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4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인환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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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탁환 작가의 <읽어가겠다>를 읽는 중이다. <읽어가겠다>는 오 년간 라디오 방송에서 다루었던 책 가운데서 '열망과 덧없음'에 관한 스물세 편의 소설을 뽑아낸 독서에세이다. 이 가운데 처음 다섯 편의 작품은 나름 친숙한 작가의 작품이라 견해를 경청하면서 읽었다. 그런데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 이 작품 때문에 읽기가 막혀버렸다. 이 소설은 스물세 편의 소설 가운데 여섯 번째 소설이다.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이미지도 형성되지 않았다. 이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예전에 사두었던 소설의 첫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

2.

<연인>은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다. 이 소설은 노년의 주인공이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서사를 이어간다. 작가는 <연인>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자신의 연인에 대한 추억을 털어놓는다. 그녀가 회상하는 기억은 연대기적 서술이 아니라 의식의 흐름에 안개가 짙게 깔린 것처럼 뒤죽박죽 섞여서. 엉켜서 나열된다. 안개가 자욱할 때는 그녀를 고통과 억압으로 가두었던 가족들과의 기억이 서술되고, 안개가 걷히면 그제서야 연인의 존재는 그녀의 펜 끝에서 나타났다. 이 과정이 반복된다. 예고도 없이.  

이러한 글쓰기 스타일을 '누보로망'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연인>은 이 공식을 아주 충실하게 따른다.


사실적인 묘사와 이야기의 치밀한 구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적인 소설의 형식을 부정하고, 작가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적인 생각이나 기억을 새로운 형식과 기교를 통해 재현하려는 경향의 소설을 의미한다. 반소설(antinovel)이라고도 한다. 특정한 줄거리가 없기 때문에 독자는 직접적으로 작품에 참여해서 적극적인 독서를 해야 한다.

3.

<인연>을 다루는 몇 독서에세이에서는 이 소설을 사랑이라는 카테고리에 묶은 다음 사랑의 다양한 표정 중 하나로 다루고 있다. 쾌락과 탐닉이라는 원초적인 사랑의 부각. 두 사람의 사랑은 미성년인 빈곤층의 백인 소녀와 나이가 많은 부유층의 아시아인 남성이라는 신분과 인종을 초월한 사랑으로 읽을 수 있다.

신분과 인종. 이것은 차별을 야기하는 금기들이었다. 금기를 벗어난다는 것은 억압과 굴레로부터의 일탈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소녀가 사회로부터.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한 채, 아슬아슬한 상황에 놓이게 된 이유가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여인으로서의 한정된 역할에 만족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27. 욕망을 외부에서 끌어오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욕망은 그것을 충동질한 여자의 몸 안에 있다. 그게 아니라면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첫눈에 벌써 욕망이 솟아나든지 아니면 결코 욕망이란 존재하지 않든지 둥 중에 하나이다.

<연인>에서 일탈의 형태는 욕망으로 변하고, 탐닉과 관능의 사랑으로 반항적으로 표출된다. 하지만 나는 이것에서 탐닉과 관능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불러일으킨 억압에 대한 반항, 그리고 저항에 대한 공감대가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에 대한 반항인가? 백인 소녀의 경우에는 어머니의 히스테리컬한 측면. 그리고 큰오빠의 무능함에 대한 저항. 즉, 가난한 환경, 학대받는 생활. 큰 오빠에 대한 편애와 큰 오빠의 방탕한 삶. 그녀를 형성하게 한 존재에 대한 부정. 이것들에 대한 반항으로 부유한 중국인 남자를 받아들이게 된 것일 테다. 그리고 중국인 남자의 경우에는 가문의 억압. 정해진 미래라는 억압에 저항해서 아름답고 젊은 백인 소녀에 반하게 되었을 테다.  


77. 내게 전쟁은 큰오빠와도 같다. 전쟁은 큰오빠처럼 도처에 번지고, 침입하고, 훔치고, 또 감금한다. 또한 모든 것에 섞여들어 머릿속에도 몸속에도 생각 속에도 존재하며, 깨어 있을 때나 자고 있을 때나 시종일관 제어할 수 없는 취기 같은 욕망에 사로잡혀 사랑스러운 영혼 같은 어린아이의 몸을, 나약한 자들이나 패배한 민족들의 육체를 점령한다. 악은 바로 거기에, 우리 피부에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119. 그녀가 이따금씩 자기 인생에 대해 품는 혐오감도 그를 두렵게 했다. 이런 혐오감에 휩싸이면 그녀는 갑자기 어머니를 떠올리곤 소리를 지른다. 이제는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고, 어머니가 죽기 전에는 행복해질 수가 없으며 이런 불행을 초래한 자들을 죽여 버릴 수도 없다는 생각에 분노의 눈물을 흘린다. 그녀에게 얼굴을 갖다 대고, 그는 그녀의 눈물을 삼킨다. 그녀의 눈물과 그녀의 분노는 그의 욕망을 자극한다. 미친 듯이, 그는 자기 몸 아래 그녀를 눕히고 짓누른다.


소녀의 반항에 비해서 남성의 반항은 진지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소녀는 탈출을 원했지만, 남성은 정복을 원했기 때문이다.


4.


<연인>은 형식으로도 그렇고, 내용으로도 제약을 두지 않는 소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은 쾌락과 절망의 지점을 불규칙하게 왕래한다. 그것을 느끼는 의식으로 하여금 마음 놓고 뛰어놀 수 있도록 가만히 놓아둔다. 주인공이 자유와 쾌락에 갈망하는 욕망 역시 어떤 제약을 벗어던지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이것은 억압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마르그리트 뒤라스 작가는 억압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이 질문이 아마도 문장으로 이루어진 문학작품 <연인>을 이야기하는 가장 알맞은 질문이 아닐까 싶다.  


<연인>의 문장들은 한마디로 염세적이다. 대부분 염세적인데 결정적인 순간 나르시즘이 등장한다. 이런 방식으로 그녀는 무너져가는 삶을 억지로 지탱한다. 아슬아슬하다. 이 가운데서 좀처럼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들에 대한 정의들이 뒤라스의 의식을 빌어 튀어나온다. 좋게 말하면 아주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5.


이 문장은 위(3)에서 이야기했던 억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사회에서부터 시작된 것(금기)이 작은 공동체로, 가족으로, 이어져서 마침내 어머니와 큰오빠에게 전염되는. 그런 형태로 그려진다.


69. 바라본다는 것은 한순간 그 대상을 행한, 그 대상에 대한 호기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불행에 빠지는 행위이다. 누군가를 바라본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그 시선에 합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여전히 그는 불명예스러운 사람일 수도 있다. 대화라는 것은 허영이다. 이 집에 가장 잘 어울리는 어휘는 수치와 자만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족이라는 집단이건 혹은 다른 어떤 종류의 집단이건. 공동체라는 형태를 한 모든 것은 우리에겐 증오의 대상이자 지저분한 그 무엇이다. 우리 가족은 삶을 살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근원적인 수치심 속에 빠져 있다. 우리 형제들의 이야기 가장 깊숙한 곳에는 우리 세 사람이 사회가 목 졸라 죽인 우리 어머니, 그 선량한 여인의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우리는 어머니를 절망에 빠뜨려 버린 이 사회의 한편에 비켜서 있다. 그토록 다정하고, 그토록 남을 쉽게 믿는 우리 어머니에게 사람들이 저지른 짓들 때문에, 우리는 삶을 증오하고, 우리 자신을 증오하고 있다.   


6.


이 문장에서 드러나는 쾌락은 절정의 순간에서 얻은 것이다. 솔직한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118. 그는 내가 바라던 것을 넘어, 내 육체의 숙명에 적합한 곳까지 나를 대려갔다. 그렇게 나는 그의 아기가 되었다. (...) 119. 그 사냥꾼의 육체와 그의 성기와 형언할 수 없는 부드러움과 숲 속이나 강가에서의 용맹함에 대하여 그리고 강 하구의 검은 표범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 모든 것이 그의 욕망을 자극하여 , 내 몸을 포옹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의 아기가 되었다. 그와 매일 저녁 사랑을 나눈 사람은 그의 아기였다.


7.


이 문장은 불멸성에 관한 그녀의 감각이다. 이 감각이 태어난 것은 작은오빠의 죽음과 관계가 있다. 나는 김탁환 작가의 생각에 동의한다. 소녀가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은 중국인 남자가 아니라 그녀의 작은오빠였음을. 작은오빠의 죽음에 그녀는 불멸이라는 것 역시 유한하다는 것을 깨우친다.


123. 내 작은오빠는 불멸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그를 보지 못했다. 그의 불멸성은 그가 살고 있었을 때, 작은오빠의 육신에 가려져 있었다. 우리는 불멸성이 바로 육신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내 작은오빠의 육신은 죽었다. 그의 불멸성도 그와 함께 죽었다.


124. 불멸성은 유한한 것이고, 불멸성도 죽을 수 있으며, 그리고 그런 사건이 일어났고,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불멸성은, 결코, 불멸성으로서 눈에 띄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절대적인 이원성이다. 그것은 세부적인 것에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근원 속에서만 존재한다.


125. 이런 불멸성이 살아 있을 때에만, 삶은 불멸의 것이 된다. 불멸성이 삶 속에 있을 때, 그것은 길게 사느냐 짧게 사느냐 하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또 다른 그 무엇인 것이다. 불멸성은 시작도 끝도 없다고 말하는 것도, 불멸성은 정신의 삶과 함께 시작되어 그것과 함께 끝난다고 말하는 것도 똑같이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불멸성은 정신에도 관여하고 또 바람을 쫓아가는 것에도 관여하기 때문이다. 사막의 죽은 모래들, 어린아이들의 시체를 보라. 불멸성은 거기로 지나가지 않는다. 그것은 거기에 머물렀다가 우회한다.


8. 


5,6,7에서 인용한 문장들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지닌 독특한 감각을 보여주는 문장들이며, 이 문장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소설을 이루는 요소들 가운데서도 오직 감각을 통해 호소하는 그런 작가다. 이 호소는 결국, 이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더 슬프게 다가온다. 삶에 대한 발버둥. 쾌락과 공허함. 불멸의 죽음. 불멸이라고 믿었던 존재가 사라졌음에도 세상은 돌아가는. 나이들어버린 한 여린 존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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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 미쓰다 신조 작가 시리즈 1
미쓰다 신조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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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은 작가 본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특이한 소설이다. 일단, 가장 먼저 이야기를 꺼낼 부분은 소설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 중간마다 등장하는 미쓰다 신조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문학관에 대해서다.


233. 란포라는 작가는 분명 탐미파였어요. 그런데 탐정소설이라는 새롭고 매력적인 문학이 눈에 들어오고 말았죠. 게다가 탐정소설은 매사에 싫증을 잘 내고 인생을 지루하게 느끼던 그에게 최고의 자극제였어요.


미쓰다 신조가 소개하고 그리고 평가하는 많은 작가와 그들이 쓴 미스터리 작품. 이 부분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따로 언급할 말은 없다. 그러나 <기관>을 통해 에도가와 란포가 일본 추리 문학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작가야 말로 자신이 소원하는 바를 이루어줄수 있을 것 같다고 평가한 렌조 미키히코라는 작가의 언급은 렌조 미키히코라는 작가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검색해본 결과 렌조 미키히코라는 작가는 안타깝게도 이 소설이 출간된 지 12년이 지난 2013년에 생을 거두었다.


2.


1의 논의 중에서 특히, 료코와 대화를 나누는 부분을 요약해보면 미쓰다 신조 작가는 본격 미스터리의 독자적인 장치들 속에 사건에 휘말리는 등장 인물의 심리 묘사 등을 얹어 그 자체로 문학적인 가치가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집념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집념의 시작이 <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이라고 판단해도 될 듯 하다. 왜냐하면, 이 작품이 미쓰다 신조라는 이름을 걸고 출간하는 최초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루트로서는 말이다.  


결국, 미쓰다 신조라는 작가가 추구하는 소설은 본격 미스터리라는 장르의 한계를 뛰어넘어 문학성으로 따져도 뛰어난 소설일 것이다.곰곰이 생각해보면 <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은 그런 점이 일부 녹아있다. 문학성의 기준을 탁월한 심리묘사로 판단하는 미쓰다 신조 작가는 본격 미스터리 장르에 호러를 입히는 방식으로 문학성이 뛰어난 미스터리 소설이라는 과제를 수행한다.  


실제로 읽어보면 호러라는 요소는 사람들의 심리를 뒤흔드는데 굉장히 탁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숫자 7, 그리고 서양식 건물과 관계되어서 일어나는 의문의 일가족 살인사건. 그리고 그것에 휘말리는 현실 속의 주인공과 현실 바깥의 주인공.

따지고 들면 논리는 부족하고, 궁극적인 살해의 이유에 대해서 생각할 여지도 부족하지만 어쨌든 이 소설은 눈앞에 닥칠 위험을 인지하고 책장을 넘겨서 그것을 확인해 나간다는 점에서 섬뜩함을 가져온다.


초반에는 이 호러장치가 주인공인 작가와 주인공이 쓰는 작품 <모두 꺼리는 집>속의 주인공이라는 존재로 나뉘어. 개별적인 바탕에서 그려진다. 그런데 어느순간부터 작가와 주인공이라는 공식이 파괴된다. 작가와 작가가 쓴 주인공이 동시에 똑같은 공포를 느끼게 되고, 이 공포가 연속으로 이어진다. 두 명의 주인공이 공포로 인하여 패닉에 접어들고, 그런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진실에 대한 실마리는미궁으로 빠진다.


3.


미궁에 빠진 상태에서 소설이 지목하는 범인. 이 범인의 정의와 이유가 엉망진창이 된다. 이 진창 속에서 역설적으로 이 소설과 이 사건과 이 범인에 관련하여 발생한 어떠한 사실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주장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확실한 무언가를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불투명한 혼돈 속에서 느끼는 주인공의 절박함과 혼돈 가운데 뻗어오는 존재에 대한 공포심은 더욱 독자들을 불안에 떨게 한다. 직접 읽으면 알겠지만 소설 전체를 드리우는 불확실성을 빼놓으면 딱히 설명할 거리가 없는 소설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살인 사건을 저지른 범인을 찾는 것에서 재미를 찾는 소설이 아니라, <미궁초자>라는 동인지에 미스터리 소설을 기고하는 편집자 겸 작가인 주인공 미쓰다 신조과 주인공이 쓴 소설 안에서 고통을 겪는 또 다른 주인공 코토히코가 느끼는 공포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는데서 더 큰 재미를 얻을 수 있는 소설이다.


한가지 더 강조하자면, 실제의 현실, 소설 안의 현실과 소설 안의 가상세계. 이 세 가지의 세계를 한데 합친 다음에 한꺼번에 붕괴시켜버리는 작가의 독특한 장치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주인공인 미쓰다 신조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야기가 마음대로 흘러간다는 본격 소설 속의 장치를 읽으면서 드라마 W가 잠깐 생각나기도 했다.


충분히 깊이 읽지 못했다. 아마 다음 번에 읽게 된다면 일본 추리소설에 대한 지식을 쌓은 다음 도전해보고 싶은 작품이다.


171. 지금 내 몸 속에는 작가로서의 나, 독자로서의 나, 그리고 뭔가를 두려워하는 나, 이렇게 세 가람의 내가 있다. 게다가 세 번째 내가 느끼는 공포보다 첫 번째 내가 쓰고 싶다는 욕구. 두 번째 내가 읽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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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용도 (양장)
니콜라 부비에 지음, 티에리 베르네 그림, 이재형 옮김 / 소동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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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행기의 고전


여행기의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책이다. 이 책은 "전 세계의 책벌레들이 여행서가에서 반드시 집어드는 전설적인 여행서(문학동네 카페 인용)" 중에 하나라고 한다. 스위스인 문장가 니콜라 부비에와 화가 티에리 베르네는 1953년 6월 스위스 제네바를 떠나서 1954년 12월 아프가니스탄의 종착지인 카이바르 고개까지 이동한다. 이 책은 그렇게 지나온 여정을 기록한 책이다.


책을 읽다보면 여행이라는 행위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초반부. 여행이라는 것과 자신을 따로 떼어서 생각했던 작가가 어느새 정착하는 곳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읽을 수 있고, 그런 상황에서 각 지방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전반적인 문화와 역사에 관한 이야기에 더하여 거칠고 경사진 길과 낙후된 공간을 이동하면서 극한의 고통을 견디는 초인적인 모습을 읽을 수도 있으며, 그러한 고통을 참지 못한 나머지 파리에게 화풀이를 하는 모습도 읽을 수 있다.


일단 여행기로서 니콜라 부비에가 말하는 여행에 대한 고찰 몇 가지를 음미해보자.


15. 여행은 동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여행은 그냥 그 자체로서 충분하다는 것을 곧 증명해 주리라. 여행자는 자기가 여행을 하고 있다고 믿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여행이 여행자를 만들고 여행자를 해체한다.


85. 넓은 시골땅에 분산되었던 그날의 기분이 포도주 몇 잔과 연필로 그리는 종이 식탁보, 입 밖에 내는 단어 속에 응축된다. 감정의 분비에 수반하여 식욕이 느껴지는 걸 보면, 여행생활에서 몸을 위한 양식과 정신을 위한 양식이 어느 정도까지 밀접하게 연관되는지 알 수 있다.


86. 여행은 엔진 소리와 스쳐가는 풍경에 실려와서 당신의 몸을 관통하고 당신의 머리를 환하게 밝혀준다. 아무 이유 없이 받아들인 생각은 당신을 떠난다. 반대로 다른 생각이 새로 정리되어 강 밑바닥에 조약돌처럼 당신 가슴속에 자리를 잡는다. 개입할 필요는 전혀 없다. 도로가 당신을 위해 일을 한다. 도로가 제 할일을 다 하여 이번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인도 끝까지,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죽음까지 그렇게 뻗어나갔으면 좋겠다.  


119. 여행은 몸을 털고 일어나 기운을 차릴 기회를 제공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자유를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일종의 축소를 경험하게 해줄 뿐이다. 일상적인 주변 환경에서 벗어나 자신의 습성을 박탈당한 여행자는 마치 포장지가 벗겨지듯 자기 자신이 보잘 것 없는 크기로 줄어든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좀 더 왕성한 호기심과 날카로운 직관을 발휘하게 되고, 첫인상을 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다.


270. 우리가 여행을 하는 것은 무슨 일인가 일어나서 자신을 변화시키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집에 있는 게 차라리 낫다.  


2. 무목적성이 일궈낸 쾌거


니콜라 부비에와 티에리 베르네가 여행을 떠난 동기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이들이 여행할 곳에 대해서 공부한 흔적들은 자주 소개된다.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여행의 목적은 없지만 여행을 떠날 곳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 사실이다. 얼핏 모순처럼 들린다. 이러한 점으로 추측해 봤을 때, 두 사람은 예술가로서. 그리고 학자로서 지금보다 더 나은 능력을 갖춘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이론적으로 아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직접 눈으로, 마음으로 관찰하고, 새기고, 그러한 고양을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은 일단, 유럽이라는 공간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여행기에서 유독 이스탄불을 그렇게 빨리 떠난 것도 유럽과 닮은 실용적인 문화였기 때문에 그랬다. 그들은 그들을 존재케 한 문화와 다른 문화를 원했다. 타브리즈, 그리고 카불. 이질적인 경험은 그들을 성장시키는 용도로서 활용된다. 나에게 없는 것을 채우기 위해서... 완전성이란 결국 외부에 존재한다라는 생각으로서 그들은 길을 떠난 것이다. 아래 문장은 타 문화에 대하여 여태껏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잘 표현해 놓은 문장이다.


176. 그들에게는 기술이 부족하다. 반면에 우리는 지나치게 발달된 기술이 우리를 끌고 들어갔던 막다른 길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오락문화에 물들 대로 물든 우리의 감수성을 되살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되살리기 위해 그들의 방식을 신뢰하고, 그들은 살기 위해서 우리들의 방식을 신뢰한다.  


434. 돌은 더 이상 우리의 시대에 속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우리와는 다른 주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돌을 다듬어서 돌에게 우리의 언어로 말하도록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이다. 그러고 나면 돌은 결별과 포기, 무관심, 그리고 망각을 의미하는 자신만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315. 이란에서는 불가능이란 게 없다. 영혼들은 최고에 관해서든, 최악에 관해서든 상당한 여유를 가지고 있으며 당신은 완벽함에 대한 이 지속적이고 광신적인 열망을 참작해야만 한다. 가장 태평스런 사람조차도 이 열망을 이기지 못해 가장 극단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341. 타브리즈의 삶을 넘어서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이곳에는 부조리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삶이 도처에서 마치 어둠 속의 레비아탄 처럼 모든 것을 밀어낼 뿐이다.


3. 깨달음


이 책에서 가장 결정적이며 인상적인 깨달음은 이것이 아닌가 싶다.


186. 결국 존재의 기반을 이루는 것은 가족도 아니고, 나에 대한 다른 사람의 말이나 생각도 아니다. 사랑보다 더 평온한 초월적 힘에 의해 고양될 때의 순간이 내 삶의 뼈대를 이루는 것이다. 삶은 그 같은 순간을 인색하게 나누어준다. 우리의 허약한 마음은 더 이상 견뎌낼 수 없다.


249. 출발은 마치 새로운 탄생과도 같고, 나의 세계는 아직도 너무나도 새로워서 체계적으로 성찰할 수 없다. 나는 자유도, 유연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오직 욕망만을, 그리고 순전한 공포심만을 갖고 있을 따름이다.


니콜라 부비에는 이러한 삶의 인색함에 반기를 든다. 그렇게 그는 고양의 순간을 직접 찾아나선다. 기다리기만 하면 쉽게 얻을 수 없는 자기를 만들어낼 특별한 순간을 얻기 위하여 조급하게 움직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세상의 용도>에서 고백하는 이러한 조급함은 에고이즘에 의한 본능적인 행위였다. 에고이즘은 목적을 두지 않은 여행을 만들었으며, 결과적으로 니콜라 부비에라는 존재를 끌어올렸다.


니콜라 부비에와 티에리 베르네가 보고 기록한 내용보다는 이런 관념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 훨씬 중요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니콜라 부비에라는 인물의 작품에서 이러한 경험들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지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이 현재로서는 없다는 점이다. 괴테나 헤르만 헤세의 여행기는 그들의 문학과 관련해서 생각할거리를 않이 제공한다. 그런 면에서 <세상의 용도> 한 권만 읽는 것은 미완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깨달음을 얻기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4. 기록을 위한 중요하지 않은 기록


462. 태양에 관해 자주 생각했지만,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정신을 되찾고 보니 티에리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떠나야 해... 여기서 떠나야 한다구!"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데. 여기 실제로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사람이 나온다. 그 사람은 니콜라 부비에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 부분이 그렇게 중요하진 않다. 그저 이 부분을 보면서 카뮈 생각이 났다. 니콜라 부비에가 뫼르소를 생각하면서 이 부분을 썼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5. 기록을 위한 중요하지 않은 기록


563. 인간은 지나치게 까다롭다. 그는 선택받은 죽음을, 뭔가 완성되고 개인적인 것을 꿈꾼다. 그는 그 꿈을 이루려고 노력하고, 때로는 그 꿈을 이룬다. 아시아의 파리들은 이런 구분을 하지 않는다. 이 혐오스런 생물체에게는 죽거나 살거나 마찬가지이며, 시장에서 잠을 자는 아이들을 보면 이놈들이 형체 없는 것의 완전한 하인이 되어 모든 걸 제멋대로 혼돈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원래 유럽인들은 파리가 똥에서 태어나고, 재에서 부활하고, 죄를 짓는 자의 입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으며, 파리를 악령 또는 악령을 옮기는 동물이라고 해서 저주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저주가 더 보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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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의 눈 - 제6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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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의 첫 문장이다.


13. 이 세상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기억과 양심, 진실 그리고 그것을 가진 사람도. (...) 사람들은 늘 사라진다.


이 문장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고요한 밤의 눈>에서는 D의 언니가 사라졌고, X의 기억이 사라졌다. 그리고 Y의 어머니의 삶이 사라졌다. 그 외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양심과 진실을 가진 누군가가 우리의 시야에서 하나둘 사라졌다.


소설의 초반부는 15년이라는 시간을 잃은 X가 느끼는 절망감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문장들이 소설을 이끌어나간다. 그래서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기억을 잃은 남자가 자신의 감정을 묘사하는 이런 문장. 정체성을 찾으려는 욕망을 표출하는 문장은 매력적이었다.


X : 26. 그들은 나에게 질문함으로써 자신들의 삶을 재고하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통해 자신의 미래를 예측했던 것처럼 나는 그들을 통해 나의 잃어버린 과거를 분석했다.


2.


행방불명 된 언니를 되찾고, 기억상실에 걸린 남자가 기억을 회복하면서 무언가를 깨닫는 것이 일반적인 소설들의 결말일테고, 독자로서도 어느 정도 불확실성에서 확실성으로의 전환. 문제해결의 카타르시스를 기대하면서 소설을 읽게 마련일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결말은 예상과 많이 달랐다. 그래서 흥미로웠다. 

행방불명 된 언니는 소설의 끝에 이르러서도 D의 결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남자가 잃어버린 15년의 기억도 회복되지 않았다. 첫문장의 말처럼 그들은 사라진 것이다. 양심과 진실을 덮으려는 누군가의 음모에 의해서 말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결말에서 철학적인 성찰이 돋보인다. 뭐랄까. 시간은 되돌릴 수없고, 흘린 물은 주워담을 수 없듯이.이 세계에서 원상태 그대로 회복할 수 있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현재 상태를 딛고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제약이면 제약일 수도 있고, 고난이면 고난일 수도 있겠으나. 이것이 현실이다. 그렇게 해석되었다.


3.


이 소설의 등장인물은 사회적인 지위나 권력이라는 기준으로 층위를 나눌 때, 상위 10%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 X,Y,B는 권력자를 위해서 일하는 스파이. 즉, 정보요원으로 활동하는 인물이다. X,Y,B의 관점으로 서술하는 챕터 속의 주변인물 역시 한때 요원으로 활약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D의 언니는 정신과 의사이며, D도 언니에 준하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Z는 불굴의 소설가다.


B : 77. 이제 사람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보다 처음부터 유인 편을 존경을 넘어 숭배한다. (...) 하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태어날 때도 무이고 앞으로도 무일 사람들이 타고난 유들을 찬양하고 지지하는 것이다.


Z : 102. 나는 비겁해지고 싶지 않다. 어쩌면 이것도 변명이고 열등감이고 패배의식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어차피 이제 이 일은 정신 제대로 박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자부심과 자존심만으로 버티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좁고 빈약하지만 진짜 끝날 때까지는 끝이 아니다.


박주영 작가가 이러한 인물들을 소설에 배치한 이유는 이제는 민중의 힘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듯하다. 작가는 민중의 힘은 1%를 위해 달려가는 10%의 계층의 감시와 억압과 회유에 의해 무뎌지고, 정치에 환멸을 느끼며 무관심해진다. 그래서 민중의 힘이 발휘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243. 가장 큰 적은 우리가 아니라 무관심이야. 무관심 때문에 소수의 절대적 지지만으로도 다수를 대변해야 할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에 다수를 대변하는 척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게 된 거야.


243의 문장은 B와 마주한 상부의 목소리다. 이것은 시스템을 조종하는 존재에게서 이탈을 고려하는 B를 회유하기 위한 말이다. 그런데 사실은 민중의 힘이 무뎌지는 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사람들을 무관심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사람들을 정치에 무관심하게 만드는 행위들은 의도적으로 행해진다.

다행스럽게도 B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보지 않으려고 해도 볼 수 있었다. 유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10%에 위치한 사람들이 <고요한 밤의 눈>에서 1%에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B의 독백처럼 권력자의 의도대로 사회를 통제하는 시스템의 불합리성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소설은 현실 세계를 살고 있는 이들에게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당신의 힘이 필요하다는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는 것 같다


X : 285. 어떤 이는 절망을 봤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이는 자신의 죽음을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본 미래는 반드시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 미래를 바꿀 수는 없을까요? 누군가는 그 미래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누군가는 그 미래를 바꾸기 위해 애쓰기 시작합니다. 그걸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저는 현실을 분석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입니다. 만약 그런 내가 본 미래가 아주 절망적인 것이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그 사실을 확정된 미래로 받아들이고 포기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제 마음이 대답하더군요. 너무너무 절망적이라면 오히려 죽을 힘을 다해 바꾸고 싶어질 것 같지 않은가. 라고


X의 고백에서 X가 왜 기억을 잃게 되었는지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유능함 때문에 절망적인 미래를 봤고, 그것을 바꾸고 싶었기 때문에 조직에 반하는 행위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의 천성은 변하지 않기 때문인지. 기억을 잃은 X가 똑같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를 가정했을 때도 과거와 같은 선택을 내린다는 점이었다.


아마 이쯤 읽었을 때, 여기에서 첫문장의 사라짐은 타의에 의한 사라짐. 그리고 자의에 의한 사라짐이 공존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타의에 의해 사라진 사람은 정체성이 완전히 돌아오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 양심과 진실과 사랑을 회복한다. 자의에 의해 사라진 사람들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무언가를 계획한다.


그것은 어떤 독서클럽이라는 활동으로 구체화되는데 그들은 세상에 '패자의 서'라는 것을 남기기로 한다. 변화를 위해서는 점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점이 모여서 선이 되고 면이 되어야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패자의 서라는 것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도화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을 통해 흩어져있는 사람들을 한데 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310. 기꺼이 패자가 되어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 패자의 서는 정해져 있는 책이 아니다. 이미 쓰여져 있는 책이 아니다. 어떤 책이 패자의 서가 될지 모른다. 패자의 서는 앞으로 쓰여질 책, 우리 모두가 쓰게 될 책이다.


4.


'패자의 서'라는 것은 패자들의 이야기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것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떠오른 것들이다. 카프카나 조지 오웰의 소설처럼 부조리를 폭로하는 소설. 앞서 읽은 한강 작가의 소설처럼 권력을 쥔 존재의 오만함과 잔인함을 폭로하는 소설들은 그 당시의 부조리에 대해 말하는 '패자의 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에는 한국영화도 이런 것들을 잘 다루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것들.


Z : 295. 어떤 이들은 밤을 낮처럼 즐겼고, 어떤 이들은 밤을 낮처럼 일했다. 누군가는 일 없이 휴식하고 누군가는 휴식 없이 일했다. 휴식 없이 일하는 자들로 인해 일 없이 휴식하는 자들의 자산은 늘어났다. 그들은 그 가치를 정당하게 배분하지 않았다. 독점은 습관이 되었고 당연한 이치가 되어갔다. 착취는 습성이 되었고 당연한 방식이 되어갔다.   


오늘을 말하는 '패자의 서'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작가는 이것이 앞으로 쓰여질 책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고요한 밤의 눈> 이 책이야말로 패자의 서의 일부가 될 자격이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5.


265. 이런 시대에 작가의 역할은?


제대로 된 관찰자라도 되어야겠다. 생각해.


인생과 소설은? 소설과 세계는?


인생은 언제나 한 가지 이유가 하나의 결과를 낳는 식으로 굴러가지 않아. 어떤 소설은 조용히 마음을 건드리고 오래도록 생각을 하게 해. 처음에는 등장인물의 삶을, 다음에는 나의 삶을, 결국에는 이 세계를


275. 책은 위험하지. 책을 대신할 유희는 많지만 책보다 생각을 깊이 전달하는 것은 없지. 책은 만드는 데 돈이 덜 들고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 사이를 떠돌면서 불어나니까. 한때 작가는 시대의 양심으로 일종의 혁명가였어. 그리고 혁명가는 거의 모두 작가야. 그들은 말을 하고 행동을 하고 이야기를 남기지. 지배자들은 그래서 늘 책을 없애려고 해. 언제 죽을지 모를 세상에 책은 육체가 사라져도 살아남는, 영혼 같은 거거든.


279. 자신의 밥벌이조차 되지 않는 것으로 소설을 전락시키는 것. 아무도 읽지 않고 그래서 다시 쓸 수 없고, 쓰지 않으니 읽을 수 없고, 그런 악순환을 누군가가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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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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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행


29. 세상은 한 통의 거대한 세탁기이며 사람들은 그 속에서 젖은 면직물 더미처럼 엉켰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닳아간다.


구병모 작가의 여섯 번째 장편 <한 스푼의 시간>에는 사람 같지만, 엄연히 사람과는 다른 존재가 등장한다. 그것은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명정의 아들이 변두리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명정에게 유품으로 남긴 것이다. 다름아닌 사람 모양을 한 로봇이었다. 명정은 이 로보트에 은결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노년의 남성와 인간 형상의 로봇 간의 동행을 기록한 소설. <한 스푼의 시간>은 세탁소라는 장소로부터 시작된다.


2. 배움과 성장. 사람다움


103. 사람의 말은 가끔 맥락 없이 튀기 때문에 은결은 주인의 모든 말에 반응해야 할 필요는 없음을 안다. 그러나 맥락이 없기도 하지만 때로는 손닿는 모든 곳이 맥락이 되기도 한다.


108. 무슨 수로 인간은 그 다양한 상황에서 가장 합당한 말 한마디를 골라 건넬까. 눈앞의 사람이 아픈지 슬픈지 분하거나 억울한지 또 달리 무슨 문제가 있는지, 어떻게 마이크로 단위의 시간동안 확정하고 가장 그런듯한 조치를 취할까. 어쩌면 사람이 그 때 그 순간에 가장 적절하게 반응한다는 것도 확률의 문제일 뿐 실은 그들이 내놓는 모든 결론과 행위 또한 매 순간 몇 제타바이트에 이르는 오해를 동반하는 게 아닐까.


얇은 분량임에도, <한 스푼의 시간>에서 읽을 수 있는 깨달음은 다양하다. 그 중에서 은결이 주변 이웃들의 말과 표정과 행동을 관찰하고, 그것에 대하여 학습하는 과정에 녹아있는 여리고 순수한 서사와 은결이 사람의 감정들을 이해하며 점점 더 사람과 닮아가는 모습. 그리고 죽을 때까지 사랑하는 존재의 곁에 남기를 소망하며 저지르는 은결의 결심에 담겨 있는 성장소설로서의 면모는 소설의 중심축을 형성한다.


인간을 닮아가는 은결의 내적성장을 그리는 이야기 이외에. <한 스푼의 시간>에는 잠시 시점을 세탁소의 이웃들인 시호나 준교나 세주의 삶으로 옮겨서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구병모 작가는 이들의 고단한 하루를 위로한다. 위로에 덧붙여 이러한 팍팍한 인생살이와 살아가는 것에 대한 어쩔 수 없음. 그리고 이러한 인생의 한없이 짧음에 같은 인간으로서 공감한다.  


157. 아무리 약품을 집중 분사해도 직물과 분리되지 않는 오염이 생기게 마련이듯이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제거도 수정도 불가능한 한 점의 얼룩을 살아내야만 한다. 부주의하게 놓아둔 바람과 팽창과 수축을 거쳐 변형된 사죽처럼. 복원 불가능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


184. 우주의 나이가 137억 년을 조금 넘나 그렇다지. 그 우주 안의 콩알만 한 지구도 태어난 지 45억 년이나 되고, 그에 비하면 사람의 인생은 고작 푸른 세제 한 스푼이 물에 녹는 시간에 불과하단다. 그러니 자신이 이 세상에 어떻게 스며들 것인지를 신중하게 결정하고 나면 이미 녹아 없어져 있지.


3. 삶의 아포리즘


구명모 작가의 문장을 일부러 떼어내 읽으면 아포리즘처럼 진한 울림이 있다. 많은 사유를 거친 후 탄생한 날카로운 문장들은 현실적인 문제에 깊이 천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아포리즘에 담긴 진지함에 대해서 함께 고민해보는 것도 <한 스푼의 시간>을 읽는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그런 면에서 <한 스푼의 소설>은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는 소설은 아니었다.


50. 가족이란 신선한 공기가 들락거리는 건강한 폐 같은 거라고 믿었던 순진한 시절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이 엇박자 내지는 폐기종에 불과한 것을


51. 관계란 물에 적시면 어느 틈에 조직이 풀려 끊어지고 마는 낱장의 휴지에 불과하다.


112. 그 무너짐은 정말 저 무너짐과 같은가. 무너진다는 건 결국 그 현상을 대하는 사람의 슬픔이나 분노에 좌우되는 게 아닌가.


141. 늘어나는 경험과 지식의 질량은 그에게 필요치않은 무거운 털외투처럼 나날이 몸을 감싼다. 그러나 그 외투를 벗고 가벼워져야 한다는 판단만은 들지 않는다.    


173. 사람이란 때로는 상대방을 행해. 자신조차 그 독법을 알지 못하는 행간을 읽어내달라는 부당한 호소를 거리낌 없이 하는 존재 아닌가.


208. 이해 불가능한 방식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구전을 통해 허황되게 부풀려지는 것들, 존재의 진실성 여부가 그것을 상상하는 사람들의 수긍과 인정에 달려 있는 것들 잊어버린 채 방기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등 뒤에서 노크해 오거나 부지불식간에 덜미를 잡아채는 것들. 실체를 확인하고 분석하기 위해 과감히 렌즈를 들이대면 사라지는 것들. 그래서 때로 지나치게 의미가 부여되곤 하는 것들.


249. 그는 인간의 시간이 흰 도화지에 찍은 검은 점 한 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그 점이 퇴락하여 지워지기 전에 사람은 살아 있는 나날들 동안 힘껏 분노하거나 사랑하는 한편 절망 속에서도 열망을 잊이 않으며 끝없이 무언가를 갈구하고 기원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것이 바로, 어느 날 물속에 떨어져 녹아내리던 푸른 세제 한 스푼이 그에게 가르쳐준 모든 것이다.


4. 약점


위에 쓴 글과 옮겨적은 문장들은 <한 스푼의 시간>의 강점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 깊이 빠져들지 못하게 하는 약점도 분명히 있다. 일단, 소설 자체가 이야기 중심이 아니라 의미 중심이라는 점을 이해하면 몇 가지 아쉬운 점은 그냥 넘어갈 수 있다. 그러고보면 제일 처음 읽었던 그녀의 소설 <위저드 베이커리>도 이야기가 남는 것이 아니라 강렬한 한 컷. 어떤 가게의 시나몬 쿠키의 인상이 남고, 이 소설도 마찬가지로 세제 한 스푼이 물에 녹아 풀어지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또한, 장문을 즐겨 용하는 구명보 작가의 스타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들을 이해하더라도 한 번 읽어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들은 굉장히 거슬렸다. 실제로 읽는 속도를 더디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아래의 두 문장이 그렇다. 

164페이지의 문장 같은 경우는 독해하는 데 너무 어려웠다. 시호의 아르바이트에 얽힌 난처한 이야기를 하면서 아빠가 옛날에 겪었던 부조리한 기억을 연상하는 부분인데, 처음에 읽을 때는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않았다.


164. 그때 문득 옛날에 우리 아빠가 결국 치료비 보조는 언감생심에 사람의 살이 익어가는 현장을 지켜본 손님들한테 오히려 돈 백만 원 물어줬던 일이 떠올랐어.  


201. 사지 멀쩡하여 일할 수 있는 누구나 마음이 조금만 기울어져도 그대로 넘어져 부서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그저 의지박약의 일종으로 치부했으며, 자신이 홀몸으로 딸을 억척같이 키워낸 과업을 수시로 내세우는 한편, 과거의 자신과 달리 지금의 딸은 직무태만에 모성 부족이며 등 따시고 배가 불러서 우울증 따위가 드나드는 것이니, 우울증이란 그저 병원과 의사가 돈벌이를 위해 만들어낸 허상의 질병이름으로서 거기 놀아나는 딸이 한심하다는 말로 더 큰 갈등의 요인을 만들곤 했다.


201페이지의 장문 같은 경우에는 실제로는 '사지 멀쩡하여 / 일할 수 있는 누구나 / 마음이 조금만 기울어져도' 이렇게 끊어 읽어야 할 것 같은 문장인데 이걸 처음 읽을 때는 '사지 멀쩡하여 / 일할 수 있는 / 누구나 마음이 조금만 기울어져도' 같은 방식처럼. 제일 앞 부분을 주어로 판단해서 읽게 된다. 그런데 이 문장을 그렇게 읽었다가는 처음부터 의미가 꼬여버리니 아예 해석이 되지 않는 답답함이 밀려온다. 다듬을 때. 조금만 더 신경써줬으면 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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