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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 사유의 풍경으로 걸어 들어가다
로제 폴 드루아 지음, 백선희 옮김 / 책세상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걸어다니는 행위를 좋아한다. 심심하면 집앞 공원에 산책을 나가서 정처없이 돌아다니기도 하고, 일부러 도보여행으로 일정을 잡아서 4박 5일동안 미친듯이 걷기만 했던 적도 있었다. 자동차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는 것과는 다른, 걷는 것만의 낭만이 있다. 주변의 배경이 천천히 내 속도에 맞춰 지나가고, 그 속도에 맞춰 천천히 내 생각도 흘러간다. 혼자 걷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이야기하며 걷는 걸 더 좋아하는 편인데, 걸으면서 이야기하다보면 서로가 품고있던 문제들이 스르르 풀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때가 많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다리와 함께 생각도 함께 걷는걸까? 그러고 보면 생각을 많이 하는 옛날 철학자들은 항상 걸으면서 진실을 탐구했던 것 같다. 걷는 행위 안에는 뭔가 특별한 힘이 숨어있는 걸까?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은 걷기라는 행위를 통해 다양한 철학자들의 생각과 인생을 살펴보는 책이다.
「이내 명백한 사실이 눈앞에서 확인될 것이다. 걷기가 추락의 시작이라는 것, 추락의 발단이라는 것. 추락은 촉발되었다가 이내 저지당하고, 다시 시작되다가 또 저지당하고……. 그렇게 무한히 이어진다. 한 발을 다른 발 앞에 놓는 건 거의 자신을 넘어뜨리다가 균형을 회복하고, 다시 거의 넘어뜨리다가 만회하기를 끊임없이 이어가는 일이다. 변함없이 시도되었다가 중단되는 이 추락을 시작으로 움직임이 생겨난다. 우리는 그걸 직감적으로 안다. 매일 걷지만 우리 중 대부분은 이런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p.13>
걷는 것이 추락의 시작이고, 이내 그것을 바로 잡아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못했다. 그저 다리가 움직이는대로 걸을 뿐,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라 그 행동을 쪼개서 생각해보니 새삼 새롭다. 그러고보면 친밀한 사람끼리는 멀리서 걷는 모습만으로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얼굴과 생김새는 숨겨도 걸음걸이는 못 숨긴다는 말처럼 사람마다 특유의 걸음걸이가 있는 것이다. 그 걸음걸이 마저도 기분에 따라 씩씩하고 당당해지기도 하고, 어깨 축쳐진 터덜터덜한 발걸음이 되기도 한다. 사람이 걸을 땐 생각도 함께 걷는 것이다. 「"네가 어떻게 걷는지 보여주면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주겠다."」<p.26> 이 말처럼 걷는 행위가 사람의 생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언제나 철학은 확신에 딴지를 거는 일부터 한다. "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정말 그렇게 확신해?" 이 시비 걸기는 명백히 안정을 깨뜨리는 일이다. (...)어떤 경우건 철학을 통해 친근한 확신을 흔드는 일은 걷기의 첫 움직임이 촉발하는 추락의 시작에 비교할 수 있다. 명백한 사실에 틈을 만드는 의심은 곧 넘어지겠다는 느낌을 준다. 친근하고 확실하던 세계가 갑자기 의심스러운 것으로 드러난다. 우리가 기대고 있던 기둥들이 무너진다. 이 균형 깨기는 매번 동일한 동요에서 비롯된다. "안다고 믿었죠? 알지 못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친근하다고 확신하십니까? 다르게 보세요. 놀라시게 될 겁니다."」 <p.108>
철학자들의 생각이란 기존에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관념을 깨는 것에서 출발한다. 모두가 보고도 보지 못하는 것을 어느새 다른 눈으로 보게된다. 걸으면서 생각이 흐르는데로 놔두다 보면 어느새 '왜?'라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그것이 철학의 시작이 아닐까? 걷다보면 나무, 풀, 건물, 지나다니는 사람들, 강아지, 고양이 등 수많은 것들을 지나치기 마련이다. 눈으로 보면서 걷다보면 어느새 집안에 가만히 앉아있을 때보다 생각이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걸 느낄 수 있다. 그 속엔 물론 쓸데없는 생각들이 더 많겠지만 복잡한 머릿속에 산소를 공급해 생각을 유연하게 해주는 작용을 할 것이다.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에 나오는 철학자 중 특히 기억에 남았던 사례는 노자의 이야기였다.
「바람은 작고 미미하지만 산을 깎을 수도 있고 나무들을 눕힐 수도 있다. 바람은 우리가 그 둘레를 구분하지 못하게 움직이며 경게가 없다. 그저 달아나며 미끄러지듯 지날 뿐인데 바람은 제 힘을 온전히 발휘한다. 바람의 힘은 제 안에 있지 않고 제 자신을 관통한다. 바람은 그 힘을 소유하지 않고, 그 힘에 소유당하지도 않는다. 세상이 제자리에서 작동하도록 내버려두며 스스로를 지우기 때문이다.
현자는 정확히 바람처럼 행동한다. 그러므로 걷는 것은 당나귀이지 현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현자는 일정한 방식으로 걷는다. 그가 가만히 내버려두기 때문이다. 이 절대적 수동성 속에서 그는 실재적이고 궁극적인 힘을, 만물의 내적 작동과, 만물의 내밀한 전진과 하나가 되는 힘을 발견한다. 따라서 걷는 건 세상이지 현자가 아니다. 현자는 그럼에도 걷지 않으면서 나아가고, 전진하고, 자기 발을 다른 발 앞에 내딛는 것보다 더 잘 걷는다. 노자의 것으로 여겨지는 이런 문장이 있다. "진정한 말은 역설처럼 보인다." 정말 그래 보인다.」
<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p.83~84>
직접 두발로 걷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아니라 세상이 걷도록 하는 사람, 절대적인 수동성으로 자연을 그대로 내버려둠으로써 걷지않고도 전진한다는 것, 그 자신이 보이지 않는 바람이 된다는 것, 왠지 멋져보였다.
책을 읽고나니 더욱 더 걷고 싶어졌기에 밖으로 나갔으나, 이제 완연한 추운 겨울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뼛속 깊숙히 찬바람이 들어와 오래 걸을 순 없었지만 다음번엔 내복에 목도리까지 돌돌 말고 나가서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걷는 것만큼 건전하게 기분을 환기하고, 생각을 정리하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방법은 흔치 않으니까. 걷다보면 나도 언젠가 감추어져있는 세상의 진리를 하나쯤은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걷는다, 또 걷는다.
그대도 걸으며 세상의 숨은 진리를 찾아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