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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4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인환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평점 :
1.
김탁환 작가의 <읽어가겠다>를 읽는 중이다. <읽어가겠다>는 오 년간 라디오 방송에서 다루었던 책 가운데서 '열망과 덧없음'에 관한 스물세 편의 소설을 뽑아낸 독서에세이다. 이 가운데 처음 다섯 편의 작품은 나름 친숙한 작가의 작품이라 견해를 경청하면서 읽었다. 그런데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 이 작품 때문에 읽기가 막혀버렸다. 이 소설은 스물세 편의 소설 가운데 여섯 번째 소설이다.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이미지도 형성되지 않았다. 이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예전에 사두었던 소설의 첫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2.
<연인>은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다. 이 소설은 노년의 주인공이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서사를 이어간다. 작가는 <연인>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자신의 연인에 대한 추억을 털어놓는다. 그녀가 회상하는 기억은 연대기적 서술이 아니라 의식의 흐름에 안개가 짙게 깔린 것처럼 뒤죽박죽 섞여서. 엉켜서 나열된다. 안개가 자욱할 때는 그녀를 고통과 억압으로 가두었던 가족들과의 기억이 서술되고, 안개가 걷히면 그제서야 연인의 존재는 그녀의 펜 끝에서 나타났다. 이 과정이 반복된다. 예고도 없이.
이러한 글쓰기 스타일을 '누보로망'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연인>은 이 공식을 아주 충실하게 따른다.
사실적인 묘사와 이야기의 치밀한 구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적인 소설의 형식을 부정하고, 작가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적인 생각이나 기억을 새로운 형식과 기교를 통해 재현하려는 경향의 소설을 의미한다. 반소설(antinovel)이라고도 한다. 특정한 줄거리가 없기 때문에 독자는 직접적으로 작품에 참여해서 적극적인 독서를 해야 한다.
3.
<인연>을 다루는 몇 독서에세이에서는 이 소설을 사랑이라는 카테고리에 묶은 다음 사랑의 다양한 표정 중 하나로 다루고 있다. 쾌락과 탐닉이라는 원초적인 사랑의 부각. 두 사람의 사랑은 미성년인 빈곤층의 백인 소녀와 나이가 많은 부유층의 아시아인 남성이라는 신분과 인종을 초월한 사랑으로 읽을 수 있다.
신분과 인종. 이것은 차별을 야기하는 금기들이었다. 금기를 벗어난다는 것은 억압과 굴레로부터의 일탈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소녀가 사회로부터.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한 채, 아슬아슬한 상황에 놓이게 된 이유가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여인으로서의 한정된 역할에 만족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27. 욕망을 외부에서 끌어오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욕망은 그것을 충동질한 여자의 몸 안에 있다. 그게 아니라면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첫눈에 벌써 욕망이 솟아나든지 아니면 결코 욕망이란 존재하지 않든지 둥 중에 하나이다.
<연인>에서 일탈의 형태는 욕망으로 변하고, 탐닉과 관능의 사랑으로 반항적으로 표출된다. 하지만 나는 이것에서 탐닉과 관능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불러일으킨 억압에 대한 반항, 그리고 저항에 대한 공감대가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에 대한 반항인가? 백인 소녀의 경우에는 어머니의 히스테리컬한 측면. 그리고 큰오빠의 무능함에 대한 저항. 즉, 가난한 환경, 학대받는 생활. 큰 오빠에 대한 편애와 큰 오빠의 방탕한 삶. 그녀를 형성하게 한 존재에 대한 부정. 이것들에 대한 반항으로 부유한 중국인 남자를 받아들이게 된 것일 테다. 그리고 중국인 남자의 경우에는 가문의 억압. 정해진 미래라는 억압에 저항해서 아름답고 젊은 백인 소녀에 반하게 되었을 테다.
77. 내게 전쟁은 큰오빠와도 같다. 전쟁은 큰오빠처럼 도처에 번지고, 침입하고, 훔치고, 또 감금한다. 또한 모든 것에 섞여들어 머릿속에도 몸속에도 생각 속에도 존재하며, 깨어 있을 때나 자고 있을 때나 시종일관 제어할 수 없는 취기 같은 욕망에 사로잡혀 사랑스러운 영혼 같은 어린아이의 몸을, 나약한 자들이나 패배한 민족들의 육체를 점령한다. 악은 바로 거기에, 우리 피부에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119. 그녀가 이따금씩 자기 인생에 대해 품는 혐오감도 그를 두렵게 했다. 이런 혐오감에 휩싸이면 그녀는 갑자기 어머니를 떠올리곤 소리를 지른다. 이제는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고, 어머니가 죽기 전에는 행복해질 수가 없으며 이런 불행을 초래한 자들을 죽여 버릴 수도 없다는 생각에 분노의 눈물을 흘린다. 그녀에게 얼굴을 갖다 대고, 그는 그녀의 눈물을 삼킨다. 그녀의 눈물과 그녀의 분노는 그의 욕망을 자극한다. 미친 듯이, 그는 자기 몸 아래 그녀를 눕히고 짓누른다.
소녀의 반항에 비해서 남성의 반항은 진지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소녀는 탈출을 원했지만, 남성은 정복을 원했기 때문이다.
4.
<연인>은 형식으로도 그렇고, 내용으로도 제약을 두지 않는 소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은 쾌락과 절망의 지점을 불규칙하게 왕래한다. 그것을 느끼는 의식으로 하여금 마음 놓고 뛰어놀 수 있도록 가만히 놓아둔다. 주인공이 자유와 쾌락에 갈망하는 욕망 역시 어떤 제약을 벗어던지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이것은 억압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마르그리트 뒤라스 작가는 억압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이 질문이 아마도 문장으로 이루어진 문학작품 <연인>을 이야기하는 가장 알맞은 질문이 아닐까 싶다.
<연인>의 문장들은 한마디로 염세적이다. 대부분 염세적인데 결정적인 순간 나르시즘이 등장한다. 이런 방식으로 그녀는 무너져가는 삶을 억지로 지탱한다. 아슬아슬하다. 이 가운데서 좀처럼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들에 대한 정의들이 뒤라스의 의식을 빌어 튀어나온다. 좋게 말하면 아주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5.
이 문장은 위(3)에서 이야기했던 억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사회에서부터 시작된 것(금기)이 작은 공동체로, 가족으로, 이어져서 마침내 어머니와 큰오빠에게 전염되는. 그런 형태로 그려진다.
69. 바라본다는 것은 한순간 그 대상을 행한, 그 대상에 대한 호기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불행에 빠지는 행위이다. 누군가를 바라본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그 시선에 합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여전히 그는 불명예스러운 사람일 수도 있다. 대화라는 것은 허영이다. 이 집에 가장 잘 어울리는 어휘는 수치와 자만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족이라는 집단이건 혹은 다른 어떤 종류의 집단이건. 공동체라는 형태를 한 모든 것은 우리에겐 증오의 대상이자 지저분한 그 무엇이다. 우리 가족은 삶을 살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근원적인 수치심 속에 빠져 있다. 우리 형제들의 이야기 가장 깊숙한 곳에는 우리 세 사람이 사회가 목 졸라 죽인 우리 어머니, 그 선량한 여인의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우리는 어머니를 절망에 빠뜨려 버린 이 사회의 한편에 비켜서 있다. 그토록 다정하고, 그토록 남을 쉽게 믿는 우리 어머니에게 사람들이 저지른 짓들 때문에, 우리는 삶을 증오하고, 우리 자신을 증오하고 있다.
6.
이 문장에서 드러나는 쾌락은 절정의 순간에서 얻은 것이다. 솔직한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118. 그는 내가 바라던 것을 넘어, 내 육체의 숙명에 적합한 곳까지 나를 대려갔다. 그렇게 나는 그의 아기가 되었다. (...) 119. 그 사냥꾼의 육체와 그의 성기와 형언할 수 없는 부드러움과 숲 속이나 강가에서의 용맹함에 대하여 그리고 강 하구의 검은 표범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 모든 것이 그의 욕망을 자극하여 , 내 몸을 포옹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의 아기가 되었다. 그와 매일 저녁 사랑을 나눈 사람은 그의 아기였다.
7.
이 문장은 불멸성에 관한 그녀의 감각이다. 이 감각이 태어난 것은 작은오빠의 죽음과 관계가 있다. 나는 김탁환 작가의 생각에 동의한다. 소녀가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은 중국인 남자가 아니라 그녀의 작은오빠였음을. 작은오빠의 죽음에 그녀는 불멸이라는 것 역시 유한하다는 것을 깨우친다.
123. 내 작은오빠는 불멸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그를 보지 못했다. 그의 불멸성은 그가 살고 있었을 때, 작은오빠의 육신에 가려져 있었다. 우리는 불멸성이 바로 육신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내 작은오빠의 육신은 죽었다. 그의 불멸성도 그와 함께 죽었다.
124. 불멸성은 유한한 것이고, 불멸성도 죽을 수 있으며, 그리고 그런 사건이 일어났고,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불멸성은, 결코, 불멸성으로서 눈에 띄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절대적인 이원성이다. 그것은 세부적인 것에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근원 속에서만 존재한다.
125. 이런 불멸성이 살아 있을 때에만, 삶은 불멸의 것이 된다. 불멸성이 삶 속에 있을 때, 그것은 길게 사느냐 짧게 사느냐 하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또 다른 그 무엇인 것이다. 불멸성은 시작도 끝도 없다고 말하는 것도, 불멸성은 정신의 삶과 함께 시작되어 그것과 함께 끝난다고 말하는 것도 똑같이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불멸성은 정신에도 관여하고 또 바람을 쫓아가는 것에도 관여하기 때문이다. 사막의 죽은 모래들, 어린아이들의 시체를 보라. 불멸성은 거기로 지나가지 않는다. 그것은 거기에 머물렀다가 우회한다.
8.
5,6,7에서 인용한 문장들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지닌 독특한 감각을 보여주는 문장들이며, 이 문장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소설을 이루는 요소들 가운데서도 오직 감각을 통해 호소하는 그런 작가다. 이 호소는 결국, 이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더 슬프게 다가온다. 삶에 대한 발버둥. 쾌락과 공허함. 불멸의 죽음. 불멸이라고 믿었던 존재가 사라졌음에도 세상은 돌아가는. 나이들어버린 한 여린 존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