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하위징아
빌렘 오터스페어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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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을 대충 열흘정도 붙잡고 있었던 것 같다. 꽤 공들여 읽었건만. 내용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다는 부채감만 남긴 채. 짧게나마 글을 남겨 본다. 

 

2. 요한 하위징아의 글쓰기의 방식이나 남들과는 다른 개성 있는 관점에 대한 이야기를 찬찬히 읽다 보면. "아! 이 사람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원하는 통섭형 인재에 가까운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깨닫는다. 

 

단순하게 요즘 시대로 따지면수능 잘 쳐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그런 양산형 천재같은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 괴짜처럼 이쪽 학문, 저쪽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글을 쓰고, 하위징아가 저술한 작품들을 분류하는 전문가들도 명확한 정의를 내릴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랄까? 

 

학문의 경계를 폭넓게 뒀던 사람이라서 그런지 하위징아는 독서를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그중에서 문학 작품에서 학문적 영감을 발견하고, 그러한 단서를 토대로 역사적인 사건이나 과거의 풍경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모습은 흥미로웠던 것 같다. 요한 하위징아에 의하여 극찬받는 인물이 두 사람 있는데 단테와 나다니엘 호손이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작품을 읽는 순간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된다는. 예를 들면 단테가 쓴 작품을 읽는 순간. 실제로 이탈리아의 어느 곳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한다. 어쨌건 그들의 작품은 반드시 읽어야 할 문학 작품이 되었다.

 

3. <원제: 하위징아 읽기>의 빌렘 오터스페어가 말하기를 요한 하위징아의 글쓰기 특징에는 뚜렷한 특징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대표적으로 대조의 방식이다. 하위징아가 대조의 방식으로 글을 쓰는 이유는 양쪽 극단의 한계치까지 한꺼번에 보여줌으로써 읽는 사람들이 하위징아가 표현하고자 하는 정확한 지점을 포착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란다. 

 

4. 내 생각엔 요한 하위징아가 가진 특성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연속성(열정과 공감각으로 형성된)이 아닐까 싶다. 하위징아는 이미 그의 저작을 통하여(중세의 가을을 읽어보지 않아 단정을 짓긴 어렵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던 중세와 르네상스의 시대적 단층을 파괴했다. 쉽게 말해서, 중세와 르네상스는 계단의 형태가 아니라 무빙워크의 형태와 유사하다는 의견인데. 그러한 연속성을 12세기 르네상스라는 시대적 유산의 재발견과 발달 과정으로 증명하려 한다.  

 

그의 연속성은 무빙워크처럼 통합적이며, 쌍방 통행이라고 볼 수 있다. 책의 286페이지처럼, 마르크스는 돈과 노동, 다윈은 DNA, 프로이트는 성욕이라는 개념 하나를 가지고 인간을 전부 다 증명하려 하는데, 하위징아는 그러한 모든 것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그 세 가지 전부를 부정할 수도 있다고 한다.  

 

5. 여행을 떠나던가. 혹은 전혀 해보지 않았던 행동을 하는 것 같은. 새로운 경험을 통하여 철학의 도구로 의식을 낯설게 하기를 권하는데 하위징아의 철학은 낯설다 못해 그야말로 안개같이 두루뭉술하다. 그래서 손에 착하고 감기는 맛은 없다. 허우적대고 있는 것은 나의 깊이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6. 어떤 개념 자체가 인간적(살아 숨 쉬는 유기체)이어야 한다는 느낌이랄까. 객관적인 틀은 만들어 놓되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은 무한대로 주관성을 띄어도 좋다는 걸까?

 

휴머니즘, 낭만적인 분위기뿐만 아니라 불완전하고, 분노하고, 갈등하는 인간이어야 하고, 그의 온몸의 기관에서 시작되는 기록과 기록에 내포된 열망이야말로 진정한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하위징아는 말하는 것 같았다. 

 

7. 그리고 하위징아는 경쟁을 통한 발전과 토론을 통한 상호작용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이었고, 모더니즘에 대하여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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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지킹의 후예 - 제18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이영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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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감상을 남기기가 너무나 어렵다. 왜냐하면 <체인지킹의 후예>의 "우리는 체인지킹의 후예일 뿐이야."라는 자조와 냉소가 한데 어우러진 한 마디를 실은 반대편의 논지가 너무나 치밀하고 섬뜩하게 와 닿아. 정작 그가 계획했고 말하고자 했던 변증법을 위한 결말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말은 결말이고, 자조는 자조고, 냉소는 냉소고, 그리고 나는 나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영호의 말처럼 아버지가 없는 것과 아버지는 없지만, 어머니가 있는 것이 다르다면 그 차이는 얼마나 클까? 영호 자신이 이런 삶을 살게 된 이유는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완전 부정과 완전 긍정이라는 논리로 민에게 소리칠 수 있을까? 완전 부정의 영역에 들어있는 민의 주장을 100%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 

 

그 완벽한 부정과 긍정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흩어진 각종 정보의 인력에 취해서 자석에 끌리듯이 흐물흐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공포를 극복하지 못한 채. 지금도 트라우마를 안고서 삶의 흐름을 이어간다는 고백을 함으로써 성립된다. 이영훈 작가는 이처럼 기존의 여러 작가들이 제기한 주장에 반하는 주장을 펴고 있긴 한데.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앞으로도 여전히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체인지킹의 후예>에서 과거의 트라우마로서 영호의 정체성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공개하는 상징은 영호의 등짝에 선명하게 박힌 흉터다. 그 증거를 통하여 영호는 민 당신이 이야기한 인력의 세계는 망상이요. 앞으로 전개될 트라우마의 극복이야말로 각자에게 남겨진 몫이 되리라는 것을 알려온다. 

 

그 방식은 어느 누구도. 그리고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하지만 말이다. 그냥 헤쳐나갈 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민 역시 어쩌면 영호와 같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야기는 바람직한 방향(자신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했던 물질의 극복. 그 극복은 안이요. 민. 그리고 이제는 한가족이 된 샘의 도움)으로 마무리된다. 

 

결국, <체인지킹의 후예>의 이야기는 최근 형성된 잉여·오타쿠론으로 사회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트라우마를 내재한 사람들이 그것을 회피(이 영역에 잉여론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하거나 극복하기 위한 사람들이 모인 사회로 해석한다고 볼 수 있다. 

 

영호와 민. 그들뿐만 아니라, 안이요 역시.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던 젊은 세대. 특히, 그의 아들이 자살하는 것을 막지 못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샘의 경우에도 단순한 이상한 변태같은 녀석이 아니라 친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이 섞인 기억의 트라우마에 갇혀있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윤필 역시.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고 보험금을 타낸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아버지의 행성을 제거하는 극본을 쓴 최후의 일인이 되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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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 영화 '남영동 1985'의 주인공 김근태 이야기
방현석 지음 / 이야기공작소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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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읽어봐야 할 소설. 소설이라고 말하긴 뭐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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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 영화 '남영동 1985'의 주인공 김근태 이야기
방현석 지음 / 이야기공작소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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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은 소설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소설이 아니다. 표면적으로만 소설이다. 방현석 작가가 쓴 김근태의 일대기를 다룬 실화소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는 누구 말마따나 절대 그럴리 없는 상상 속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 아니라 이것이 실제 일어났던 사실이면 불편해할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소설로 퉁쳤다고 표현하는 게 적당할 것 같다. 퉁하고 쉽게 끝날 문제는 아니지만 말이다.

 

2. 위의 단락은 경향신문의 기사를 읽기 전. 소설을 바라보면서 느낀 개인적인 생각이었고, 실제로는 인재근 의원으로부터 고인의 삶을 기록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구술을 빌어 김근태 의장의 삶을 기록해 나가다가 고인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완벽한 글의 탄생이 어렵게 되자 자서전에서 소설로 형식을 변경했다고 한다. 

 

구술로 채워지지 않은 나머지 부분은 주변 사람들의 증언과 민주화 운동에 관련하여 출판된 참고자료를 인용해서 써내려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주변 사람의 증언들은 서체를 달리하여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때>는 평전이나 다름없는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 사실과 다를 바 없는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김근태 의장은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의 '나'가 되었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읽어내려가는 나는 소설 속의 '나'와 일심동체가 되어서 김근태 의장이 느꼈을 감정들을 공유했다. 그런 의미에서 상당한 몰입도를 가져다주었다. 

 

3. 이 책은 김근태 의장의 삶의 기록이다. 이 책은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수재라는 사실이 알려주듯이. 나라의 경제 성장을 정치의 가장 중요한 척도로 생각했던 한 청년이. 고등학생 시절에도 그랬고, 대학교 입학 초기에도 박정희에 반대하는 학생에 맞서 논쟁을 벌였던 한 청년이 어떻게 민주화의 투사가 되었는지 알려준다.

 

박정희에 맞서게 된 이유는 총통이 되기 위해 유신 개헌을 이룬 박정희의 탐욕스러운 권력욕에 의하여 사라져가는 민주주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반대자를 처단하기 위하여 국민들에게 심어놓은 반공 사상도 마음대로 이용한다. 그 잔재는 지금도 여전히 남아있다. 그리고 선거철만 되면 잘 먹히는 여전히 좋은 수단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반대의 이유는 일본 군국주의의 식민주의 사관에 물들어 있었던 박정희의 그릇된 역사인식에 대한 저항이었다. 미개한 조선인들을 개화시켰다는 일본인들과 친일 언론의 허무맹랑한 주장을 받들어 한국전쟁 이후 고통받고 있는 국민들에게 계속 쉬지 않고 일하라고 채찍을 휘두르고 소리친 격이었다. 

 

박정희의 업적이라고 알고 있었던 에너지와 기간사업을 육성하는 경제 개발 5개년의 계획은 이미 장준하 선생이 기획했던 정책이라는 사실을 봤을 때, 박정희의 군국주의적 식민사관으로 일구어낸 경제 발전은 일제와 비슷한 의미에서의 식민통치에 대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결과물로 인하여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말을 듣지 않으면 몽둥이가 약이고, 일단 지르고 나면 차차 적응할 수 있다라고 섣불리 판단 짓는다.

 

4. 이 책은 1980년 5월 18일에 대한 진실도 포함하고 있었다. 네이버에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하면 자동으로 뜨는 화면은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전두환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를 보면 광주 시민이 왜 총기를 들고 일어나야 했는지 알려준다. 게다가 그들은 먼저 총기를 들고 일어나지도 않았다.

 

박정희가 암살되고 난 이후, 그 자리를 노렸던 전두환과 유신의 잔당들이 전국에 계엄군을 보냈고, 그에 반대하기 위해서 학생 위주의 시위대를 짰던 광주 시민이 5월 18일에서부터 무려 나흘에 걸쳐 계엄군의 총과 대검에 의해 아무런 저항도 못한 채 피격당하고, 난자당했던 것이다.  


그런 공격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은 21일 오후부터 계엄군의 폭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순, 나주 지역에서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무장해, 시민군을 결성했던 것이다. 그리고 계엄군에 맞섰던 것이다. 과연 이것이 폭동일까? 매우 의문스럽다.

 

5. 이 책은 반민주화 시절. 힘의 우위에 있는 인간이 한 인간을 어떻게 고문으로 무력하게 만들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일인칭 화자의 적나라한 심리 묘사 통해 보여주고 있다. 아무래도 이 책을 평전이 아닌 소설로 만든 것은. 김근태가 아닌 '나'가 서술하도록 한 것은 이 고문의 기억을 제대로 알리고 싶은 작가의 의도 때문에 계획된 것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고문과 관련된 진실은 김근태 의장에게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비롯하여 각종 고문을 했던 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고문기술자 이근안 한 명이 아니라. 총 여덟 명이 그를 린치하고, 그의 손과 발을 붙잡고, 거짓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처참하게 그를 짓밟았다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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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과의 대화 - 넬슨 만델라 최후의 자서전
넬슨 만델라 지음, 윤길순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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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의 이름은 넬슨 만델라다. 넬슨 만델라가 맞긴 한데. 이 책을 읽은 김에 기왕이면 넬슨 롤리흘라흘라 만델라라고 새롭게 기억하자. 왜냐하면, 넬슨은 영국식 이름이고,가운데 적힌 이름이 아버지가 그에게 지어준 아프리카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롤리흘라흘라를 기억하는 것은 넬슨 만델라의 투쟁기를 기억하는 가장 쉬운 실천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2. 간혹 우리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사람들은 평화를 무엇보다 가장 중요시 생각하는 인물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전 생애를 불의에 대항하여 비폭력투쟁에 매진한 인물들만 노벨평화상을 받는다고 오해할 수 있다. 특히, 나의 경우는 그런 편견을 간디(후보에만 5번)나 김대중 대통령이 만들었는데. 이 때문에 만델라도 비폭력 투쟁을 펼친 인물로 객관화시켜 생각하고 있었다.

 

3. 만델라는 회고록 성격이 짙은 <나 자신과의 대화>에서 말하기를. 가능한 한 비폭력투쟁을 통해서 혁명을 완수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비폭력투쟁을 하겠다, 폭력투쟁을 하겠다는 결심이 아니라 이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살펴야 한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의 이야기를 토대로 객관적으로 1960년 대의 남아공 사회가 처해있는 환경을 그려봤을 때, 만델라가 싸워야 했던 아파르트헤이트는 비폭력으로는 결코 뿌리 뽑을 수 없는 문제였다고 본다. 이 당시 남아공 내에서는 폭력과 비폭력으로 노선이 갈렸다고 하는데 만델라의 판단은 폭력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그레서 MK를 창설했다.

 

4. 아파르트헤이트. 이것은 백인과 흑인을 분리하여 통치하는 남아공의 인종 차별 정책은 과거의 백인우월주의의 역사관을 계승하겠다는 뜻이다. 즉, 백인들의 세계. 서양의 열강이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대륙의 흑인을 노예로 부렸던 과거의 역사에 대하여 반성하지 않겠다. 그것도 모자라서 오늘. 그리고 미래에도 흑인은 백인이 누리는 것을 누리지 못하게 막아놓은 것이 바로 아파르트헤이트였던 것이다.

 

아파르트헤이트의 정신은 대한민국의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본 제국주의 정신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즉, 일본 우익이 독도의 소유권을 줄기차게 주장하는 것은 식민지 시대처럼 한반도를 소유하겠다는 야욕을 품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독도를 탐하며, 식민지의 향수를 느끼는 것이다.

 

4. <나 자신과의 대화>는 만델라 대통령이 겪었던 삶의 분수령을 논픽션처럼 구성해서 바라보는 것은 애초에 무리가 있는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철학이나 의의. 그리고 인종분리정책을 부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었는지 정도를 파악하는데 그친다. 그의 또 다른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 <넬슨 만델라 평전>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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