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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평점 :
1.
윌
리엄 스토너. 그가 위대한 인물이라는 사실에는 큰 이견이 없을 듯히다. 소설 안의 스토너와 다소 떨어진 곳의 스토너. 즉, 미래의
스토너가 3인칭을 사용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회고하듯이 고백하는 이야기를 의심 없이 좇으면 말이다. 그에 따르면 스토너의 관점은
'선'이 되고, 스토너를 가로막는 로맥스, 이디스, 워커는 '악'에 가까울 것이다. 애정 없는 결혼 생활, 학과 내의 권력 투쟁.
그것에 저항하여 성취를 이룬 스토너. 개츠비에 붙어있는 'Great' 라는 칭호를 떼어내어 스토너에게 달아주고 싶을 생각이 들
것이다.
아. 스토너라는 인물이 인류의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말은 아니다. 8. 스토너의 동료들은 그가 살아 있을 때도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의 이름을 잘 입에 올리지 않는다. (중략) 단순한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라는 설명처럼 그는 어느 대학에서 평생 동안 조용하게 학생을 가르친 사람일 뿐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평생 동안 학생을 가르친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것도 열정적으로.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읽어보면 평생 동안 열정을 잃지 않고 학생을 가르친다는 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의 힘을 빌어 스토너를 자세히 살피지 않았다면 누구도 그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작은 거인'
같은 사람이었고, 자신이 살아낼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산다는 것은 남들의 눈에 쉽게 포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도
스토너를 읽지 않았더라면, 주위의 대학교수. 표지갈이를 하지 않고 묵묵히 강의하는 교수와 표지갈이를 하는 교수 중에서 누가
스토너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것이다.
2.
앞
서 읽은 나쓰메 소세키의 <행인>과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의 주요 인물은 묘하게도 닮은 구석이 많다.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이자 대학의 교수이며, 애정이 빠져나간 결혼 생활로 인한 갈등으로 인하여 점점 더 자신의 일에 집착하는 모습이
그렇게 느껴졌다. <행인>의 이치로와 <스토너>의 스토너에게 남겨진 유일한 탈출구는 '일(학문)'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행인>의 결말은 격렬한 반면, <스토너>의 결말은 초월한 자아를 보여준다.
그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봤다. <행인>의 표현을 빌려서 이야기하자면 이치로는 자신이 올라가고 있는 산이 유일한 진리였다.
세상사에 관계된 보편적인 산을 내버려 두고, 시비, 선악, 미추의 구별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키워놓은 기준으로 쌓아올린 산을
오른다. 그곳에서 이치로는 그의 아내와 가족을 부른다. 이쪽으로 오라고 소리친다. 반대로, 그의 아내와 가족과 동생도 마찬가지로
이치로에게 그들을 향해 오라며 소리친다. <행인>은 관계 회복을 위한 극심한 진통이었다.
한
편, 스토너는 산을 향해 그저 묵묵히 홀로 걸어가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위해서 산을 오를 뿐이었다. 찰스 워커와 로맥스와의 논쟁은
학문적으로 타협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또한 아내인 이디스와의 소원한 결혼 생활은 그를 힘들게 했다. 스토너를 읽어보면 이
부부관계의 회복의 키를 쥔 인물은 스토너가 아니라 이디스였으니. 거리를 좁히려고 노력하지 않은 죄를 스토너에게 물을 수 없었다.
스토너의 학교에서 발생한 사건을 이디스가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는지에 관해서도 심각하게 의심하지 않았다. 독자인 내가 굉장히
의문스러웠는데도 말이다.
3.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줄리언 반스는 우리에게 질문한다. 50년 만에 이 소설이 부활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개인적으로 소설은 공감의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공감대가 형성되면, 그 몰락한 인물의 얼굴과 우리의 미니어처를 대입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 소설이 부활한 이유를 16장의 초입에서 발견했다. 그 발견 때문이 아니라도, 이 소설이 앞의 모든 부분과 16장을 나누고 무게를 재어보라 했을 때, 16장에 모든 무게가 쏠린다. 위에서 매긴 별점 또한 16장 때문에 가능한 별점이다. "스토너의 죽음에 대한 존 윌리엄스의 주관적인 묘사는 현대 문학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는 이언 매큐언의 찬사는 전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 소설의 정서는 불안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불안>은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처럼 욕심의 크기가 클 때도 생기지만, 불확실성. 즉, 기본적으로는 안전하지 않음에서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스토너의 배경은 세계대전과 불황이 교차하는 시대였다. 그리고 현재 우리의 시대. 우리의 삶도 불황으로 인한 비정규의 불안에
젖어있다. 그 불안을 잘 표현한 <사축일기> 라는 책이 요즘 인기라고 한다. '전해라'라는 노래말이 유행어가 되는
이유도 이 시대의 불안이 임계점에 다다랐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의 불안감을 누군가가 알아줬으면 하는 욕망이 작용한 탓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다.
16장의 본문. 불안의 언어를 옮겨본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전쟁으로 비워진 자리와 어느 날 출근했을 때 비워진 동료의 옆자리의 크기가 비슷하다고 느꼈다. 이들의 전쟁은 우리가 직면한 경제 불황의 전쟁이며, 그 맹렬한 구조조정의 폭풍 속에 우리들도 스토너처럼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단단히 여미며 한 발 한 발 내딛지만, 마음속은 격렬히 분열되어 있었다. 죽은 자들의 이름과 얼굴과 목소리는 남아있지 않은 자들의 잔상이었다.
346.
전쟁이 벌어진 몇 해 동안은 시간이 흐릿하게 뭉쳐서 흘러갔다. 스토너는 견디기 힘든 맹렬한 폭풍 속을 지나갈 때처럼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생각은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딛는 데에만 고정시킨 채 그 시절을 겪어냈다. 하지만 단단한
인내심과 무신경함으로 하루를 보내고 몇 주를 보내면서도 그의 마음속은 격렬히 분열되어 있었다. 마음 한쪽은 매일 헛되이 스러지는
생명, 냉혹하게 마음과 정신을 강타하는 수많은 파괴와 죽음에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며 움츠러들었다. 이번에도 교수진이 고갈되었고,
강의실에는 젊은 청년들이 사라졌으며, 남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고뇌가 가득했다, 그 얼굴들에서 그는 서서히 죽어가는 마음, 모질게
마모되어 사라지는 감정과 애정을 보았다. (중략)
매
주, 매달, 죽은 자들의 이름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개중에는 먼 과거의 기억처럼 단순히 이름으로만 기억되는 사람도 있었고, 그
이름을 지닌 사람의 얼굴이 함께 떠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목소리, 그가 했던 말이 떠오을 때도 있었다.
이와 같은 불안한 하루하루를 극복하고 묵묵히 자신이 오를 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인물이 스토너였다. 스토너는 왜 위대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충분한 답변이다.
4.
여기서 언급할 내용은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간단하게 줄이자면 스토너가 자신의 가치를 지키고 발전해나간 방법에 대한 개인적인 깨달음인데. 이것은 스토너의 학문적 사상적 변화와 맞닿아 있다.
16
장을 제외하고, 이 책에서 중요한 부분이 몇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스토너와 로맥스, 찰스 워커의 학문적 논쟁일 것이다. 이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스토너가 '선' 이고, 로맥스, 찰스 워커가 '악'이라는 프레임을 잠시 깨트려보고자 한다.
과거의 스토너라고 칭하자. 이 스토너는 굉장히 보수적이면서 정량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중시하는 규칙적인 인물이다. 그는 과거. 황금시대에 만들어진 진리가 어딘가에 숨어져 있고, 공부를 통해서 이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43.
스토너는 대학을 커다란 저수지처럼 생각하고 있을걸. 도서관이나 유곽처럼 말이야.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자신을 완성해줄
물건들을 고를 수 있는 곳, 모두가 같은 벌집의 작은 일벌들처럼 힘을 합쳐 일하는 곳. 진실, 선함, 아름다움. 이런 것들이
모퉁이 너머 바로 다음 복도에 있다는 것이지. 아직 읽지 못한 바로 다음 책, 아니면 아직 가보지 못한 바로 다음 서가에. 언젠가
우리는 반드시 그 서가에 이를 것이고, 그러면... 그러면.
반면에 로맥스와 찰스 워커는 규칙보다는 일탈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개인의 창의성에 굉장히 큰 가치를 부여하는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라는 것은 어디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139.
그는 자신의 기형적인 외모 때문에 고립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일찍부터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으며, 자신을
방어할 방법을 떠올릴 수 없었다고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이 털어놓았다. 그는 길고 긴 낮과 밤을 방에서 혼자 보내며
자신의 일그러진 몸이 강요하는 한계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책을 읽다가 점차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가 이 자유의
본질을 이해하게 됨에 따라 그가 느끼는 자유로움도 더욱 강렬해졌다.
이 둘 사이의 메워질 수 없는 거리와 그로 인한 투쟁은 셰익스피어에 대한 시각에서 마침내 촉발한다.
이것은 스토너의 생각을 대변하는 드리스콜이 발표한 내용이다.
194. 그녀는 중세의 문법과 논문집에까지 끈질기게 모습을 드러낸 도나투스 전통을 셰익스피어가 어떻게 이용했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뤘는데, 그녀가 발표를 시작하고 얼마 안 돼서 스토너는 그 보고서가 아주 훌륭하다는 것알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 부분은 찰스 워커가 셰익스피어에 대하여 말한 부분인데, 스토너의 생각과 완벽한 대비를 이룬다.
199.
셰익스피어의 용솟음치는 서정성이 그저 한밤중에 불을 밝히고 애쓴 덕분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범속한 법칙을 뛰어넘는 타고난 천재성
덕분에 생겨난 것임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다른 평범한 시인들과 달리 셰익스피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그 다정함을
황량한 분위기 속에서 낭비해버리려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시인들이 자양분을 구하려고 의지하는 그 신비로운 원천을
먹어치웠습니다. 보잘것없는 문법에서 찾을 수 있는 그 어리석은 규칙들이 불멸의 시인에게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책에서 찰스 워커를 묘사할 때, 다듬어지지 않은 면을 보란 듯이 스토너에게 노출시킨다. 그 허점이 스토너에게는 크게 느껴진다. 앞서 얻은 문학적 가치를 따르기보다는 앞으로 만들어 나갈 것에 집중하는 그들에게 스토너는 집요한 공격을 가한다.
"중세 희곡을 세편 열거해보게.", "르네상스 시기의 장르 중에서 가장 자신 있는 것이 무엇인가?", " 영어로 된 최초의
무운시 비극이 무엇인가?" ,"셰익스피어 이전의 중요한 희곡 제목을 아무거나 하나 말할 수 있나?", "바이런 경의 중요한
작품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테지." , "잉글랜드 서정시인과 스코틀랜드 비평가에 대해 논평해보겠나?"와 같은 질문들을 던진다. 개인의 천재성과 미적 감각에 무게를 두는 워커가 제대로 답했을 수 없었다. 그는 그렇게 게으른 인물로 낙인찍히고, 문학교수의 자격을 박탈당한다.
스토너가 로맥스와 워커에게 던진 것은 엄격한 틀이었다. 그리고 워커의 거부에 반발하여 로맥스가 스토너에게 던진 것도 고정된 학제라는 엄격히 정해진 룰이었다. 스토너는 그 학제를 묵묵히 받아들이다가 그것을 거부하고 자기가 가르치고자 하는 것을 가르친다. 그
런데 로맥스가 스토너에 던진 틀을 빠져나오게 한 반전이 굉장히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그 틀을 빠져나오는 동시에 과거의 스토너의
완고함은 해제된다. 그 사이에 이루어진 드리스콜과의 진심어린 사랑이 도움은 분명히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스토너와 드리스콜의 관계는 누가 보듯 명백하게 규칙에 반하는 행위였다. 그런데 평생 문학의 규칙을 연구한 그가
규칙에 어긋난 사랑을 하게된다. 학장이자 친구인 핀치가 전하는 경고는 과거의 그. 워커를 몰아붙이던 스토너가 사랑에 빠진 그
자신에게 하는 경고로 들렸다.
291.
이론적으로 자네 인생은 자네 것일세. 이론적으로는, 누구든 자네가 원하는 사람과 잘 수 있거, 무엇이든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지. 그것이 강의에 지장을 주지만 않는다면 문제될 것이 없네. 하지만 말이야, 젠장, 자네 인생은 자네 것이 아니야. 자네
인생은... 아, 빌어먹을.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그
는 깨닫는다. 세상의 규칙을 알아내는 것만이 개인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인에게 더욱
충실한 모습을 모여주는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이 좌절의 시기에는 여전히 스토너는 그녀와 함께할 용기가 없었다.
303. 결국은 우리도 세상의 일부인 거요. 그걸 알았어야 하는 건데.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조금 뒤로 물러나서 그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던 거요. 그래야 우리가.
그 알림은 조금 후에 시작된다.
315.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받았던 교육이 모두 이런저런 방식으로 우리를 방해할 것입니다. 경험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는 우리의 습관이
우리의 기대치를 결정한 것처럼, 중세 사람들의 기대치도 습관에 의해 결정되었으니까요. 먼저 기본적인 공부를 위해 중세 사람들의
삶과 생각과 글을 결정했던 마음의 습관들을 몇 가지 살펴봅시다.
이
강의 커리큘럼의 소개는 과거의 스토너와 작별을 고하는 알림이었다. 과거의 스토너는 과거의 교육이 아름답고 옳은 것이었기에.
현재의 창조물의 원천을 과거로부터 찾았지만, 이 소개로 나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현재를 다지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과거의
틀을 고수하지도 않고, 로맥스와 찰스 워커의 영역으로 나가아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중립을 지키는 움직임이다. 어쩌면 우리는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것을 알면서 행하는 것과 구조에 휩쓸리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본다.
이런 스토너의 개인적인 진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16장의 문장이 탄생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