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와 니체의 문장론 -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하여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홍성광 옮김 / 연암서가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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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이 시점에서 이 책을 찾을 사람들은 매우 한정되어 있다. 그 사람들이 누군지 고민하지 않아도 바로 떠오를 것이다. 분명히 책을 읽는 행위를 좋아하거나 책을 모으는 행위를 좋아하는 사람일 것이다. 책에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작은 해답을 찾길 바라는 사람일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문장론이니까 나처럼 블로그의 문장을 향상 시킬 수 있는 비법을 얻길 바라는 사람일 것이다.  

 

118. 독서란 자기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대신 생각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좇아가는 것에 불과하다. 

 

2. 안타깝게도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문장론>은 독서를 좋아해서 이 책을 펼쳐 든 사람에게 냅다 날카로운 비수를 던진다. 두 사람은 (특히, 쇼펜하우어) '독서의 즐거움'과 '좋은 문장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좋은 문장이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사유를 통해 만든 순수하고 소박한 성격의 문장이라고 정의하기 때문이다. 정의에 따르면 어느 것의 힘도 빌리지 않고, 순수하게 경험적인 측면에서만 좋은 문장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책을 읽는 시간이 길면 길어질수록 정작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 사유해야 할 시간은 사라진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결국,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책을 읽는 즐거움 보다는 생각의 깊이를 날카롭게 벼리는 것이라는 거다. 

 

3. 사람을 가장 빠르게 변화시키는 것은 한 권의 좋은 책을 읽는 것이라고 누군가 이야기했던 기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만약, <문장론>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그 주장을 이 문장에 대입한다면 상당히 비극적인 시나리오가 그려진다. 인생의 변화를 불러오는 한 권의 책이라는 것이 우리가 평소에 입고 벗는 의복 같은 개념으로 전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클럽에 갈 때는 클럽 분위기와 어울리는 복장을 입고. 결혼식에 갈 때는 결혼식 복장. 놀이동산에 놀러 갈 때는 캐주얼 복장. 등산할 때는 등산복. 이렇게 분위기에 맞는 옷을 입는 것처럼 책을 무조건 타인의 사상이 담긴 것으로만 생각하고 읽는다면 독서 행위 자체가 상당히 우려스러워진다.  

 

4. 그런데 나는 자신의 사고와 문장자의 사고를 분리시키는 것쯤으로 독서를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비록, 상황에 맞게 입고 벗는 껍데기 같은 의복의 기능을 어느정도 담당하고 있을지라도 내가 생각하는 의복의 본질적인 개념은 그들의 생각과 다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우리의 몸을 날카로운 것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바로 의복이다.

 

독서는 흘러가는 대로 살지 않게 하는 보호막의 역할을 첫 번째로 담당한다고 생각한다. 

 

5. 그리고 책은 타인의 사상이 담긴 물건이라서 그것과 내가 아무런 관련성을 맺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라 책을 통하여 생각을 끌어올리는 펌프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양서일수록 그 책을 읽으며 상호작용하는 정도가 커지고 딸려나오는 생각도 많아질 것이다. 

 

책을 읽고 우러나는 생각을 영원히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최대한 그것을 보존하려 노력한다면 그렇게 우러난 생각은 내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니체도 책에서 말하고 있지 않은가? 여행자의 다섯 단계를 말이다. 우리는 책을 여행하면서 꾸준히 다섯 번째 등급의 여행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6. 그러니까 이 책을 읽는 나의 소감은 쇼펜하우어보다는 니체의 이야기가 더 와 닿았다는 말이다.

 

163. 여행자에게는 다섯 가지의 등급이 있다.


가장 낮은 등급은 여행하면서 관찰의 대상이 되는 자들이다. 그들은 본래 여행의 대상이며 흡사 장님과 같다.


다음 등급은 실제로 여행을 구경하는 자들이다.


세 번째 등급은 여행자는 관찰의 결과로 무언가를 체험하는 자이다.


네 번째 등급의 여행자는 체험한 것을 체득해서 몸에 지니고 다닌다.


마지막으로 최고의 능력을 지닌 몇몇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관찰한 것을 모두 체험하고 체득한 뒤 집에 돌아온 즉시, 또한 체험하고 체득한 것을 행동이나 일에서 반드시 발휘해나가야 한다. 


인생의 여로를 걷는 모든 인간은 이 다섯 종류의 여행자와 같다. 가장 낮은 등급의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으로 살아가고, 가장 높은 등급의 인간은 내면적으로 체득한 것을 남김없이 발휘하며 행동하는 자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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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생의 고비마다 한 뼘씩 자란다
김이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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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목의 한 뼘은 물리적으로는 20센티미터 남짓한 길이 정도겠지만, 인생이라는 자로 쟀을 때는 아주 큰 의미가 있는 한 뼘이 아닐까 생각한다. 책에서 언급한 대로라면 바로 이 한 뼘에서 담벼락을 넘어설 수 있는 동력이 만들어지는 셈이고, 에베레스트 정상 50센티미터를 남겨준 상황에서 내딛는 '한걸음' 역시 제목의 한 뼘과 같은 의미를 내포함을 알 수 있었다.  

 

2. 김이율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 낯선 이름을 보면서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상당히 많은 자기계발 관련 서적을 펴낸 작가였다. 

 

자기계발이라는 단어를 좀 멀리하고 싶어하던 찰나. 책의 가장 마지막 페이지를 보면 국립중앙도서관 출판도서목록(CIP)의 작은 네모 안에 인생훈(人生訓 :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하거나 유익한 교훈)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자기계발 작가라는 표현보다는 인생훈을 쓰는 작가라는 표현이 더 멋있어 보였다.

 

3. 인생훈을 쓰는 김이율 작가는 인물의 스토리를 재구성하는 능력도 상당하지만, 그보다는 편집자적인 능력이 더 뛰어나 보였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 인생훈을 들려주기 위해 등장하는 주요 챕터 속의 인물은 무려 23명이다. 마음을 전하는 힐링노트라는 공간에서 한마디를 툭 던지는 인물들까지 세면 훨씬 더 많다.  

 

이 23명의 공통점은 장애와 역경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사람들 외에 기억나는 사람. 그러니까 책에서 소개되지 않는 인물 중에 자연스레 생각나는 사람은 가까운 시기로 보면 임윤택 씨라던가. 아주 유명한 헬렌 켈러 같은 위인도 있긴 하다. 이렇게 따지면 어느 인물을 끌어오더라도 이러한 공식에 들어맞는다. 그것이 좀 아쉽다면 아쉽긴 하지만...(이것이 이 책을 유니크 해지는 것을 가로막는 이유랄까?)   

 

어쨌건 <나는 인생의 고비마다 한 뼘씩 자란다>라는 책은 <마지막 강의>의 랜디 포시, 판매왕 빌 포터, 발레리나 빌리 엘리어트, 브리튼 갓 탤런트의 수잔 보일, 운전면허 필기시험에 960번 도전해서 끝내는 합격한 차사순 할머니같이 책이나 대중매체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던 인물도 있었고, 그 외. 몰랐던 인물의 전기를 읽은 듯한 느낌을 주는 그런 책이었다.   

 

4. 결국, 보통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유난히 의지력이 뛰어난 그들의 짧은 전기를 보면서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한다면 반드시 결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응원과 더불어 하고자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다시금 힘을 낼 수 있게끔 하는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인내와 끈기. 의지라는 단어를 다시 한 번 새길 수 있게끔 해주는 책이라는 거다. 결국, 문제는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을 극복하는 것에 있다.

 

135.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일


6. 시련은 우리에게 고통만 주는 게 아닙니다. 어쩌면 그 시련은 우리에게 시련 그 자체보다 더 가치 있고 아름다운 그 무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계속 찾아오는지 모릅니다. 

 

192. 지금의 생각이 중요하고, 지금의 내가 중요하고, 지금의 사람이 중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것, 그게 바로 행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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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 쇼크 - 위대한 석학 25인이 말하는 사회, 예술, 권력, 테크놀로지의 현재와 미래 베스트 오브 엣지 시리즈 2
존 브록만 엮음, 강주헌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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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컬쳐쇼크>에서 소개한 생소한 단체. 엣지의 설명(엣지는 사람이다. 엣지는 주목할만한 대사건이다. 엣지는 대화다.)을 보면서 생각 이면에 프리메이슨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유럽 사회를 좌지우지했었던 비밀집단 프리메이슨 말이다. 엣지는 그들만큼 깊은 지식과 통찰력을 소유한 사람들이 모인 단체로 느껴졌다. 

 

프리메이슨과 엣지가 다른 점은 전자는 비밀집단이고 후자는 지식 웹이라는 접근이 용이한 장소를 인터넷 공간에 창조하여 회원들의 다양한 의견에 대하여 활발히 토론하고, 그 성과까지도 대중에게 노출하는 집단이라는 점 정도랄까? 이처럼 사소하게 보이지만 상당히 큰 차이가 있는 엣지 회원들의 활동 결과를 책으로 엮은 것이 바로 <컬쳐쇼크>다.  

 

총균쇠로 유명한 제러드 다이아몬드 외. 엣지에 속한 17명의 명사가 쓴 다양한 방향의 주장과 토론의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라 어떤 이야기를 시작하고 또 풀어야 할지 막막하게 느껴졌다. 읽고 밑줄긋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좋았으나 막상 뭔가를 새로이 남기려면 막막한 그런 책이 아닌가 싶다.

 

2. 여러 가지로 떠오르는 내용과 정리되지 않는 상념들을 전부 걷어내고, 단순하게 생각해봤다. 

 

<컬쳐 쇼크>는 인터넷이 만들어내는 것들에 관하여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식 웹이라는 집약적인 공간이 인간의 학습향상에 크게 이바지를 할 것으로 예측했다. (15장. '아리스토텔레스'와 지식웹) 그리고 또한 위키피디아나 구글이 인류에게 남긴 성과에도 주목했다. 지나친 과학 만능주의를 외치는 스튜어트 브랜드의 목소리가 담긴 5장. (우리는 신으로 존재하므로 그 역할을 잘해야 한다.) 같은 다소 아쉬운 주장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매우 훌륭했다. 

 

12장. (디지털 마오이즘: 새로운 온라인 집단주의의 위험성)도 조금 아쉽긴 했다. (13장에서 아주 격렬하게 논의하여 올바르게 방향을 잡아주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재런 래니어의 주장이 완전히 그릇되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재런 래니어의 주장인 집단(하이브 마인드)의 문제와 검색 포털의 지나친 메타화가 남기는 편향성과 검색어 권력이라는 문제. 그리고 인터넷 목소리가 실제 행동에 옮겨지지 않음을 비판하는 태도.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윤창중'이라는 검색어의 노출이 정치인들에게 도덕적인 측면에서 경각심을 일으켜 더 나은 사회가 조성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윤창중'이라는 뉴스가 지닌 힘이 '클라라'라는 검색어 혹은 '서태지'라는 검색어로 쉽게 가려질 수도 있는 것이 지금의 인터넷 환경의 문제라는 점. 

 

그리고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에서 들끓는 여론의 방향과 실제 투표로 나타나는 결과가 다를 수도 있다는 점. 그것을 만드는 것은 인터넷 공간의 자유로운 주장에서 오는 만족감과 그것이 실행을 방해한다는 주장에는 많은 부분 공감하는 편이다.  

 

3. 책을 읽으면서 가장 중요하게 와 닿은 점은 엣지의 지식인은 다른 무엇보다도 문화적 요소를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러한 원인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컬쳐쇼크>는 문화의 발전 혹은 현재의 문화적 상태를 진화라는 관점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었다. 이 진화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요인으로 <이기적 유전자>의 리처드 도킨스가 언급한 적이 있었던 밈이라는 문화 유전자의 개념을 가져왔다. 

 

3장(문화의 진화)의 발언자 대니얼 데닛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존재는 유전자의 번식을 위한 필요뿐만 아니라, 문화를 전파시키기 위한 도구라는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요인들이 창조해 낸 테크놀로지를 분해하여 살펴보면 그 속에는 지난 세월 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아주 단순한 종류의 것들이 조합되어 발달해왔음 (9장. 테크놀로지는 진화하는가?)을 알 수 있었다. 

 

그러한 조합물들은 그들의 의도하여 만든대로 진화해왔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생각과는 달리 만들어진 돌연변이 같은 진화였을 수도 있다고 봤다. (16장. 팬케이크 인간 Vs. 괴델투구글 네트) 문화 유전자 밈이 문화의 긍정적인 측면과 더불어 부정적인 측면도 함께 옮기는 것처럼 말이다. 

 

4. 어쨌건 간에 이렇게 거대하고 복잡해진 문화의 진화물들을 지속적으로 통합하여 발전시켜 인류에게 닥친 여러 문제점들을 알아채고, 올바른 방향으로 해결하는 데 사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앞으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바로 지식산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요즘 우리나라가 추구하는 창조경제와도 아주 가까이 닿아있다. 

 

그 안에는 학문과 예술 뿐만 아니라, 과학과 기술이라는 테크놀로지도 포함될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소모되는 것들이 아니라 경제학자들이 수확체증이라고 정의하는 것처럼 쓰면 쓸수록 더욱 발전하는 특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 바로 문화적 진화 그리고 컬쳐 쇼크로 불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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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 팜팔론 - 동방의 성자들에 관한 전설
니콜라이 레스코프 지음, 이상훈 옮김, 비탈리 콘스탄티노프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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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치 동화 같은 이야기다. 사람들의 의식을 계몽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이야기다. 어떻게 사는 것이 신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면서도 그러한 고민이 외려 신이 원하는 방향으로의 삶을 밀어낼 수도 있음을 경고하기도 한다. 

 

2. 팜팔론이라는 인물은 흥미로웠다. 처음에는 조르바처럼 완전히 제 멋대로 사는 인생인 줄 알았는데, 사연을 들어보니 그게 또 그렇지가 않았다. 더러운 이들과 부대끼며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광대놀음을 청산하고 싶었던 팜팔론에게 우연히 광대로 돈을 벌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이 들어오게 된다. 

 

그런데 그는 돈이 없었을 때보다 훨씬 더 자유가 제한되는 느낌을 받는다. 목이 말라도 물을 마시러 갈 수가 없었고, 배가 고파도 밥을 먹으러 갈 수가 없었다. 집 안에 모셔둔 돈 때문에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집 밖 사람들의 행동을 몰래 살피며 혹여나 누가 그를 해치고 돈을 훔쳐가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불안에 젖는 팜팔론의 신세가 왠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팜팔론은 자신에게 돈이 생기면 남보다는 자신을 위해 살겠다. 자유를 찾아 살겠다는 신과의 약속을 저버린다. 본성이 그런 사람이었을까? 팜팔론은 자신의 삶보다는 자신이 좋아했던 타인의 삶이 계속 눈에 밟혔던 것이다. 

 

그는 과거에 그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던(높은 지위에서 안락한 생을 누리던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즉,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 팜팔론의 광대놀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그나라는 여인을 구명하는 데 그의 돈을 사용하고, 그는 다시 원래의 생활. 그에게 부여된 광대의 삶을 묵묵히 살아간다. 그렇게 어제와 다르지 않은 삶을 연명한다.

 

한편, 30년간 홀로 고행을 한 끝에 신으로부터 팜팔론의 이야기를 들으라는 목소리를 듣고, 팜팔론이 살고 있는 도시를 방문한 예르미라는 현자에게 팜팔론은 자기 희생이라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60p. “무슨 소린가! 자네는 하느님도 두렵지 않단 말인가?” 
팜팔론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곤 대답했다. 
“맞아요, 나는 그분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난 그분을 사랑하지요.” 

 

3. <광대팜팔론>처럼 개인을 위한 삶보다는 타인의 어려움을 못 본척하지 말고 가진 것을 베푸는 삶을 살았던 어느 창녀의 삶. 하지만 현자의 눈에는 성자로 보였던 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었다. <아름다운 아자> 

 

교주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일개 나무꾼의 기도를 통해 가능해지는 기적. 그 속에서 땀 흘려 일하는 것을 신성시여기는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다.<하느님의 마음에 든 나무꾼 이야기> 

 

아군이건 적이건 간에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고, 또한 자신의 죄를 뉘우치려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이야기도 있었다. <양심적인 다니엘에 관한 전설> 

 

이 세상의 여러 종교 가운데 특히,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를 믿는 각 신도들이 어떻게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배척해왔는지에 관한 어리석음을 담아낸 이야기도 실려 있었다. <그리스도인 표도르와 그의 친구 유대인 아브람에 관한 전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하여 니콜라이 레스코프는 "참다운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 대한 메시지를 우리들의 두 손에 무사히 전달해준다. 물론, 니체식으로 해석하면 나약해지는 지름길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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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란 무엇인가
크리스토퍼 베넷 지음, 김민국 옮김 / 지와사랑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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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만치 않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책이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를 읽을 때와는 달리 서평을 염두에 두고 읽으니 그나마 뭔가 기억에 남는 것이 있고, 건질 것이 있음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 듯하다.

 

340. 우리가 아무리 도덕을 잘 이해하더라도 거기에는 여전히 숱한 모순이 잠재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런 모순을 개선하거나 없애려는 연구는 아직도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제일 마지막 문장이자, 이 책의 결론이다. 좀 허무하긴 하지만 이 허무함을 다르게 해석해보자면, 공리주의, 칸트주의, 덕 윤리학, 사회계약론, 마르크스의 도덕, 니체의 도덕관 같은 도덕 이론 하나에 깊이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뉘앙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학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았다. 이것은 작가의 뉘앙스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인지 확실히 모르겠다.) 

 

이론이 아닌, 실제 현실의 윤리적 선택을 내리는 과정에서 행위자를 움직이게 하는 개념을 살펴보면서 이론에서 공감하는 부분만 취하는 정도로만 이용하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라고 말한다. 왜 그런지는 책의 1장과 2장에서 직접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여기서 다뤄지는 삶과 죽음의 도덕적인 선택 과정을 지켜보더라도 그 선택에 만족이란 없었다. 계속 반론을 이어붙임으로써 만족스러운 결론에 도달할 수 없게 만들었다. 마치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다. 

 

2. 바로 앞에 읽은 <김약국의 딸들>에서 나는 그들의 선택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러한 착오는 관습적으로 이어져서 그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받아들여진 규범(사회계약론적 특징)에 따랐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선택이 가문 전체로 봤을 때 이득을 줬기 때문(결과론적인 측면에서 공리주의적)이라는 판단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결국, 이 두 가지의 윤리적 판단은 변화하는 시대 앞에서는 그릇된 것이 되었고, 변화에서 그들이 놓친 것은 바로 '행위자의 행복' 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우선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학이었던 것이다. (나라를 잃어버린 시대에 대체 어떤 윤리적 기준이 숨을 쉴 수 있었겠느냐 반론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일제가 대놓고 그들에게 죽어라고 칼을 들이대지 않는 이상 그들은 오순도순 행복했을 것이다.) 

 

사람들이란 자고로 시대적, 문화적으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며 그에 따라서 다른 선택을 하지만, 그 선택이 자신의 행복에 우선하여 내릴 수 있었다면 그들은 아마도 좀 더 행복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수고했다며 알지도 못하는 젊은 여자 엉덩이나 툭툭 두드리는(grab) 행위를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격려의 의미라고 변명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겠지만 말이다.  

 

3. 니체의 <도덕의 계보>의 개념을 차용하여 나쁜 남자가 이성에게 인기 있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니체는 도덕을 부정한 사람이라고 한다. 도덕을 부정한 이유는 도덕이라는 것을 애초에 약자들이 타협하여 만든 것이고, 이러한 도덕적 굴레가 강자의 강함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라고 봤다. 이 세상을 거쳐갔었던 다수의 약자들은 그렇게 소수의 강자를 제거하여 자신들과 동일한 존재로 흡수하여 왔던 것이다. 

 

그렇게 봤을 때, 착한 남자라는 의미는 도덕적인 면에서 우수한 인간이라는 의미와 다름이 없고, 따라서 착한 남자는 약자로 동일시 됨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약자의 개념이 아주 부정적이었다. 순응적인 니힐리스트며 자기혐오의 감정도 지닌 나약한 인간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쁜 남자는 그렇지 않다. 극단적인 부분을 제거하고 생각해보면, 대체로 나쁜 남자들은 자기중심적이며 오만하다. 그만큼 자아가 강한 인물이라는 뜻이 된다. 순응적인 니힐리스트. 그리고 에고가 강한 사람. 누가 이성에게 자신을 강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 바로 후자라고 생각한다. 

 

오류투성이인 극히 개인적이며 즉흥적인 견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번쩍하며 생각난... 다만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기록해둔... 그러므로 이 글을 읽고 나쁜 남자 행세를 하다 차여도 나는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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