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금서
김진명 지음 / 새움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의 댄 브라운. 김진명.
한(韓)의 기원을 밝히다.

이야기 자체는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서 생략하고,
쟁점이 되는 부분만 적어본다.

봉 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린다. 짐은 생각건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우 리 태조(太祖)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국토 밖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탐라국(耽羅國)을 차지하여 귤, 유자, 해산물을 공납(貢納)으로 받게 되었다. 사천 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王業)을 세웠으니, 예악(禮樂)과 법도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을 이어받았고 국토는 공고히 다져져 우리 자손들에게 만대토록 길이 전할 반석같은 터전을 남겨 주었다.
 
짐이 덕이 없다 보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상제(上帝)가 돌봐주신 덕택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안정되었으며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 군사들과 장사꾼들이 한목소리로 대궐에 호소하면서 수십 차례나 상소를 올려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짐이 누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올해 9월 17일 백악산(白嶽山)의 남쪽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大韓)’ 으로 정하고 이해를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으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 썼다. 왕후(王后) 민씨(閔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이리하여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큰 의식을 비로소 거행하였다. 이에 역대의 고사(故事)를 상고하여 특별히 대사령(大赦令)을 행하노라.


- 고종 36권, 34년(1897 정유 / 대한 광무(光武) 1년) 10월 13일(양력) 2번째기사

고종은 삼한 얘기를 한 뒤에 국호를 대한이라 하여 대한제국이 삼한을 잇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진명은 여기서부터 가설을 출발하는데,
만약 기존의 학설대로 삼한이 한반도 남부에 위치했다면,
이미 압록강을 포함한 한반도 북부를 차지하고 있던 조선이
굳이 삼한을 잇는다는 의미로 대한제국을 선포했을리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한보다 더 큰, 삼한 이전의 한(韓)나라가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걸 찾아보자는 것이다.


1.사료의 실존여부

<가상의 책>

나는 오성의 집결을 관측하고 기록한 흔적을 보고 동국이 이미 큰 나라를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로부터 천년 후 이들의 자손이 주를 찾았으니 그 내력이 중화에 못지않으리라. 놀라운 일이로다! 놀라운 일이로다!

- 왕부, 지명원류고
* 사실 꽤 드라마틱한 부분이었는데 가상의 책이라니 개인적으로 참 아쉽다.

그 외 왕부의 씨성본결, 왕부 후손의 유한집 전부 가상의 책


<실재하는 책>

단군세기
잠부론
시경

그렇다면 실재하는 이 세 권의 책에서 인용되는 부분을 살펴보자.


1. 단군세기 :  환단고기의 한 부분으로 위서로 여겨지고 있음.

오성취루 - BC1734년에 일어난 것으로 단군세기에 기록된 오성취루는
               5C 중국 한나라 사서에 기록되어 있고,
               따라서 단군세기가 작성되었다는 13C에는
               당연히 역산해서 기록될수 있어 진서의 근거로 사용될 수 없음.

十三世檀君 屹達(一云代音達)   在位六十一年

己卯元年
甲午十六年定州縣立分職之制官無兼權政無越則民無離鄕自安所 事絃歌溢域是歲冬殷人伐夏其主桀請援帝以邑借末良率九桓之師 以助戰事湯遣使謝罪乃命引還桀違之遣兵遮路欲敗禁盟遂與殷人 伐桀密遣臣智于亮率 軍合與樂浪進據關中 岐之地而居之設官 制
戊戌二十年多設蘇塗植天指花使未婚子弟讀書習射號爲國子郞國 子郞出行頭揷天指花故時人稱爲天指花郞
戊辰五十年五星聚婁黃鶴來棲苑松
己卯六十一年帝崩萬姓絶食而哭不絶仍命釋囚 禁殺放生過歲而 葬之牛加古弗立


척 -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倜'이 아니라 '尺'이므로 논할 필요가 없다.

二十九世檀君 摩休   在位三十四年

戊寅元年周人入貢
乙酉八年夏地震
丙戌九年南海潮水退三
辛亥三十四年帝崩太子奈休立



2. 시경 한혁편

시경 한혁편은 주나라 선왕(BC 827~782)이 한후(韓侯)를 만나는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
이 한후는 시대적으로 진(晉)나라가 분열한 후의 한나라(BC403~230)의 한후가 될 수 없으므로,
이 한나라는 다른 나라일 것이고, 아마도 우리 민족의 조상 한국, 고조선일 것이라는 것이
김진명의 생각이다.

詩經,  大雅‧,  蕩之什,  韓奕

    奕奕梁山,維禹甸之。               크고 큰 양산(梁山)은 우임금이 다스리셨네
    有倬其道,韓侯受命。               밝으신 그 도로 한후(韓侯)가 명을 받았네
    王親命之,纘戎祖考,               왕께서 친히 명하시어 그대의 조상 공적을 이어
    無廢朕命,夙夜匪解,虔共爾位。짐의 명령을 저버리지 말고 낮밤 없이 게으르지 말며 그대 지위 삼가 공경하라.
    朕命不易,榦不庭方,以佐戎辟。짐의 명령은 바꾸지 않으리라, 내조하지 않는 제후 바로 잡아 그대의 임금 보좌하라.


    四牡奕奕,孔脩且張。               네 필 수말 크기도 하며 길고 큰 몸집 당당하네.
    韓侯入覲,以其介圭,入覲于王。한후가 들어와 왕을 뵈올 제 그 큰 홀[圭]을 받들고 왕에게 인사드리네.
    王錫韓侯,淑旂綏章。               왕께서는 한후에게 하사하시니 무늬 있는 깃대와
    簟茀錯衡,玄袞赤舄。               새깃 깃발 대자리 덮개와 고운 멍에채. 검은 곤룡포에 붉으신 고리달린 말배띠와
    鉤膺鏤鍚,鞹鞃淺幭,鞗革金厄。무늬 있는 당로 수레의 가로막이 나무 턱, 호피덮개 고삐 줄 황금고리였네.


    韓侯出祖,出宿于屠。               한후 노제를 지내고 가다가 도(屠)땅에 머무셨네
    顯父餞之,清酒百壺。               현보(顯父)가 송별잔치 하니 맑은 술이 백병이나 되네.
    其殽維何?炰鼈鮮魚。               그 안주는 무엇인가 구운 자라와 싱싱한 생선이네.          
    其蔌維何?維筍及蒲。               그 나물은 무엇인가 죽순과 부들이었네.
    其贈維何?乘馬路車。               그 선물은 무엇인가 네 필 말과 큰 수레네.
    籩豆有且,侯氏燕胥。               대그릇 나무그릇 많기도 하니 한후 기뻐하여 즐기네.


    韓侯取妻,汾王之甥,蹶父之子。한후가 장가를 드니 분왕(汾王)의 생질이요 궤보(蹶父)의 따님이네.
    韓侯迎止,于蹶之里。               한후가 아내로 맞이하러 궤씨네 마을까지 갔네.
    百兩彭彭,八鸞鏘鏘,不顯其光。많은 수레 의젓하게 달리며 여덟 말방울 딸랑거리니 그 빛 매우 밝았네.
    諸娣從之,祁祁如雲。               따라오는 여러 몸종들 줄지은 것이 구름 같네.
    韓侯顧之,爛其盈門。               한후가 뒤돌아보니 찬란한 빛 그 문 안에 가득하네.


    蹶父孔武,靡國不到。               궤보는 매우 용감하여 가보지 않은 나라 없으며
    為韓姞相攸,莫如韓樂。            딸 시집보낼 곳을 찾아보니 한나라만한 곳이 없더라네.
    孔樂韓土,川澤訏訐。               즐거운 한나라 영토여, 시냇물 못물이 넘쳐흐르고
    魴鱮甫甫,麀鹿噳噳。               방어와 서어 뛰놀고 암사슴 떼지어 풀을 뜯고
    有熊有羆,有貓有虎。               곰과 말곰이 있으며 살쾡이도 있고 범도 있네.
    慶既令居,韓姞燕譽。               이미 좋은 곳을 가려 잔치하니 궤보 딸도 좋아하네.


    溥彼韓城,燕師所完。               높은 저 한나라 성은 연나라 백성이 완성시켰네
    以先祖受命,因時百蠻。            조상의 명을 받들어 여러 오랑캐를 다스리시니
    王錫韓侯,其追其貊。               왕께서 한후에게 추나라와 맥 땅까지 내리셨네
    奄受北國,因以其伯。               북쪽 나라 맡아 다스리고 그곳의 제후가 되셨네
    實墉實壑,實畝實藉。               성 쌓고 호 파고 밭 정리하고 부세하여
    獻其貔皮,赤豹黃羆。               비가죽(貔皮)과 표범가죽 누런 말곰가죽을 바치네.


- 시경 , 이상진․황송문 역, 자유문고, 1994

3. 왕부 잠부론

晉穆侯生桓叔,桓叔生韓萬,傅晉大夫〔一〕,十世而為韓武侯,五世為 韓惠王,五世而亡國〔二〕。襄王之坥孫信,俗人謂之韓信都〔三〕。高祖以信為韓王孫,以信為韓王,後徙王代,為匈奴所攻,自降之〔四〕。漢遣柴將軍擊之, 斬信於參合,信妻子亡入匈奴中。至景帝〔五〕,信子頹當及孫赤〔六〕來降,漢封頹當為弓高侯,赤為襄城侯。及韓嫣,武帝時為侍中,貴幸無比。案道侯韓說, 前將軍韓曾〔七〕,皆顯於漢〔八〕。子孫各隨時帝分陽陵、茂陵、杜陵〔九〕。及漢陽、金城諸韓,皆其後也。信子孫餘留匈奴中〔一〇〕者,亦常在權寵,為貴 臣。及留侯張良,韓公族姬姓也。秦始皇滅韓,良弟死不葬,良〔一一〕散家貲千萬,為韓報讎,擊始皇於博浪沙中,誤椎副車。秦索賊急,良乃變姓為張〔一 二〕,匿於下邳,遇神人黃石公,遺之兵法。及沛公之起也,良往屬焉。沛公使與韓信略定韓地,立橫陽君城〔一三〕為韓王,而拜良為韓信都〔一四〕。信都者 〔一五〕,司徒也。俗前〔一六〕音不正,曰信都,或曰申徒〔一七〕,或勝屠〔一八〕,然其本共一司徒耳。後作傳者不知“信都”何因,彊妄生意,以為此乃代 王為信都也。凡桓叔之後,有韓氏、言氏〔一九〕、嬰氏〔二〇〕、禍餘氏〔二一〕、公族氏〔二二〕、張氏,此皆韓後姬姓也。1) 昔周宣王亦有韓侯,其國也〔二三〕近燕,故詩雲:“普彼韓城,燕師所完〔二四〕。2) ”其後韓西亦姓韓,為魏滿所伐,遷居海中〔二五〕。

- 王符,  潛夫論,  卷九,  志氏姓

<이병도 - 한씨조선설>
이병도는 2)에서 ‘韓西’를 ‘韓東’의 오기로 보고, 한후의 한국(韓國)과 조선을 별개로 인식하면서
2)를 ‘(한국이 생긴 후에) 그 한국의 동쪽[朝鮮]에서도 또한 한씨 성을 일컫더니
(그 후에)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해중으로 천거하였다’고 보았다.
즉 그는 잠부론의 위 구절은 조선 왕의 성(姓)이 한씨였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렇지만 그 한씨는 한국과는 별개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의 왕이 한씨 성을 칭한 것은 우리말과 관련 있다고 보았다.
즉 만몽어에 군장을 汗(Han) 혹은 可汗(Khahan)이라 하고, 부여․고구려에서도 대인을 加(Kha),
신라에서도 군장․대인을 干(Khan), 今(Khum)이라 한 것 등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81

<윤내현>
윤내현은 이병도가 잠부론 의 ‘韓西’는 ‘韓東’의 오기로 본 것은 중대한 착오라고 했다.
그는 이병도가 인용한 잠부론의 바로 앞부분을 들면서 왕부의 지적에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

무릇 桓叔의 후손으로는 한씨(韓氏)․ 언씨(言氏)․영씨(嬰氏)․화여씨(禍餘氏)․공족씨(公族氏)․장씨(張氏)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韓의 후손으로 姬姓이었다(한편 옛날 주 선왕 때에 또한 한후가 있었으니 그 나라는 연나라에서 가까웠다. …).

윤내현은 잠부론 에서 왕부가 전하려고 한 뜻은 서주 왕실과 동성인 희성으로서
韓나라의 제후였던 桓叔의 후손으로는 韓氏․言氏․嬰氏․禍餘氏․公族氏․張氏 등이 있었으니
이들은 모두 성이 희(姬)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한(韓)과 다른 또 하나의 한후(韓侯)가 있었으니 그 나라는 연나라에서 가까웠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병도가 인용한 부분의 잠부론 은 정확한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앞에 나오는 한후는 연나라의 동쪽에 있던 그 지역 토착세력의 왕[君長]을 의미하고,
뒤의 한은 기자국의 준을 뜻하는 것이니 기자국이 한후의 서쪽에 있었다는 표현은 정확한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주 선왕 때에 연나라에 가까웠던 한후는 고조선한국를 가리키고
그 고조선한국의 서쪽에는 기자한국이 있었는데 이 기자한국이 위만에게 공벌당해서 해중으로 옮겨가 살았다는 것이다.

- 윤내현, 고조선 연구 , 일지사, 1999

* 윗 부분은 정형진, 『시경』한혁편의 한후와 한씨조선에 관한 새로운 견해, 단군학연구 제13호, 2005. 12 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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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 찾다보니까 책에서처럼 쉽게 결론내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김진명이 내세운 사료들 중 의미있는 것은 시경과 잠부론이다.
이 두 가지는 기원전 9세기 주나라 시대에 한(韓)나라가 있었고,
기원전 5세기에 또 다른 한(韓)나라. 즉 두 개의 한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한나라가 고조선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아직까지 학계에서 정설이 정해지지 않은 부분으로 지금도 계속해서 연구중이다.

나도 이병도 교수보다는 윤내현 교수의 이론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면에서는 김진명과 마찬가지 입장이지만,
쉽게 결론내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면에서는 김진명과 완전 다른 입장이다.

김진명처럼 비약이 심한 팩션은 곧이곧대로 믿으면 정말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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