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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
이창래 지음, 나중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월
평점 :
1. 전쟁과 전쟁터
142, 어쩌면 그것은 그들의 전쟁이 아니라 모택동이나 트루먼의 전쟁, 혹은 다른 누군가의 전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처음부터 애국심과 저항, 강경 외교정책과 평화주의만 선동하는 전쟁이었다.
작가의 말처럼 전쟁은 누군가를 위한 이데올로기 다툼일지 몰라도. 전쟁이 일어나는 전쟁터는 이데올로기 다툼이 일어나는 공간이 아니다. 이곳에서의 공식하나를 털어놓자면. 아마도 "내가 죽이지 않으면 적이 나를 죽인다"는 것일테다.
언제 죽을지도 모를 불안감과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이것은 인간에게 극도의 공포를 유발한다. 이러한 공포에 젖은 상황에서 불안감과 죄책감이라는 균형이 한꺼번에 무너지면 그들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죽는 자는 더욱 잔혹하게 죽고, 죽이는 자는 더욱 잔혹한 방법으로 죽인다. 이것이 바로 제노사이드다.
2. 제노사이드
제노사이드는 힘의 균형이 무너졌을 시 인간이 어떻게 변하는 지 잘 알려준다. 균형이 무너지면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동물의 본능은 그 얼굴을 드러낸다. 우리는 <파리대왕>이나 <암흑의 핵심>에서 매달린 머리라는 매개물을 통하여 그 본성을 똑똑히 읽은 바 있다.
제노사이드는 자신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려 든다. 그 이유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그들이 나중에라도 알지 못하도록. 복수를 방지하고자. 철저히 입막음을 하는 것일 테다. 다시 말해서, 아마도... 자신에게 해가 될 수 있는 이질적인 것을 씻어내려는 무의식적인 공포의 발현이 아닐까 싶다.
이창래 작가의 <생존자>는 1950년의 한국에서, 그리고 그 이전. 1934년 만주에서 벌여졌던 제노사이드를 피해자의 시점을 통해 보여준다.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일어난 전쟁. 힘의 균형이 무너진 전쟁터라는 공간. 포악해져버린 군인들은 피난 생활을 전전하던 준의 가족을 불의의 사고로 사망케 한다. 그리고 반전과 평화를 위해서 전쟁터의 한복판에 안식처를 마련한 실비의 가족을 잔혹하게 학살했다. 힘없는 이 여인들은 두 눈으로 이 참혹한 비극을 그저 지켜봐야만했다.
3. 생존자
준과 실비는 불행한 시기. 고난 속에서 살아남았다. 준과 실비 같은 직접적인 피해자의 신분은 아니지만, 전쟁을 참전했던 군인 헥터(전쟁 중에 살아남은 또 한 사람이자. 매일 겪는 죽음과 죽임을 견딜 수 없어서 후방의 작업을 자청했던 군인)도 마찬가지로 전쟁에서 살아남았다.
이창래 작가의 <생존자>는 전쟁 가운데 일어나는 학살과 고문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일반적인 제노사이드 문학과는 다르게 1930년의 전쟁과 1950년의 전쟁 이 후. 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추적하는 일을 진행한다. 전쟁으로 인하여 만신창이가 된 그들이 어떻게 인생을 꾸려나가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이창래 작가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고스란히 소설에 담아 놓았다. 결과적으로. <다윗과 골리앗>같은 성공의 산물은 아니었다. 그 책이 다루지 못한 수많은 실패의 사례 중에 하나가 바로 <생존자>다. 특히, 준의 경우 경제적으로 많은 부를 쌓았지만, 하루하루가 위태롭고 두려운 삶이었다. 그 증거로 가장 경제적으로 성공한 준은 아이러니하게도 <생존자>의 현실에서 삶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들의 삶은 분명히 전쟁에 의한 후유증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생존자> 또한 넓은 의미에서 제노사이드 문학이다.
4.
다시 강조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그들이 멀쩡해 보였을지 몰라도. 가족의 죽음을 목격하는 순간 내면은 이미 산산조각 나버렸다. 실비는 고통을 잊기 위해서 매번 마약에 의존했고, 헥터는 소중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하여 더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없게 되었고, 준 역시. 한국의 고아원에서 입양을 위해 몸부림 쳤지만 끝까지 버림받는다.
이런 '준'의 깊은 상처는 훗날, 시간이 흘러 고국을 도망치듯 떠나 도착한 낯선땅 미국에서 낳은 아들 '니콜라스'와도 유대감을 충분히 쌓지 못하게 한다. 낯선 곳에서 홀로 아들을 키워야 하는 입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을 채찍질하고. 과거를 잊기 위해 미친듯이 일을 했을 것이다. 아마 그래서 그의 아들의 의식 형성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준'의 아들은 그런 어머니를 만족시켜 드리기 위해서 전 세계를 떠돌면서 일에 매진한다. 하지만, <생존자>는 아들의 남 다르게 빠른 독립심과 유능한 재주까지도 비극의 재료로 사용한다.
대를 이어 내려오는 비극을 통해서 전쟁이라는 근원적인 것에 또 한 번 책임을 묻는다. 게다가 예전과는 다른 아들의 행동과 얼마남지 않은 삶이라는 불안에 아들을 찾아나선 준은 불안감을 야기했던 이유에 대해서 끝까지 알지 못한 채 눈을 감게 되는 설정은 전쟁에 더욱 큰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다.
5.
모자의 비극적 결말에 깊이 연관된 '헥터'는 다름아닌 그녀의 남편이자. 그의 아버지였다. 이 진실은 반전이 아니고 처음부터 공개되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리 큰 스포일러가 되지는 않는다. 반전은 따로 있다. 헥터가 니콜라스의 아버지라는 것보다 더 큰 반전은 <생존자>에서 가장 극적인 만남에서 생겨나는 어떤 이질감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누군가 물어본다면 비밀글로 대답해 줄 용의는 있다.
152. 헥터는 무질서가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면 거기에 맞서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서로를 갈망하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혼란과 무질서에 대한 원초적인 저항은 사랑이었다. 모든 이야기가 그렇게 짜여져 있었다. 물론 상미와 정. 두 사람 사이에는 친밀함이나 육체적 접촉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다. 헥터는 도라와 자신의 관계도 어쩌면 사랑이 아니라 친밀함 속에서 위안을 얻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항상 그랬지만 그에게는 누구 하나 마땅히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헥터의 생각이면서 동시에 이창래 작가는 무질서가 세상을 지배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서로를 갈망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이름의 강렬한 갈망은 이 세 주인공에게 모두 트라우마만 짊어지게 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하는 사람이 그들의 곁을 떠날 때 찾아오는 고통 또한 더욱 크다는 트라우마 말이다. 이 세사람은 끝내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다.
그래서 헥터는 36년이 흐른 <생존자>의 현재까지도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기대했던 '도라'라는 여인이 일말의 희망이었으나. '헥터'를 알게 되고, '준'을 만나게 됨으로써 어이없이목숨을 잃는데. 이 장면은 어쩌면 <생존자>의 가장 큰 옥의 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이 트라우마는 1950년 당시의 고아원에서 실비가 끝내 헥터와 준을 외면했던 이유이기도 하고, 36년이 흐른 <생존자>의 현재 시간에서 준이 홀로 치열하게 삶을 살아온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헥터'가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6.
짧게 <생존자>는 "전쟁은 소중한 사람을 잃게 하고, 그것은 살아 남은 자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는 그 트라우마를 죽을 때까지 극복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트라우마는 점점 더 커져서 왜곡되어 타인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이 메시지를 위해 이창래 작가는 700페이지에 달하고. 반세기의 시간과 미국과 한반도와 만주와 이탈리아라는 공간을 뛰어넘는 위대한 서사를 완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