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박상익 교수가 번역한 책을 읽고 있다.
'호메로스에서 돈 키호테까지'
쉽지 않은 역사서지만, 매끄러운 번역에 감사하며 읽고 있다.

박상익 교수가 쓴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책이 있어 쭉 살펴보았다.

국내외 번역의 현주소와 나름대로의 제안을 내놓았다.

우선 중국은 서역의 불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면서,
일본은 메이지유신 시대 서양의 장점을 흡수하기 위해서 번역하면서
그 나라 학문연구의 기초를 닦았다고 한다.
서유럽도 이슬람 점령지를 재탈환하면서 아랍어로 번역된 그리스 철학 문서를
다시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겪었다고 한다.

반면 우리나라의 번역경시 풍조에 대해서도 말한다.

1. 번역은 학문성과로 인정받지 못함
2. '매춘교수' 또는 '기지촌교수'들의 대학원생들에게 나눠주어 취합한 날림 번역의 문제
3. 번역료의 문제 : 원고지 1장당 1,300원 정도의 헐값

위 문제들은 1985년도에 출간된 도올 김용옥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
이미 제기되었던 것으로, 박상익 교수도 도올 김용옥을 계속해서 인용한다.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서유럽이 고대 그리스 철학을 이슬람 문명을 통해 받아들였다는 부분이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이슬람 문명이 발전하면서
고대 그리스의 문화는 이슬람 문명에 의해 번역되어 흡수, 발전되었고,
나중 서유럽이 이슬람 점령지를 재탈환할 때 발견된 아랍어로 번역된 그리스 철학 문서를
다시 라틴어로 번역하게 되었고, 그 결과 르네상스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박상익 교수의 말대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우리에게는 지금의 '잃어버린 100 년'이
'잃어버린 200 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수 많은 번역가들의 노고를 날로 받아먹는 독자의 입장에서,
그리스, 로마 고전의 원전을 번역하고 있는 천병희, 강대진 교수와
이 책을 쓴 서양사 부문의 박상익 교수,
그리고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도올 김용옥 선생님

이 분들이 건강하게 오래도록 번역 작업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수상한 시절을 헤쳐나갈 수 있는 해답은
인문학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인문학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번역가들이 인정받는 시대도 곧 올 것이다.



- 도올 김용옥 번역 작업 리스트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1985) - 번역의 문제제기
화이트헤드 : 이성의 기능(1998)
금강경강해(1999)
노자 도덕경 : 길과 얻음 (2000)
요한복음강해(2007)
큐복음서(2008)
논어한글역주(2009)
효경한글역주(2009)

도올 김용옥 비판서들 중에 학문적 성과를 예로 들면서,
아직까지 제대로 이룬 것이 않느냐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여럿인데,
이 사람들은 위에 말한 대로 번역을 학문적 성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님이 강의하실 때
자기 소원이 13경을 번역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작업에 돌입하신지 꽤 시간이 흐른 것 같다.
끝까지 완수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 13경
<주역><서경><시경><주례><예기><의례><춘추좌씨전><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논어><효경><이아><맹자>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http://www.koreanhistory.or.kr/)
민족문화추진위에서 고전 국역사업을 계속해서 진행하는 중이다.
역사 좋아하는 분들은 위에서 모든 국역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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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금서
김진명 지음 / 새움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의 댄 브라운. 김진명.
한(韓)의 기원을 밝히다.

이야기 자체는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서 생략하고,
쟁점이 되는 부분만 적어본다.

봉 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린다. 짐은 생각건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우 리 태조(太祖)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국토 밖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탐라국(耽羅國)을 차지하여 귤, 유자, 해산물을 공납(貢納)으로 받게 되었다. 사천 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王業)을 세웠으니, 예악(禮樂)과 법도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을 이어받았고 국토는 공고히 다져져 우리 자손들에게 만대토록 길이 전할 반석같은 터전을 남겨 주었다.
 
짐이 덕이 없다 보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상제(上帝)가 돌봐주신 덕택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안정되었으며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 군사들과 장사꾼들이 한목소리로 대궐에 호소하면서 수십 차례나 상소를 올려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짐이 누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올해 9월 17일 백악산(白嶽山)의 남쪽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大韓)’ 으로 정하고 이해를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으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 썼다. 왕후(王后) 민씨(閔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이리하여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큰 의식을 비로소 거행하였다. 이에 역대의 고사(故事)를 상고하여 특별히 대사령(大赦令)을 행하노라.


- 고종 36권, 34년(1897 정유 / 대한 광무(光武) 1년) 10월 13일(양력) 2번째기사

고종은 삼한 얘기를 한 뒤에 국호를 대한이라 하여 대한제국이 삼한을 잇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진명은 여기서부터 가설을 출발하는데,
만약 기존의 학설대로 삼한이 한반도 남부에 위치했다면,
이미 압록강을 포함한 한반도 북부를 차지하고 있던 조선이
굳이 삼한을 잇는다는 의미로 대한제국을 선포했을리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한보다 더 큰, 삼한 이전의 한(韓)나라가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걸 찾아보자는 것이다.


1.사료의 실존여부

<가상의 책>

나는 오성의 집결을 관측하고 기록한 흔적을 보고 동국이 이미 큰 나라를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로부터 천년 후 이들의 자손이 주를 찾았으니 그 내력이 중화에 못지않으리라. 놀라운 일이로다! 놀라운 일이로다!

- 왕부, 지명원류고
* 사실 꽤 드라마틱한 부분이었는데 가상의 책이라니 개인적으로 참 아쉽다.

그 외 왕부의 씨성본결, 왕부 후손의 유한집 전부 가상의 책


<실재하는 책>

단군세기
잠부론
시경

그렇다면 실재하는 이 세 권의 책에서 인용되는 부분을 살펴보자.


1. 단군세기 :  환단고기의 한 부분으로 위서로 여겨지고 있음.

오성취루 - BC1734년에 일어난 것으로 단군세기에 기록된 오성취루는
               5C 중국 한나라 사서에 기록되어 있고,
               따라서 단군세기가 작성되었다는 13C에는
               당연히 역산해서 기록될수 있어 진서의 근거로 사용될 수 없음.

十三世檀君 屹達(一云代音達)   在位六十一年

己卯元年
甲午十六年定州縣立分職之制官無兼權政無越則民無離鄕自安所 事絃歌溢域是歲冬殷人伐夏其主桀請援帝以邑借末良率九桓之師 以助戰事湯遣使謝罪乃命引還桀違之遣兵遮路欲敗禁盟遂與殷人 伐桀密遣臣智于亮率 軍合與樂浪進據關中 岐之地而居之設官 制
戊戌二十年多設蘇塗植天指花使未婚子弟讀書習射號爲國子郞國 子郞出行頭揷天指花故時人稱爲天指花郞
戊辰五十年五星聚婁黃鶴來棲苑松
己卯六十一年帝崩萬姓絶食而哭不絶仍命釋囚 禁殺放生過歲而 葬之牛加古弗立


척 -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倜'이 아니라 '尺'이므로 논할 필요가 없다.

二十九世檀君 摩休   在位三十四年

戊寅元年周人入貢
乙酉八年夏地震
丙戌九年南海潮水退三
辛亥三十四年帝崩太子奈休立



2. 시경 한혁편

시경 한혁편은 주나라 선왕(BC 827~782)이 한후(韓侯)를 만나는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
이 한후는 시대적으로 진(晉)나라가 분열한 후의 한나라(BC403~230)의 한후가 될 수 없으므로,
이 한나라는 다른 나라일 것이고, 아마도 우리 민족의 조상 한국, 고조선일 것이라는 것이
김진명의 생각이다.

詩經,  大雅‧,  蕩之什,  韓奕

    奕奕梁山,維禹甸之。               크고 큰 양산(梁山)은 우임금이 다스리셨네
    有倬其道,韓侯受命。               밝으신 그 도로 한후(韓侯)가 명을 받았네
    王親命之,纘戎祖考,               왕께서 친히 명하시어 그대의 조상 공적을 이어
    無廢朕命,夙夜匪解,虔共爾位。짐의 명령을 저버리지 말고 낮밤 없이 게으르지 말며 그대 지위 삼가 공경하라.
    朕命不易,榦不庭方,以佐戎辟。짐의 명령은 바꾸지 않으리라, 내조하지 않는 제후 바로 잡아 그대의 임금 보좌하라.


    四牡奕奕,孔脩且張。               네 필 수말 크기도 하며 길고 큰 몸집 당당하네.
    韓侯入覲,以其介圭,入覲于王。한후가 들어와 왕을 뵈올 제 그 큰 홀[圭]을 받들고 왕에게 인사드리네.
    王錫韓侯,淑旂綏章。               왕께서는 한후에게 하사하시니 무늬 있는 깃대와
    簟茀錯衡,玄袞赤舄。               새깃 깃발 대자리 덮개와 고운 멍에채. 검은 곤룡포에 붉으신 고리달린 말배띠와
    鉤膺鏤鍚,鞹鞃淺幭,鞗革金厄。무늬 있는 당로 수레의 가로막이 나무 턱, 호피덮개 고삐 줄 황금고리였네.


    韓侯出祖,出宿于屠。               한후 노제를 지내고 가다가 도(屠)땅에 머무셨네
    顯父餞之,清酒百壺。               현보(顯父)가 송별잔치 하니 맑은 술이 백병이나 되네.
    其殽維何?炰鼈鮮魚。               그 안주는 무엇인가 구운 자라와 싱싱한 생선이네.          
    其蔌維何?維筍及蒲。               그 나물은 무엇인가 죽순과 부들이었네.
    其贈維何?乘馬路車。               그 선물은 무엇인가 네 필 말과 큰 수레네.
    籩豆有且,侯氏燕胥。               대그릇 나무그릇 많기도 하니 한후 기뻐하여 즐기네.


    韓侯取妻,汾王之甥,蹶父之子。한후가 장가를 드니 분왕(汾王)의 생질이요 궤보(蹶父)의 따님이네.
    韓侯迎止,于蹶之里。               한후가 아내로 맞이하러 궤씨네 마을까지 갔네.
    百兩彭彭,八鸞鏘鏘,不顯其光。많은 수레 의젓하게 달리며 여덟 말방울 딸랑거리니 그 빛 매우 밝았네.
    諸娣從之,祁祁如雲。               따라오는 여러 몸종들 줄지은 것이 구름 같네.
    韓侯顧之,爛其盈門。               한후가 뒤돌아보니 찬란한 빛 그 문 안에 가득하네.


    蹶父孔武,靡國不到。               궤보는 매우 용감하여 가보지 않은 나라 없으며
    為韓姞相攸,莫如韓樂。            딸 시집보낼 곳을 찾아보니 한나라만한 곳이 없더라네.
    孔樂韓土,川澤訏訐。               즐거운 한나라 영토여, 시냇물 못물이 넘쳐흐르고
    魴鱮甫甫,麀鹿噳噳。               방어와 서어 뛰놀고 암사슴 떼지어 풀을 뜯고
    有熊有羆,有貓有虎。               곰과 말곰이 있으며 살쾡이도 있고 범도 있네.
    慶既令居,韓姞燕譽。               이미 좋은 곳을 가려 잔치하니 궤보 딸도 좋아하네.


    溥彼韓城,燕師所完。               높은 저 한나라 성은 연나라 백성이 완성시켰네
    以先祖受命,因時百蠻。            조상의 명을 받들어 여러 오랑캐를 다스리시니
    王錫韓侯,其追其貊。               왕께서 한후에게 추나라와 맥 땅까지 내리셨네
    奄受北國,因以其伯。               북쪽 나라 맡아 다스리고 그곳의 제후가 되셨네
    實墉實壑,實畝實藉。               성 쌓고 호 파고 밭 정리하고 부세하여
    獻其貔皮,赤豹黃羆。               비가죽(貔皮)과 표범가죽 누런 말곰가죽을 바치네.


- 시경 , 이상진․황송문 역, 자유문고, 1994

3. 왕부 잠부론

晉穆侯生桓叔,桓叔生韓萬,傅晉大夫〔一〕,十世而為韓武侯,五世為 韓惠王,五世而亡國〔二〕。襄王之坥孫信,俗人謂之韓信都〔三〕。高祖以信為韓王孫,以信為韓王,後徙王代,為匈奴所攻,自降之〔四〕。漢遣柴將軍擊之, 斬信於參合,信妻子亡入匈奴中。至景帝〔五〕,信子頹當及孫赤〔六〕來降,漢封頹當為弓高侯,赤為襄城侯。及韓嫣,武帝時為侍中,貴幸無比。案道侯韓說, 前將軍韓曾〔七〕,皆顯於漢〔八〕。子孫各隨時帝分陽陵、茂陵、杜陵〔九〕。及漢陽、金城諸韓,皆其後也。信子孫餘留匈奴中〔一〇〕者,亦常在權寵,為貴 臣。及留侯張良,韓公族姬姓也。秦始皇滅韓,良弟死不葬,良〔一一〕散家貲千萬,為韓報讎,擊始皇於博浪沙中,誤椎副車。秦索賊急,良乃變姓為張〔一 二〕,匿於下邳,遇神人黃石公,遺之兵法。及沛公之起也,良往屬焉。沛公使與韓信略定韓地,立橫陽君城〔一三〕為韓王,而拜良為韓信都〔一四〕。信都者 〔一五〕,司徒也。俗前〔一六〕音不正,曰信都,或曰申徒〔一七〕,或勝屠〔一八〕,然其本共一司徒耳。後作傳者不知“信都”何因,彊妄生意,以為此乃代 王為信都也。凡桓叔之後,有韓氏、言氏〔一九〕、嬰氏〔二〇〕、禍餘氏〔二一〕、公族氏〔二二〕、張氏,此皆韓後姬姓也。1) 昔周宣王亦有韓侯,其國也〔二三〕近燕,故詩雲:“普彼韓城,燕師所完〔二四〕。2) ”其後韓西亦姓韓,為魏滿所伐,遷居海中〔二五〕。

- 王符,  潛夫論,  卷九,  志氏姓

<이병도 - 한씨조선설>
이병도는 2)에서 ‘韓西’를 ‘韓東’의 오기로 보고, 한후의 한국(韓國)과 조선을 별개로 인식하면서
2)를 ‘(한국이 생긴 후에) 그 한국의 동쪽[朝鮮]에서도 또한 한씨 성을 일컫더니
(그 후에)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해중으로 천거하였다’고 보았다.
즉 그는 잠부론의 위 구절은 조선 왕의 성(姓)이 한씨였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렇지만 그 한씨는 한국과는 별개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의 왕이 한씨 성을 칭한 것은 우리말과 관련 있다고 보았다.
즉 만몽어에 군장을 汗(Han) 혹은 可汗(Khahan)이라 하고, 부여․고구려에서도 대인을 加(Kha),
신라에서도 군장․대인을 干(Khan), 今(Khum)이라 한 것 등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81

<윤내현>
윤내현은 이병도가 잠부론 의 ‘韓西’는 ‘韓東’의 오기로 본 것은 중대한 착오라고 했다.
그는 이병도가 인용한 잠부론의 바로 앞부분을 들면서 왕부의 지적에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

무릇 桓叔의 후손으로는 한씨(韓氏)․ 언씨(言氏)․영씨(嬰氏)․화여씨(禍餘氏)․공족씨(公族氏)․장씨(張氏)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韓의 후손으로 姬姓이었다(한편 옛날 주 선왕 때에 또한 한후가 있었으니 그 나라는 연나라에서 가까웠다. …).

윤내현은 잠부론 에서 왕부가 전하려고 한 뜻은 서주 왕실과 동성인 희성으로서
韓나라의 제후였던 桓叔의 후손으로는 韓氏․言氏․嬰氏․禍餘氏․公族氏․張氏 등이 있었으니
이들은 모두 성이 희(姬)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한(韓)과 다른 또 하나의 한후(韓侯)가 있었으니 그 나라는 연나라에서 가까웠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병도가 인용한 부분의 잠부론 은 정확한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앞에 나오는 한후는 연나라의 동쪽에 있던 그 지역 토착세력의 왕[君長]을 의미하고,
뒤의 한은 기자국의 준을 뜻하는 것이니 기자국이 한후의 서쪽에 있었다는 표현은 정확한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주 선왕 때에 연나라에 가까웠던 한후는 고조선한국를 가리키고
그 고조선한국의 서쪽에는 기자한국이 있었는데 이 기자한국이 위만에게 공벌당해서 해중으로 옮겨가 살았다는 것이다.

- 윤내현, 고조선 연구 , 일지사, 1999

* 윗 부분은 정형진, 『시경』한혁편의 한후와 한씨조선에 관한 새로운 견해, 단군학연구 제13호, 2005. 12 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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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 찾다보니까 책에서처럼 쉽게 결론내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김진명이 내세운 사료들 중 의미있는 것은 시경과 잠부론이다.
이 두 가지는 기원전 9세기 주나라 시대에 한(韓)나라가 있었고,
기원전 5세기에 또 다른 한(韓)나라. 즉 두 개의 한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한나라가 고조선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아직까지 학계에서 정설이 정해지지 않은 부분으로 지금도 계속해서 연구중이다.

나도 이병도 교수보다는 윤내현 교수의 이론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면에서는 김진명과 마찬가지 입장이지만,
쉽게 결론내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면에서는 김진명과 완전 다른 입장이다.

김진명처럼 비약이 심한 팩션은 곧이곧대로 믿으면 정말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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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그리고 또 다른 <재즈 시대 이야기들>, 펭귄 클래식 펭귄클래식 11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박찬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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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먼저 보고 이제야 책을 읽었다.

영화는 1918년 1차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시작되어 2003년에 막을 내리고,
책은 1860년 남북전쟁 발발(1861)을 앞두고 시작되어 1930년에 막을 내린다.

1860년(0살, 70살) 벤자민 버튼은 태어나자마자
                        70살 먹은 아기였으며, 키는 173cm였으며,
                         부처님처럼 바로 말을 시작했다.

                         "로저 버튼, 당신이 내 아버지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대신 하바나 시가를 즐겨 피웠다.

1888년(18살, 52살) 예일대에 합격했으나 입학식 때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주름살이 팬
                          나이든 외모 때문에 놀림을 당하고 쫓겨나고,
                          복수를 다짐하며 아버지와 사업을 같이 하게 된다.

1890년(20살, 50살) 아버지와 함께 참석한 무도회장에서 힐데가르드를 보고 첫눈에 반해 결혼한다.
                          그는 50살의 외모로 20살의 힐데가르드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1895년(35살, 35살) 결혼 15년 후 35살이 된 힐데가르드 보다 더 젊고 활력이 넘쳤다.
                           아들 로스코는 14살이 되었다.

1898년(38살, 32살)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하고
                          그는 육군 대위로 입관해 혁혁한 공을 세우고 금의환향한다.

1900년(40살, 30살) 집으로 돌아온 그는 이제 40살의 나이 든 아내를 보게 된다.
                           반면에 더할 나위 없이 활력에 넘치고 삼십대로 보이는 벤자민은
                           사교계를 주름잡으며 각종 새로운 댄스를 유행시킨다.

1909년(49살, 21살) 로스코는 하버드를 졸업한다.

1910년(50살, 20살)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벤자민은 하버드에 입학하여
                          풋볼시합에 참가하여 예일대를 떡실신시키며 복수한다.

1915년(55살, 15살) St.Midas 고등학교에 가고 싶지만 로스코가 같이 가주지 않음.

1917년(57살, 13살) 1차세계대전 참전을 앞두고 군대에서 육군준장으로 다시 참전해주기를 통보.
                           13살의 꼬마 모습이던 그는 군대에 갔다가 망신만 당하고 로스코의 손을 잡고 울며 돌아옴.

1920년(60살, 10살) 로스코의 아들, 벤자민의 손자 탄생

1928년(68살, 2살) 보모 나나가 돌봄.

1930년(70살, 0살) 벤자민, 달콤하고 따뜻한 우유향을 맡으며 눈을 감다.


책은 1922년에 출간되었다.

대공황이 오리라곤 상상하지도 못했던 시기.
자기의 욕망에 솔직해지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행복이었던 시대.

벤자민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다 이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어려진다면,
살아갈 수록 삶이 재밌어지겠다.

심지어 생의 마지막에는
두려움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달콤하고 따뜻한 우유처럼
부드럽게 맞이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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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양록- 바다 건너 왜국에서 보낸 환란의 세월
강항 지음, 이을호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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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05일에 저장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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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남아있는 그리스 비극 중에 오이디푸스와 관련된 이야기는 6편이다.
대략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 아래와 같다.


<오이디푸스 왕> Oidipous Tyrannos  - 소포클레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Oidipous epi Koloni - 소포클레스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 Hepta epi Thebas - 아이스퀼로스
<포이니케 여인들> Phoinissai - 에우리피데스
<안티고네> Antigone - 소포클레스
<탄원하는 여인들> Hiketides - 에우리피데스


그렇다면 왠지 낯익은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1. 테바이 오이디푸스 가문 가계도


랍다코스                             메노이케우스(스파르토이)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                                                           |
라이오스~이오카스테                                             크레온~에우뤼디케 
            |                                                        __________|________
            |                                                        |                          | 
      오이디푸스~이오카스테                            하이몬               메노이케우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                 |             |    
에테오클레스  폴뤼네이케스  안티고네   이스메네 



2. 오이디푸스 가문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 - 소포클레스>

테바이 왕 라이오스는 자기가 낳은 아들이 자기를 죽이고 자기 부인과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신탁을 받는다.
(이런 신탁을 받는 이유로 라이오스가 펠로폰네소스 지방에 머물 때 펠롭스의 아들 크뤼십포스를 사랑하게 된,
 즉 동성연애를 하게 된 벌이라는 견해가 있다. [아폴로도로스,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5권 5장-5]) 

그래서 아들 오이디푸스를 낳자마자 두 다리를 묶어(못으로 꿰었다고도 한다.) 키타이론 산에 버리도록 명령한다.
아이를 불쌍히 여긴 가신은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그 아이를 넘기고 결국 아이는 코린토스에서 왕손으로 자라난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는 두려운 나머지
부모가 살고 있는 코린토스에서 멀리 떨어진 테바이로 떠난다.

<목자에 의해 새로운 삶을 얻게 된 오이디푸스, Antoine-Denis Chaudet, 1801, 루브르>

테바이로 가던 중에 한 무리의 전차를 만난다. 마부는 그를 무시하고 전차에 타고 있던 사람은 그를 때리기까지 한다.
울컥하는 마음에 지팡이를 휘둘러 그들을 죽이고 만다.

한편 테바이에서는 여인의 얼굴과 사자몸에 날개가 달린 스핑크스가 나타나 수수께끼를 내고
풀지 못한 사람들을 계속 잡아먹고 있다. 오이디푸스가 때마침 나타나 수수께끼를 푼다.

"목소리는 하나인데, 처음에는 발이 네 개, 그 다음에는 두 개, 마지막에는 세 개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

"두 자매가 있는데 서로 번갈아 낳아주는 것은 무엇이냐?"
"낮과 밤"

스핑크스는 절망하여 절벽에서 스스로 떨어져 죽고,
사람들은 비어있는 왕위에 오이디푸스를 앉히고 왕비와 결혼시킨다.
오이디푸스는 왕비 이오카스테와의 사이에서 아들 둘, 딸 둘을 얻어서 평온한 세월을 보낸다.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805, 루브르>

그러던 어느 날 테바이 전역에 역병이 돌아 사람들이 죽어가고 곡식은 이삭을 맺지 못하고
동물들을 새끼를 낳지 못한다. 오이디푸스가 신탁을 묻자 이 나라를 오염시킨 범죄 때문이며
그 범죄를 없애야만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오이디푸스는 전 왕 라이오스가 살해당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 범인을 찾기 위해 눈 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부른다. 테이레시아스는 참혹한 과거를 알리기 싫어 입다물고 있지만
오이디푸스의 거듭된 위협에 결국 범인은 바로 당신, 오이디푸스라고 지목한다.

믿을 수 없는 얘기에 놀란 오이디푸스는 오히려 테이레시아스와 그와 함께 있던 크레온을 역모로 몬다.
그 때 마침 코린토스로부터 도착한 사자가 오이디푸스의 부친 폴뤼보스 왕의 죽음을 알린다.
또한 오이디푸스는 사실 폴뤼보스 왕의 친아들이 아니며 그를 발견했던 사람이 다름 아닌
사자 자신이라고 말한다. 충격을 받은 오이디푸스는 마지막으로 사자에게 아이를 넘겨준 가신을 찾는다.
가신은 라이오스 왕이 죽던 날, 혼자 살아남아 변방에서 목자로서 살아가고 있다.

불려온 가신은 아이를 넘겨준 사자를 보고 놀라면서 라이오스를 죽인 사람이 바로 눈 앞에 있는 오이디푸스라고 말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이자 아내 이오카스테와 결혼해서
자신의 형제/자매이자, 자식들을 낳았던 것이다.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는 밧줄에 목을 매어 죽고 오이디푸스는 절규하며 자신의 두 눈을 찌른다.

"이제 너희들은 내가 겪고 있고, 내가 저지른 끔찍한
 일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너희들은 보아서는 안 될
사람들을 충분히 오랫동안 보았으면서도
내가 알고자 했던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했으니,
앞으로는 어둠 속에서 지내도록 하라!"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는 두 눈이 먼 채로 딸 안티고네와 함께 테바이에서 추방된다.
정처없이 헤메다 아테나이 근처 콜로노스의 복수의 여신들의 신전에 도착한 그들에게
막내딸 이스메네는 그간의 테바이 소식을 알린다.

오이디푸스가 추방된 뒤 왕위를 이어 받은 장남 폴뤼네이케스는
아우 에테오클레스에 밀려 쫓겨난다. (나머지 얘기에서는 이 둘의 관계가 반대다.)
아르고스에서 세력을 결집한 폴뤼네이케스는 
테바이를 침략할 준비를 마친다.

복수심에 불타는 형제에게 신탁이 내린다.

"오이디푸스를 얻는 사람이 전쟁에서 이기리라."

에테오클레스의 명령을 받은 오이디푸스의 외삼촌 크레온이 테바이로 오이디푸스를 데려가기 위해
안티고네를 납치하자 오이디푸스는 아테나이 왕 테세우스에게 그를 지켜줄 것을 탄원한다.
테세우스는 안티고네를 무사히 구출하고 크레온의 세력을 무사히 막아낸다.

이제 테바이를 침략하기 전 장남 폴뤼네이케스가 오이디푸스를 방문한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그가 추방당할 때 어떤 일도 하지 않은 채 침묵으로 일관한
두 아들이 서로 싸우다 죽을 것이라는 저주를 내린다.

결국 누구도 오이디푸스의 마음을 얻지 못한 채 전쟁은 벌어진다.
오이디푸스는 탄원을 들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테세우스에게
신의 비의를 알려주고 세상을 떠난다.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Johann Peter Krafft, 1809>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 - 아이스퀼로스>
<포이니케 여인들 - 에우리피데스>
<안티고네 - 소포클레스>

남겨진 두 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는 다시 테바이로 돌아온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테바이가 아르고스와의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크레온의 아들 메노이케우스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한다.

메노이케우스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 결국 테바이의 일곱 장수를 막아낸다.
하지만 일대일로 맞선 폴뤼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는 결국 서로 죽이고 만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죽자 왕위에 오른 크레온은
테바이를 위해 싸운 애국자 에테오클레스는 정중히 장례를 치러주되
테바이를 침략한 배신자 폴뤼네이케스는 아무도 손대지 말고
개 떼와 새 떼에게 뜯어먹히도록 놔두라고 명한다.

하지만 오라비를 가엾게 여긴 안티고네는 폴뤼네이케스를 매장하려다 발각당해 체포된다.
크레온은 아들 하이몬과 안티고네를 결혼시키려던 마음을 바꿔 그녀를 동굴에 가두어 굶겨 죽일 것을 명한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신의 불문율을 따른 그녀를 죽이면 크레온에게 불행한 일이 닥칠 것이라고 말하자
크레온은 두려워져 그녀를 살려주기로 결심한다. 

크레온은 찾아간 동굴에서 목매어 죽은 안티고네를 안고 흐느끼는 하이몬을 발견한다.
하이몬은 분노에 휩싸여 크레온의 얼굴에 침을 뱉고 아버지에게 칼을 던지지만 빗나가자
망설임없이 자기의 옆구리에 칼을 찔러 죽음을 택한다.

이 소식을 들은 크레온의 아내이자 하이몬의 어머니인 에우리뒤케도 칼로 가슴을 찔러 자결하고,
크레온은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며 울부짖는다.

<탄원하는 여인들 - 에우리피데스>

테바이를 공격한 아르고스의 일곱전사들이 전사하자 테바이인들은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그들의 시신을 돌려달라는 아르고스 측 요구를 거절하는데, 이는 그리스인들의 신성한 관습에 위배된다.

이들 장수들의 어머니들이 원정을 주도했던 아르고스 왕 아드라스토스와 함께 아테나이 근처에 있는 엘레우시스에 있는
데메테르 여신의 신전을 찾아가 마침 그 곳에서 기도하던 아테나이 왕 테세우스의 어머니 아이트라에게 자식들의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도와달라고 탄원한다. 테바이인들의 전령이 나타나 이들을 넘겨달라고 위협하듯 요구하지만,
테세우스는 단호히 거절하고 무력으로 시신들을 찾아온다. 그리하여 장례식이 치러지자 일곱 장수 중 한 명인
카파네우스의 아내 에우아드네가 남편의 화장용 장작더미에 뛰어들어 죽는다.


<뒷 얘기>

테바이를 공격한 아르고스의 일곱전사들의 아들들(Epigonoi)은 다시 테바이를 공격하여 점령한다.

이 과정에서 오이디푸스의 손자이자 에테오클레스의 아들 라오다마스가 죽자
그 자손들은 엔켈레이스족(알바니아 근처)에게 피신하거나 아테나이로 떠났다고 한다.

[헤로도토스, 역사, 5권 61장]

오이디푸스의 또다른 아들인 폴뤼네이케스의 자손들은 라케다이몬(스파르테)에 살다가
테라스 때에 테라(산토리니섬)로 가서 식민지를 건설했다고 한다.

오이디푸스
     |
폴뤼네이케스
     |
테르산드로스
     |
테이사메노스
     |
아우테시온
     |
 테라스
     |
오이롤뤼코스
     |
아이게우스
 
스파르테의 주요 씨족인 아이게이다이 가는 그에게서 이름을 따왔다.
이 가문의 남자들에게 태어난 자식들은 늘 요절했다.
그래서 신탁의 조언에 따라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의 원혼들에게 사당을 지어주었다.
그러자 아이들이 제명대로 살았는데 테라에 살던 아이게이다이 가의 후손들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헤로도토스, 역사, 4권 147~14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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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이야기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직접 살펴보니 모르고 있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도 모른 채 죄를 저지른다.
하지만 신의 도움으로 처벌을 면하는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와는 다르게
그는 자신의 손으로 두 눈을 찔러 묵묵히 죄값을 치른다.

물론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는 변명을 하기도 한다.
아버지를 죽인 것은 내가 살기 위한 정당방위였고,
어머니와 같이 결혼하게 된 것은 몰랐기 때문에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정당방위와 모르고 저지른 범죄는 죄가 아니라는 논리를 앞세우나
사실 신의 비밀을 밝혀내려는 자만심과 호기심이 이미 죄라는 것을
불행을 겪고 난 오이디푸스는 알고 있다.

처음 테바이에 역병이 돌 때 오이디푸스는 경솔하게도 범인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말한다.
그 범인이 자기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한줌도 없다.
범인을 밝혀내려는 호기심과 스핑크스에게서 테바이를 구해냈듯이
이번에도 자기만이 범인을 밝혀낼 수 있으리라는 자만심만이 가득하다.

이런 인간에게 신의 심판은 가혹하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 비극의 특징인 딜레마를 경험한다.

그리스 비극의 인물들은 자신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 발버둥치나
그것이 결국 자신의 운명을 완결시키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오이디푸스는 생부로 알고 있던 양부 코린토스왕을 죽이지 않기 위해 떠나와야했지만
결국 진짜 생부 라이오스왕을 죽이고 만다.

왕으로서 테바이의 역병을 치료해야 위해 그렇게 열심히 찾았던
범인의 정체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인간은 빠져나갈 수 없는 신의 덫.

하지만 신은 불행이라는 고통으로 인간을 쓰러뜨리지만
성숙이라는 보상으로 다시 일으켜준다.

가혹하지만 인간은 여기에 만족해야 한다. 신이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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