주에 대해 알게 된 것들의 자취는 오늘날의 우주개척시대를 초래한 과학발달사일 뿐만 아니라, 우주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주체할 길 없는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며 ‘플레이보이’에도 원고를 기고했을 만큼 헌신적인 그였지만, 그에 대한 이상한 오해가 따라붙곤 한다. 요는 ‘세이건이 외계인은 존재한다고 했다’는 내용이다. 장담컨대 세이건은 ‘코스모스’를 비롯한 어느 저서에서도 결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는 단지 외계인이 없다면, ‘우주는 지나친 공간 낭비일 뿐’이라고 자신의 바램과 가능성을 표현했을 뿐이다. UFO나 X-file류의 공상적 기담이 과학의 입지를 좀먹는 상황에서, 세이건은 과학을 수호하는 대표적 지성으로서 죽는 순간까지 맹렬히 투쟁했다.

그는 현대과학을 ‘수학’과 ‘물리학’적 메스로 재단해 단조롭고 무미건조하게 만드는 기존 학자들과 달리, 방대한 인문학적 지식을 접목해 유려하고 아름답게 그려냄으로써, 현대과학도 얼마든 흥행에 성공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달리 말해 그는 참된 과학의 세계가 사이비과학보다 훨씬 흥미진진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코스모스’야말로 참과학의 결정체이다. 그것은 위대한 우주 대서사시이자 인류가 축적해온 방대한 우주지식일 뿐만 아니라, 우주가 어떤 지점에서 인간의 본성과 연결될 수 있는지를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한 마디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과학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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