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많이 그리울 겁니다 - 바보 대통령 노무현 추모집(노무현 추모시집)
신경림.송기인.박노해.유시민.안도현 외 지음 / 트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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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3일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날이다. 아무도 그의 서거소식을 믿지 않을 정도로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집중된 각종 비리의혹의 기사가 물밀듯이 쏟아져 나온 이후. 그리고 그런 의혹들과 예전에 그가 입버릇처럼 내뱉던 부패척결이라는 단어를 뒤섞은 기사가 나온 이후. 그를 지켜주는 언론은 단 한군데도 없었다.

각종 전략ㆍ전술들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전략이라고 일컬어지는 도덕성에 흠집이 난 그는 씻을 수 없는 불명예의 방망이로 육체 속에 숨겨져 있던 서민을 위하던 그 투명하고 맑은 영혼이 피곤죽이 될 정도로 격한 정신적 타격을 입으셨다. 그렇지만 그 순간에도 그는 아무에게도 죄를 묻지 않으시고,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 조각’이라는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신 채 훌쩍 떠나버렸다.

그 후 오랜 시간동안 우리들은 패닉상태에 잠겨들었다. 그리고 그를 추모하는 발걸음이 연일 이어졌다. 그리고 각종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된 서적들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책들 가운데 그런 죄스러운 마음을 한군데 고스란히 그리고 정성껏 담아낸 故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집 또한 마주할 수 있다.

‘바보 노무현’을 그리는 많은 인물들의 글을 담은 <당신이 많이 그리울 겁니다>. 나는 책 제목처럼 우리들은 당신이 만들어준 그늘이 너무나도 그리울 것 같고, 그런 그늘을 또 다시 유지하기 위해서는 ‘후불제’를 통해서 꾸준히 지불해나가야 한다는 암울한 생각을 또 다시 해보게 된다.

책에 실린 글 한편, 시 한편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역시나 한결 같은 목소리가 이 책에서 울려 퍼진다. 그가 떠나고 나서야 그가 씨앗을 흩뿌린 풀뿌리 민주주의를 깨닫게 되고, 작금을 상황을 지켜보고 나서야 그때의 자유가 소중했었구나…….라는 후회 섞인 한숨들.

그렇지만 그가 뿌리고 간 씨앗은 비록 그것을 부정하는 자들에 의해 짓밟혔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 씨눈을 틔우지 못했던 수 많은 불량종자는 그 격렬한 짓누름을 통해서 마침내 씨눈을 틔우게 만들어 주었다. 마치 척박한 토지에 쟁기질을 한 것처럼 그렇게 우리들은 새로이 눈을 뜨게 되었다.

나도 그랬고 당신도 그랬고 모든 이들이 그랬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모두 ‘정치’라면 그저 머리 아픈 것쯤으로 치부해버리고서는 아무나 뽑혀도 그저 잘해주기만을 바랄뿐이고, 또한 후보자가 가진 도덕적 인품은 무시한 채 그저 경제만 살려주기를 바랄뿐이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이 정치라는 골치 아픈 녀석을 관심 있게 지켜본 이들은 그저 신문에 실린 기사들에만 초점을 맞추었고, 그 기사들의 내용만을 재생산 해내기에 급급했던 아둔했던 우리들이었다. 이리 쏠린다 싶으면 이쪽으로 우르르. 저리 쏠린다 싶으면 저쪽으로 우르르. 지난날의 우리들을 기억한다면 모두가 고개 숙여 스스로 반성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양쪽의 균형 그리고 믿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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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이야기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
오비디우스 지음, 이윤기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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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 카잔차카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보면 조르바의 애인. 과부 오르탕스 부인이 ‘부불리나’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부불리나’는 조르바가 언제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가시방석 속에 살아가는 매우 애처로운 여인으로 그려지게 되는데, <변신이야기>에 등장하는 뷔불뤼스의 이름을 보는 순간 갑자기 이제껏 이해하지 못했던 <그리스인 조르바>의 그 사랑이야기의 또 한 가지를 이해하는 기쁨이 밀려왔다.

<변신이야기> 등장하는 뷔불뤼스는 그의 오라버니인 카우노스를 사랑하게 된다. 그녀의 뜨거운 가슴은 더 이상 그녀를 주체하지 못하게 하여 카우노스에게 그 사랑을 고백하기에 이르는데, 이 카우노스는 뷔불뤼스를 ‘미친년’ 취급하면서 그녀의 사랑을 매몰차게 거절한다. 이 부분에서 뷔불뤼스가 갈등하고 있는 고백과 두려움 사이의 심리묘사는 마치 남자인 내가 뷔불뤼스가 되어 생각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섬세하고 탁월했다. 

이런 진실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그때의 기억을 새로 해석할 수 있었다. 조르바가 그녀를 ‘부불리나’로 불렀다는 것은 조르바의 사랑이 오르탕스 부인이 조르바를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사랑이라는 것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조르바는 그녀를 언제든 떠날 수 있고, 더 나아가 ‘부불리나’로 부르면서 자신의 친동생과 같은 약간의 천륜을 어긋난 것과 같은 미묘한 껄끄러움을 표현한 것이다.

조르바는 오르탕스에게 ‘우리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라고 말하지 않고 돌려서 뷔불뤼스를 연상시키는 부불리나로 불렀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부불리나’ 여사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실제로 사랑할 수 없는 카우노스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조르바를 대하게 되었음을 지금에서야 깨닫게 된다.

이처럼 많은 이야기들이 이 그리스ㆍ로마 신화로부터 파생되었으며, 신데렐라나 백설공주 인어공주 등 어린 시절에 읽었던 수 많은 이야기들의 변신에 관련한 내용들은 바로 이 신화에서 파생되어 오늘날에도 악한자들은 추한 동물로 변하게 함으로써 ‘권선징악’적 요소를 표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피타고라스의 가르침

이 책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 ‘피타고라스의 가르침’이라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역자 이윤기님께서는 이 가르침에 등장하는 피타고라스가 실제로 피타고라스가 가르침을 내린 것이 아니라 저자인 오비디우스가 피타고라스의 이름을 빌어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가르침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책이 씌어진 시대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드러남을 알 수 있다.

나는 그중에서도 영혼에 대한 해석이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흔히 윤회사상이라고 불리는 바로 그 영혼은 돌고 돈다는 이야기를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피타고라스의 가르침>에서의 영혼이란, 어떤 생명체에서든지 옮겨가면서 자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동물을 해치지 말아야 하며 특히, 육식을 하는 것은 당신의 가족을 먹는 것과 같은 행위라고 비난한다. 즉, 사람이 죽어서 구더기를 낳는 것은 인간의 영혼이 구더기로 옮아 간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이 세상을 이루는 원소는 <흙, 물, 공기, 불>과 같이 4개의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들 원소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흙이 물이 되고 물이 공기가 되며, 공기가 불이 되는 것처럼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설명한다. 모든 것이 이 4가지의 원소로 변환이 가능하기 때문에 저 깊은 산속에 바다의 생물인 따개비가 있는 것과 같은 이해하기 힘든 자연현상을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지금에서 바라볼 때 이들의 이론이 틀렸음이 밝혀졌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일정한 체계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조물주가 세상을 창조해냈다는 기독교의 세계관 이전에는 아무런 관념이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새롭게 이 고대 그리스ㆍ로마의 세계관을 바라보면서 2000년도 이전의 사람과 소통하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만끽하고 있었다.

<변신이야기>의 탄생배경

그러나 이 변신이야기에는 놀라운 탄생배경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로마의 건국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그들의 조상을 신의 세력권 아래에 두어 정당성을 부여한 작업이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우리도 단군신화를 통해서 우리가 신의 아들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이 <변신이야기>도 우리가 느끼는 그 자부심과 같은 맥락을 위해 만들어진 책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리스 신화와 동일한 인물이지만 로마의 이름으로 표기된 부분이 많고, 다소 로마의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여러 인물들에 그들과의 연관성을 부여했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는데, 어떤 부분이 이어져있는지 앞으로 이에 관련된 책을 보면서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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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이야기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
오비디우스 지음, 이윤기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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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얼핏 생각하기에 기원전의 사람들은 상당히 미개한 수준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기 쉽지만, 사실은 우리가 가진 기술력으로도 쉽사리 만들어내지 못한 많은 건축물을 보유하고 있는 장면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태양의 아이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같은 책들을 보게 되면, 기원전 그리스ㆍ로마의 수학자들의 학문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쌓여있던 많은 문화유산들은 그 시대의 지식인들의 전유물로만 취급되어 널리 퍼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당시 유행하던 카톨릭 교회들은 그들만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책과 지식의 보급을 금지했기 때문에 거의 2000년간 문화적 암흑기를 거쳐왔다는 이야기들 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처럼 지식의 흐름이 끊겨서 왔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항상 고대의 책을 섭렵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비로소 오비디우스가 지어낸 <변신이야기>를 읽게 되면서 약속을 지켜낸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해져옴을 느낀다.

그렇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유피테르나 헤라클레스와 같은 인물들을 포함하고, 그 이외에도 수 없이 등장하고 있는 많은 신들과 명사들의 이야기에 머리가 핑하고 돌아버릴지경이었다. 그만큼 이 책은 나를 상당히 혼란스럽게 했고, 여러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내용을 파악하기에 쉽지 않은 감이 있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지침서라는 느낌을 많이 받게끔 한다고 생각했다.  

태초의 카오스에서 시작된 인류의 문화. 그 문명은 황금과 은과 청동과 철의 시대를 거쳐오면서 탐욕으로 흐른다. 서로의 가진 것들을 탐내며 싸워오던 인간들은 전쟁의 여파로 인해서 갈수록 포악해지고, 잔인한 심성을 갖게 된다. 그들은 여자들을 노리개 따위로 생각하면서 아무여자나 탐하고, 서슴없이 불륜을 저지르기도 하는데, 이 변신이야기에서는 인간의 비윤리적인 행동들과 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인간윤리를 거스른 사람들의 끝은 어떻게 되었을까? 책의 제목 <변신이야기>처럼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신의 아들인 인간에서 미개한 동물과 식물 따위로 전락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들을 욕되게 하는 인물들 역시 신의 노여움으로 인해서 벌을 받게 된다는 무서운 이야기들이 책 속에 가득히 자리하고 있다.

즉, 이 세계의 신이라는 것은 누구나 두려워해야 마지않는 절대적인 존재임에 틀림없다. 이런 무서운 처벌의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오면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나는 그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 신의 노여움을 받긴 싫어’라는 두려움의 계몽의식이 생겨남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생각해본다.

신이라는 존재. 그 신을 믿는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인간을 이롭게 하는 행동이며, 더 나아가서 지구상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를 위하는 행동인 것이다. 그들은 정말 신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믿어온 것일 수도 있겠지만 신의 존재에 대한 의식이 상당히 옅어진 지금. 우리들이 생각할 때는 이 신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행위의 과정과 결과를 통해서 신을 믿기 위해 했던 선한 행동들이 나는 보호해주는 것을 느끼게 되고, 재물적인 이득이 아니더라도 삶에 있어서의 목숨과 같은 이익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신을 경배하지 않았나 짐작해본다.

사실 신의 개념은 특정계층의 기득권을 위해 악용되어왔던 것도 사실이고 지금도 그런 악용의 사례는 수도 없이 빛과 그림자처럼 항상 따라다니지만, 그 이전에 이 신은 인간윤리의 계몽을 위한 가장 확실한 도구였던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도 역시 신의 은총을 위한 어떤 선한 행동으로서 일하고 저축하고 자본을 모았음을 생각해볼 때, 이런 종교의 역할은 인간의 행동을 조종하는 절대적인 장치로서 존재해왔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장정일의 <공부>라는 책을 보면 <중국이 만든 유럽의 근대>, <동양은 어떻게 서양을 계몽했는가>,<서구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라는 책을 예로 들면서 중국의 사상이 실크로드나 몽고제국을 통해 서양으로 건너감에 따라 서양 철학의 기폭제로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다면 기원전에 지어진 <변신이야기>나 여러 신화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계몽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윤리 관념들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갑자기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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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매일 읽는 긍정의 한 줄 긍정의 한 줄
린다 피콘 지음, 유미성 옮김 / 책이있는풍경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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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음가짐을 바로잡기 위해서 자기 계발서를 읽는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자기 계발서에서 그렇게 마르고 닳도록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라고 이야기하는데도 힘들 때는 한없이 힘들고, 지칠 땐 한없이 지치고, 슬플 땐 한없이 슬픈 것일까?

한비야님이 말씀하셨다. 5시간 만에 인간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책이 유일할 것이라고……. 그녀의 말처럼 책은 우리에게 새로운 마음가짐과 새로운 시각을 열리게 도와주지만 딱 한 가지 그런 공식이 적용되지 않는 분야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 계발이라는 분야라고 할 수 있다.

경험해봐서 알겠지만 우리는 자기 계발서를 통해 5시간 동안 잠시 바른 인간으로 바뀌더라도, 다른 어떤 분야보다 그 마음가짐이 삼일을 못 버틸 정도로 오래 지속되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솔직히 자기계발에 있어서 책을 5시간동안 붙잡고 있으면서 그 마음가짐을 되새기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마음가짐을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을지가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다. 이때 나에게 나타난 <긍정의 한줄>이란 책은 우리에게 그런 기대치를 만족시켜주기 위해서 등장한 책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미국의 독립운동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은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이라는 명언집을 통해 많은 미국인들을 계몽시키려 했다. 그도 오랜 시간의 자기계발이 아니라 섬광이 스치고 갈 정도의 깨달음을 제공하는 짧은 명언이 갖는 효과에 주목했었다. 그리고 이 <긍정의 한줄> 또한 프랭클린이 했던 것과 같이 우리에게 하루 한 페이지에 할당된 명사들의 한마디를 통해 긍정의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이 책을 9월 24일에 받고 지금 이 서평을 쓰는 9월 28일 까지 읽은 분량은 책이 정해준 5페이지에 불과하다. 하지만 조바심을 내진 않겠다. 이 책이 의도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을 5시간에 걸쳐 읽으면서 ‘아~ 긍정적인 삶을 살아야지’라고 뭉뚱그려서 생각하지는 않겠다.

9월 24일에 읽은 ‘고난은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는 긍정의 한줄.

9월 25일에 읽은 ‘지식과 지혜의 차이점과 지혜로운 사람이 되자’는 긍정의 한줄. 

9월 26일에 읽은 ‘모든 책임은 나에게 달려있다’는 긍정의 한줄.

9월 27일에 읽은 ‘어처구니없는 걱정은 하지 말고 스스로가 알아서 ’힘든 친구와 같이 아무 이유 없이 놀아주는‘ 긍정의 한줄.

9월 28일. 오늘 새벽에 읽은 ’말을 신중하게 가려서 하자‘는 긍정의 한줄.

그리고 앞으로 남은 360일에 기다리고 있는 긍정의 힘을 기대하면서 하루에 한 페이지씩만 읽기를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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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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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 신드롬이 일고 있다. 신경숙의 ‘엄마 신드롬’과 공지영의 ‘도가니 신드롬’은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해서 그들의 눈물을 하나도 남김없이 쏙 빼놓았다. 그러나 그 이후 한비야의 ‘사랑 신드롬’이라고 부르면 될까? 이 한비야표 희망과 사랑신드롬은 우리에게 비워진 눈물샘에 다시금 맑고 강한 영혼이 가득 차기를 원하고 있었다.

한비야? 사실 내가 무르팍 도사에 나온 그녀의 모습을 잠시나마 보지 못했다면. 그리고 서점가와 활동하는 카페에 들락날락 하면서 그 유명세를 체험해보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까지도 한비야라는 사람이 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시간을 몰입하지 않더라도 화면 저 너머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자신감에 가득차있는 모습은 나에게 막연한 궁금증을 유발해놓고야 말았다. ‘어떻게 방송인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자연스러운 모습이 가능할까? 그녀를 우뚝 세우고 있는 저 자신감의 근원은 과연 무엇일까?’

그녀의 이력의 한곳을 차지하고 있는 ‘국제 홍보학 석사’ 학위는 그녀가 가진 매력도 매력이거니와 그런 매력적인 요소들을 어떤 방식(미디어)으로 효율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한비야 그녀와 비슷하게 미디어를 적재적소에 잘 활용하시는 분으로는 이외수님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이외수님이 젊은이들의 단어를 양껏 사용하면서 같은 눈높이에서 소통을 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데 반해서, 한비야님은 미디어를 통해서 자신을 알림으로서 소통하고 있다는 점에서 약간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자유로운 영혼 그리고 바람의 딸

건도가 말한다. “그녀의 나이 52세!!” 그렇다 그녀의 나이는 한국 나이로 50살을 훌쩍 넘어버렸다. 대략 계산 해봐도 우리 어머니나 이모뻘 나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젊은 생각이 중요하다손 치더라도 주위에서 퍼부어대는 생체학적 나이 역시 무시하지 못할진대…….

여기서 나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당시 사회의 분위기상 결혼에 대한 요구치가 얼마나 강했을까?, 결혼 평균연령이 서른을 훌쩍 넘긴 지금도 30살에만 들어서게 되면 추석이나 설에 언제 결혼 하냐며 성화인데 그녀는 어떻게 버텼을까?’

자유로운 그녀가 결혼 보다는 꿈이 먼저라며 훌쩍 세계여행을 떠나버렸고 그 시기가 무려 7년간이나 이어졌을 때, 아마도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의 꿈에 응원을 보냈을까? 아니면 더 이상 네 마음대로 할 거면 차라리 나가서 살아라고 했을까? 솔직히 우리 가족 기준에서 본다면 후자가 될 듯싶은데, 그녀의 가족은 진심으로 응원해 줬을지 어땠을지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스스로 새장이라고 표현하는 좁은 공간을 벗어나, 새장 밖의 더 넓은 세계로 그녀의 발자국을 하나하나 찍어가며 경험하게 되는 것들 덕분에 조금씩 뛰어오르는 가슴을 부여잡으면서, 마침내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긴급구호)이 무엇인지 찾아내고 그 일을 하면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의 책을 보고 있으면, 그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단순히 그녀가 했던 5년간의 구호활동의 보고서나 홍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꿈과 그 꿈을 가로막고 있는 저마다의 새장을 벗어나기를 응원하는 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가슴 뛰는 삶을 위해

처음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책의 제목을 접하면서 나는 ‘문화 사대주의에 빠져서 맹목적으로 미국의 그리고 영어의 세계화를 외치는 그런류의 책이겠거니’ 라고 지레짐작으로 폄하해버렸다. 책을 읽지도 않고 말이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에서야 나는 예전에 그런 잘못된 생각으로 이 책을 가까이 두지 못했던 것을 상당히 후회한다.

책 속에서 아프리카 대륙과 아시아지역에서 긴급구호활동을 벌이고 있는 그녀는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 힘쓰고 있었고, 특히 중동의 이스라엘을 격하게 비난하는 그녀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아! 이분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에 사로잡힌 분이 아니라 지구촌의 모든 이들이 잘 살기를 바라는 세계화를 추구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단순히 우월감을 뽐내고 싶어 구호활동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어려워하고 있는 그들을 돕고 싶은 마음에 구호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즉, 마음에서 우러나고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그런 소명감을 받들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사회의 부속품으로 살아가기에 급급한 바쁜 현대인들은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자신이 살아내지 못한 하나의 로망을 바라보듯이 대리만족 쯤에 그치면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가 궁금하다.

아마 그녀가 바라는 것은 단순히 그녀의 경험치를 전달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녀는 우리들이 가진 잠재력을 좀 더 큰 틀에서 펼쳐놓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라는 제목이 단순히 한국을 뛰어넘으라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영어공부를 하라고 부추기는 책도 아닐 것이다. 그녀가 이야기하는 지도란? 지금껏 자신을 붙잡고 있던 회사나 학교와 같은 공간에서 날개를 펼치지 못하고 있는 가능성의 일부분일 것이다.  

아무나 섣불리 흉내 낼 수 없는 진정으로 새장을 벗어나서 훨훨 날고 있는 자만이 전달할 수 있는 지도 밖(펼친 가능성)에서의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노라면 우리도 지금 당장 우리가 원하는 것을 위해 ‘난 준비가 부족해. 조금 더 갈고 닦아야 나갈 수 있을 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 대신에 ‘부족하더라도 한 번에 뛰어넘으려 하지 말고, 조금 더 넓게 참여하고, 더 많은 시도를 하게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게 될 듯하다.

덧붙여 기아와 질병에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에게 희망의 싹을 틔워줄 수 있도록. 그녀가 누구는 살려야 하고 누구는 살리지 못해야 하는 슬픔을 더 이상 가지지 않도록. 나눔의 손길을 내밀어보는 것은 어떨까? 얼핏 작은 돈으로 그들을 구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직접 체험하는 것과 같은 생사의 갈림길을 접해보니, 더 이상 좌시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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