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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생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이레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나쓰메 소세키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로 문학적 성공을 얻기 전의 궁핍했던 시기. 그의
실제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길 위의 생>이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는 책의 마지막 부분. 양아버지와의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100엔을
지급하고 증서를 받고 난 후, 아내와 이야기하는 부분에 압축되어
있었다.
“끝난 건 거죽뿐이라구. 그러니까 당신을 형식만 아는 여자라고 하는
거야.”
“그럼 어떻게 하면 정말로 끝이 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끝나는 것이란 하나도 없어. 일단 한 번 일어난 건
언제까지나 계속되지. 그저 여러 가지 형태로 모양만 바꾸는 거니까 남도 나도 느끼지 못할 뿐이야.”
“아이고. 우리 아기 예쁘기도 하지. 아버님 말씀은 무슨 말씀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네.”
- 310~311p-
소세키의 모습을 대신하고 있는 겐조와 아내의 대화는 인간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는 지식인의 모습과 그 답과는 전혀 상관없이 아내는 아내 나름대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아기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대비시켜 보여줌으로써 마치 평행선을 걷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모습 전체가 나쓰메 소세키가
생각하는 답이었던 것 같다.
<길 위의 생>에서의 겐조는 없는 살림집에 막내로 태어난 죄로 혹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겐조는 양육의 문제 때문에
양아버지 시마다에게 입양되는데, 입양된 곳에서도 그들이 늙었을 때 요긴하게 사용할 연금의 목적으로 양육되었다는 불만을 책 속에 드러낸다. 이로
인해서 겐조는 눈에 보이는 것을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대하는 성격을 가지게 된다.
유년시절의 어두운 기억을 간직한 겐조는 인정머리 없고 틀에 박힌
지식인의 모습으로 자란다. 솔직히 겐조 보다는 누이와 매형. 형. 장인. 양부와
양모가 훨씬 더 문제점이 많은 사람으로 그려진다. 따라서 이들과 타협하려하지
않는 겐조가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나의 문제점은
없을까? 있다면 고쳐야 하지 않을까?’ 라는 고민은 전혀 없어 보인다.
사실 겐조가 탐욕스러운 그들과 타협 또는 융화하려는 노력과 행동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 있다. 빚보증 잘못 섰다가 나까지 낭패를 보게 될 결과가
눈에 뻔히 보이듯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친척들의 끊이지 않는 금전적 요구때문에 지식인의 무기력함에 대한 회의감까지 찾아오는 등 심리적으로 큰 압박감을 받고 있었던 겐조는
그 감정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그래도
옮겨담어 사회로
표출한다.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는 주위의 사람에 대항하여 겐조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결하는
<길 위의 생>의 결말은 통쾌하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말했다시피 각각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다른
가치관을 따르고 있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휩쓸리지 말고 “자기
소신껏 삶을 살아보는 것이 어떠냐?”라는 조언을 나쓰메 소세키는
건네준다.
이것이 서양의 문화가 스며들었던 일본 근대사회에
대항하여 부조리를 폭로했던 그가 남긴 마지막 목소리였던 것 같다. 다만 아쉬운
것은 소설 속 시점상의 제약(3인칭 구조를 띠고 있음에도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이야기)과 소설 밖 공간적 제약(다소 짧은 페이지) 때문에
사건이 중구난방으로 얽혀있어 그의 삶을 온전히 기억해낼 수 없었던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