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윌 리엄 스토너. 그가 위대한 인물이라는 사실에는 큰 이견이 없을 듯히다. 소설 안의 스토너와 다소 떨어진 곳의 스토너. 즉, 미래의 스토너가 3인칭을 사용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회고하듯이 고백하는 이야기를 의심 없이 좇으면 말이다. 그에 따르면 스토너의 관점은 '선'이 되고, 스토너를 가로막는 로맥스, 이디스, 워커는 '악'에 가까울 것이다. 애정 없는 결혼 생활, 학과 내의 권력 투쟁. 그것에 저항하여 성취를 이룬 스토너. 개츠비에 붙어있는 'Great' 라는 칭호를 떼어내어 스토너에게 달아주고 싶을 생각이 들 것이다.


아. 스토너라는 인물이 인류의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말은 아니다. 8. 스토너의 동료들은 그가 살아 있을 때도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의 이름을 잘 입에 올리지 않는다. (중략) 단순한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라는 설명처럼 그는 어느 대학에서 평생 동안 조용하게 학생을 가르친 사람일 뿐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평생 동안 학생을 가르친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것도 열정적으로.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읽어보면 평생 동안 열정을 잃지 않고 학생을 가르친다는 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의 힘을 빌어 스토너를 자세히 살피지 않았다면 누구도 그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작은 거인' 같은 사람이었고, 자신이 살아낼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산다는 것은 남들의 눈에 쉽게 포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도 스토너를 읽지 않았더라면, 주위의 대학교수. 표지갈이를 하지 않고 묵묵히 강의하는 교수와 표지갈이를 하는 교수 중에서 누가 스토너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것이다.


2.


앞 서 읽은 나쓰메 소세키의 <행인>과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의 주요 인물은 묘하게도 닮은 구석이 많다.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이자 대학의 교수이며, 애정이 빠져나간 결혼 생활로 인한 갈등으로 인하여 점점 더 자신의 일에 집착하는 모습이 그렇게 느껴졌다. <행인>의 이치로와 <스토너>의 스토너에게 남겨진 유일한 탈출구는 '일(학문)'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행인>의 결말은 격렬한 반면, <스토너>의 결말은 초월한 자아를 보여준다.


그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봤다. <행인>의 표현을 빌려서 이야기하자면 이치로는 자신이 올라가고 있는 산이 유일한 진리였다. 세상사에 관계된 보편적인 산을 내버려 두고, 시비, 선악, 미추의 구별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키워놓은 기준으로 쌓아올린 산을 오른다. 그곳에서 이치로는 그의 아내와 가족을 부른다. 이쪽으로 오라고 소리친다. 반대로, 그의 아내와 가족과 동생도 마찬가지로 이치로에게 그들을 향해 오라며 소리친다. <행인>은 관계 회복을 위한 극심한 진통이었다.


한 편, 스토너는 산을 향해 그저 묵묵히 홀로 걸어가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위해서 산을 오를 뿐이었다. 찰스 워커와 로맥스와의 논쟁은 학문적으로 타협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또한 아내인 이디스와의 소원한 결혼 생활은 그를 힘들게 했다. 스토너를 읽어보면 이 부부관계의 회복의 키를 쥔 인물은 스토너가 아니라 이디스였으니. 거리를 좁히려고 노력하지 않은 죄를 스토너에게 물을 수 없었다. 스토너의 학교에서 발생한 사건을 이디스가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는지에 관해서도 심각하게 의심하지 않았다. 독자인 내가 굉장히 의문스러웠는데도 말이다. 


3.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줄리언 반스는 우리에게 질문한다. 50년 만에 이 소설이 부활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개인적으로 소설은 공감의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공감대가 형성되면, 그 몰락한 인물의 얼굴과 우리의 미니어처를 대입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 소설이 부활한 이유를 16장의 초입에서 발견했다. 그 발견 때문이 아니라도, 이 소설이 앞의 모든 부분과 16장을 나누고 무게를 재어보라 했을 때, 16장에 모든 무게가 쏠린다. 위에서 매긴 별점 또한 16장 때문에 가능한 별점이다. "스토너의 죽음에 대한 존 윌리엄스의 주관적인 묘사는 현대 문학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는 이언 매큐언의 찬사는 전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 소설의 정서는 불안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불안>은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처럼 욕심의 크기가 클 때도 생기지만,  불확실성. 즉, 기본적으로는 안전하지 않음에서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스토너의 배경은 세계대전과 불황이 교차하는 시대였다. 그리고 현재 우리의 시대. 우리의 삶도 불황으로 인한 비정규의 불안에 젖어있다. 그 불안을 잘 표현한 <사축일기> 라는 책이 요즘 인기라고 한다. '전해라'라는 노래말이 유행어가 되는 이유도 이 시대의 불안이 임계점에 다다랐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의 불안감을 누군가가 알아줬으면 하는 욕망이 작용한 탓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다.  


16장의 본문. 불안의 언어를 옮겨본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전쟁으로 비워진 자리와 어느 날 출근했을 때 비워진 동료의 옆자리의 크기가 비슷하다고 느꼈다. 이들의 전쟁은 우리가 직면한 경제 불황의 전쟁이며, 그 맹렬한 구조조정의 폭풍 속에 우리들도 스토너처럼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단단히 여미며 한 발 한 발 내딛지만, 마음속은 격렬히 분열되어 있었다. 죽은 자들의 이름과 얼굴과 목소리는 남아있지 않은 자들의 잔상이었다. 


346. 전쟁이 벌어진 몇 해 동안은 시간이 흐릿하게 뭉쳐서 흘러갔다. 스토너는 견디기 힘든 맹렬한 폭풍 속을 지나갈 때처럼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생각은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딛는 데에만 고정시킨 채 그 시절을 겪어냈다. 하지만 단단한 인내심과 무신경함으로 하루를 보내고 몇 주를 보내면서도 그의 마음속은 격렬히 분열되어 있었다. 마음 한쪽은 매일 헛되이 스러지는 생명, 냉혹하게 마음과 정신을 강타하는 수많은 파괴와 죽음에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며 움츠러들었다. 이번에도 교수진이 고갈되었고, 강의실에는 젊은 청년들이 사라졌으며, 남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고뇌가 가득했다, 그 얼굴들에서 그는 서서히 죽어가는 마음, 모질게 마모되어 사라지는 감정과 애정을 보았다. (중략)


매 주, 매달, 죽은 자들의 이름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개중에는 먼 과거의 기억처럼 단순히 이름으로만 기억되는 사람도 있었고, 그 이름을 지닌 사람의 얼굴이 함께 떠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목소리, 그가 했던 말이 떠오을 때도 있었다.


이와 같은 불안한 하루하루를 극복하고 묵묵히 자신이 오를 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인물이 스토너였다. 스토너는 왜 위대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충분한 답변이다.


4.


여기서 언급할 내용은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간단하게 줄이자면 스토너가 자신의 가치를 지키고 발전해나간 방법에 대한 개인적인 깨달음인데. 이것은 스토너의 학문적 사상적 변화와 맞닿아 있다.


16 장을 제외하고, 이 책에서 중요한 부분이 몇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스토너와 로맥스, 찰스 워커의 학문적 논쟁일 것이다. 이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스토너가 '선' 이고, 로맥스, 찰스 워커가 '악'이라는 프레임을 잠시 깨트려보고자 한다.


과거의 스토너라고 칭하자. 이 스토너는 굉장히 보수적이면서 정량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중시하는 규칙적인 인물이다. 그는 과거. 황금시대에 만들어진 진리가 어딘가에 숨어져 있고, 공부를 통해서 이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43. 스토너는 대학을 커다란 저수지처럼 생각하고 있을걸. 도서관이나 유곽처럼 말이야.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자신을 완성해줄 물건들을 고를 수 있는 곳, 모두가 같은 벌집의 작은 일벌들처럼 힘을 합쳐 일하는 곳. 진실, 선함, 아름다움. 이런 것들이 모퉁이 너머 바로 다음 복도에 있다는 것이지. 아직 읽지 못한 바로 다음 책, 아니면 아직 가보지 못한 바로 다음 서가에. 언젠가 우리는 반드시 그 서가에 이를 것이고, 그러면... 그러면.


반면에 로맥스와 찰스 워커는 규칙보다는 일탈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개인의 창의성에 굉장히 큰 가치를 부여하는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라는 것은 어디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139. 그는 자신의 기형적인 외모 때문에 고립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일찍부터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으며, 자신을 방어할 방법을 떠올릴 수 없었다고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이 털어놓았다. 그는 길고 긴 낮과 밤을 방에서 혼자 보내며 자신의 일그러진 몸이 강요하는 한계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책을 읽다가 점차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가 이 자유의 본질을 이해하게 됨에 따라 그가 느끼는 자유로움도 더욱 강렬해졌다.


이 둘 사이의 메워질 수 없는 거리와 그로 인한 투쟁은 셰익스피어에 대한 시각에서 마침내 촉발한다.

이것은 스토너의 생각을 대변하는 드리스콜이 발표한 내용이다.


194. 그녀는 중세의 문법과 논문집에까지 끈질기게 모습을 드러낸 도나투스 전통을 셰익스피어가 어떻게 이용했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뤘는데, 그녀가 발표를 시작하고 얼마 안 돼서 스토너는 그 보고서가 아주 훌륭하다는 것알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 부분은 찰스 워커가 셰익스피어에 대하여 말한 부분인데, 스토너의 생각과 완벽한 대비를 이룬다.


199. 셰익스피어의 용솟음치는 서정성이 그저 한밤중에 불을 밝히고 애쓴 덕분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범속한 법칙을 뛰어넘는 타고난 천재성 덕분에 생겨난 것임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다른 평범한 시인들과 달리 셰익스피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그 다정함을 황량한 분위기 속에서 낭비해버리려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시인들이 자양분을 구하려고 의지하는 그 신비로운 원천을 먹어치웠습니다. 보잘것없는 문법에서 찾을 수 있는 그 어리석은 규칙들이 불멸의 시인에게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책에서 찰스 워커를 묘사할 때, 다듬어지지 않은 면을 보란 듯이 스토너에게 노출시킨다. 그 허점이 스토너에게는 크게 느껴진다. 앞서 얻은 문학적 가치를 따르기보다는 앞으로 만들어 나갈 것에 집중하는 그들에게 스토너는 집요한 공격을 가한다. "중세 희곡을 세편 열거해보게.", "르네상스 시기의 장르 중에서 가장 자신 있는 것이 무엇인가?", " 영어로 된 최초의 무운시 비극이 무엇인가?" ,"셰익스피어 이전의 중요한 희곡 제목을 아무거나 하나 말할 수 있나?", "바이런 경의 중요한 작품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테지." , "잉글랜드 서정시인과 스코틀랜드 비평가에 대해 논평해보겠나?"와 같은 질문들을 던진다. 개인의 천재성과 미적 감각에 무게를 두는 워커가 제대로 답했을 수 없었다. 그는 그렇게 게으른 인물로 낙인찍히고, 문학교수의 자격을 박탈당한다.


스토너가 로맥스와 워커에게 던진 것은 엄격한 틀이었다. 그리고 워커의 거부에 반발하여 로맥스가 스토너에게 던진 것도 고정된 학제라는 엄격히 정해진 룰이었다. 스토너는 그 학제를 묵묵히 받아들이다가 그것을 거부하고 자기가 가르치고자 하는 것을 가르친다. 그 런데 로맥스가 스토너에 던진 틀을 빠져나오게 한 반전이 굉장히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그 틀을 빠져나오는 동시에 과거의 스토너의 완고함은 해제된다. 그 사이에 이루어진 드리스콜과의 진심어린 사랑이 도움은 분명히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스토너와 드리스콜의 관계는 누가 보듯 명백하게 규칙에 반하는 행위였다. 그런데 평생 문학의 규칙을 연구한 그가 규칙에 어긋난 사랑을 하게된다. 학장이자 친구인 핀치가 전하는 경고는 과거의 그. 워커를 몰아붙이던 스토너가 사랑에 빠진 그 자신에게 하는 경고로 들렸다.


291. 이론적으로 자네 인생은 자네 것일세. 이론적으로는, 누구든 자네가 원하는 사람과 잘 수 있거, 무엇이든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지. 그것이 강의에 지장을 주지만 않는다면 문제될 것이 없네. 하지만 말이야, 젠장, 자네 인생은 자네 것이 아니야. 자네 인생은... 아, 빌어먹을.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그 는 깨닫는다. 세상의 규칙을 알아내는 것만이 개인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인에게 더욱 충실한 모습을 모여주는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이 좌절의 시기에는 여전히 스토너는 그녀와 함께할 용기가 없었다.


303. 결국은 우리도 세상의 일부인 거요. 그걸 알았어야 하는 건데.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조금 뒤로 물러나서 그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던 거요. 그래야 우리가.

그 알림은 조금 후에 시작된다.


315.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받았던 교육이 모두 이런저런 방식으로 우리를 방해할 것입니다. 경험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는 우리의 습관이 우리의 기대치를 결정한 것처럼, 중세 사람들의 기대치도 습관에 의해 결정되었으니까요. 먼저 기본적인 공부를 위해 중세 사람들의 삶과 생각과 글을 결정했던 마음의 습관들을 몇 가지 살펴봅시다.


이 강의 커리큘럼의 소개는 과거의 스토너와 작별을 고하는 알림이었다. 과거의 스토너는 과거의 교육이 아름답고 옳은 것이었기에. 현재의 창조물의 원천을 과거로부터 찾았지만, 이 소개로 나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현재를 다지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과거의 틀을 고수하지도 않고, 로맥스와 찰스 워커의 영역으로 나가아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중립을 지키는 움직임이다. 어쩌면 우리는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것을 알면서 행하는 것과 구조에 휩쓸리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본다.


이런 스토너의 개인적인 진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16장의 문장이 탄생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인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1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346. 요컨대 인간 세상에 대해 게이타로가 가진 최근의 지식과 감정은 모조리 고막의 작용에서 온 것이다. 모리모토에서 시작하여 마쓰모토로 끝나는 몇 자리의 긴 이야기는 처음에는 넓고 얕게 게이타로를 움직이면서 점차 깊고 좁게 그를 움직이기에 이르더니 갑작스럽게 끝났다. 하지만 게이타로는 결국 그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게이타로에게는 그것이 어딘가 부족한 점이고 동시에 다행스러운 점이다.

 

소세키는 <춘분 지나고까지>의 주인공. 게이타로의 경험을 빌어 타자의 인생 안에 들어갈 수 없었음을 이야기했지만. 완벽함을 갈구하는 인간의 형상화는 멈추지 않았다. 이 작업은 <행인>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이치로에게로 옮겨간다. 소세키의 분신. 이치로는 말한다.

 

138. "어떤 서간에서 그 사람은 이런 말을 했어. 나는 여자의 용모에 만족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여자의 몸에 만족하는 사람을 봐도 부럽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자의 영혼, 이른바 정신(spirit)을 얻지 못하면 만족할 수 없다. 따라서 아무리 해도 내게는 연애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치로는 학자였다. 그것도 아주 비상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는 서재에 파묻혀 열심히 이 세상의 구동원리에 대해서 공부했다. 날이 갈수록 그 깊이는 깊어갔고, 그에 따라서 자신감은 높아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그의 가장 옆에 있는 부인의 마음을 얻진 못했다. 오히려 그는 부인으로부터 무시당하는 기분만 들었다. 이치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자신은 분명 올바른 길로 가고 있다고 믿는데. 그녀의 부인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으로부터도 조금씩 멀어지고, 고립되고, 겉도는 느낌인 것이다.

 

그것의 원인은 간단했다. 부모가 점지해 놓은 인연을 아무 의심없이 따랐기 때문이었다. 애정이 존재하지 않은 자연스럽지 않은 결혼. 이것이 그가 느끼는 불안과 분리의 원초적인 원인이었다. (이것. 즉 애정없는 결혼에 대한 비판정신은 곳곳에 존재하는데 사실 이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261. "지로, 세상은 왜 중요한 남편의 이름은 잊어먹고, 파올로와 프란체스카만 기억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 인간이 만든 부부라는 관계보다는 사실 자연이 만들어낸 연애가 더 신성하니까, 그래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좁은 사회가 만들어낸 답답한 도덕을 벗어버리고 커다란 자연의 법칙을 찬미하는 목소리만이 우리 귀를 자극하도록 남겨진 게 아닐까? 물론 그 당시에는 다들 도덕에 가세하지. 두 사람 같은 관계를 부정하다며 비난하고. 하지만 그건 그 사정이 생긴 순간을 치유하기 위한 도덕에 쫓긴 이를테면 지나가는 소나기 같은 것이고, 뒤에 남는 것은 아무래도 창천과 백일, 즉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야. 어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중략) 지로, 그러니까 도덕에 가세하는 사람은 일시적인 승리자인 건 틀림없지만 영원한 패배자야. 자연에 따르는 사람은 일시적 패배자지만 영원한 승리자고..."

 

263. " 스모 기술을 배워도 사실 힘이 없는 사람은 안 되잖아. 그런 형식에 얽매이지 않아도 확실한 실력만 있으면 그런 사람이 꼭 이기지. 이기는 게 당연해. 스모의 사십팔수는 인간의 잔재주 에 불과하거든. 힘은 자연이 준 선물이지..."

 

이치로에 비해 그의 동생 지로는 아버지의 소탈하고 익살스러운 성격을 물려받아서 사회성이 뛰어났다. 이치로는 세상이 요구하는 정신은 이치로 자신처럼 소심하고 내향적인 모습이 아니라 소탈하고 외향적인 동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치로는 지로와 부인에 대한 불쾌한 상상을 한 것이다. 부인 나오에게 이치로 자신은 도덕과 형식이고, 지로는 자연이자 힘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나오는 그의 부인이지만, 나오에 대한 묘사를 볼 때, 그녀는 세계의 상징하는 존재의 축양본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었다.

 

302. 그녀에게는 어쩌면 초월해야 할 담도 벽도 없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여자였다. 지금까지 그녀의 행동은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발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때는 또 그녀가 모든 것을 가슴속에 넣어두고 쉽사리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이른바 야무진 사람처럼 비쳤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그녀는 흔해빠진 야무진 사람의 단계를 훨씬 넘어서 있었다. 그 차분함, 품위, 과묵함, 누가 평해도 그녀는 너무 야무진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놀랄 만큼 뻔뻔한 사람이기도 했다. 이떤 순간 그녀는 인내의 화신처럼 내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인내에는 고통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고상함이 숨어 있었다. 그녀는 눈쌀을 찌푸리는 대신 미소를 지었다. 쓰러져 우는 대신 단정히 앉았다. 마치 그렇게 앉아 있는 자리 밑에서 자신의 발이 썩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요컨대 그녀의 인내는 인내라는 의미를 넘어서 거의 천성에 가까운 것이었다.

    

 

2.

 

이치로의 동생이자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체. 동생 지로는 H에게 형과의 여행에 동행해줄 것을 청하면서 형의 심리 상태를 알아와달라고 부탁한다. H는 동생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치로에 관한 장문의 편지를 보낸다. 이것은 엄연히 가족과 이치로의 원만한 화합을 위한 순수한 의도였는데. 이치로의 깊은 고뇌를 읽을 수 있다. H의 편지에서 엿볼 수 있는 논쟁은 이 소설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363.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자신의 목적이 되지 못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네."

 

366. " 이렇게 수염을 기르거나 양복을 입거나 시가를 물거나 하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자못 어엿한 신사 같지만, 실제로 내 마음은 묵을 곳 없는 거지처럼 아침부터 밤까지 헤매고 있네. 24시간 내내 불안에 쫓기고 있지. 한심할 정도로 진정되지 않네. 끝내는 세상에서 나만큼 수양이 안 된 딱하 사람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네. 그런 때에 전차 같은 데서 문득 눈을 들어 건너편을 보면 자못 근심 없는 듯한 얼굴을 맞딱뜨리는 일이 있네. 내 시선이 일단 사념이 없는 멍한 얼굴에 쏟아진 순간 나는 절실하게 기쁨이라는 자극을 온몸에 받는다네. 내 마음은 가뭄에 타들어가는 벼이삭이 단비를 만난 듯 되살아나지. 동시에 그 얼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완전히 태연자약한 그 얼굴이 무척 고상해 보인다네. 눈이 처지거나 코가 납작하거나 얼굴 생김새가 어떻든 간에 굉장히 고상하게 보이는 거지. 나는 거의 종교심에 가까운 경건한 마음으로 그 얼굴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어지네. 자연에 대한 나의 태도도 전적으로 마찬가지네. 예전처럼 그저 아름다우니까 즐긴다는 마음은 지금의 내게는 생길 여유가 없네. (중략) 자네도 하루 중 손해도 이득도 필요하지 않는, 선도 악도 생각하지 않는 그저 자연 그대로의 마음을 자연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는 일이 한두 번은 있겠지? 내가 고귀하다는 건 그때의 자네를 말하는 거네. 그때에 한해서야."

 

370. "인력거꾼이든 밀꾼이든 도둑놈이든 내가 고맙게 여기는 찰나의 얼굴이 곧 신 아닌가? 산이든 강이든 바다든 내가 숭고하다고 느끼는 순간의 자연이 곧 신 아닌가? 그 밖에 어떤 신이 있겠나?"

 

384. H : "왜 산 쪽으로 걸어가지 않나? 자넨 산을 불러들이는 사람이네. 불러들이고 오지 않으면 화를 내는 사람이지. 발을 동동 구르며 분해하는 사람이네. 그리고 산을 나쁘게 비판하는 일만 생각하는 사람이지. 왜 산 쪽으로 걸어갈 생각은 안 하나?"

 

"혹시 그쪽이 이쪽으로 와야 할 의무가 있다면 어떤가?" 형님이 말했네.

 

H : "그쪽에 의무가 있든 말든 이쪽에 필요가 있다면 이쪽이 가면 되는 일 아닌가?" 내가 대답했네.

 

"의무가 없는 곳에 필요가 있을 리 없지." 형님이 주장했네.

 

H : "그럼 행복을 위해 가는 거지. 필요 때문에 가고 싶지 않다면 말이네." 내가 다시 대답했네

 

내 말의 의미를 형님은 잘 알고 있었지. 하지만 시비, 선악, 미추의 구별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키워온 높은 기준을 생활의 중심으로 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형님은 그걸 선뜻 내던지고 행복을 구할 마음이 들지 않는 거네. 오히려 거기에 매달려 행복을 얻으려고 초조해하는 거지. 그리고 그 모순도 형님은 잘 알고 있네.

 

H : "자신을 생활의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깨끗이 내던지면 좀 더 편해질거네."

 

386. (H) : "세상일이 자기 생각대로만 되는 게 아니라면 거기에 자신 이외의 의지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지. 그리고 그 의지는 자네의 의지보다 훨씬 위대하지 않은가?"

 

"위대할지도 모르지, 내가 지니까. 하지만 대체로 내 의지보다 선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고 진실하지도 않네. 나는 그들에게 질 리가 없을 텐데도 지네. 그러니 화가 나는 걸세."

 

(중략) (H) : " 모든 걸 위임하는 거지. 아무쪼록 잘 부탁드린다고 말하면서. 이보게, 인력거를 타면 인력거꾼이 떨어뜨리지 않게 잘 끌어주겠지 하고 안심하며 그 안에서 잘 수는 없나?"

 

393. 형님은 신이든 부처든 뭐든 자신 이외에 권위 있는 것을 건립하는 걸 싫어하네. 그렇다고 니체처럼 자아를 주장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네. "신은 자기다"라고 형님은 말하네. 형님이 이렇게 강력하게 단안을 내리는 모습을, 모르는 사람이 뒤에서 들으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네. 형님은 이상하게 여겨지더라도 어쩔 수 없을 만큼 격렬한 어투를 사용하네.

 

(중략)

 

형님은, 순수하게 마음의 안정을 얻은 사람은 구태여 구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네. 한번 그 경지에 들어가면 우주도 만물도, 모든 대상이라는 것이 모조리 없어지고 오로지 자신만 존재하게 된다고 했네. 그리고 그때의 자신은 있는지 없는지 분간할 수 없는 거라고 하네. 위대한 것 같기도 하고 또 미천한 것 같기도 하다고 하네, 뭐라고도 명명할 수 없는 거라고 하네. 즉 절대라는 거지. 그리고 그 절대를 경험하는 사람이 갑자기 경종 소리를 듣게 되면 그 소리가 곧 자신이라는 거네. 말을 바꿔 같은 의미를 표현하자면 절대가 곧 상대가 된다는 거지. 따라서 자기 이외의 물건을 두고 남을 만들어 괴로워할 필요가 없어지고 또 괴로움을 당할 염려도 생기지 않는다는 거네.

 

긴 편지글의 많은 부분을 옮겨 썼는데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치로 형님은 절대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아무리 깊게 파고 들어가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괴로움에 젖는 것이 일상인 슬픈 사람이다.

 

사실 그가 공부한 내용은 틀렸다고 할 수는 없는 것들이다. 364. "인간의 불안은 과학의 발전에서 오네. 나아가가만 하고 그칠 줄 모르는 과학은 일찍이 우리에게 그치는 것을 허락해준 적이 없지."라고 이의를 제기하고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지식인의 올바른 책무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그렇지만, 형님은 자신의 절대성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것을 항상 의식한다.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진 것이다. 누가 짊어지라고 말하지도 않은 것들을 말이다. 그 무게를 항상 안고 있기 때문에 그는 편안함을 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H는 당신의 의지만으로는 이 세계를 살 수 없을 것이라고, 가끔씩은 다른 방향의 의지를 믿고, 내려놓기를 권하지만, 형님은 자신의 의지가 가장 순수하고 진실된 것이라는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 이것은 움직이지 않는 산을 보고 계속 이쪽으로 오라고 소리치는 행위이며, H가 권하는 것은 필요하다면 스스로 산으로 향해 이동하라는 것이었다.

 

형님도 자신의 주장이 억지스럽고, 또 크게 무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향엄의 일화처럼 한 순간의 번쩍이는 깨달음으로써 무게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희망도 항상 품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에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 고립감이 그를 점점 안으로만 파고들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H의 설득은 실패한다. H가 가족에게 남길 수 있는 것은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구름을 걷어내 달라는 주문뿐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악스트 Axt 2015.7.8 - 창간호 악스트 Axt
악스트 편집부 엮음 / 은행나무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실험적인 매거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춘분 지나고까지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0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경험과 업에 대한 목마름


(첫 문장) 20. 게이타로는 얼마 전부터 해온 별 성과도 없는 취직 활동과 그 분주함이 다소 지겨워졌다. 원래부터 튼튼하게 생겨먹은 몸이라 그저 뛰어다니는 노력이라면 그다지 힘들지 않을 거라는 건 자신도 알고 있지만, 생각한 일이 뭔가에 걸려 꼼짝 않고 버티고 있거나 또는 붙잡으려고 손을 내미는 순간 쓰윽 빠져나가는 실패가 거듭되다 보니 몸보다는 머리가 점차 말을 듣지 않게 되었다.  


이 소설의 첫 문단은 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세상으로 나갈 출구를 찾아내 그쪽으로 인생의 방향을 정해야 함에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좌절하고, 그것이 반복되어 정신적으로 지쳐가는 게이타로의 처지를 설명하는 매우 효과적인 문단이다.


이런 게이타로의 이웃 중에는 같은 곳에서 하숙하면서 자주 마주치게 된 모리모토라는 뜨내기가 있는데. 한눈에 봐도 그의 말은 어딘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크게 관심을 보이는 게이타로의 심리- 26. 모리모토의 모든 과거는 게이타로가 보기에 일종의 로맨스 냄새가 혜성의 꼬리처럼 뿌옇게 뒤덮인 채 괴이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는 어쩌면 경험이 부족한 게이타로를 잘 설명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싶었다. 거기에 덧붙여 점쟁이를 만나서 나온 괴이한 점괘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까지도 말이다.   


게이타로는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막연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이타로는 29. 세상으로 나갈 출구를 다리가 뻣뻣해지도록 찾아다니고 있다.는 소세키의 설명처럼 포기하지 않고, 뭔가를 하려고 시도했다. 109. 남의 개로 부려지는 불명예와 부도덕함을 느끼고 겨드랑이에서는 괴로운 진땀이 흘렀다. 하지만 그는 돈을 벌어야 했다.


갈증과 막연함은 이런 거라면 괜찮겠지 싶은 생각을 정당화시켰다. 친구인 스나기로부터 소개받은 다구치의 제안. 누군가를 감시하라는 엉뚱한 탐정놀음을 수락한다. 게이치로는 누군가의 뒤를 열심히 밟았다. 그 결과는 너무나 형편없었고, 게이치로의 존재가 그 결과의 상관없음과 동일시되어 아무런 '의미가 없음' 으로 수렴한다. 이러한 상황 현실로 건너와서 생각하기에는 고용시장에서의 청년의 위치가. 피고용인으로서의 힘없는 을의 관계을 상징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을을 나약하게 조종하는 것은 갑의 의심이 큰 몫을 하고 말이다.


188. 원래 성품은 좋은 사람이라네.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야. 다만 여러 해 동안 사업의 성공만 안중에 두고 그렇게 세상과 싸워온 사람이라 사람을 보는 눈이 묘하게 치우쳐 이놈은 도움이 될까, 이놈은 안심하고 쓸 수 있을까, 뭐 이런 것만 생각하는 거지.


2. 정략결혼. 자격지심. 그리고 질투


게이타로가 감시한 사람은 그와 그의 고용인에게 어떤 만족스러운 결과를 제공하진 않았다. 그저, 게이타로가 도움이 될지 어떨지 대충 탐색한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소설로 볼 때는 예고에 없었던 어떤 여인을 소설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했고, 그녀를 축으로 하여 게이치로에서 스나기로 소설의 이야기가 옮겨지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제 와서 말하건대. 이 소설은 크게 3명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이 3인은 각기 다른 프리즘으로 세상을 보여주는데. 그것을 통해 사회를 읽을 수 있게 하는 소설이다. 첫 번째의 중심부는 게이타로의 갈증이었고, 바통을 넘겨받은 번째 중심부는 게이타로를 다구치에게 소개해준 스나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달라지는 것은 삼인칭 화자가 아니라 스나기가 일인칭 서술자가 되는 것이다.    


스나기는 직업의 문제도 고민거리였지만, 고등유민(176)으로 자신을 포장했기에 그 압박감이 게이타로보다는 덜했다. 그것보다 그를 옭아매는 문제는 애정과 결혼에 얽힌 것이었다. 스나기와 그녀의 이종사촌 지요코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스나기와 지요코는 어렸을 때부터 정략적으로 결혼하기로 말이 오간 사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스나기의 가문이 지요코의 가문보다 위세가 강했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스나기의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그의 유산을 바탕으로 어머니와 함께 고등유민을 자처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에 비해 지요코의 가문은 다구치의 사업수완으로 인하여 훨씬 부유하게 되었다. 과거와는 반대로 벌어진 격차. 그것을 보면서 스나기는 답답함을 느낀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생각하는 재주밖에 없었다. 그는 다분히 철학적인 인간(245)이었기 때문이다.


기울어지는 가문을 자신의 힘만으로는 어쩌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 과거에 부모들끼리 말이 오갔다 하더라도 그녀에게 딱히 무엇을 내세울 수 없는 자신의 현재 모습. 이것이 그들 자격지심에 휩싸이게 했던 것이다.


243. 지요코는 두려움을 모르는 여자다. 그리고 나는 두려움만을 알아버린 남자다. (중략) 내가 만약 지요코를 아내로 맞이한다면 아내의 눈에서 나오는 강렬한 빛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인정의 빛도, 사랑의 빛도, 혹은 싶은 사모의 빛도 마찬가지다. 나는 분명 그 빛 때문에 꼼짝하지 못할 게 뻔하다. 그것과 같은 정도로 또는 그 이상으로 빛나는 것을 그녀에게 답례로 돌려주기에는 감정에 좌우되기 쉬운 나는 너무나 모자라다.


그녀를 아끼는 마음은 컸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을지라도... 그런데 불안한 심리의 스나기. 그와 정반대로 건장하고 활달한 성향의 다카기. 그리고 지요코. 이 세 사람이 마주했을 때, 그 아끼는 마음이 질투가 되어버렸고, 그것을 두 사람이 모두 느낀 순간 두 사람의 관계는 틀어져버렸다.


305. 내가 미적지근하고 또 융통성이 없는 남자로서 지요코에세 일종의 경멸을 받고 있다는 것은 진작에 말한 대로다. 사실 우리 두 사람의 교제는 서로 그것을 묵인한 상태에서의 친밀한 관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 대신 나는 다행히도 지요코가 늘 경외하는 점을 딱 하나 지니고 있었다. 과묵함이다. (중략) 그런데 우연히 다카기라는 이름을 입에 담았을 때 나는 금세 이 존경을 영원히 지요코로부터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3. 혈통. 정략결혼에 얽힌 힘겨루기. 만들어진 자격지심.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요코와 스나기 사이에 갑자기 다카기가 들어와서 그들이 유지하고 있던 최소한의 균형마저도 무너뜨렸다. 이 균열을 제공한 다카기는 어디서 나타난 존재일까? 이 소설에서는 하나의 불안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은 혈통과 관련된 일이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발휘해본다. 


나는 스나기에게 질투심을 유발하여 그를 무너뜨린 건 다구치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방식은? 일거리를 찾아 헤매던 게이타로에게 감시원 역할을 맡긴 것과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인재인 다카기에게 지요코의 남자 친구의 후보정도 되는 역할을 맡긴 것이다.


312. 이치조는 세상과 접촉할 때마다 안으로 몸을 사리는 성격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자극을 받으면 그 자극이 차례로 회전하여 점점 깊고 촘촘하게 마음속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어디까지 파고들어도 한계를 모르는 똑같은 작용이 연속되어 그를 괴롭힌다. 끝내는 어떻게든 그 내면의 활동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간절히 바랄 만큼 괴로워하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저주처럼 끌려간다. 그리고 언젠가 그 노력 때문에 쓰러질 수밖에 없다, 혼자 쓰러질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을 안게 된다. 그리하여 미치광이처럼 지쳐간다. 이것이 이치조에게는 생명의 근간에 가로놓인 일대 불행이다.


번째 이야기에서 스나기 가문에 얽힌 진실이 공개되고, 스나기는 자신의 손을 떠난 여인을 잊고, 무너진 자존감을 치유하기 위해 타지역으로 방랑한다. 그런 이야기 가운데 스나기의 외삼촌인 마쓰모토가 밝히는 스나기의 성격이자. 약점이다. 


성공을 위해 사람을 가려온 다구치의 눈으로 이것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다구치는 스나기에게 자극을 던진 것이다. 자격지심을 일으킬만한 자극을... 질투에 관한 그것을 말이다. 약점을 집요하게 노려 그를 무너뜨리면 정략결혼에서도 해방될 수 있고, 그 말은 더는 그 혈통과 얽힐 일이 없다는 계산이 섰을 것이다.


327.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나는 다구치 자형에게 그 남자는 어땠느냐고 물었다. 다구치 자형은 익살스럽게 웃으며 다카기는 처음부터 후보자로 나선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상당한 신분과 교육이 있고 독신 남자라면 누구든지 후보자가 될 권리는 있으니까 후보자가 아니라고는 결코 단언할 수 없다고도 했다.


4. 목마름의 끝에서 알게 된 어느 가족사에서의 해방과 그리고 예방


344. 게이타로의 모험은 이야기로 시작하여 이야기로 끝났다. 그가 알고자 하는 세상은 처음에는 멀리 보였다. 요즘은 눈앞에 보인다. 하지만 게이타로는 마침내 그 안으로 들어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문외한 비슷했다. 그의 역할은 끊임없이 수화기를 귀에 대고 '세상'을 듣는 일종의 탐방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금 게이타로로 돌아온 <춘분 지나고까지>. 이 소설은 제목에 그다지 중요한 의미가 없었던 걸까? 마지막에서야 언급해본다. 그의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모리모토에서 시작되어 처음에 시작한 탐정놀이까지는 그다지 영양가가 없었지만, 그 이후에 알게 되는 스나기와 마쓰모토와 다구치 가문에 얽힌 이야기는 흥미진진했고, 배울 점을 찾을 수 있었다. 아마 게이타로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346. 요컨대 인간 세상에 대해 게이타로가 가진 최근의 지식과 감정은 모조리 고막의 작용에서 온 것이다. 모리모토에서 시작하여 마쓰모토로 끝나는 몇 자리의 긴 이야기는 처음에는 넓고 얕게 게이타로를 움직이면서 점차 깊고 좁게 그를 움직이기에 이르더니 갑작스럽게 끝났다. 하지만 게이타로는 결국 그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게이타로에게는 그것이 어딘가 부족한 점이고 동시에 다행스러운 점이다.


누군가의 인생에 완벽히 들어갈 수 없는 것. 이것은 분명 당연한 일이다. 부족해야 마땅하다. 근데 굳이 왜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했을까? 스나기에게 닥친 비극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 들음으로써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중톈의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 천재 동양 철학자들의 생각의 향연을 듣다
이중텐 지음, 이지연 옮김 / 보아스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생각의 향연


책을 선택하기 전에도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다>보다는 이중톈이라는 브랜드에 먼저 끌렸을 만큼. 개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제목이다. 그렇게 아무 생각없이 읽기 시작하다가 가만히 표지를 들여다보면 큼직한 글씨 위쪽에 자그맣게 생각의 향연이라는 부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분명히 책을 읽기 전엔 눈에 들어오지 않겠지만, 책을 읽으면서 표지를 훑게 되면 <생각의 향연>이라는 단어가 눈에 확 띌 것이다.


2.


이 책은 내가 읽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철학을 소개하는 책 중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책이 아닌가 싶다. 이 책에서는 유가와 묵가와 도가와 법가를 춘추전국시대의 주요 사상으로 다룬다. 이중톈은 이 사상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색하고, 그들의 사상 가운데의 핵심 내용을 설명하고, 더 나아가서 이들의 사상이 지닌 한계를 아주 정확하게 설명한다. 아마도 앞으로도 공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듯하다.



3. 지식과 지혜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즉, <생각의 향연>에서 이중톈이 이렇게 다양한 사상을 그것이 출발한 원인에서부터 설명한 이유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순간에 좀 더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돕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지혜... 음.. 개인적으로는 지혜를 발휘해야 하는 순간은 인간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크고, 지식이 필요한 순간은 인간이 배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쉽게 말해서, 지식은 사회에 속하는 것으로 손쉽게 주고받을 수 있으며, 생각보다 꽤 단순하게 비교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열관계를 손쉽게 선택할 수있다. 최근에는 스마트폰에서 간단히 손가락만 움직여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혜는 개인의 관점에 속한 것으로서 오로지 각자의 깨우침으로써 판단할 수 있다. 지식이 가능성의 판단 여부를 알아보는 것이라면, 지혜는 그 가능성이 어떤 인식의 확장으로 통해 다가왔는지, 그리고 그 가능성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지 미리 판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4. 노자 <제18장>


262. 큰 도가 없어지니 인과 의가 나타났고, 지략과 지모가 나타나니 큰 위선이 생겨난 것이다. 가족이 화목하지 못해 효성과 자애라는 것이 나타났고,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충신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 책의 이 구절을 통해서 처음 깨닫는 건 아니다. 작용과 반작용. 인간이 어떤 행위를 하게 되는 것 이면에 숨겨진 방어기제라는 이론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내용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니 이 구절이 제일 강하게 박히는 건 사실이다.


사회를 지탱하는 무언가 무너졌다. 사상가들은 그 원인을 살폈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인과 의, 지략과 지모, 효성과 자애, 충신이라는 관념을 내세웠다. 그것의 이동과정을 살펴보면 사상의 단계별로 맨 처음에는 도덕이 필요치 않은 무위의 사회 -> 인 -> 의 -> 예악 ->법(권세)으로 흐르고, 이러한 도구를 통해 과거의 영광스러운 시대회귀(유가, 도가, 묵가)하거나 권세가에 눈에 들어서 자신의 힘을 인정받는 시간(법가)으이동한다.


5. 헬조선이 뜻하는 난세.


헬조선을 인정하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 그에 따라서 이 시대에 대한 처세가 점차 극단적으로 바뀌는 것 같기도 하다. 그만큼 이제는 군자는 '인애'의 상징이 아니라 의 틀에 박힌 예법. 혹은 신분 차이의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도구로 전락했고, 무위라는 것이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잉여라는 사회부적응이라는 관점으로 변질되었다. 


그에 대응하여 우리는 이제. 스스로 자신을 포장해야 한다. 우리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말이다. 그 상품이 배송되는 곳은 우리를 필요로 하는 군주(지금의 기업가)이다. 우리는 이들의 눈 에 띄어야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이 세상의 위치는 덕과 자연스러움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지 오래요. 법 혹은 권세에 너무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그것이 모든 것이 되어가고 있는 것다.


그런데 최근에 생긴 의문이 있다. 


우리 사회가 전체적인 틀로 볼 때 헬조선이라고 불릴 정도로 팍팍하고, 그렇기에 모사의 사고방식으로 법과 권세에 의존하여 부를 쌓아가는 것이 시대의 흐름이라고 본다 하더라도. 그런 룰을 적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갈 만한 아주 일상적이며, 사소한 것에까지 다소 무리하다시피 하여 난세의 룰을 적용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