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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평점 :
1.
10. 옷 사면 사람 만나야 하고, 사람 만나면 술 마셔야 하고, 술 마시면 실수하고, 실수하면 후회하게 되리란걸 알았지만, 그런 패턴조차 내가 사회적인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안도감을 주었다.
안도했던 순간도 잠시. 그녀의 순정은 멍들고 파괴되었다. 현대의 인간 관계에서 생겨난 어떤 습성 때문이었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에서는 필요한 순간만 잠시 일회용처럼 쓰고 버리는 인간 관계의 몹쓸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단편은 인간이 사물로 전락했음을 꼬집었고.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타락이라는 다른 이름이었다.
2.
56. 넓은 곳에 살고 싶다는 욕구는 어느새 조용한 곳으로 옮기고 싶다는 바람으로 바뀌었다. 조용한 곳에 있고 싶은 마음은 공기 좋은 곳에 살고 싶다는 욕심으로, 나중엔 또 괜찮은 이웃들이 모인 데 머물고 싶다는 욕망으로 변할 테지만, 서울엔 그 조건이 모두 충족되는 공간이 흔치 않았다. 나는 차 소리가 싫었다. 하지만 온몸으로 그 소리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매일매일 도시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벌레들> : 그녀는 언제 떠나야할지 모르는 막연한 불안감을 껴안은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파괴되어가는 A구역의 정경과 벌레의 모습은 어쩌면 전세입주자 상태로 불안해하는 동시에 욕망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아닐까?
벌레 입장에서는 그들이 오랜시간 살아왔던 보금자리가 누군가에 의해 뿌리뽑혔기 때문에 강제로 떠돌이가 되었는데, 이들은 정착민에게는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들의 안락함을 위협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3.
94. 자연은 지척에서 흐르고, 꺾이고, 번지고, 넘치며 짐승처럼 울어댔다. 단순하고 압도적인 소리였다. 자연은 망설임이 없었다. 자연은 회의가 없었고, 자연은 반성이 없었다. 마치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는 거대한 금치산자 같았다.
<물속 골리앗> : 이 시대에는 노아의 방주 따윈 없었다. 자연은 신이 아니라 금치산자였기 때문이다. 자연으로부터. 사회로부터(근본적으로는 인간으로부터) 소외된 그들을 구원하려는 손길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말콤 글래드웰이 주장하는 <다윗과 골리앗 : 역경을 견뎌내면 더 강한 사람이 된다.>라는 공식이 애초에 성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알 수 있는 단 한가지는 홀로 남겨진 소년 앞에 기다리고 있을 세월의 무게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것일테다.
4.
145. 사람들은 곧잘 허황된 말을 했다. 이상한 점은 금방 들통나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들이 그런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거였다. 자기가 안기부 간부라고 으스대던 중년은, 앞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자 "저 새끼, 차 세위!"라고 한 뒤 '남바'를 적으라고 요란을 떨었다.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 노아의 방주는 없지만, <운수 좋은 날>은 오늘 날에도 여전히 유효했다.
<운수 좋은 날>에는 없었지만,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에는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친족이라는 이름의 존재들이었다. 보통 친족은 친근하고 낯설게 마련인데, 역설적인 것은 이 단편에서는 친족이란 남보다도 못한 인간으로 해석된다.
명절이라는 날을 통해서 친족은 그들의 성공을 자랑하고, 당신의 실패를 탓하는 자리로 만들었는데. 용대는 그 비교대상으로 매우 훌륭했다. 그로 인하여 용대는 수치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친족들에 의해 매겨진 그의 가치였다.
다른 누구보다도 친족에 의해서 최하급으로 매겨진 그의 택시에 올라탄 이름모를 타인들 또한 그 앞에서 과시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아마도 과시를 하는 이유는 아픈 현실을 살아가는 데 대한 보상을 받고 싶었을 수도. 또는 자기가 택시운전사인 용대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5.
176. 관제탑 너머론 이제 막 지상에서 발을 떼 비상하고 있는 녀석도 있었다. 딴에는 혼신을 다해 중력을 극복하는 중일 테지만 겉으로는 침착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얼마 뒤 녀석이 지나간 자리에 안도의 긴 한숨 자국이 드러났다. 사람들이 비행운이라고 부르는 구름이었다.
<하루의 축> : 기옥씨는 청소 노동자이자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였다. 그녀는 전 세계인의 배설물이 버려지는 곳을 청소한다. 추석이라는 날은 더 힘든 하루일 뿐이었다. 추석을 하루 앞둔 날, 감옥에 갇힌 아들이 보낸 편지가 그녀에게 도착한다. '엄마, 사식 좀'이라는 다섯 글자가 적혀있었다.
다섯 글자가 주는 허무함 때문에 그녀는 결국 평정심을 잃는다. 자신의 민낯을 가리지도 못한 채, 그녀는 파트장 앞에 선다. 추석 당일 빵꾸난 자리를 메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파트장의 얼굴은 어두워진다. 어떤 경우에도 아픔을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6.
211. 호들갑스럽지 않게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정장. 백화점 할인매장에서 산 너무 비싸지도 싸지도 않은 핸드백. 담담한 질감의 소가죽 구두. 4월, 친하지 않은 친구의 결혼식에 가는 길. 책가방에 점수가 잘 나온 성적표를 담아 집으로 뛰어가는 아이처럼 나는 히죽 웃었다.
214. 월급날에 대한 확신과 기대는 조금 더 예쁜 것, 조금 더 세련된 것, 조금 더 안전한 것에 대한 관심을 부추겼다. 그러니까 딱 한 뼘만... 9센티미터만큼이라도 삶의 질이 향상되길 바랐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 많은 물건 중 내게 '딱 맞는 한 뼘'은 없었다는 거다. 모든 건 늘 반 뼘 모자라거나 한 뼘 초과됐다. 본디 이 세계의 가격은 욕망의 크기와 딱 맞게 매겨지지 않았다는 듯. 아직 젊고, 벌 날이 많다는 근거 없는 낙관으로 나는 늘 한 뼘 더 초과되는 쪽을 택했다.
<큐티클> : 당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가꾸고 타인 앞에 선다. 당신이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가꾼 손톱에. 피부에. 당신의 정장에. 핸드백에 구두에 적힌 성적표를 남들이 봐주길 바랄 것이다. 당신 자체가 아닌 당신의 겉을 바라봐주길 바라는 모습에서 소외가 드리워진다.
7.
<호텔 니약 따> : 모든 인간은 다르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은 타인보다 자신에게 안락한 것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로 인한 친구(서윤과 은지) 간의 갈등. 그리고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 자(다빈)의 허풍이 공존한다.
8.
294.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데. 다른 친구들은 무언가 됐거나 되고 있는 중인거 같은데. 저 혼자만 이도 저도 아닌 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해져요. 아니, 어쩌면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고요.
301. '열심히만 하면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오십대 남성의 강의를 들었어요. 너무 빤해서 들을 게 없는 강연 같죠? 맞아요, 언니. 그런데 그 빤한 게 사람 맘을 막 쥐고 흔들데요? '꿈'이라는 말을 듣는데 가슴 한쪽이 싸한 게 찌르르 아픈 것도 같고 좋은 것도 같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어요. 그리고 실은 제가 아주 오래전부터 그런 말을 간절히 듣고 싶어 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어요. 말 그대로 '교과서에 나오는 말 같은 거. 올바르고 아름다운데, 실은 아무도 믿지 않는 말들 말이에요.
<서른> : 삶에 대한 불안감이 당신의 눈을 흐리고 위험에 빠뜨린다. 당신은 무척이나 이성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당신을 둘러싸고 압박하는 부채는 당신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뭐든 해야만 했다. 그 '뭐든'에 담긴 속내엔 비행운이 감춰져 있었다. 세속적 '성공' 말이다.
당신을 옭아매려고 덫을 쳐놓고 있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당신은 그 세계를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람을 대신 집어넣었다. 과연 그는 당신이 견뎌내지 못했던 그곳을감당할 수 있었을까? 글쎄. 감당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 것이라고 생각핬을까? 그저 탈출하기 위해서 다른 희생양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당신의 위기를 모면하려 내리는 순간의 판단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을 끌어들이게 하고, 그의 목숨을 앗아가는 장면. 낯설지가 않았다. 얼마전 지니어스라는 TV 프로그램에서 고스란히 나온 장면이기도 했다.
소설집 <비행운>은 작가 김애란이 관찰한 이 시대의 슬픈 초상이었다.
이쯤이면 비행기의 연료가 타면서 생기는 매연 따위에 비행운이라고 특수한 의미 따위를 부여할 필요는 없고, 그것을 쫓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대가 만들어 낸 매연 같은 뜬구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쫓아야 하는가? <비행운>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건 사회 구조에서 비롯된 것은 전부 비행운(허상)이라고만 알려준다. 좀 더 인내심을 갖고 내면을 관찰할 필요가 있겠다. 그 관찰에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