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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연한 인생
은희경 지음 / 창비 / 2012년 6월
평점 :
1. 처음 접하는 은희경 작가의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국적이나 장르 따위를 염두에 두고 읽는 스타일은 아님에도, 이 책을 읽을 때는 소설에서 풍겨오는 이국적인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이 책은 한국문학이야.’ 라는 쓸데없는 구분을 지었다.
이국적 분위기에서의 이국은 프랑스를 가리켰다. 바로 전에 읽은 프랑스 소설인 <인생은 짧고 욕망은 끝이 없다>와 비슷한 분위기다. 류와 요셉 그리고 이안이라는 주인공의 이름이 낯설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간에 보편적인 작가와는 분명히 다른 스타일을 가진 작가임에는 분명하다.
그 분위기라는 것을 글로서 표현해본다면 대충 이렇다. 한국작가 대부분이 제한적인 역사적 사건이나 제한적 세대라는 프레임에 종속적으로 얽매여있고, 그들의 문학과 그 속의 인물들은 이 프레임에 관련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그 사건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런 분위기가 있다.
그런데 은희경 작가의 <태연한 인생>은 역사적 사건과 세대에 얽매이지 않고(그렇지만 사회 비판의 메시지는 뚜렷하고 그래서 오히려 훨씬 적극적인), 사회와 인물 간의 일대일 관계로서 시작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리고 일대일 관계로서 사회에 정착한 인물들이 서로 관계하며 부산물처럼 떨어지는 콩고물의 맛이 아주 새콤하다.
2. 사회와 인물 간의 관계에서의 인물들은 류, 요셉, 이안, 이채, 도경, 정연, 젊은 감독, 수희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류와 요셉 그리고 이안. 좀 더 나가면 이채까지 그래 마지막. 도경까지 기억 속에 오래 남아있을 것 같다.
특히, 요셉이 전해주는 냉소 섞인 부조리의 단면들은 곰곰이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그리고 요셉의 주위에서 들려오는 부조리의 목소리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가령 카페에서 만난 유학생 남자의 목소리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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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류. 아들러 심리학의 이론처럼 그녀는 부모로부터 조성된 양육환경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역사적 사건과 세대가 아닌 태생적이라는 프레임에 갇힌다. 부모의 환경이라는 프레임. 어머니의 성향과 아버지의 성향의 차이. 불행하게도 그들의 극명한 성격 차이가 말해주듯 부모의 금슬은 좋지 않았다.
<등대로>의 램지부인의 경우와는 달리 삶 전부를 가족을 위해 희생할 수 없는. 희생자의 위치였지만 그 한계를 분명하게 인지해버린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우연적이면서도 새로운 욕망을 좇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아버지. 상반된 성향이 그녀를 지배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기억이 요셉과 만남에서 재현된다. 그렇게 류는 떠난다. 스스로 고독을 받아들인다.
4. 요셉. <태연한 인생>의 태연함이라는 단어를 상징하는 존재다. 그는 영악하지만, 그의 영악은 위악에 가깝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요셉은 <쿠오 바디스>의 페트로니우스와 킬로니데스를 적절하게 섞은 느낌이 든다. 페트로니우스처럼 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 즉, 패턴이라고 규정지은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인물이면서. 애써 바꾸려고도 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불평하긴 하지만 킬로니데스처럼 무엇보다 자신의 욕망? 쾌락? 삶? 즐거움을 위해서 세상의 모든 패턴들을 취했다 버렸다 한다.
그렇지만 가슴 깊이 존재하는 그리움. 류에게 만은 한없이 작아지는 인물이다. 류의 부모에게서 배운 방어법이 통했기 때문에 요셉의 사랑이 여태껏 지켜졌을까? 아니면 요셉은 죽을 때까지 그녀에게 품은 사랑의 감정을 지킬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안타깝지만 류의 방어가 통했던 것 같다.
5. 이안. 이안은 요셉의 가장한 악을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인물이다. 그래서 <위기의 작가들>이라는 영화에 실제인물 요셉을 캐스팅한다. 그는 이 소설에서 가장 혁명가에 가깝다. 이안은 이 사회의 패턴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잘못된 패턴을 까발려서라도 고쳐 잡으려고 한다. 분명히 악보다는 선에 가까운 인물이지만 <태연한 인생>을 살아가는 요셉을 위해 악역을 맡아야 하는 운명에 처한 인물이다.
6. 이채와 도경. 도경에게 작가 요셉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는 존재다. 그것은 아마도 지식일수도 있고, 명예일수도 있다. 돈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그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그것을 취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채에게 요셉은 인생의 멘토 격이다. 아직 사회를 바라보는 시야가 넓지 않은 이채에게 요셉이 전해주는 주옥같은 말들은 진리와도 다름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채에게는 요셉의 눈길을 돌릴만한 본능적인 매력이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