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총총
사쿠라기 시노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2월
평점 :
절판


어떤 기구함은 그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것보다 오롯이 타자의 관점으로 관찰할 때 더 증폭되는 것이 아닐까.

소설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지하루는 이야기 중 한 번도 화자로 등장하지 않는다. 총 9개의 단편 같은 이야기 속에서 엑스트라 혹은 잠깐 지나가는 사람으로 매회 등장할 뿐이다. 소설 속에서 숨은 그림 찾기를 해야 할 정도로 잠깐씩 등장하지만 이 소설은 엄연히 지하루의 기구한 삶에 대한 이야기다. 말로 나열해보려 하면 기구하다 못해 통속적인 막장 드라마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이야기를 만약 지하루의 입을 빌려 서술하기 시작했다면 어쩌면 기구한 운명을 살았던 한 여자의 팔자타령 정도로 치부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소설은 신선하게도 지하루의 인생을 스쳐갔던 사람들이 화자가 되어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9개의 이야기는 결국 지하루가 지나온 인생을 이야기하는 연작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각기 다른 단편처럼 느껴진다. 지하루를 매듭 삼아 그녀를 스쳐간 다양한 사람들의 기구한 이야기가 함께 엮여있는 식이다. 이런 퍼즐 같은 구성이 신선하고 마음에 들었다. 지하루의 엄마 사키코의 시선으로 시작해 지하루의 딸 야야코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 이 이야기는 장장 40여 년을 아우른다.

지하루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어울리지 않게 불균형할 정도로 큰 가슴을 가졌다. 그런 신체적 조건은 아름다움과 별개로 여러 남자들에게 성욕의 대상이 된다. 태생적으로 순종적인 성격에 약간 맹해 보이는 인상은 남자들이 다가서기 쉬운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였을까. 중학생 시절 학교 체육 선생님에게 성추행을 당하기도 하고, 고등학교 시절에 아이를 임신해 중절수술을 받기도 한다. 그렇게 서서히 지하루의 힘들고 고단한 삶이 시작된다.

소설을 읽는 내내 인생이 왜 저렇게까지 되나 싶어서 답답하기도, 화가 나기도 한다. 그러나 지하루는 마치 감정이 없는 양 묵묵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간다. 재밌는 건 지하루의 엄마 사키코의 삶이다. 자기를 사랑해줄 남자를 찾기 위해서 딸도 무참히 버리고 배신했던 그녀는 늘그막이 진짜로 그 소원을 이뤘다. 비록 가슴이 썩어들어가는 병에 걸려 손도 못써보고 죽게 생겼지만 자신을 위해 같이 죽어줄 수 있는 남자가 실제로 생겼으니 말이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밤 사키코가 세상을 떠나고 그 옆에 누워 함께 죽음을 준비하는 남자의 모습이라니, 인생이란 묘하다.

한편 지하루는 평생에 걸쳐 결국 모든 걸 잃은 것처럼 보인다. 교통사고로 그나마 멀쩡하던 신체마저도 모조리 망가지게 되니 말이다. 다리가 절단되고 얼굴엔 온통 상처, 거기다 정기적으로 이마와 볼에서 교통사고 때 얼굴에 박혔던 유리 파편이 튀어나온다. 지하루는 그걸 또 소중하게 약병에 조약돌 모으듯이 간직하고 말이다. 그 어떤 불행도 오롯이 받아들이는 지하루의 태도는 이쯤 되면 불쌍한 것이 아니라 대단케 느껴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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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은 다음에 다시 지하루의 대사만 되짚어 찾아봐도 좋을 것 같다. 작가의 시선은 세상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지하루를 선택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가운데서도 '골똘히 생각하는 눈빛,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어른들을 관찰하는 눈빛'을 가진 명민한 열세 살 소녀의 삶을 오래도록 응시했을 것이다. 그녀가 필요 최소한의 온당한 말을 하고 온당한 비명을 지르는데도 평범한 이웃인 우리가 그것을 어떤 이유로 어떻게 뒤틀고 일그러뜨렸는지를.

<별이 총총, 옮긴이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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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루의 이야기를 보여주는데 다양한 타인의 시선을 빌려와 이야기를 이끌어간 것은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타인의 이기적인 눈에 비친 지하루, 지하루를 성적으로 대하는 음흉한 남자들의 시선을 노골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지하루의 삶은 한층 더 기구해 보인다. 사람이 저렇게도 살 수가 있나 싶어진다. 하지만 그건 타인의 시선으로 본 지하루의 모습일 뿐이다. 지하루 자신이 스스로를 긍정한다면 그녀는 어떻게든 살아나갈 것이다. 일그러져도, 아파도, 인생은 계속되니까.

책을 다 읽고 나면 코가 시리도록 추운 겨울날, 눈물 콧물 짜며 펑펑 울고 난 다음 맑아진 눈으로 별이 총총 떠있는 밤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기구하고 기구한 지하루의 일생은 '슬프지만 이 또한 인생'이라며 가만히 등을 도닥여주는 것 같다.

사쿠라기 시노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한 작가다. 생소한 작가라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읽기 시작한 책에 푹 빠져버렸다. 통속적으로 보일 수도, 다소 노골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소재를 신선한 구성을 통해 잘 살려낸 것 같아 읽는 동안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9개의 이야기 하나하나가 다 재미있으면서 그 자체로서 완성 미와 여운이 있고, 이야기 속에 숨은 그림 찾기처럼 숨어있던 지하루가 책을 다 읽고 나면 3D 입체가 되어 튀어나오는 느낌이다.

한마디로 사쿠라기 시노의 다른 작품도 꼭 읽어보고 싶다는 얘기!

애정 작가 목록에 살짝궁 넣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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