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천국의 조각을 줍는다 퓨처클래식 2
바데이 라트너 지음, 황보석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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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 문장


많은 사람이 소설의 첫 문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그 이유를 알고는 있는데. 나로서는 그것이 크게 와 닿지 않았다. 기존에 읽었던 작품 중 <롤리타>의 첫문장1에서도 실감하지 못했다. (롤리타를 처음 접했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 살펴보니 그 경탄해 마지않는 목소리의 이유를 알 것 같긴 하다. 오.. 롤리타!) 그런데 바데이 라트너 <나는 매일 천국의 조각을 줍는다>는 첫 페이지를 펴자마자 무언가 각인되었다.


전쟁은 로켓탄 폭발음이 아니라 발소리, 복도에서 내 방을 지나 엄마 아빠 방으로 가는 아빠의 발소리와 함께 내 유년의 세계로 침입해 들어왔다.


아빠의 다급한 발소리를 통해서 전쟁이 자신의 세계로 침입해 들어왔다는 이 묘사. 단, 한 문장만 읽었음에도, 이 글을 쓴 화자가 얼마나 아빠를 사랑하고 또 의지하는지 잘 드러난다. 아빠와 딸 사이의 사랑뿐만 아니라, 어려움에 직면한 가족이 그들에게 침입한 전쟁에 어떻게 헤쳐나가는지 바데이 라트너의 <나는 매일 천국의 조각을 줍는다. (원제 : In the Shadow of the Banyan)>는 소설의 첫 문장만큼이나 세밀한 표현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2. 1975년 캄보디아. 킬링필드


킬링필드2라는 단어는 작년에 읽었던 <불평등의 킬링필드>라는 책에서 본 적이 있지만, 그 단어가 탄생한 배경을 이 책을 통해서야 알게 되었다.(본래의 뜻 로라면 불평들의 킬링필드는 이미 학살이 벌어진 것으로 읽어야 했다.) 


각주의 설명을 보면 사회주의 유토피아 건립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었던 전 세계의 수많은 혁명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읽었던 작품 가운데서는 <동물농장>이 이 상황을 설명하는데 가장 적절하고, 션판이라는 작가가 쓴 <홍위병>이라는 작품이 라미의 고난과 가장 흡사하다. <홍위병>에서 주인공은 공산당으로부터 부모를 잃지만, 분노를 참고 거짓으로 당에 잠입한 뒤,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신임을 얻고 미국으로 망명한다. 아마도 <홍위병>의 주인공이 이런 선택을 하게 된 원인은 완전히 혼자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3. 한국어 제목. 원서 제목

바데이 라트너가 쓴 작품의 한국어 제목은 <나는 매일 천국의 조각을 줍는다>다. 이것은 번역가 선생님이 이 책을 긍정적으로 바라본 신호라고 봤다. 즉, 라미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인간에게 남아있는 순수한 사랑의 조각을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하나씩 모아간다는 의미로 읽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한편, 원서의 제목은 <In the Shadow of the Banyan>이다. 이것은 "38. 우리 중에 반얀나무 그늘 아래에서 쉴 꼭 그만큼만 남게 되겠지.". "우리 중에 반얀나무 그늘 아래에서 쉴 꼭 그만큼만 남게 되겠지. 전쟁은 계속 될 거고 안전한 곳이라고는 여기...반얀나무 그늘 아래뿐이니."라고 중얼거리는 할머니의 입에서 맴도는 단어인데.

예언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할머니의 말. '안전한 반얀나무 그늘 아래'는 463페이지의 라미의 생각을 통해 부정되고, 이것은 소설 전체의 메시지로 번져간다.  


라미는 깨닫는다. 463. 삼촌이 왕비 할머니와 다른 가족들 모두가 그 예언의 저주를 받은 사람들에 속해 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로 나를 위로해줄 작정이었다면, 나는 삼촌에게 그런 것은 없다고, 그런 예언도 그런 저주도 없다고 하고 싶었다. 또 우리가 그 그늘 밑에서 안전해질 신성한 나무도 없다고, 있는 것이라고는 이 매장지뿐이고 우리 모두 여기에서, 우리의 공동묘지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4. 아빠. 가족. 그리고 사랑


이 책은 정말 가슴을 아프게 한다. 겨우 7살 소녀. 게다가 소아마비를 앓아서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는 라미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사건의 연속이었다. 

​혁명과 전쟁. 그로인한 죽음과 학대라는 고통은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했다.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탐욕을 외치는 자들은 희생양을 바쳐야 고통스러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희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스러져갔던 영혼들이 훨씬 더 많았다. 라미와 동행했던 삼촌과 숙모와 고모와 쌍둥이와 할머니는 킬링필드로 인하여 스러져간 무수한 영혼을 응축하여 탄생시킨 상징들처럼 느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족을 지키는 힘은 '사랑'. '가족 간의 사랑'이었다.  

혁명과 전쟁 그로 인한 죽음과 학대라는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나머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날개를 꺾어서 딸에게 달아준 위한 아버지의 마음. 사랑이 없었던 가정에서 태어났기에 자기 자식은 사랑이 가득한 환경에서 키우리라 다짐하고 온 힘을 다했던 어머니의 마음은 이 소설의 모든 것이다.

딸이 아빠를 위하는 마음. 아빠가 딸을 위하는 마음. 엄마가 남편과 딸을 위하는 마음. 이 애틋한 마음을 나는 마음대로 줄일 수도 옮겨적을 수도 없었다. 살짝 단락을 몇 개 가져와서 맛만 보여줄 따름이다.


126. "너 내가 왜 네 이름을 바타아라미라고 지었는지 아니? 그간 네가 내 사원이고 내 정원이고 내 신성한 대지이고 너에게서 내 모든 꿈을 볼 수 있기 때문이야. 어쩌면 그것이, 자기 자식에게서 때 묻지 않은 선량함을 보는 것이 아빠로서는, 모든 부모로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네가 할 수 있다면, 라미, 너 스스로 그걸 보았으면 해. 네 주위에서 네가 그 어떤 추악함과 파괴를 목격했건 나는 네가 언제나 여기저기서 아주 조금씩 얼핏얼핏 보는 아름다움이 신들의 거처를 반영한 것이라고 믿었으면 해. 그건 실제로 있는 거니까, 라미. 세상에는 그런 곳, 그런 신성한 곳이 있어. 그리고 너는 그곳을 마음속에 그리고 꿈을 꾸려고만 하면 돼. 그곳은 네 마음 속에,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으니까."


128. 언젠가 여행길의 꿈결 속에서

내 영혼을 간직한 아이와 만났다네.


183. "글이란, 너도 알다시피 우리로 하여금 본질적으로는 덧없는 것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게 해주는 거란다. 불의와 상처로 가득 찬 세상을 아름답고 시적인 곳으로 바꾸게도 해주고. 설령 종이 위해서만이라도. 나는 네가 소아마비로 앓아누웠던 날 너를 위한 시를 썼어. 내가 네 요람 곁에 서 있는데 네가 그렇게도 슬픈 눈으로 나를 보아서 나는 네가 내 슬픔을 이해한다는 생각이 들었지."


195. 갑자기 내가 잠을 깨기 전에 꾸었던 꿈이 기억났다. 꿈에서 아빠는 인간인 동시에 신이고 무력하면서도 용감한 신화적인 킨나라, 경쟁하는 실체들의 당기는 힘을 견디지 못하고 번개에 찔려 땅으로 떨어진 킨나라와 매우 흡사한 존재였다. 그는 날개가 잘려나가 피를 흘리고 있었고 빗속에서 홀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움츠러들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삶을 선택한 그는 자신의 불멸을 밤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희망의 빛을 바꾸었다. 그 이미지들이 계속 내 마음속에서 음악 선율들처럼 맴돌았고, 다음에 나는 내가 온전히 나 스스로 잠을 깨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240. 모든 현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수 있는 이 세상에서, 누군가의 집이며 정원이며 도시가 하루아침에 안개처럼 증발해버릴 수 있는 세상에서, 정원이며 도시가 하루 아침에 안개처럼 증발해버릴 수 있는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아빠 하나뿐이라는 것. 아빠는 내 아빠고 나는 아빠 딸이며, 아빠가 살아왔던 모든 전생으로부터 길 안내를 하기 위해, 나를 사랑하고 보살피기 위해, 처음으로 내게 육신을 준 것이 이 우주에 어떤 질서가 있다는 충분한 증거라는 것.


371. "나는 내 아이들이 사랑으로 둘러싸이게 해주어야겠다고 결심했어. 나는 너와 네 동생을 위해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너희 둘 모두가 똑같이 많은 사랑을 받는 세상을 만들려고 애썼어. 사랑은 현실이고 그래서 그걸 꾸며내거나 애매모호한 말들에서 찾으려고 해서는 안 돼. 이를테면 내 아버지가 말했던 것처럼 때로는 가장 아끼는 것도 포기해야 한다는 그런 말에서는. 아니, 그런 말에는 아무 의미도 없었어. 그런 말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또는 자식들인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사랑은 솔직하고 분명해야 돼. 우리가 보고 만지는 일상적인 것들에 배어 있어야 해. 적어도 그게 내가 생각했던 거고...

하지만 사랑은, 이제 나는 알고 있는데, 온갖 장소들에 숨어 있고 마음속 가장 슬픈 구석에도 깃들여 있어서 우리는 누군가가 가버리기 전까지는 그 사람을 정말로 얼마나 사랑했는지 몰라."


243. 날개. 나는 아빠가 그 날개를 잘라내어 내게 넘겨주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가 스스로 계속 날 수 있도록


373. "너를 차마 볼 수 없고 너와 이야기를 할 수 없을 때가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너는 내가 네게서 나 자신을 보고 네게서 내 끔찍한 슬픔을 본다는 걸 알아야 해. 우리는 별로 다르지 않아. 너하고 나는."




  1.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 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리-타.
  2. 1975년 캄보디아의 공산주의 무장단체이던 크메르루주(붉은 크메르) 정권이 론 놀 정권을 무너뜨린 후 1979년까지 노동자와 농민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명분 아래 최대 200만 명에 이르는 지식인과 부유층을 학살한 사건이다.
    크메르루주의 지도자 폴 포트는 1975년 4월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함에 따라 약화된 캄보디아의 친미 론 놀 정권을 몰아냈다. 당시 폴 포트가 정권을 잡자 론 놀 정권의 부패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국민들은 환영하였다. 그러나 폴 포트는 새로운 농민천국을 구현한다며 도시인들을 농촌으로 강제이주시키고, 화폐와 사유재산, 종교를 폐지했다. 이 과정에서 과거 론 놀 정권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지식인, 정치인, 군인은 물론 국민을 개조한다는 명분 아래 노동자, 농민, 부녀자, 어린이까지 무려 전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00여만 명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크메르루주 정권은 1979년 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캄보디아 공산동맹군에 의해 전복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킬링 필드 [Killing Fields]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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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인간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수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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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씨앗 (seed)


한 작가의 독서 인생을 갈무리해놓은 이 책은 읽는 행위를 갈망하는 또 다른 누군가의 시작을 도울 책이라고 가장 처음 느꼈다.  그래서 이 책을 설명할 첫 번째 키워드를 씨앗으로 정했다.


<읽는 인간>에서 말하는 읽는 행위는 시간을 소비하기 위한 독서. 그리고 재미만을 위한 독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 싶다. 오에 겐자부로의 독서는 진실로 나를 알고 싶어 하는 열망이 넘쳐흐르는 독서이며, 그 과정은 매우 높은 단계에 이르러있다.


2.  HOW TO READ


많은 이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읽는 인간>을 읽으면 오에 겐자부로가 추천하는 독서법을 알 수 있다. 짧게, 겐자부로는 어떤 작품이 자신을 성장시킬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다면 (그 작품은 누군가 추천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Re-Reading는 기본 조건이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Infinite-Reading을 권한다.


만약, 겐자부로의 청춘에 깊은 울림을 일으킨 작가. 예를 들면, 아르튀르 랭보, T,S. 엘리엇,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윌리엄 블레이크, 에드거 앨런 포, 단테 알리기에리, 맬컴 라우리. 마크 트웨인, 에드워드 사이드처럼 외국 작가라면, 그는 번역서를 먼저 읽고, 그 번역서에서 읽은 인상 깊은 구절에 밑줄을 치고, 그다음. 작품의 원서를 찾아 밑줄 그은 부분이 실제로 어떤 단어로 쓰였는지. 직접 해독하는 방식을 권한다.


이러한 방식을 권하는 이유는 작가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번역서보다는 원서의 단어를 직접 살펴보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겐자부로'는 3년 단위로 하나의 분야나 어떤 작가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읽는 방법을 권한다.


책을 읽어온 나의 경험에 따르면. 난해한 작가의 글을 한 번에 바로 읽어내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겐자부로'는 해당 작품을 읽기 전에 그 작가가 어떤 작가인지 참고할 만한 개론서. 그리고 예를 들어, '단테'의 <신곡>을 읽는다고 하면, 기존에 존재하는 '단테'의 <신곡>을 다룬 서적들을 충분히 읽어보고, 공부할 작가를 충분히 이해한 후, 작품의 핵심에 접근하기를 권한다. 


그렇게 하면, 책을 쓸 당시의 작가의 심정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신곡>을 읽을 때, 밑줄 친 구절. 가슴에 다가온 문장이 어떤 마음으로 썼는지 알게 되고, 그렇게 되면 보다 충실한 독서가 가능하다는 가르침이었다.


3. 수상한 이인조


<읽는 인간> 안에서 뿐 아니라, 오에 겐자부로라는 작가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수상한 이인조'가 아닐까 싶다. 겐자부로에게 있어서 거의 최초의 단짝인 이타미 주조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그는 훗날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게 되고, 그의 동생을 부인으로 맞이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이인조의 상호작용. 오에 겐자부로의 삶은 독서라는 행위를 통한 작가와 독자라는 관계에서의 이인조로. 그리고 대학의 공부라는 행위를 통해 교수와 제자라는 이인조의 관계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성장한다.


179. 하나의 얼굴인 동시에 수많은 얼굴이지요. 자신이 지금껏 만나온 모든 사람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동트기 전 거리에서 생각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여러 사람과 묻고 답하기 시작하죠.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걸듯이 소리를 내고, 이에 역시 자기 목소리로 대답하는건지도 모릅니다. 어찌 되었든 확실히는 알지 못하는 사람, 그러나 자기 인생에서 만났던 소중한 한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의 집합체일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 사람들과 인생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는 설정입니다.


이 문단을 읽는 순간. 나의 내면에 묻혀있었던 헤르만 헤세가 강하게 다가왔다.


새로운 세상이란 기존의 것. 안주하고 있는 당신의 둥지를 파괴함으로써 성립한다고 헤세형님이 말씀하셨다. 아프락사스. 부모의 안락한 세계를 부숴버린 프란츠. 프란츠의 통제를 받는 세계를 부숴버린 데미안, 통제불능의 방종을 부숴버린 베아트리체, 자기 안의 목소리가 아닌 목소리를 부숴버린 에바 부인. 모두가 아프락사스에 기인한 공간이다. <데미안 리뷰 중에서...>


오에 겐자부로의 성장 과정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읽었던 과정과 유사하다고 느꼈다. 싱클레어가 삶의 고비에서 만났던 인물들. 그 인물들과의 이인조적인 융화를 통하여 싱클레어는 성장했던 것처럼 오에 겐자부로라는 거대한 작가는 그의 곁에 누군가와 함께 성장을 거듭한다.


데미안을 읽었을 때는 프란츠나 베아트리체. 그리고 에바 부인 같은 인물이 싱클레어의 내면에서 저절로 탄생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을 읽으며, 그것은 내면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인조의 의미로서 바깥에 존재하는 인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데미안>을 썼을 시기의 헤세. 거목으로 성장한 헤르만 헤세의 자의식이 싱클레어의 주변을 탄생시켰을 수도 있다.) 


어쨌든, 위에서 열거한 작가들은 어느 한 시기에 동시다발로 만난 작가들이 아니라. 싱클레어를 찾아온 인물들처럼, 그의 생에서 어떤 점에서 집중적으로 만나서 이인조의 관계를 형성한 작가고, 그런 상호작용은 오에 겐자부로의 문학에까지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한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일본 작가들의 문체에서 찾을 수 없었던 닮고 싶었던 문체. 강인하고 부드러운 문체는 서양 작가의 문장을 직접 읽음으로써 발견할 수 있음을 그는 <읽는 인간>을 통해서 고백하였고, 그 문체를 온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자 겐자부로는 부단히 노력해왔음을 알 수 있었다.


4. 오에 겐자부로


우리가 오에 겐자부로를 만나서 이인조의 성장이 만들어낸 산물을 직접 확인하고, 그것을 벗 삼아 독자 개개인의 성장을 도모하려면, 이 책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SEED. 즉, 씨앗의 역할에 충실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읽는 인간>을 읽고, 이 책을 통해 삶이라는 무게를 마주하고, 그 무게를 오에 겐자부로는 어떻게 말하는가 알고 싶다면, 겐자부로가 상호작용하며 탄생시킨 작품을 독자인 우리가 직접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읽는 인간>의 오에 겐자부로를 읽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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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
이창래 지음, 나중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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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쟁과 전쟁터


142, 어쩌면 그것은 그들의 전쟁이 아니라 모택동이나 트루먼의 전쟁, 혹은 다른 누군가의 전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처음부터 애국심과 저항, 강경 외교정책과 평화주의만 선동하는 전쟁이었다.


작가의 말처럼 전쟁은 누군가를 위한 이데올로기 다툼일지 몰라도. 전쟁이 일어나는 전쟁터는 이데올로기 다툼이 일어나는 공간이 아니다. 이곳에서의 공식하나를 털어놓자면. 아마도 "내가 죽이지 않으면 적이 나를 죽인다"는 것일테다.


언제 죽을지도 모를 불안감과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이것은 인간에게 극도의 공포를 유발한다. 이러한 공포에 젖은 상황에서 불안감과 죄책감이라는 균형이 한꺼번에 무너지면 그들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죽는 자는 더욱 잔혹하게 죽고, 죽이는 자는 더욱 잔혹한 방법으로 죽인다. 이것이 바로 제노사이드다. 1


2. 제노사이드


제노사이드는 힘의 균형이 무너졌을 시 인간이 어떻게 변하는 지 잘 알려준다. 균형이 무너지면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동물의 본능은 그 얼굴을 드러낸다. 우리는 <파리대왕>이나 <암흑의 핵심>에서 매달린 머리라는 매개물을 통하여 그 본성을 똑똑히 읽은 바 있다. 

제노사이드는 자신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려 든다. 그 이유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그들이 나중에라도 알지 못하도록. 복수를 방지하고자. 철저히 입막음을 하는 것일 테다. 다시 말해서, 아마도... 자신에게 해가 될 수 있는 이질적인 것을 씻어내려는 무의식적인 공포의 발현이 아닐까 싶다.


이창래 작가의 <생존자>는 1950년의 한국에서, 그리고 그 이전. 1934년 만주에서 벌여졌던 제노사이드를 피해자의 시점을 통해 보여준다.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일어난 전쟁. 힘의 균형이 무너진 전쟁터라는 공간. 포악해져버린 군인들은 피난 생활을 전전하던 준의 가족을 불의의 사고로 사망케 한다. 그리고 반전과 평화를 위해서 전쟁터의 한복판에 안식처를 마련한 실비의 가족을 잔혹하게 학살했다.  힘없는 이 여인들은 두 눈으로 이 참혹한 비극을 그저 지켜봐야만했다.


3. 생존자


준과 실비는 불행한 시기. 고난 속에서 살아남았다. 준과 실비 같은 직접적인 피해자의 신분은 아니지만, 전쟁을 참전했던 군인 헥터(전쟁 중에 살아남은 또 한 사람이자. 매일 겪는 죽음과 죽임을 견딜 수 없어서 후방의 작업을 자청했던 군인)도 마찬가지로 전쟁에서 살아남았다. 


이창래 작가의 <생존자>는 전쟁 가운데 일어나는 학살과 고문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일반적인 제노사이드 문학과는 다르게 1930년의 전쟁과 1950년의 전쟁 이 후. 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추적하는 일을 진행한다. 전쟁으로 인하여 만신창이가 된 그들이 어떻게 인생을 꾸려나가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이창래 작가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고스란히 소설에 담아 놓았다. 결과적으로. <다윗과 골리앗>같은 성공의 산물은 아니었다. 그 책이 다루지 못한 수많은 실패의 사례 중에 하나가 바로 <생존자>다. 특히, 준의 경우 경제적으로 많은 부를 쌓았지만, 하루하루가 위태롭고 두려운 삶이었다. 그 증거로 가장 경제적으로 성공한 준은 아이러니하게도 <생존자>의 현실에서 삶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들의 삶은 분명히 전쟁에 의한 후유증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생존자> 또한 넓은 의미에서 제노사이드 문학이다.


4.


다시 강조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그들이 멀쩡해 보였을지 몰라도. 가족의 죽음을 목격하는 순간 내면은 이미 산산조각 나버렸다. 실비는 고통을 잊기 위해서 매번 마약에 의존했고, 헥터는 소중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하여 더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없게 되었고, 준 역시. 한국의 고아원에서 입양을 위해 몸부림 쳤지만 끝까지 버림받는다. 


이런 '준'의 깊은 상처는 훗날, 시간이 흘러 고국을 도망치듯 떠나 도착한 낯선땅 미국에서 낳은 아들 '니콜라스'와도 유대감을 충분히 쌓지 못하게 한다. 낯선 곳에서 홀로 아들을 키워야 하는 입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을 채찍질하고. 과거를 잊기 위해 미친듯이 일을 했을 것이다. 아마 그래서 그의 아들의 의식 형성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준'의 아들은 그런 어머니를 만족시켜 드리기 위해서 전 세계를 떠돌면서 일에 매진한다. 하지만, <생존자>는 아들의 남 다르게 빠른 독립심과 유능한 재주까지도 비극의 재료로 사용한다. 


대를 이어 내려오는 비극을 통해서 전쟁이라는 근원적인 것에 또 한 번 책임을 묻는다. 게다가 예전과는 다른 아들의 행동과 얼마남지 않은 삶이라는 불안에 아들을 찾아나선 준은 불안감을 야기했던 이유에 대해서 끝까지 알지 못한 채 눈을 감게 되는 설정은 전쟁에 더욱 큰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다. 


5.


모자의 비극적 결말에 깊이 연관된 '헥터'는 다름아닌 그녀의 남편이자. 그의 아버지였다. 이 진실은 반전이 아니고 처음부터 공개되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리 큰 스포일러가 되지는 않는다. 반전은 따로 있다. 헥터가 니콜라스의 아버지라는 것보다 더 큰 반전은 <생존자>에서 가장 극적인 만남에서 생겨나는 어떤 이질감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누군가 물어본다면 비밀글로 대답해 줄 용의는 있다.


152. 헥터는 무질서가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면 거기에 맞서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서로를 갈망하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혼란과 무질서에 대한 원초적인 저항은 사랑이었다. 모든 이야기가 그렇게 짜여져 있었다. 물론 상미와 정. 두 사람 사이에는 친밀함이나 육체적 접촉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다. 헥터는 도라와 자신의 관계도 어쩌면 사랑이 아니라 친밀함 속에서 위안을 얻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항상 그랬지만 그에게는 누구 하나 마땅히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헥터의 생각이면서 동시에 이창래 작가는 무질서가 세상을 지배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서로를 갈망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이름의 강렬한 갈망은 이 세 주인공에게 모두 트라우마만 짊어지게 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하는 사람이 그들의 곁을 떠날 때 찾아오는 고통 또한 더욱 크다는 트라우마 말이다. 이 세사람은 끝내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다.


그래서 헥터는 36년이 흐른 <생존자>의 현재까지도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기대했던 '도라'라는 여인이 일말의 희망이었으나. '헥터'를 알게 되고, '준'을 만나게 됨으로써 어이없이목숨을 잃는데. 이 장면은 어쩌면 <생존자>의 가장 큰 옥의 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이 트라우마는 1950년 당시의 고아원에서 실비가 끝내 헥터와 준을 외면했던 이유이기도 하고, 36년이 흐른 <생존자>의 현재 시간에서 준이 홀로 치열하게 삶을 살아온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헥터'가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6. 


짧게 <생존자>는 "전쟁은 소중한 사람을 잃게 하고, 그것은 살아 남은 자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는 그 트라우마를 죽을 때까지 극복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트라우마는 점점 더 커져서 왜곡되어 타인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이 메시지를 위해 이창래 작가는 700페이지에 달하고. 반세기의 시간과 미국과 한반도와 만주와 이탈리아라는 공간을 뛰어넘는 위대한 서사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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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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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헨리 포드의 자동차 생산라인이 헉슬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모양이다. 그리스도를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한 신이 다름아닌 포드라니 말이다. 포드 신을 숭배하는 가상의 세계. <멋진 신세계>에서 포드의 후계자들은 자동화된 생산라인을 이용하여 자동차 대신 인간을 대량으로 찍어냈다.


<멋진 신세계>의 통치자는 인간들을 다섯 계급(알파, 베타, 감마, 델타, 입실론)으로 나누어 찍어냈고, 등급에 따라 다른 색깔의 옷을 입히고, 각기 다른 역할을 부여했다. 상위 계급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할 목적으로. 하위계급은 단순노동에 필요한 노예계급으로 나누었다. 


통제자의 공장에서는 지금까지 쌓아온 과학 지식을 토대로 각 계급의 지능지수를 차등화시켰다. 신체와 의식이 완벽하게 형성되지 않은 태아에게 같은 목소리로 같은 메시지를 주입하여. 자신이 행복한 세상을 살고 있다고 세뇌를 시켰고, 늙지 않는 얼굴과 신체를 제공하였고, 대가없는 쾌락을 제공했고, 심리적인 고통에 대응할 수 있는 소마라는 이름의 알약도 제공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통제자 한 사람을 위해서 돌아가는 세계. 그 누구도 당신의 세상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세계.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기는 커녕. 오히려 행복하다고 느끼는 세계. 통제자의 시점에서 <멋진 신세계>는 그야말로 완벽한 유토피아였다. 


2. 


신세계에 살았던 인간들 가운데. 특히, 알파 계급의 똑똑한 몇몇 사람들은 약간의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의문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똑똑한 사람들이 자신만의 사상을 만들어낼 수 없었던 것이다. 무언가를 표현해할 순간이면 무의식의 벽에 부딪혀서 불편해지고, 순식간에 생각이 사라지는 경험을 반복했고, 그런 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어서 갑갑했다


포드신을 모셨던 시간동안 그런 생각을 했던 사람은 상당수 있었던 듯 싶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버나드 마르크스와 왓슨 헬름홀츠라는 인물이 그런 역할을 담당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어 통제를 벗어나려고 했다. 포드신을 모시는 통제자 무스타파 몬드가 봤을 때, 버나드와 헬름홀츠는 돌연변이나 다를 바 없었다.


헬름홀츠는 내면을 탐구하는 학자 스타일이라서 다루기 쉬운데 반해서. 버나드의 경우는 잠재적인 독재자 스타일인데. 그는 같은 계층의 사람들에 비해서 부족한 외모에 대한 자격지심을 극복하기 위해서, 특별한 존재가 되길 바랬던 인물이었다.

자신에게 향하는 불합리한 손가락질에 절망하던 버나드는 원주민 보호구역에서 그의 상관이 저지른 부정행위의 증거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것을 자신의 신분상승의 재료로 이용하기 위해서, 그 증거를 상부에 보고했다. 더욱이 증거를 연구대상으로 만들고, 그와 대화가 가능한 유일한 인간으로써 자신의 특별함을 포장하려 했다. 


3. 


그 증거가 바로 야만인으로 불리는 '존'이었다. 야만인은 <멋진 신세계>에 분열을 가져올 인물이었다. 야만인 존은 포드시대가 태어나기 전의 세상이 가장 빛나던 시기의 유산인 셰익스피어의 가치를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설에서는 야만인과 통제자 간의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이 논쟁에서 왜 안정을 원하는지? 혹은 왜 계급사회로 만들었는지에 관련한 그들의 생각 전부를 읽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주고받는 긴 대화의 모든 것이 <멋진 신세계>의 핵심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야만인의 말은 거의 대부분이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의 문장 가운데 한 부분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야만인 존은 그야말로 셰익스피어의 분신이나 마찬가지라고도 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가치란 간략히 말해서 르네상스 시대의 가치를 말하는 것인데. 높은 수준의 도덕성. 순결의 소중함. 일인일처제. 극기정신과 같은 인본중심적인 사고방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357. 가치란 어느 특정한 의지에 따라 좌우되지는 않아요. 그것은 쟁취하려는 자에게 그 자체로서 소중할 뿐 아니라, 그의 판단과 권위에 따라서도 그 가치가 좌우됩니다.


4. 


멋진 신세계의 벽은 공고했다. 몇 백년동안 도전을 받았지만 무너지지 않았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통제자의 생산라인에서 생산된 불량품은 불량품이 모여있는 전 세계의 섬으로 보내졌고, <월든>의 소로우처럼 문명을 거부하고, 자연주의의 길을 선택한 존에게는 야만인으로 불렀던 지난 세월과 마찬가지로 미개한 구경거리로 전락시켰다. 


존의 일상을 추하고 포악하다는 이미지(존에게 있어서는 인간의 유혹을 견뎌내려는 인내의 몸부림이지만, 신세계인에게 있어서는 알약 하나만 먹어도 해결되는 간단한 일이기에 더욱 존을 이해할 수 없었다.)에 포장함으로써 야만인은 미개한 종족이라는 것을 증명했고, 통제자의 아래에 있는 것에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알게 했고, 이런 방식으로 통제자의 지배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몇 년전. 읽으면서 충격을 받았던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처럼 야만인 존 역시. 신세계인이자 좀비인 다수인으로부터 전설 속의 미개인으로 남겨질 운명에 처했다. 이들이 부르짖었었던 인본주의의 가치는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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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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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 옷 사면 사람 만나야 하고, 사람 만나면  술 마셔야 하고, 술 마시면 실수하고, 실수하면 후회하게 되리란걸 알았지만, 그런 패턴조차 내가 사회적인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안도감을 주었다.


안도했던 순간도 잠시. 그녀의 순정은 멍들고 파괴되었다. 현대의 인간 관계에서 생겨난 어떤 습성 때문이었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에서는 필요한 순간만 잠시 일회용처럼 쓰고 버리는 인간 관계의 몹쓸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단편은 인간이 사물로 전락했음을 꼬집었고.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타락이라는 다른 이름이었다.  


2.


56. 넓은 곳에 살고 싶다는 욕구는 어느새 조용한 곳으로 옮기고 싶다는 바람으로 바뀌었다. 조용한 곳에 있고 싶은 마음은 공기 좋은 곳에 살고 싶다는 욕심으로, 나중엔 또 괜찮은 이웃들이 모인 데 머물고 싶다는 욕망으로 변할 테지만, 서울엔 그 조건이 모두 충족되는 공간이 흔치 않았다. 나는 차 소리가 싫었다. 하지만 온몸으로 그 소리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매일매일 도시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벌레들> :  그녀는 언제 떠나야할지 모르는 막연한 불안감을 껴안은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파괴되어가는 A구역의 정경과 벌레의 모습은 어쩌면 전세입주자 상태로 불안해하는 동시에 욕망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아닐까?

벌레 입장에서는 그들이 오랜시간 살아왔던 보금자리가 누군가에 의해 뿌리뽑혔기 때문에 강제로 떠돌이가 되었는데, 이들은 정착민에게는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들의 안락함을 위협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3.


94. 자연은 지척에서 흐르고, 꺾이고, 번지고, 넘치며 짐승처럼 울어댔다. 단순하고 압도적인 소리였다. 자연은 망설임이 없었다. 자연은 회의가 없었고, 자연은 반성이 없었다. 마치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는 거대한 금치산자 같았다.


<물속 골리앗> : 이 시대에는 노아의 방주 따윈 없었다. 자연은 신이 아니라 금치산자였기 때문이다. 자연으로부터. 사회로부터(근본적으로는 인간으로부터) 소외된 그들을 구원하려는 손길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말콤 글래드웰이 주장하는 <다윗과 골리앗 : 역경을 견뎌내면 더 강한 사람이 된다.>라는 공식이 애초에 성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알 수 있는 단 한가지는 홀로 남겨진 소년 앞에 기다리고 있을 세월의 무게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것일테다.


4.


145. 사람들은 곧잘 허황된 말을 했다. 이상한 점은 금방 들통나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들이 그런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거였다. 자기가 안기부 간부라고 으스대던 중년은, 앞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자 "저 새끼, 차 세위!"라고 한 뒤 '남바'를 적으라고 요란을 떨었다.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 노아의 방주는 없지만, <운수 좋은 날>은 오늘 날에도 여전히 유효했다.

<운수 좋은 날>에는 없었지만,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에는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친족이라는 이름의 존재들이었다. 보통 친족은 친근하고 낯설게 마련인데, 역설적인 것은 이 단편에서는 친족이란 남보다도 못한 인간으로 해석된다. 


명절이라는 날을 통해서 친족은 그들의 성공을 자랑하고, 당신의 실패를 탓하는 자리로 만들었는데. 용대는 그 비교대상으로 매우 훌륭했다. 그로 인하여 용대는 수치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친족들에 의해 매겨진 그의 가치였다.


다른 누구보다도 친족에 의해서 최하급으로 매겨진 그의 택시에 올라탄 이름모를 타인들 또한 그 앞에서 과시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아마도 과시를 하는 이유는 아픈 현실을 살아가는 데 대한 보상을 받고 싶었을 수도. 또는 자기가 택시운전사인 용대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5.


176. 관제탑 너머론 이제 막 지상에서 발을 떼 비상하고 있는 녀석도 있었다. 딴에는 혼신을 다해 중력을 극복하는 중일 테지만 겉으로는 침착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얼마 뒤 녀석이 지나간 자리에 안도의 긴 한숨 자국이 드러났다. 사람들이 비행운이라고 부르는 구름이었다.


<하루의 축> : 기옥씨는 청소 노동자이자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였다. 그녀는 전 세계인의 배설물이 버려지는 곳을 청소한다. 추석이라는 날은 더 힘든 하루일 뿐이었다. 추석을 하루 앞둔 날, 감옥에 갇힌 아들이 보낸 편지가 그녀에게 도착한다'엄마, 사식 좀'이라는 다섯 글자가 적혀있었다.


다섯 글자가 주는 허무함 때문에 그녀는 결국 평정심을 잃는다. 자신의 민낯을 가리지도 못한 채, 그녀는 파트장 앞에 선다. 추석 당일 빵꾸난 자리를 메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파트장의 얼굴은 어두워진다. 어떤 경우에도 아픔을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6.


211. 호들갑스럽지 않게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정장. 백화점 할인매장에서 산 너무 비싸지도 싸지도 않은 핸드백. 담담한 질감의 소가죽 구두. 4월, 친하지 않은 친구의 결혼식에 가는 길. 책가방에 점수가 잘 나온 성적표를 담아 집으로 뛰어가는 아이처럼 나는 히죽 웃었다.


214. 월급날에 대한 확신과 기대는 조금 더 예쁜 것, 조금 더 세련된 것, 조금 더 안전한 것에 대한 관심을 부추겼다. 그러니까 딱 한 뼘만... 9센티미터만큼이라도 삶의 질이 향상되길 바랐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 많은 물건 중 내게 '딱 맞는 한 뼘'은 없었다는 거다. 모든 건 늘 반 뼘 모자라거나 한 뼘 초과됐다. 본디 이 세계의 가격은 욕망의 크기와 딱 맞게 매겨지지 않았다는 듯. 아직 젊고, 벌 날이 많다는 근거 없는 낙관으로 나는 늘 한 뼘 더 초과되는 쪽을 택했다.


<큐티클> : 당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가꾸고 타인 앞에 선다. 당신이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가꾼 손톱에. 피부에. 당신의 정장에. 핸드백에 구두에 적힌 성적표를 남들이 봐주길 바랄 것이다. 당신 자체가 아닌 당신의 겉을 바라봐주길 바라는 모습에서 소외가 드리워진다.


7.


<호텔 니약 따> : 모든 인간은 다르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은 타인보다 자신에게 안락한 것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로 인한 친구(서윤과 은지) 간의 갈등. 그리고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 자(다빈)의 허풍이 공존한다.


8.


294.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데. 다른 친구들은 무언가 됐거나 되고 있는 중인거 같은데. 저 혼자만 이도 저도 아닌 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해져요. 아니, 어쩌면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고요.


301. '열심히만 하면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오십대 남성의 강의를 들었어요. 너무 빤해서 들을 게 없는 강연 같죠? 맞아요, 언니. 그런데 그 빤한 게 사람 맘을 막 쥐고 흔들데요? '꿈'이라는 말을 듣는데 가슴 한쪽이 싸한 게 찌르르 아픈 것도 같고 좋은 것도 같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어요. 그리고 실은 제가 아주 오래전부터 그런 말을 간절히 듣고 싶어 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어요. 말 그대로 '교과서에 나오는 말 같은 거. 올바르고 아름다운데, 실은 아무도 믿지 않는 말들 말이에요.  


<서른> : 삶에 대한 불안감이 당신의 눈을 흐리고 위험에 빠뜨린다. 당신은 무척이나 이성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당신을 둘러싸고 압박하는 부채는 당신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뭐든 해야만 했다. 그 '뭐든'에 담긴 속내엔 비행운이 감춰져 있었다. 세속적 '성공' 말이다.


당신을 옭아매려고 덫을 쳐놓고 있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당신은 그 세계를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람을 대신 집어넣었다. 과연 그는 당신이 견뎌내지 못했던 그곳을감당할 수 있었을까? 글쎄. 감당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 것이라고 생각핬을까? 그저 탈출하기 위해서 다른 희생양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당신의 위기를 모면하려 내리는 순간의 판단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을 끌어들이게 하고, 그의 목숨을 앗아가는 장면. 낯설지가 않았다. 얼마전 지니어스라는 TV 프로그램에서 고스란히 나온 장면이기도 했다.   


소설집 <비행운>은 작가 김애란이 관찰한 이 시대의 슬픈 초상이었다. ​ 


이쯤이면 비행기의 연료가 타면서 생기는 매연 따위에 비행운이라고 특수한 의미 따위를 부여할 필요는 없고, 그것을 쫓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대가 만들어 낸 매연 같은 뜬구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쫓아야 하는가? <비행운>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건 사회 구조에서 비롯된 것은 전부 비행운(허상)이라고만 알려준다. 좀 더 인내심을 갖고 내면을 관찰할 필요가 있겠다. 그 관찰에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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