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의사의 죽음
[오마이뉴스 정윤식 기자]
▲ 고 이상호 선생님
ⓒ2004 정윤식
어제(9일) 휴대 전화의 문자 알림소리가 들리자 나는 기뻤다. 며칠간 울지 않던 전화기였기에 무척 반가웠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뿐 나는 그만 주저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한의사 선생님이 돌아가셨대.'

그 짧은 문자는 나를 뒤흔들어 놓았다. 나는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 하지만 선생님의 모습이 잘 안 떠오른다. 눈물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흐르고 내 마음 한 구석은 주체할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하다.

이상호 선생님은 대한 한방 해외의료봉사단(콤스타) 소속 한의사로 스리랑카 북부지역 자푸나에서 의료봉사를 하시던 중 지난 7월 8일 목요일 새벽 갑자기 세상을 등지셨다.

같이 간 단원 말에 의하면 밤까지 잘 계시던 분이 아침에 식사를 하러 나오지 않고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응답이 없어 8시 쯤 숙소문을 열고 들어가니 벌써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사인은 심장마비인 듯하다고 했다.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계시던 자푸나는 스리랑카 반군장악지역으로 최근 정부와 휴전협정을 맺어 일시적으로 평화를 찾은 곳이다. 선생님은 이전에 콜롬보 일원에서 일하시다가 반군장악지역의 의료환경이 열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홀로 이 지역을 찾아 현지인에게 무료의료봉사를 해오시던 중이었다.

선생님과 함께 한 단원 말에 따르면 의료환경이 열악하다보니 선생님은 많게는 하루 3천여 명에 달하는 환자를 돌보기도 하셨기에 과로로 쓰러지신 것 같다고 한다.

이상호 선생님은 한의학에서는 최고라는 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과정을 마치고 의료봉사활동을 위해 2001년 11월 콤스타 단원의 일원으로 스리랑카에 첫 발을 디뎠다. 1주일간 봉사활동을 한 후 귀국한 뒤로도 선생님은 다시 스리랑카로 돌아갈 생각을 하셨다. 그러나 스리랑카 현지 사정이 나빠 스리랑카 정부가 허가를 미루는 바람에 2년이 지난 2003년 11월에야 다시 스리랑카에 들어갈 수 있었다.

▲ 선생님의 진료를 기다리는 현지인들
ⓒ2004 정윤식
선생님은 스리랑카 보렐라에 위치한 아유베딕 병원에서 코리안 클리닉 센터를 만들어 활동하셨다. 그 병원은 현지인들에게 무료로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다. 진료와 치료, 약 모든 것이 무료다.

그곳 주민들의 한 달 평균 월급은 우리나라 돈으로 약 6만원. 도저히 이 돈으로는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 그래서 현지인들은 늘 그 병원을 이용한다. 선생님은 "가난한 자가 가장 서러울 때는 제때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할 때"라며 정성껏 환자를 돌보셨다.

또 현지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전통 한의학을 전파하기 위해 현지 의사들에게 직접 강의도 하셨다. 한의학의 특성상 구하기 힘든 약재들도 많았으나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용케 충당하셨다.

▲ 현지인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상호 선생님
ⓒ2004 정윤식
"코훼더 리덴네?(어디가 아프십니까)"
"마게 까꿀러 히리웨띨라 사하 카두에니어봐 와게.(다리가 무척 쑤십니다)"
(중략)
"이꾸망터 수워웨느(빨리 나으세요)"
"보우머 이쓰뚜띠(고맙습니다)"
이런 대화가 늘 이어졌다.

고온 다습하고 탁한 공기 때문에 스리랑카는 천식 등 호흡기 질환과 요통 환자가 많다. 30~35도를 넘드나는 무더위 속에 진료를 한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다. 전력 사정도 좋지 못해 수시로 정전이 된다.

열악한 스리랑카 정부 재정으로는 소독용 솜도, 기자재도 지원받기 어렵다. 하지만 그 열악한 생활 속에서도 선생님은 항상 웃으시며 환자들을 만났다. 스리랑카 내에는 영리 목적으로 와 있는 인도 의사 외에는 의료봉사활동을 위해 스리랑카에 정착한 외국인 의사는 없다. 선생님은 외로운 싸움을 하신 것이다.

언젠가 나는 선생님께 물어봤다.

"선생님, 여기 왜 왔어요?"

내가 스리랑카에 왔을 때 제일 듣기 싫은 말 중 하나를 내가 다시 그 분에게 물어 보았다. 근데 답이 다소 엉뚱했다.

"한국이 재미없어서."

선생님은 단지 봉사에 머무르지 않고 스리랑카에서 현지인과 함께 살 계획을 세우셨다.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좋다고 하시면서…

그런 선생님의 사랑을 현지인들도 잘 알았다. 선생님 진료실에서 만난 환자이자 현지인 의사는 "마터 고닥 싼토싸이"라고 내게 말했다. 우리말로 옮기면 "나에게 선생님은 행복을 주었다. 그로 인해 행복이 왔다"정도로 표현된다. 그런 말들로 그들은 선생님께 감사함을 표현했다.

내가 아는 선생님은 서둘러 뭔가 이룩하려 하지 않고 하나하나 채워 나가는 분이셨다. 언젠가 선생님은 내게 이렇게 말하셨다.

"내가 선택한 것은 봉사가 아니야. 그냥 삶이야. 나를 낮추기만 하면 정말 행복해 질 수 있어."

▲ 가족과 함께
오늘(10일) 선생님의 시신이 고국으로 돌아온다. 채 10살도 안 된 아들과 5살 난 딸아이를 두고 싸늘한 시신으로 고국으로 돌아오는 선생님. 그 가족들이 울어야 하는 수많은 밤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진다.

"선생님, 선생님의 고귀한 희생 잊지 않겠습니다."

함께한 단원들이 선생님을 보내며…

"하늘에서 저희들 지켜 보고 계시죠? 그곳도 스리랑카처럼 많이 더운가요? 저는 눈물 한방울 보이지도 못했는데, 선생님께서 떠나시는 스리랑카에는 당신의 떠남을 슬퍼하는듯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지난 주 이기수 선배님의 돌잔치에서 나누었던 시간이 마지막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 함께 의료봉사 가지 않음을 섭섭해 하셨던 그 말씀이 지금에서야 너무 무겁게 다가옵니다. 의료봉사에서 다녀오시면 오래만에 함께 테니스도 치고, 선생님 보고 싶어 하셨던 <고양이의 보은> 애니메이션도 함께 보려고 구해 두었는데…. 이제는 선생님과 테니스도, 좋아하시던 미야자키 애니메이션도 함께 나눌 수 없는 곳으로 떠나셨군요.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장례식장에서는 눈물 한방울 나지 않더라구요. 내가 울면, 슬퍼하면 선생님 떠나시는 데 힘이 드실 것 같기도 하고, 여전히 트링코 말리 어디에선가 헐벗은 자들과 함께 하시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이, 당신이 먼 곳으로 떠나셨다는 사실보다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일 거에요.

아직도 당신이 항상 계셨던 병원 그 자리에 가면 계실 것 같고, 병원 앞 맥도널드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주실 것 같고, 현지인들과 함께 하고자 하셨던 그 현지인 교회에 가면 항상 계시던 그 자리에서 예배 드리시고 있을 것 같은데….

당신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다가 옵니다. 꿈에서라도 다시 뵐수 있을까요. 선생님 보고싶습니다. 사랑합니다."


-이경선 단원(직업훈련청, 컴퓨터)

"스리랑카는 오랜 내전으로 경제나 심적으로 매우 어렵게 생활하고 있어요. 그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서로에 대한 증오와 내전의 상처가 아물려면 몇 년이 지나도 힘들 듯해요. 의약품 지원도 중요하지만 진심으로 이들의 아픔을 안아 줄 수 있는 분이 계셔야 하는데…. 이상호 선생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는데…. 참 안타깝네요."

-류혁수 단원(그는 입관식이 있다며 황급하게 메신저에서 사라졌다)


조시

봉사활동은 무슨 상품도 유행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나는 내 삶을 여전히 사랑합니다.

바람 한번 맞지 않고 피는 꽃이 없다하듯…
오늘의 아픔은 구름처럼…바람처럼 떠나가겠지요
그리되면 나는 또 잊은채 다가오는 하루를 살아야할겁니다.

내일이 되어 비가 올지…바람이 불지는 모릅니다.
그러면 다시 다부지게 가슴을 피고 일어나야겠습니다.

내 삶을 사랑하는 만큼
내 주위 사람을 사랑하니까요…
나로 인해 그 사람들이 아파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사랑이야 말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는 요즘
더더욱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상처입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함께 활동한 단원들이 선생님께 바칩니다. /


/정윤식 기자 (jinju95@jinju.or.kr)

덧붙이는 글
이상호 선생님의 발자취를 느끼시려면 스리랑카 한국 해외봉사단 사이트를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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