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일라스 가는 길 - 영혼의 성소 티베트
박범신 지음 / 문이당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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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치 않은 만남이다. 인터파크 잔여 마일리지를 쓰고 싶은 책이 생겨서 결재하러 들어갔다가, 전자책을 컴퓨터로 볼 수 있게 해주는 비스킷 PC 뷰어라는 프로그램을 설치하면서 같이 받게 된 5권의 책 중에 한 권이 바로 박범신의 <카일라스 가는 길>이다.

 

박범신이라는 작가는 <촐라체>와 <은교>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개인적 기준으로는 한국소설가 중에서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였기 때문에 별다른 생각 없이 믿고 다운받게 되었다. 그래서 책을 읽기 시작하고 나서야 이 책이 여행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전혀 실망스럽지 않았다.

 

티베트의 현재

 

티베트의 현재는 예전에 읽었던 <중국의 거대한 기차>라는 책을 통해 읽은 기억이 있다. 중국정부의 티베트 통치 야욕과 지하자원을 얻으려는 국책사업의 일환이라는 이유로 건설된 칭짱 철도로 인해 티베트에는 급속한 자본주의 물결이 흘러들어오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카일라스 가는 길>에서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라사에서 작가는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라사는 어느새 쾌락의 도시가 됐다. 매춘 전문 홍등가도 있고 매춘이 가능한 발마사지 업소도 수십 군데 이른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원칙적으로 매춘은 불법이지만 자기 헌신을 통해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 ‘티베트의 영혼’을 무너뜨리기 위해 중국정부는 쾌락의 병균을 은밀히 퍼뜨리고 있다. 수많은 한족들이 물밀듯 티베트로 몰려들고 있고, 하루가 다르게 현대적 빌딩과 마켓들이 생겨나고 있으며, 달라이 라마의 망명으로 속이 텅 빈 포탈라궁은 암표상들이 둘러싼 관광 상품으로 전락한 지 오래됐다. -27p-

 

하지만 이런 풍경과 동시에 그의 눈에 들어왔던 것은 저항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욕심내지 않고 한데 어울려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자본주의의 쾌락과 종교의 인내가 공존하는 상반된 풍경 속에서 티베트가 오염되었다고 단정을 짓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말한다. 티베트 사람들은 현재 상황을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헤쳐나가는 중이었다.

 

티베트의 불교

 

'다르마타’가 지나면 모든 영혼은 전생의 카르마에 따라 다시 생성된다. 그가 무엇으로, 어떤 환경을 갖고 태어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업력에 달려 있다. 살아생전 고통받은 삶일수록 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새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113p-

 

어떤 것은 몸이 행하고 어떤 것은 말이 행하고 어떤 것은 생각이 행한다. 그리고 몸과 말과 생각이 행한 것의 총체가 바로 스스로 만든 카르마, 곧 자업이 되며, 자업은 그 결과를 낳는다. 모든 것이 자업다득이라는 것이다. -149p-

 

불교의 윤회사상은 내세를 기원하는 티베트인들에게 올바른 현재를 살아가도록 만들어준다. <쿠오 바디스>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욕망의 억제를 통해 내세를 기원하는 모습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들이 말하는 업이라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점점 더 쌓이게 되고, 티베트인들은 순례를 통해 조금이라도 현세의 업보를 씻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이들의 눈에는 이승의 삶이 번갯불이 번쩍하는 찰나의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삶이란 육체라는 껍데기에 영혼이 잠시 머물러 있는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더 재미있는 여행을 기대하며 이승을 살아간다. 보이지 않는 달콤한 내세라는 것은 인간의 타락을 막는 가장 튼튼한 고삐처럼 보인다.

 

신이 깃들어 있는 곳. 카일라스

 

수천 미터 직벽처럼 솟아오른 카일라스가 눈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가 시바신의 현현이든 제석천의 궁전이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상대화된 문명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도 카일라스를 보면 금방 그 어떤 절대적인 에너지에 흡수되는 것 같은 감동과 위엄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191p-

 

작가의 여행은 티베트의 현재를 보는 눈과 티베트의 문화를 조명하는 사명감을 거쳐 마지막 종착지인 카일라스로 향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시달렸던 정신적인 압박감에서 마침내 해방됨을 느낀다.

 

왜냐하면, 카일라스의 정수리와 직접 대면할 수 있게 신이 허락해주기 때문이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걱정거리는 카일라스라는 장엄한 존재에 의해 명멸하다가 마침내 사라진다. 그의 눈과 가슴을 가득 채우는 카일라스는 다른 이물질이 그의 영혼에 침투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자연이 주는 거대한 존재를 마주하고 있으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티끌만큼 작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내 존재감의 상실은 인생의 무상함을 야기하는 커다란 동기가 되는 것 같다. 내가 잘살든 그렇지 않든 나보다 훨씬 더 웅장한 무엇인가를 마주하게 되면 나의 모든 것이 초라해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 초라해짐은 좀 더 발전된 방향으로 나의 인생을 재설정해주기 때문에 오히려 고맙기도 하다.

 

저자는 이런 감정들을 <카일라스 가는 길>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가 나로 하여금 여행의 발길을 재촉했다면, 그의 <카일라스 가는 길>은 여행에서 그려지는 인간의 모습과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방향의 재설정을 도와주는 것 같다.

 

티베트의 불교와 티베트의 자연의 위력을 일찌감치 실감한 부자아빠와 가난한 아빠의 로버트 기요사키는 동생의 삶을 바라보면서 진정한 부자는 무엇인지 깨달았고 <부자오빠와 부자동생>을 통해 우리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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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오 바디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8
헨릭 시엔키에비츠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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솅키에비치의 고전적 작품은 폴란드 국민의 정신에 영향을 주고 영광된 과거를 기억하게 하고, 미래를 의심하지 않게 하고, 그리고 믿음과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솅키에비치의 문학과 투쟁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도 절실히 요청된다. <김수영 전집 산문편> -356p-

 

<김수영 전집>에서 소개된 작가 중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인물은 헨릭 시엔키에비츠라는 작가였다. 말과 글을 뺏겨버린 우리나라의 근대사와 너무나도 닮은 과거 폴란드의 어두운 현재. 절망감에 사로잡혀있던 국민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가지고 있던 모든 노력을 쏟아 부은 작가 헨릭 시엔키에비츠. 그의 <쿠오 바디스>를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작품은 로마의 네로 황제 시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덕분에 1896년에 발표된 작품임에도, 로마 시대에 사용되었을 법한 언어들이 책을 빼곡히 채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로마 신화 속의 많은 이름이 상황을 설명하거나 인물을 묘사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열된다. 그렇지만 딱딱한 느낌은 전혀 없다. 오히려 이 단어들이 뚜렷한 개성을 드러내면서 네로시대 속의 등장인물이 살아가고 있는 각자의 방식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전달된다.

 

이 작품은 네로황제시대의 억압 속에서 그리스도교라는 작은 묘목이 뿌리 내리고 가지를 뻗는 과정을 담고 있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어떤 환경들을 함축하여 담고 있지 않나 생각해보았다.

 

네로야 말할 것도 없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추악한 인간 본능의 초상이고, 그를 따르는 신하들은 추악함에 동조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애쓰는 무엇이고, 페트로니우스 같은 인물은 인간의 추악함을 인정하면서,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찬동해야만 권력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무엇이고, 킬로는 기득권이 어떻든 간에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철학을 취했다가 버렸다가 하는 무엇이었다.

 

무엇보다도 리기아라는 여인은 왠지 그리스도교를 함축한 모습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기존에 있는 어떤 여인들의 모습과도 다른 특별함. 그 특별함이 그녀가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아름다움과 같이 힘을 발휘하여 그리스도교가 끌어들이려는 대상(로마시민)인 비니키우스의 혼을 쏙 빼놓으면서 비니키우스까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으로 끌어들이는 것 같다.

 

사실 다수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 속에서 개인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소설들을 읽으면서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다. 예를 들면 <1984>나 <나는 전설이다> 같은 소설이다. 그 소설들은 점차 다수의 힘에 동조하는 군상들과 홀로 남겨진 나의 모습을 쓸쓸하게 그려낸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것과는 정반대로 흘러간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소수의 개인이 힘을 모아서 다수의 추악함을 극복하는 과정 속에서 폴란드의 국민성을 고취하려는 시엔키에비츠의 목표와 방식이 엿보인다. 그래서 2권이 더욱 기대된다. 1권은 리기아로 말미암은 비니키우스의 그리스도교 적인 진정한 사랑이라는 깨달음에서 멈춰졌다.

 

"그리스는 지혜와 미를, 로마는 힘을 창조했다. 그러면 그리스도교인들은 이 세상에 무엇을 가져올 것인가?"

"우리는 이 세상에 사랑을 가져옵니다."베드로가 대답했다.

타르수스의 바오로가 덧붙였다.

"우리 모두가 인간의 무수한 언어로 말을 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한낱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꽤과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51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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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9
앙드레 지드 지음, 오현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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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지드의 이름은 여러 군데의 책에서 조금씩 들어왔었는데, 이번에 읽고 있는 <김수영 전집>에서 모든 것을 글로 표현 할 수 있다고 말하기를 서슴지 않는 훌륭한 작가라고 하길래 그 궁금증 참을 수 없어서 결국 그의 대표작<좁은문>을 손에 들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 프랑스 문학은 상당히 난해한 것으로 다가온다. 이 책에서 <팡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웬만하면 책을 다 읽어보려고 노력하는 내가 포기했던 몇 안 되는 책이 <팡세>였고, <좁은문>이라는 소설도 줄거리는 대충 이해할 수 있으나 뭔가 많이 숨겨져 있는 듯한 문장에 직면하여 '내가 정확히 보고 있는 것인가?' 자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뜨리고 있다. 


외사촌 간의 사랑이야기가 등장하길래 처음에는 사실 근친혼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가 들어있나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론만이야기 하자면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은 근친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혹시 모르겠다. 제롬과 알리사가 근친관계라서 이런 비극을 초래하게 됐을지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23p-


왜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넓고 커다란 문이 보기에도 탁 트여서 들락날락하기 쉬운데, 굳이 몸에 바짝 끼여서 비좁은 그래서 고통스러운 좁은 문을 고집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매우 답답하다. 어쨌든 책의 제목이 좁은 문이니 분명 이 책은 좁은 문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이 담겨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좁은 문이 상징하는 것은 성스러운 하느님의 계시를 따르는 것이며, 청교도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깨끗한 영혼의 가장 모범적인 아들이 되는 것일테다. 그래서 제롬과 알리사는 - 특히 알리사가 더욱 - 한결같이 성서에서 요구하는 비좁은 통로를 뚫기 위해 나름의 방식대로 안간힘을 쓴다. 노력의 결과는 그들이 바라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제롬과 알리사의 관계는 이제껏 본 사랑이야기 중에서 가장 플라토닉스러웠다. 마치, 서로 얼굴을 모르는 남녀가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대화를 하면서 사랑을 느끼는 것 마냥 그들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사촌 간임에도 불구하고 만남을 자제한 채 편지만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에 만족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들이 이처럼 극도의 청교도적인 삶을 추구하며 좁은문을 향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책의 편지와 독백 그리고 알리사의 일기에 그 설명이 살짝 드러나 있는데, 제롬의 성장배경이 청교도적인 가정이라는 사실이 기본적인 이유라면, 알리사의 부분에 국한되어 나타나는 주요한 장면들은 <좁은문>이 이야기하는 주요한 이유로 보인다.


알리사의 감정에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에서와 비슷한 성질의 자기 실망이 드러난다. 자신은 아주 선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자기의 행복이나 이익에 관련된 중요한 순간에 발동하는 찰나의 이기심이 그녀를 더욱 좁은길로 발걸음을 옮기게 한다.


그 발걸음은 동생 줄리에트 또한 제롬을 사랑한다고 말한 그 이후부터 시작되었고,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불안감을 느끼게 되면서 걸음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빠른 속도의 뜀박질은 알리사의 상태가 제롬이 바라는 기대치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는 자괴감이라는 숨 차오름을 만들어내고, 그 터질듯한 뜀박질을 견디지 못한 알리사는 나를 희생하면 제롬을 좁은문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중도 포기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그녀는 비극적 결말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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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생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이레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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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로 문학적 성공을 얻기 전의 궁핍했던 시기. 그의 실제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길 위의 생>이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는 책의 마지막 부분. 양아버지와의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100엔을 지급하고 증서를 받고 난 후, 아내와 이야기하는 부분에 압축되어 있었다.

 

“끝난 건 거죽뿐이라구. 그러니까 당신을 형식만 아는 여자라고 하는 거야.”

“그럼 어떻게 하면 정말로 끝이 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끝나는 것이란 하나도 없어. 일단 한 번 일어난 건 언제까지나 계속되지. 그저 여러 가지 형태로 모양만 바꾸는 거니까 남도 나도 느끼지 못할 뿐이야.”

“아이고. 우리 아기 예쁘기도 하지. 아버님 말씀은 무슨 말씀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네.”

                                                                                                         - 310~311p-

 

소세키의 모습을 대신하고 있는 겐조와 아내의 대화는 인간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는 지식인의 모습과 그 답과는 전혀 상관없이 아내는 아내 나름대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아기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대비시켜 보여줌으로써 마치 평행선을 걷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모습 전체가 나쓰메 소세키가 생각하는 답이었던 것 같다.

 

<길 위의 생>에서의 겐조는 없는 살림집에 막내로 태어난 죄로 혹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겐조는 양육의 문제 때문에 양아버지 시마다에게 입양되는데, 입양된 곳에서도 그들이 늙었을 때 요긴하게 사용할 연금의 목적으로 양육되었다는 불만을 책 속에 드러낸다. 이로 인해서 겐조는 눈에 보이는 것을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대하는 성격을 가지게 된다.

 

유년시절의 어두운 기억을 간직한 겐조는 인정머리 없고 틀에 박힌 지식인의 모습으로 자란다. 솔직히 겐조 보다는 누이와 매형. 형. 장인. 양부와 양모가 훨씬 더 문제점이 많은 사람으로 그려진다. 따라서 이들과 타협하려하지 않는 겐조가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나의 문제점은 없을까? 있다면 고쳐야 하지 않을까?’ 라는 고민은 전혀 없어 보인다.

 

사실 겐조가 탐욕스러운 그들과 타협 또는 융화하려는 노력과 행동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 있다. 빚보증 잘못 섰다가 나까지 낭패를 보게 될 결과가 눈에 뻔히 보이듯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친척들의 끊이지 않는 금전적 요구때문에 지식인의 무기력함에 대한 회의감까지 찾아오는 등 심리적으로 큰 압박감을 받고 있었던 겐조는 그 감정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그래도 옮겨담어 사회로 표출한다.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는 주위의 사람에 대항하여 겐조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결하는 <길 위의 생>의 결말은 통쾌하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말했다시피 각각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다른 가치관을 따르고 있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휩쓸리지 말고 “자기 소신껏 삶을 살아보는 것이 어떠냐?”라는 조언을 나쓰메 소세키는 건네준다.

 

이것이 서양의 문화가 스며들었던 일본 근대사회에 대항하여 부조리를 폭로했던 그가 남긴 마지막 목소리였던 것 같다. 다만 아쉬운 것은 소설 속 시점상의 제약(3인칭 구조를 띠고 있음에도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이야기)과 소설 밖 공간적 제약(다소 짧은 페이지) 때문에 사건이 중구난방으로 얽혀있어 그의 삶을 온전히 기억해낼 수 없었던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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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대교북스캔 클래식 24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활란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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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으로 발전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자는 어리석은 사람이야.”

 

‘나’(소설 속 선생님)는 초조함을 감추고 하나뿐인 친구 K에게 반복적으로 이 말을 읊어 댔다. 겉으로는 너의 길을 가라고 격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문장이 ‘나’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모든 것의 망가짐을 뜻한다. 이 말은 유산을 가로챈 숙부와 나는 다른 인간일 것으로 생각했던 믿음에 균열을 만들어내는 문장이며, 인간의 이기적인 양면성을 드러내는 천박한 문장이다.

 

아버지에게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았던 숙부가. 부모님께서 세상을 떠난 후에도 나를 아껴주던 숙부가. 왜 갑자기 유산을 가로채 갔을까? 내(선생님)가 나(나)의 나이였을 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상종 못 할 인간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하숙집 아가씨를 K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했던 말과 이 말로 인해 K가 보여준 행동에서 과거 숙부와 나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나름 평생 쌓아왔던 인생관에 숨어있는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방법 또한 같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없다. 하지만 배고픔 앞에 굴러들어온 인생을 바꿀만한 큰 먹을거리를 고스란히 남에게 바치는 인간 또한 없다.

 

절제된 시점, 절제된 대화, 절제된 행동의 끝에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 이 악마는 불행하게도 선생님의 인생 전체를 지배한다. 어느 때는 참회의 의미로. 어느 때는 방어의 의미로. 때에 맞게 교묘하게 모습을 변형하여 그를 고통스럽게 한다. 그래서 그는 ‘부자는 게으르다’는 일반적인 통념을 뒤집어쓴 채, 무위도식하며 인생을 살아간다.

 

“과거에 그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기억이 이번에는 그 사람의 머리 위에 발은 얹으려고 하지. 나는 훗날 모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지금의 존경을 거절하고 싶네. 지금보다 더 외로운 미래의 나를 견디는 대신 지금의 외로움을 견디고 싶어. 자유와 독립, 그리고 자아로 충만한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 대가로 모두 이 외로움을 맛봐야 하는 거야” -47p-

 

<마음>에서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리를 멘토 ‘나’(선생님)와 멘티 ‘나’(소설 속의 나)의 만남이라는 어떻게 보면 단순한 줄거리로서 전달한다. 만남의 과정이 급하지 않으므로 두 사람 사이의 탐색과정은 흥미롭게 전개된다. 차분하고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이타적인 배려심은 찾아볼 수 없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편지로 급하게 전해지는 그의 과거사 공개방법 또한 나쓰메 소세키가 <마음>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결론과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이 세상에 나와 연관된 유일하게 자에게 종족보존의 본능과 같은 이기적인 이유로서 번식을 허락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냥 묻어 버리기에 아깝기도 하지만 후대의 사람들이 이런 감정을 맞닥뜨렸을 때, 나(선생님)의 인생을 기억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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