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 지음, 피터 베일리 그림, 유영만 옮김 / 나무생각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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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눈앞에 보이는 결과를 바라지 않고 몇 십년 동안 같은 일을 반복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 일이 본인에게 금전적인 대가를 주는 것도 아니고,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는 일이라면? 이 책은 한 명의 양치기가 몇 십년간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매일 매일 도토리 100개씩을 심어 아무것도 없던 황무지 마을을 숲이 우거지고 개울이 졸졸 흐르는 아름다운 마을로 변모시킨다는 이야기다. 얼마 전 다른 책을 읽다가 우연히 <나무를 심은 사람>의 줄거리를 읽고, 단순한 이야기 임에도 그 울림이 너무 컸기에 꼭 전체 이야기를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사실 그 책에 소개된 줄거리 내용이 거의 다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너무나 단순하고 짧은 이야기다. 하지만 그 깊은 울림은 결코 예사롭지 않다. 

부인과 자식을 모두 잃고 황무지에서 양을 치며 개 한마리와 함께 사는 엘제아르 부피에는 일반적인 시선으로 봐서는 절대적인 고독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뿌연 흙먼지가 날리는 황량한 마을에 사는 다른 이웃들은 괴팍하고, 여유가 없으며, 하루하루 눈앞의 먹을거리에만 의존하며 급박하게 살아가는 반면, 그는 가족 한명 없이 혼자 살면서도 깔끔한 옷차림에 정돈된 생활을 하고, 주변 환경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행을 떠났다가 황무지 마을에서 우연히 길을 잃고 부피에의 집에서 머물게 된 소설의 화자는 다음 날 부피에가 정성스레 분류한 도토리들을 가지고 나가서 쇠 꼬챙이로 땅에 정성스럽게 심는 장면을 목격한다. 
매일 100개씩, 그 양치기는 지난 3년동안 10만개의 도토리를 심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 2만개만 싹이 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중의 반은 자연재해나 동물들로 인해 먹혀 없어질 것이고, 1만개 만이 제대로 된 나무가 될 것 같다고 가정하고 있다. 그 곳은 부피에가 소유한 땅도 아니고, 나무를 심는다고 누군가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이런 황무지 같은 마을이 살아나려면 나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부피에가 있을 뿐이다. 그렇게 부피에는 많은 시간이 지난 후 사람들이 도저히 한 사람이 했다고는 믿기 힘들정도로 아름답고 울창한 숲을 만들어 낸다. 물론, 그렇게 숲이 만들어지고 난 후에도 그는 죽는 순간까지 나무심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 고장 전체가 건강하고 번성하는 지역으로 변신 하는데는 8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1913년 당시에는 폐허의 땅이었으나, 이제는 잘 단장된 농장들이 들어서서 행복하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 
< 나무를 심은 사람 p.50>

처음엔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행위였지만, 생각외로 그것이 결과로 나타난 것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은 것에 놀랍다. 황무지에 나무를 심으면 환경이 좋아질 수 있다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실제로 바로 행동에 옮겨 매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것도 묘목이 아닌 도토리를 심는 일로 말이다. 
나의 나쁜 습관 중 하나는 무언가 도전할 거리가 생기면 그때만 바짝 집중해서 어느 정도 결과를 보고 난 후 빠르게 질려버리는 것이다. 노력하는 양에 비해 빠르게 결과가 나왔던 적이 많아서 슬슬 자만하며 게을러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직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뒤쳐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스피드가 생명인 단기 프로젝트에는 강할 지 모르지만, 장기 프로젝트에선 항상 좋은 결과를 보지 못했던 적이 많았다. 꼭 토끼와 거북이에 나오는 토끼 꼴이다. 혼자 까불다가 결국엔 거북이에게 지고 마는.. 그런 의미에서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무언가에 꾸준히 집중하여 매일매일 해나가는 사람들이 참 부럽다. 이 이야기가 내 마음을 좀 강하게 후벼판 것은 그 이유가 큰 것도 같다. 

다행히 이제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시점이기도 하고, 무언가 마음 먹었다면 깨끗이 털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점이 왔다. 내년에는 하루하루를 알차고 뜨겁게 보내고 싶어 기록용 다이어리만 몇개를 샀는지 모른다. 뭘하든 꾸준히 해보고 싶다. 그것이 매일 도토리를 심는 것이든, 일기를 쓰는 것이든, 글을 한 줄 쓰는 것이든 뭐든지 좋다. 그냥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매일매일 뭔가 꾸준히 해보고 싶다. 부피에가 했던 작은 행동들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숲은 그런 작은 열망을 마음속에 심어준다. 

새해엔 주변에 흔들리지 않고 뭔가 꾸준히 해보고 싶은 사람들은 필히 <나무를 심은 사람>을 읽어보도록 하자. 
마음 속 깊은 감동이 당신에게 꾸준히 할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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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1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1 2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첫, 타이베이 안그라픽스의 ‘A’ 시리즈
오가와 나호 지음, 박지민 옮김 / 안그라픽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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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할때면 언제든 훌쩍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부럽다. 이 책의 작가 오가와 나호는 일러스트 작가이자 디자이너로 일하는데, 때문에 일하다가도 마음만 먹으면 노트북과 종이만 들고 훌쩍 떠나곤 한단다. 새로운 장소에서 익숙한 듯 신기한 장면들을 보고 영감을 받을 때가 많다는 작가는 운좋게도 여행을 떠난 타이완에서 보고 즐기며 느낀 것들을 책 전체에 걸쳐 일러스트로 그려서 보여주고 있다. 여행 에세이인데 사진은 단 한장도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림으로만 표현되어 있다. 흔한 카페와 거리 전경사진이 아닌 작가의 눈을 한꺼풀 거친 일러스트라 더 새롭기도 하고 실제로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거기다 책이 생각보다 너무 고급지다. 여행 일러스트 에세이라 얇은 책일거라 예상했는데, 꽤 많은 자료가 담겼는지 두툼하고, 표지도 양장으로 제본되어 있다. 일단 비쥬얼 면에서는 합격!

「저는 보통 집에서 일을 하다보니 매일매일이 마감일입니다. 하지만 정말 다행히도 쉬는 날을 제 마음대로 정하고, 제 일정대로 여행 계획도 짤 수 있어요. 인터넷만 되면 어디서든 일을 할 수 있으니 종이와 펜, 노트북만 들고 자주 불쑥 떠나 여행하듯 일을 합니다. 
정신없이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한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골목을 천천히 걷고 미술관과 서점을 둘러보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다가 갑자기 머릿속에서 번쩍 하고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이 책 《첫, 타이베이》도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p. 4~5>

생각해보면 나도 집에서 일하고, 노트북만 있으면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자유롭게 떠나지 못하는거지.. 앞으로는 집순이 기질을 좀 없애보는 걸로ㅋ



책에 나온 타이완의 수도 타이베이의 모습은 같은 아시아권이라 그런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이었다. 서울처럼 활기넘치고 시끌벅적한 도시 느낌의 타이베이는 친절한 사람들이 넘치고, 즐길 곳이 풍부한 재미있는 도시같다. 작가가 책에 그리고 있는 내용들은 짧게 관광으로 갔을 때 느낄 수 있는 정보보다는 진득하게 지내면서 체험해볼만 장소와 요소들이 많았다. 새로운 도시에서 살아보고 싶은 로망이 생기는 책이다. 



다른 나라의 편의점에는 어떤 음료들을 파는걸까? 우리나라에는 팔지 않는 이국적인 음료들을 예쁘게 그림으로 소개하고 있어 먹어보고 싶은 마음 만땅이다. 타이완에는 목이버섯을 음료로도 많이 활용하나보다. 우리나라와는 다른 색다른 재료들, 타이완의 유명한 음식인 듯 보이는 더우장, 달콤해보이는 맥주까지 귀여운 일러스트로 소개하고 있다. 



여행가면 꼭 가보고 싶은 맛집과 유명한 음식들도 여럿 소개하고 있는데, 요건 좀 그림보다는 실물이 궁금하긴 했다. 실제 어떤 비쥬얼을 가진 음식들일까, 인터넷을 뒤져봐야 할 것 같은 느낌.    



작가가 받았다는 이색적인 안마가 웃기고도 이색적이었다. 종이로 된 끈 팬티만 입고 들어가면 작고 마른 안마사가 온몸과 엉덩이까지 조물조물 안마해준다. 시원하긴 할 것 같은데 왠지 부끄럽고 민망할 것 같은 느낌이다. 궁금하긴 한데 이건 도저히 못받겠다 ㅋㅋ 



그 외에도 다양한 호텔의 구조와 서비스를 소개한 섹션도 있었는데, 호텔의 공동 공간에 오두막이 있는 곳도 있고, 자유롭고 예쁘다. 다양한 형태의 룸을 공간과 배치까지 함께 소개하고 있어 여행을 계획할 때 참고하면 좋을 듯 하다. 작가는 다양한 장소를 소개하면서 실제 그곳에 대한 정보를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도록 홈페이지나 페이스북 주소등을 함께 적어놓았기에 실제로 여행가기전 정보를 알아보기 좋다. 

<첫, 타이베이>를 서울로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면, 서울이라는 도시 곳곳의 맛집과 예쁜 카페, 즐길 거리들, 사람들의 모습, 호텔, 도시공원 등을 소개해주고 가이드 해주는 책같은 느낌이다. 거기다 저자가 만난 다양한 사람들을 인터뷰한 페이지들이 곳곳에 있어,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도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여행에 대한 정보위주 보다는 개인의 여행 다이어리 같은 느낌도 물씬 풍긴다. 이렇게 다양한 것들을 자세하게 일일히 다 그림으로 그리고 표현하려면 작가가 정말 다리품을 많이 팔았겠다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사실 이국의 여행지 다운 색다른 맛이 별로 없고, 일반적인 도시와 별다른 점이 없다는 게 좀 아쉬웠다. 작가의 개인적인 여행 다이어리를 본 것 같은 느낌으로 만족하는 걸로 ㅋ 타이베이를 갈 계획이 있거나, 갔다온 사람들은 계획이나 추억삼아 한번쯤 넘겨봐도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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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7-11-30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에 다녀왔는데, 이렇게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보니 또 다르네요~

다림냥 2017-12-01 01:19   좋아요 1 | URL
타이베이 다녀오셨어요? 정말 사람들이 많이들 친절한가요? 저도 언젠가 꼭 한번 가봐야겠어요 ㅋ

비연 2017-12-01 06:49   좋아요 1 | URL
네네~ 타이베이는 이번이 세번째인가 했는데 사람들 많이 친절하고 좋아요~ 개인적으로 타이완 자체가 여행하기 좋은 나라라고 생각~
 
달콤한 노래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방미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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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가 죽었다. 단 몇 초만에.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 가장 강렬한 시작을 알리는 첫 문장이었다. 남자아이 아당은 이미 죽었고, 딸아이 밀라는 강렬하게 저항하다 죽어가고 있다. 아이를 죽인 보모는 자살하기 위해 자신의 팔목을 긋고, 목에 칼을 꽂았지만 결국 죽지 못했다. 그녀는 왜 아이들을 죽였는가. 그녀는 도대체 누구인가. 끔찍한 살해현장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함께 시작하는 이 소설은 긴장감 가득하게 시작하지만, 다 읽고 나서는 알쏭달쏭한 마음만 한가득이다. 이 책의 작가 레일라 슬리마니는 두번째 책으로 <달콤한 노래>를 내고 평단의 극찬을 받으며 2016년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여성으로서는 역대 12번째 수상자라는 영예를 안게 된 그녀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아이들의 엄마 미리암과 보모 루이즈의 언제 깨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긴장 상태와 완벽한 듯 보이지만 어딘가 수상한 보모 루이즈의 속마음을 상상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미리암과 폴은 결혼해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이를 얻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미리암은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전적으로 육아에 매진하게 된다. 처음엔 아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 자신이 사라지는 것 같다. 초라한 모습으로 외출했던 어느 날, 미리암은 법대에 같이 다녔던 친구 파스칼을 만나게 된다. 파스칼을 보자 자신의 처지가 더욱 한심스럽게만 느껴지던 차, 파스칼이 뜻밖의 일자리를 제안하게 된다.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 여기며 미리암은 변호사 일을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 먹는다. 그렇게 자기를 대신해 아이들을 봐줄 보모를 찾게 된다. 

부부는 여러사람을 면접 했지만 그 중 루이즈는 단연 완벽했다. 루이즈가 그전에 아이를 봐줬던 주인집 사람들도 루이즈에 대해 너무나 칭찬일색이다. 우아한 말투와 조용한 행동거지를 가진 루이즈를 보모로 맡게 되어 미리암과 폴은 너무나 만족스럽다. 루이즈는 보모의 역할을 완벽하게 하는 것은 물론, 미리암이 잘 하지 못하던 집안 청소와 식사 준비까지 완벽하게 해내기 시작한다. 어느새 루이즈는 미리암과 폴 부부에게 없어서는 안될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가 되어간다. 

작품 속 보모 루이즈의 캐릭터는 참 독특하다. 보모로써 집안일을 완벽하게 해내고 아이들과 진심으로 동심에 젖어 함께 놀아주는 사람이지만 정작 자신의 딸 스테파니는 방치하고 심지어 학대하기도 한다. 딸이 끝내 사라졌지만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미리암의 집에서 그토록 완벽하게 살림을 하고, 척척 음식을 해내던 루이즈는 막상 자신의 원룸 아파트에 도착하는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마치 스스로가 자신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 같다. 주변의 다른 보모들과는 전혀 사적인 것을 공유하려 들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을 가르치려 들어서 루이즈는 그들 사이의 암묵적인 왕따같은 존재다. 

시간이 지나면서 몇가지 사건을 겪고 난 후, 미리암과 폴은 점점 루이즈에게 불편한 기색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하지만, 각자의 일이 성공가도를 타기 시작한 참이라 너무 바쁘다. 루이즈가 당장 그만둔다면 생활이 굴러가지 않을 정도로 너무 많이 의지하게 된 것이다. 루이즈는 완벽하게 이 가족에게 동화되고 싶다. 아이들이 모두 유치원에 가게 되어 보모가 필요없어지게 될 상황이 두려워진다. 그녀는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서가 아닌 다른 가족 안에서 동화된 감정을 느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녀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자신의 삶, 자기 딸의 삶보다 자기가 보모로써 돌보는 아이와 그 가족이 우선이 된 삶, 그건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던 것일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알쏭달쏭한 느낌과 함께 먹먹한 감정이 올라온다. 주인집 아이들을 죽이고 자기도 죽고자 했던 여자, 인형처럼 가녀린 몸을 지니고 평생을 있는 듯 없는 듯 살았던 여자, 그녀의 속엔 도대체 무슨 마음이 숨어있었던 걸까. 하루아침에 아이를 다 잃고 짐승처럼 울부짖은 미리암의 삶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작가가 <달콤한 노래>를 통해 여자들의 어떤 면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는지 궁금해 진다.   
달콤한 일상 속에 숨어있던 전혀 달콤하지 않은 이야기들과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은 루이즈, 
나는 아직도 그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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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시스터즈 키퍼
조디 피코 지음, 이지민 옮김, 한정우 감수 / SISO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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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중에 아픈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분명 슬픈 일이다. 그런데 내가 태어난 이유가 그 형제를 살리기 위해 장기와 피를 제공하기 위해서라면? 그건 좀 슬픈 일이지 않을까?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형제들은 같은 피를 나눠가진 만큼, 부모에게 똑같이 사랑받기를 원하는 경쟁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이가 어려서 자기 몸에 대한 선택권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부모 마음대로 아이의 몸에서 피와 골수, 장기를 빼서 그애의 언니에게 줄 수 있는 것일까?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는 당연하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안나의 입장에 동화된 나머지, 그녀의 부모들을 내심 불만에 찬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동명의 영화로도 개봉된 적이 있는 영화원작소설 이며, 다양한 도덕적 관점이 충돌하는 소재를 활용해 충격적이고도 기가막힌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다. 소설을 읽으면서 줄곧 소름끼치면서도 애잔한 감정을 감출수가 없었던 것 같다. 

「"처음으로 언니에게 준 건 제대혈있었어요. 신생아 때였죠. 언니는 급성전골수세포성백혈병(APL)을 앓고 있었고 제 세포 덕분에 나아졌죠. 다음 번 병이 재발했을 때 저는 다섯 살이었고 의사는 제 몸에서 림프구를 뽑아갔어요. 세번이나요. 첫 시도 때 충분한 양을 뽑지 못한 것 같았거든요. 그마저도 효과가 없자 이식을 하기 위해 골수를 뽑았어요. 언니가 감염되자 과립 백혈구를 기증해야 했고요. 언니가 다시 재발했을 때에는 말초조혈모세포를 기증해야 했지요." 」 <p.31>

안나는 언니 케이트에게 유전적으로 딱맞는 기증을 할 수 있도록 태어난 유전자 맞춤아기였다. 어쩌면 복제인간과 약간 비슷한 개념으로 태어난 셈이다. 태어날 때부터 언니에게 자신의 피와 골수와 백혈구를 끝없이 기증해야 했던 아이, 이제 언니 케이트는 백혈병이 아닌 신부전증으로 문제가 생겨 신장이식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신장은 2개가 존재하고 하나만 있어도 살아가는데는 지장이 없기에 부모는 안나가 당연히 기증해줄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제 안나는 더이상 언니에게 기증하는 것을 그만두고 싶다고, 자신에게 기증을 강요하는 부모님을 고소하겠다며 변호사를 찾아간다. 13살이라는 아직 어린 나이에 어려운 전문용어를 줄줄 외며 반쯤은 어른이 된 모습으로 변호사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안나의 모습이 참 안타깝다. 

부모의 관심은 항상 아픈 케이트였다. 아픈 케이트가 제일 괴롭긴 하겠지만, 남아있는 아이들은 부모의 무관심 앞에 소외감으로 점점 삐뚤어져간다. 소설에서 비중은 작지만, 케이트의 오빠 제시는 동생에게 기증도 할 수 없는 입장이고, 부모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상태다. 커갈수록 점점 삐뚤어지며 마약과 술에 쩔어지내고, 방화를 저지르기도 한다. 부모는 계속해서 속을 썩이는 제시를 마음속으로 포기하게 되지만, 누구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제시의 상처받은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소설은 모든 등장인물의 시점을 돌아가면서 보여준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자신의 변호사 커리어를 쌓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여겼던 엄마 사라, 소방관으로 일하면서 매일 위급상황을 맞이하지만 집에서 언제 케이트가 쓰러질 지 몰라 발을 동동 굴리는 상황이 더 힘든 아빠 브라이언, 언니를 살리고 싶은데 반대로 죽여야 하는 입장에 처해 복잡한 심경의 안나, 이 모든 불행에 괴롭고 거기에 외로움까지 더한 제시 등 각자의 입장에서 보면 누구 한명이 나쁘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모두가 힘든 상황이다.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집안에 아픈 사람이 생겼을 때 모든 가족들이 겪을 수 있는 보편적인 괴로운 상황들과 함께 그 중 한 아이의 희생을 동력으로 다른 아이를 살려야만하는 특수한 상황을 끼워넣어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해볼만한 인생문제를 던져준다. 

책을 읽을 땐 안나에게 몰입한 나머지 부모들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는데, 리뷰를 쓰면서 감정에서 좀 벗어나 생각해보니 부모들의 결정이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는 면도 있기에 도저히 한쪽 편을 들어주기가 힘든 이야기다. 물론 소외받은 자식들의 외로움은 어디가서 보상받아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특히 소설의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인 결말은 책의 여운이 오래도록 뇌리에 박히게 한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소설, 영화도 찾아봐야겠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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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 사유의 풍경으로 걸어 들어가다
로제 폴 드루아 지음, 백선희 옮김 / 책세상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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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다니는 행위를 좋아한다. 심심하면 집앞 공원에 산책을 나가서 정처없이 돌아다니기도 하고, 일부러 도보여행으로 일정을 잡아서 4박 5일동안 미친듯이 걷기만 했던 적도 있었다. 자동차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는 것과는 다른, 걷는 것만의 낭만이 있다. 주변의 배경이 천천히 내 속도에 맞춰 지나가고, 그 속도에 맞춰 천천히 내 생각도 흘러간다. 혼자 걷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이야기하며 걷는 걸 더 좋아하는 편인데, 걸으면서 이야기하다보면 서로가 품고있던 문제들이 스르르 풀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때가 많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다리와 함께 생각도 함께 걷는걸까? 그러고 보면 생각을 많이 하는 옛날 철학자들은 항상 걸으면서 진실을 탐구했던 것 같다. 걷는 행위 안에는 뭔가 특별한 힘이 숨어있는 걸까?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은 걷기라는 행위를 통해 다양한 철학자들의 생각과 인생을 살펴보는 책이다. 

「이내 명백한 사실이 눈앞에서 확인될 것이다. 걷기가 추락의 시작이라는 것, 추락의 발단이라는 것. 추락은 촉발되었다가 이내 저지당하고, 다시 시작되다가 또 저지당하고……. 그렇게 무한히 이어진다. 한 발을 다른 발 앞에 놓는 건 거의 자신을 넘어뜨리다가 균형을 회복하고, 다시 거의 넘어뜨리다가 만회하기를 끊임없이 이어가는 일이다. 변함없이 시도되었다가 중단되는 이 추락을 시작으로 움직임이 생겨난다. 우리는 그걸 직감적으로 안다. 매일 걷지만 우리 중 대부분은 이런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p.13>  

걷는 것이 추락의 시작이고, 이내 그것을 바로 잡아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못했다. 그저 다리가 움직이는대로 걸을 뿐,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라 그 행동을 쪼개서 생각해보니 새삼 새롭다. 그러고보면 친밀한 사람끼리는 멀리서 걷는 모습만으로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얼굴과 생김새는 숨겨도 걸음걸이는 못 숨긴다는 말처럼 사람마다 특유의 걸음걸이가 있는 것이다. 그 걸음걸이 마저도 기분에 따라 씩씩하고 당당해지기도 하고, 어깨 축쳐진 터덜터덜한 발걸음이 되기도 한다. 사람이 걸을 땐 생각도 함께 걷는 것이다. 「"네가 어떻게 걷는지 보여주면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주겠다."」<p.26> 이 말처럼 걷는 행위가 사람의 생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언제나 철학은 확신에 딴지를 거는 일부터 한다. "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정말 그렇게 확신해?" 이 시비 걸기는 명백히 안정을 깨뜨리는 일이다. (...)어떤 경우건 철학을 통해 친근한 확신을 흔드는 일은 걷기의 첫 움직임이 촉발하는 추락의 시작에 비교할 수 있다. 명백한 사실에 틈을 만드는 의심은 곧 넘어지겠다는 느낌을 준다. 친근하고 확실하던 세계가 갑자기 의심스러운 것으로 드러난다. 우리가 기대고 있던 기둥들이 무너진다. 이 균형 깨기는 매번 동일한 동요에서 비롯된다. "안다고 믿었죠? 알지 못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친근하다고 확신하십니까? 다르게 보세요. 놀라시게 될 겁니다."」 <p.108>

철학자들의 생각이란 기존에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관념을 깨는 것에서 출발한다. 모두가 보고도 보지 못하는 것을 어느새 다른 눈으로 보게된다. 걸으면서 생각이 흐르는데로 놔두다 보면 어느새 '왜?'라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그것이 철학의 시작이 아닐까? 걷다보면 나무, 풀, 건물, 지나다니는 사람들, 강아지, 고양이 등 수많은 것들을 지나치기 마련이다. 눈으로 보면서 걷다보면 어느새 집안에 가만히 앉아있을 때보다 생각이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걸 느낄 수 있다. 그 속엔 물론 쓸데없는 생각들이 더 많겠지만 복잡한 머릿속에 산소를 공급해 생각을 유연하게 해주는 작용을 할 것이다.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에 나오는 철학자 중 특히 기억에 남았던 사례는 노자의 이야기였다. 
「바람은 작고 미미하지만 산을 깎을 수도 있고 나무들을 눕힐 수도 있다. 바람은 우리가 그 둘레를 구분하지 못하게 움직이며 경게가 없다. 그저 달아나며 미끄러지듯 지날 뿐인데 바람은 제 힘을 온전히 발휘한다. 바람의 힘은 제 안에 있지 않고 제 자신을 관통한다. 바람은 그 힘을 소유하지 않고, 그 힘에 소유당하지도 않는다. 세상이 제자리에서 작동하도록 내버려두며 스스로를 지우기 때문이다. 
현자는 정확히 바람처럼 행동한다. 그러므로 걷는 것은 당나귀이지 현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현자는 일정한 방식으로 걷는다. 그가 가만히 내버려두기 때문이다. 이 절대적 수동성 속에서 그는 실재적이고 궁극적인 힘을, 만물의 내적 작동과, 만물의 내밀한 전진과 하나가 되는 힘을 발견한다. 따라서 걷는 건 세상이지 현자가 아니다.  현자는 그럼에도 걷지 않으면서 나아가고, 전진하고, 자기 발을 다른 발 앞에 내딛는 것보다 더 잘 걷는다. 노자의 것으로 여겨지는 이런 문장이 있다. "진정한 말은 역설처럼 보인다." 정말 그래 보인다.」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p.83~84>

직접 두발로 걷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아니라 세상이 걷도록 하는 사람, 절대적인 수동성으로 자연을 그대로 내버려둠으로써 걷지않고도 전진한다는 것, 그 자신이 보이지 않는 바람이 된다는 것, 왠지 멋져보였다.

책을 읽고나니 더욱 더 걷고 싶어졌기에 밖으로 나갔으나, 이제 완연한 추운 겨울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뼛속 깊숙히 찬바람이 들어와 오래 걸을 순 없었지만 다음번엔 내복에 목도리까지 돌돌 말고 나가서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걷는 것만큼 건전하게 기분을 환기하고, 생각을 정리하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방법은 흔치 않으니까. 걷다보면 나도 언젠가 감추어져있는 세상의 진리를 하나쯤은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걷는다, 또 걷는다. 

그대도 걸으며 세상의 숨은 진리를 찾아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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