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해선 놀랄 게 없는 나이다. 워낙 험한 세상을 살다보니, 남의 나라에서 몇 만명 죽었다 해도 그저 남의 얘기로 들린다. 그럴만도 하지 않나. 백년동안 전쟁이 없었던 날이 며칠 밖에 안된다는 개판 5분전의 20세기를 40년이나 경험했다. 죽음과 공포, 빈곤, 질병에는 이력이 났다. 지식 빅뱅의 시대를 사는 덕분에 어지간한 정보는 한번씩은 다 들어봤다. 이러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고, 특별히 놀라울 일도 없는 무덤덤 무감각인이 되고 말았다. 하물며 책 따위에 놀랜대서야 체면이 서지 않는다.

 놀라운 게 한두가지가 아닌 책을 봤다. 핸드릭 빌램 반 룬의 <코끼리에 관한 짧은 우화>. 평소 저자에 관심이 없는 나로선 이름조차 생소한 그가 요즘 미국에서 잘나가는 성인동화 작가 정도 되는 줄 알았다. 잘 봐주면 내동갑 쯤 됐겠다. 근데 어쩌면 이렇게 감각이 모던한거야. 그런 분이 알고보니 1882년에 태어나서 1942년에 세상을 떠난, 증조 할아버지 뻘 되는 양반이었던 것이다.

 내가 글을 잘 쓰는지 아닌지는 당장은 모른다. 묵혀놨다가 일년뒤에 꺼내 읽어보면 안다. 쓸 때는 마치 등단이라도 할 것 처럼 자신만만했던 문장이 고작 일년만에 유치찬란한 연애편지 꼴로 변했기 십상이다. 생각이 깊지 않았던 것이 첫째요, 문체가 바로 서질 않아 난삽한 것이 둘째이며, 쓸데없는 치장과 겉멋으로 분냄새만 요란한 것이 마지막 이유일 것이다.

 핸드릭 빌램 반 룬의 백년 가까운 문장과 일러스트에는 단호한 절제가 있다. 사람세상에 대한 통찰력이 있고, 나름의 확고한 문장스타일이 있다. 도입부터 재미있다. <코끼리들이 인간의 방식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그냥 코끼리로 남아 있을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인간 세상으로 특사 '존 경'을 파견한다. 무수한 직업들이 등장하고 모든 고난극복은 저자의 동화적 상상력으로 훌쩍 뛰어넘는다. 

그다음 놀라운 것은 인간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정신. 다음은 코끼리 특사 존 경이 천신만고 끝에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와서 가족들에게 제출한 보고서의 끝부분이다.

 <인간의 문명은 훌륭하고 장대하며 화려하고 놀랍다. 그것은 정신이 단순한 무생물위에 이른 가장 위대한 승리이다. 현실적인 거의 모든 면에서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방식보다 우월하다. 그러나 깊이 연구한 끝에 나는 인간의 방식에 무언가가 결핍돼있으며 , 그들의 영광스러운 승리 한복판에 조만간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패배를 가져올 재앙의 요소가 있다는 유감스러운 결론에 도달했다. ..... 인간이 오래 전에 잊어버린 무언가를 우리들은 알고 있다. 그건 진실하고 도리에 맞는 삶은 존재의 궁극적 실체(자연의 기본질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때만 실현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족의 코멘크가 붙을 대목도, 붙을 이유도 없이 깔끔하다. 자주 동물이나 외계인의 눈으로 인간의 모순을 들여다 보는 베르베르도 이만큼 간단명료하진 못하다. 찬찬히 다음 문장을 읽어보자.

 "우리의 세계는 변치 않을 오래된 가치, 사랑, 관용을 지닌 것들이 이리도 많은데, 왜 결코 풀리지도 않을 그런 문제들에 대해 신경을 쓴다지? 아내에 대한 사랑과 존경, 친구와의 우정, 우리의 아이들이 훌륭한 후계자가 되도록 키우는 즐겁고 감사한 일, 태양이 먼 바다로부터 다시 떠오르는 이른 아침의 아름다움, 보람있게 보낸 하루의 끝에서 어둠이 언덕과 골짜기에 내려앉을 때, 우리의 수많은 실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존재의 영원한 실체에 충실했음을 느낄 때, 그때 우리를 찾아오는 만족감. "

 마지막으로 윗 문장이 나오기 직전 나를 매료시켰던 대목이 있다.

 "우리 코끼리들은 살아온 대로 조용하고 행복한 삶을 계속할 것이다. 숲속엔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먹이가 있다. 혹시 우리에게 패기가 부족한게 아닐까?" "우리도 백인들이 서로를 부추기는 것처럼 <무언가를 해내기 위해 좀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것 일까물론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지만.)" 

 아마 노인장은 이 소설을 대공황이나 1차 세계대전같은 사건 전후에 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유토피아를 향한 생산력 무한 경쟁, 결국 디스토피아로 치달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그 첨예한 갈등으로서 전쟁과 공황. 인간들은 무언가를 해내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당대에 거의 없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서로 죽고 죽이고, 뺏고 빼앗기는, 어리둥절한 광경을 코끼리들에게 보여주고 만 것이다. 그런 맹목과 이기심에서 모든 비극이 싹튼다는 걸 백년이 지난 후에도 감을 못잡고 있으니 용렬한 인류의 후손들은 노인 앞에 고개를 떨굴 뿐이다.

 동화를 별로 안좋아하는 분은 맨 끝의 스무 페이지만 정독을 해도 좋다. 하지만 내내 재미있었고 흥미진진했으며 무엇보다 신이 났다. 코끼리들을 우습게 보면 안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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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논산훈련소를 떠나 새벽에 도착한 곳은 용산TMO.

옆에 있던 동료들이 쓰리쿼터 트럭에 올라타서 마지막 담배 일발장전을 하던 모습이 선하다. 낙하산에 날개가 달린 문장을 보니 영락없는 공수부대 행. 필터 끝까지 타들어가던 꽁초를 털어 윗호주머니에 넣고 <사나이로 태어나서>를 목 터지게 부르며 새벽 안개속으로 떠나가던 그들.

 

해가 중천에 오를 때까지 나는 용산역 안팎을 샅샅이 청소하면서 날 데려갈 주인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오렌지색 운동복에 슬리퍼를 끌고, 위에는 야전상의를 대충 꿴 상병님이 나타나더니 검지로 까딱까딱 날 불렀다. 그날 나는 검정색 세단 뒷자리에 앉아 헌병의 받들어총 경례를 받으며 쏜살같이 국방부 안으로 들어갔다.

 

대한민국에 딱 세명 있는 국방부 장관실  행정병. 그게 내 보직이었다. 다들 안 믿지만 빽은 없었다. 여하튼 현역병 숫자가 장군 수보다 적다는 곳. 12.12의 주역들이 머릿기름 번질거리며 무시로 들락거리는 곳. 현관에 그 유명한 국방부 시계가 돌고 있는 그 곳에 나는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오도카니 앉아 있게 됐다. 

 

며칠 후 내겐 두 장의 신분증이 지급됐다. 뒤에 문서수발병이라고 적힌 국방부출입증. (휴가때 대학친구들에게 보여줬더니 한 여자애가 깔깔 웃으며 하는 말. <너 거기 가서 문서 수발드는구나. 진급하면 문서 수청병이 되겠네.>쪽 팔렸다. 재수없는 계집애. 그 아이는 모대학 영문과 교수가 됐고 지금도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별 안되는 말을 하고 다니며 물색없이 욕을 먹는다는 소문.)

 

또 한 장은 아주 특이한 노란 색의 <비밀취급 인가증>. 실제론 일급비밀까지 취급하는데 사병이라서 이급 인가증을 준다고 했다. 군대의 특성상 남들에게 없는 신분증은 그 자체로 권력이었다. 일상업무에선 단 한번도 쓴 적 없는 이 신분증은 휴가 때나 외박땐 나의 수호신 노릇을 단단히 했다. 시외버스를 타면 예외없이 무서운 헌병들의 검문을 받게 되는데 나는 이등병 시절부터 결코 휴가증 따위의 종이 쪽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마치 너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쳐다도 안보고 노란색 비취증을 두 손가락으로 척 꺼내주면, 헌병들은 예외없이 워커 뒷꿈치를 딱 소리나게 붙이며 <수고하십니다. 안녕히 가십시오.>하고 경례를 하곤 했다. 간혹 이게 뭔가 싶어 요리조리 구경하는 촌놈 헌병에겐 <너 밤샐래?> 한마디면 족했다. 옆에 애인이라도 앉아있을 양이면 그 으쓱함은 대통령도 안부러웠다.

 

우리 사무실 금고에는 빨간색, 노란색으로 X표시를 한 비밀문서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그때 나는 이미 실미도 사건, 북파공작대, 다대포 사건 등의 극비를 알고 있었지만, 죄다 귀동냥으로 들은 얘기일 뿐. 정작 비밀문서의 내용들은 하나같이 재미도 없고, 뭐 이런게 비밀인가 싶은 것들 천지였다. 하지만 어쩌다 그걸 수발(?)들 때면 엄청 긴장하게 되는 것은 그놈의 X표시 겉장 때문이었다. 이른바 X-파일이었던 것이다.

 

X-파일이란 말이 대중화된 것은 멀더와 스컬리라는 FBI요원이 등장하는 미국 TV드라마가 방영되면서 부터. FBI의 영구미제사건 기록중에 극비로 분류된 것을 X-파일이라고 한다는데 실제로는 그런 게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워낙 뒤가 구리고 암수가 많은 친구들이라 뭔가 그 비슷한게 분명히 있으리라는 심증은 가지만 없다는데야 뭐. 어쨌든 그 드라마 이후 우리 사회엔 X-파일이란 이름의 괴문서들이 심심찮게 출몰했다.

 

최근 버전은 <연예계 X파일>이라고 알려진 연예인 종합평가 어쩌구하는 문건이었다. 그동안 연예가에서 횡행하던 괴문서들은 대개 음해성 루머 또는 믿거나 말거나 수준의 황당무개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번 건은 제일기획이라는 국내 최대 광고대행사가 CF모델 캐스팅자료로 작성한 공식문서라서 쯔나미의 충격을 방불케 한다고 입방아가 대단들하다.

 

나 역시 비밀취급을 해온 남다른 경력으로 그 X-파일이란 걸 들춰보게 됐다. 가나다 순으로 연예인들 이름과 그들의 장단점, 사생활, 성격, 향후 전망, 상품성 등에 대해 정말 되는대로 적어놓은 3류 저급 문서였다. 처음엔 호기심으로 훑어보다가 나중엔 몇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번째 생각. 이러니까 우리나라 광고업계가 요모양 요꼴이군. 그 똘똘한 것들이 앞다투어 들어간 광고업계가 십년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게 없는 이유를 궁금하게 생각했었다. 이런 류의 문건을 자료랍시고 돌려보면서 광고의 핵심인 모델을 선정한다니 한심한 노릇 아닌가. 너희들도 많이 힘들겠구나.  

 

두번째 생각, 그 문건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기자, 매니저, 리포터 등도 답답한 인사들이긴 매 한가지. 그래도 그 동네 마당발이요, 전문가랍시고 자문을 해줬을텐데, 어디 단 한구석도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분석이 없이 <그 놈 싸가지 없어><걘 안돼> 수준의 인상비평으로 일관하고 있다.

 

세번째 생각, 그걸 갖고 호들갑을 떠는 매체들의 경박함도 그냥 넘어가기 아깝다. 내가 아는 한 그걸 본 사람들은 대부분 시큰둥한 반응이다. 군대 비밀처럼 별 재미도 없고 그저 그런 정도다. 지금은 기억조차 안난다. 그런데 인터넷 매체 등에선 마치 대단한 사고라도 터진 양 연일 <연예계 X-파일>관련 선정성 기사들을 쏟아내며 대목 만난 듯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 기사들도 하나같이 함량 미달에, 독자 농락 수준인 건 말할 나위 없다. 

결국 연예계 X파일도 내용은 별 볼일 없는데 겉장만 씨뻘겋게 X자를 그어놓은 꼴이다.

 

살다보면 <이 세상에 비밀은 없다>라는 말에 공감하게 된다. 집단과 사회에 영향을 미칠 만한 정보 중에 영원한 비밀이란 있을 수 없다. 인간에겐 <대답 본능>이란게 있다. 물어보면 제 발등 찍을 줄 알면서 자꾸 대답하려고 한다. 그래서 묵비권이 있어도 사람들은 그 권리를 행사하는 걸 몹시 힘들어한다. 덕분에 먹고 사는 사람들이 기자, 검사, 선생님, 임성훈(퀴즈가 좋다) 그리고 코치들이다. 어쨌든 누군가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 눈치채면 그 비밀이 무장해제되는 건 시간문제다. 

 

그 비밀을 숨기거나 덮으려 할 때 항상 큰 사단이 난다. 워터게이트가 그랬고 광주와 각종 ~풍 사건, 대통령의 아들 사건들이 모두 그랬다. 반대로 르윈스키 스캔들을 비롯해 온갖 비리의 옴니버스였던 클린턴 일가는 영리하게도 뻔한 비밀을 고집하지 않고 적절한 고백을 통해 면죄부를 받아내지 않았던가. 대단한 클린턴에 더 대단한 힐러리가 아닐 수 없다.

 

비밀이 없는 나라, 싸구려 X파일이 없는 사회가 돼야 한다. 

지하철에 3류 주간지가 안팔리는 나라가 돼야한다.

비록 감춰진 카리스마는 없을 지언정

투명하고 올바른 사람들이 서푼짜리 비밀 따위에 허투루 눈 돌리지 않고 사는,

그런 세상을 원한다.    

 

엊그제 대학 동창회에 나가서

<내가 입 벌리면 여럿 다쳐>라고 한 마디 했더니

어라 분위기 희한해지데.

학교 다니면서 과 커플로 소소한 염문을 일으켰던 것들이

죄다 내 눈치를 슬슬 보며 비위를 맞추는데,

거 기분 좋더구만.

 

얘들아 나 사실 아무것도 모르거든.

내 X-파일은 달랑 겉장만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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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탁환의 소설을 좋아한다. 2002년에 <나, 황진이>를 처음 만난 후부터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방각본 살인사건><불멸의 이순신>에 이르는 전작 장편들을 나오자 마자 읽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출간을 기다리는 유일한 작가가 바로 김탁환이구나. 

 

단편은 몰라도 장편은 박경리나 황석영같은 강골의 작가가 써야 제맛이다. 라면은 양은냄비가 좋고, 사골국물은 무쇠솥에서 고아야 제격인 것 처럼 말이다. 각자 의견이 다르겠지만 나는 최인호씨의 <상도>와 <해신>을 그다지 감명깊게 읽지 못했다. 어딘지 모르게 어설프다는 느낌이다. 마치 힙합 리듬으로 춘향가를 부르는 듯한 어색함. 물론 그런 인상은 작가가 평생을 소소한 사랑얘기 또는 가족소설 등속으로 입신했다는 이력에서 유추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허구적 상황에 몰입하여 리얼리티로 끌어올리는 힘이 딸린다. 장편을 끌고가기엔 역부족이란 뜻이다.

 

이에 비해 김탁환은 마치 소설 속 그 시대에서 튀어나온 이야기꾼인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오랜 학습과 습작을 통해 역사적 상황을 묘사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캐릭터 설정이 부담스럽지 않다. 말 잘하는 재담꾼이 옆 동네 얘기 하는 것 같다. 작가가 나서 비분강개하는 오버액션도 없다. 등장인물들의 동선이 빈틈없기 때문에 작가가 굳이 드러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불멸의 이순신>을 김훈의 <칼의 노래>와 굳이 비교하자면, 전자의 미이라 버전이 후자인 듯 싶다. 김탁환의 살을 떼내고 신경과 골수를 말리면 김훈이 될 것 같다. 그래서 탁환은 감성이 살아있고, 훈은 메시지만 남아있다. 김훈이 <현의 노래>에서 풀썩 주저앉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칼은 몰라도 음악(현)까지 바짝 말릴 수는 없는 노릇. 그 결과 주인공 우륵보다 칼 든 이사부가 소설의 흐름을 끌고 가는 기현상이 마침내 벌어지게 됐다.   

 

엊그제 산 김탁환의 <부여현감 귀신 체포기>1,2권을 내리 읽으면서 "이 친구가 왜 이런 책을 썼을까?" 궁금했다. 옆길로 빠진 것은 분명한데 하필이면 왜 이쪽일까? 작가 후기를 보니 김탁환은 이런 귀신 얘기를 쓰고 싶어 안달이 났던 게다. 습작시절부터 꿈꿔온 이른바 된장 판타지를 어쩌지 못하고 여태 움켜쥐고 있다가 이제사 풀어놓았다. "노동이 아닌 유희로, 저는 귀신들과 만나 춤추고 노래하며 신나게 뒹굴었습니다."  한술 더 떠 <저는 이 소설이 드라마나 영화 시리즈물로 바뀌기를 희망합니다.>라고 강력한 전파의 의지까지 드러낸다. 그의 말대로 된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조금 덜 억울하지 않겠느냐>고 작가는 반문한다.  

 

딴은 그럴 법도 하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와 같은 서양 판타지를 들여다 보면 영 숭해서 못견디겠다. 몇몇 영웅 미색들을 빼놓고는 끔직한 흉물들을 끝도 없이 봐넘겨야 한다. 케이블TV에서 노상 틀어주는 바람에 하릴없이 보게 되면서도 시간 아깝다는 생각 말고는 남는게 도통 없다. 그 이유는 푸는 맛이 없기 때문이다. 도깨비들은 장난을 좋아하고 귀신들이 난리치는 것은 원한 때문이다. 그걸 풀어주면 곱게 큰 절하고 물러나는게 조선 귀신들의 예의법도. 해원을 그 동네 사또가 하든, 전우치가 하든, 지나가는 탁발승이 하든 그건 문제가 안된다. 귀신 때문에 곤욕을 치렀던 백성들도 애틋한 사연 들으면 측은지심이 발동하고 극락왕생하라고 제사까지 치러주지 않나. 이것이 다 풀어줌의 미학이다.

 

우리 때만 해도 할머니들이 일제시대에 나서, 한국전쟁과 격동의 현대사를 맨몸으로 겪어내느라 자기 아들은 물론이고, 손주 새끼들에게 한가롭게 옛날 얘기를 해줄 처지가 못됐다. 결국 우리들은 동화책이나 이야기책을 빌려 대리만족을 해야했는데 마침 그 때 이야기 할머니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 것이 바로 KBS 의 <전설의 고향> 이었다.

 

삼천리 방방곡곡 웬만한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은 아니 다룬 것이 없다. 게다가 여름에는 납량특집을 통해 에어컨이 어떻게 생긴 지도 몰랐던 개도국 아이들의 등줄기를 씨언하게 훑어내리는 청량제 구실도 톡톡히 해냈다. 그때 본 <설녀><구미호> 등은 지금도 눈에 선하며, 특히 당대 최고의 미인이었던 한혜숙이 분했던 설녀의 아리따운 자태와 팜므파탈 적 섹스 어필은 한 소년의 가슴을 벌렁거리게 만드는데 충분했다. 68년생인 김탁환은 그 때 형 누나들 가운데 끼어앉아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TV를 보며 저 멀리 판타지의 세계로 훨훨 날아갔던게 틀림없다.

 

한가지 흠이라면 서두에 불필요한 서양 흡혈귀 얘기를 다소 장황하게 늘어놓았다는 점. 무슨 복선인지는 대충 눈치는 채겠으나 굳이 그럴 필요 없다. 설마 어린 친구들까지 귀하의 이 신토불이 귀신 얘기책을 사보리라 기대하진 않으시겠지.

그나저나 다음에도 이런 쪽으로 나오면 재미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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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5-01-25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좋은 글은 마이 리뷰로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럼 이 주의 마이리뷰 당선될 확률이 아주 높은데...당선되면 상금이 5만원이예요. 책값 버는 건데...!

로드무비 2005-01-26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은 몰라도 음악(현)까지 바짝 말릴 수는 없는 노릇.^^
 

김사장은 PR업계에선 실력을 인정받는 베테랑이다. 아침부터 고객과 언성을 높였더니 종일 되는 일이 없다. "빌어먹을. 돌대가리같은 놈이 고객은 무슨.  홍보하다 혈압 터져 내가 먼저 죽겠다."  뻑뻑한 뒷 목을 연신 주무르고 있는데 오실장이 두툼한 파일을 안고 들어왔다. "사장님. 내일 D사에 들어갈 PT(프리젠테이션)인데 한번 봐주시죠." 김사장은 손짓으로 놓고 나가라고 하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광고나 PR 매니저들이 가장 당황할 때가 있다. 고객이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고 무조건 잘해달라고 할 때다. 기업 이미지를 홍보해달라는 건지, 신제품을 프로모션하자는 건지, 아니면 수많은 컨셉중에 무엇을 앞세울 것인지 전혀 판단 못하는 고객. "그런 건 당신들이 전문가 아냐? 멋있게 한번 해봐"라고 거들먹거리는 고객. 그런 사람들일 수록 나중에 말바꿀 확률은 100%에 가깝다. "내가 언제 그걸로 하라고 그랬어? 이 사람들 보게. 내 얘긴 그게 아니었다구." 너무 황당해서 할 말을 잃는다. 김사장이 오늘 아침 뚜껑 열렸던 것도 바로 이런 고객 때문이었다.

 광고 PR 업계 사람들은 자신들을 비하할 때 <앵벌이>라고 말한다. 무슨 일이 하나 둘 쌓이면서 좀 편해지는게 아니라 맨날 뒤집어 새로 만들어야 하고, 가면 갈수록 일은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결국 내일의 기약없이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꼴이 앵벌이와 뭐가 다르냐는 것이다.

 고객들이 오해하는 게 있다. 홍보나 광고는 기본적으로 고객들이 해야 하는 일이다. 이른바 전문가들은 그 고객이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비용 대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열심히 도와줄 뿐이다. 전문가들이 얘기할 수 없는 것은 고객이 결정해야 할 몫이다. 그걸 모른 척하는 건 직무태만이요, 책임회피다. <PR매니저를 두지 말고 밖의 에이전시한테 맡기지 뭐.> 이렇게 생각하는 CEO는 아마 영원히 PR때문에 속을 썩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PR회사들은 아직 멀었어>라고 한 말씀 하시지만, 실제로 갈길이 먼 쪽은 그 CEO다.

 물론 전문가들에게도 문제는 있다. 처음부터 고객에게 설명하려고 달려든다. 마치 고객은 가만히 계시고 저희들이 모두 알아서 할 터이니 저희에게 맡겨만 달라는 식으로 접근한다. 수백 쪽짜리 PT도 모자라 아래부터 위까지 쫓아다니며 시시콜콜하게 설명하고 또 설명한다. 이렇게만 하면 분명히 성공할 거라고, 믿어달라고 호언장담한다. 액션플랜에 맞춰 짜여진 예산을 고객이 별 생각없이 뭉텅 깎아도 <그냥 한번 맞춰보지요 뭐.>한다.

 마르고 닳도록 설명하고 일주일 뒤에 고객사에 들어가 <이제 다 결정하셨습니까>라고 물으면 뻥한 눈으로 쳐다본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잘 생각이 안나서 그러니 다시 한번 설명해달라고 한다. <아 네. 이차장 뭐해. 지난번 거 빨리 꺼내.> 심지어 고객사 담당자의 기안까지 엽렵하게 준비해주기도 한다.

 광고가 나가고 보도자료가 뿌려진 뒤 고객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윗분들이 난리가 났어요. 어떻해요. 빨리 들어와서 수습하셔야지요." "아니 왜 그러시는데요?" "누가 회장님께 우리 광고가 후지다고 한 말씀 하신 모양이에요. 광고 컨셉을 왜 그렇게 잡았느냐고 담당 이사가 작살 났어요. 그러게 잘 좀 하라니까." "아니 몇번씩 PT하고 시안까지 다 보여드려서 결재까지 났던 것 아닙니까?" "이것 보세요. 당신들은 전문가 아네요? 마땅히 일이 잘못됐으면 책임을 져야지 이제와서 발뺌하잔 건가요? 이거 어디 믿고 일할 수 있겠나. 다음 경쟁PT땐 들어올 생각도 마세요."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결정하지 않은 것은 결코 기억하지 않는다. 바쁜 세상에 사흘이면 까맣게 잊어버린다. 수업시간에 집중해서 들은 내용은 그날 방과후엔 80% 기억하지만, 한달 후엔 5% 이하로 떨어진다. 고객이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게 만들지 않는 한, 광고나 홍보업계의 앞날은 내내 가시밭길일게 분명하다. 고객은 자기 판단으로 결정한 사항에 대해선 기꺼이 책임을 진다. 전문가들의 역할도 분명하게 규정된다. 프로젝트의 성과 역시 지속적으로 업그래이드할 수 있다. 당연히 성공률도 높아진다. 그래서 처음에 까다롭게 구는 고객일 수록 뒤가 편하고 성과도 좋게 마련이다. 

 고객에게 설명하지 말라. 만일 당신이 고객을 성공시키고, 자신도 성공하고 싶다면. 그 대신 코칭을 해야 한다. 코칭을 통해 고객의 마음 속에 숨어있는 진짜 목표와 가능성을 발견해내고, 실현가능한 계획을 세운 후에, 걸림돌을 찾아서 제거하면 된다. 이 과정에서 당신은 자신의 경험과 이론을 설명하지 말고 고객에게 계속 질문을 던져보라. 이는 고객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각종 변수와 상황조건들을 다시 반추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잊지 마라. 열 시간의 설명보다 적절한 한두가지 질문이 훨씬 더 큰 각성과 깨달음을 준다.

 

광고 PR전문가 뿐만 아니다. 변호사, 의사, 회계사, 부동산, 건축, 인테리어 등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은 반드시 코칭에 귀기울여야 한다. 더 이상 호시절은 없다. 예전 같으면 고객만족이니, 서비스니 하는 건 안중에도 없던 고급직군들도 차별성 없이는 경쟁에서 배겨날 재간이 없다. 뚜껑 열린 고객이 소송을 걸겠다면 "그러시든지"하고 아무 생각없이 소송절차를 밟는 변호사는 "만에 하나 소송에서 질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라고 질문하는 코치 변호사에게 당할 수가 없다. 이런 추세를 반영하듯 요즘 미국에서 코치 자격증을 가진 변호사들이 급격히 늘고 있다.   

 SK텔레콤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라는 컨셉의 광고로 공전의 히트를 칠 때, 그 캠페인을 담당했던 이용찬씨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광고 PT의 동방불패라며 부러워 하는데 무슨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뭐 비결이랄 건 없고, 고객사 CEO가 내게 물어볼 만한 질문을, 내가 먼저 물어보는 겁니다. 그렇게 두 세 가지 질문하면 고객이 스스로 컨셉을 찾아냅니다. 난 아무 것도 안했는데 고객은 그 컨셉을 내가 제안했다고 생각하더군요. 어쨌든 거기서 성패는 끝납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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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초청하려면 시간당 100은 줘야돼. 차도 보내줘야 하지만 까짓거 그냥 내가 가지뭐."

자칫하면 큰 실수할 뻔했다. 그렇구나. 그 정도 강사에게 특강을 부탁할 땐 한시간에 백만원은 쓸 생각을 해야겠군.

이 삼년전 대학 교수 친구에게 나 일하는데 한번 와서 강의좀 하라고 편하게 얘기했다가 그 친구의 몸값을 알게 됐다.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과연 그만한 값어치가 있을까 잠깐 의심도 했다. 그래도 워낙 당당하게 얘기하니까 저 녀석이 믿는 구석이 있겠거니하고 그냥 넘어갔다. 

 "죄송해요. 시간당 10만원인데 너무 적죠?" 한참동안 망서렸다. 저를 어찌 보시는 거냐며 정중하게 거절할까? 이왕 얘기했던 건데 눈딱감고 해? 말어? 솔직히 기분 좋지 않았다. 몇 년 전에 백만원 받던 놈은 뭐고, 지금 십만원 받는 난 뭔가. 창피하고 한심스럽기까지 했다. 한참 진정한 후에 승낙 메일을 보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내 몸값이 정말 시간당 십만원어치는 되는지> 반문해보게 됐다. 

 지난 일년동안 40여 시간의 코치 교육을 받았다. 실제 코칭 경험은 약 100시간 정도. 코칭관련 서적 열 권 남짓 읽고, 별것아닌 잡문 몇개 쓴 것 말고 내세울 게 또 있나 찾아봤다. 쩝쩝... 없다. 이런 얄팍한 경력이 시간당 얼마나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까? 고객이 나를 한시간 사서 어떤 효용가치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답이 쉽게 안나온다.

 왕년에 내가 뭘했는지는 중요치 않다. 고위 공무원이 미국 이민가서 청소부할 때 과거 경력이 무슨 소용인가. 내가 살아오면서 코치처럼 생각하고 행동한 적이 있었어야 경력으로 쳐주든 말든 할 것 아닌가. 옛 경력을 들추면 오히려 그나마 모아놓은 호랑이 어금니같은 코칭경력마저 깎아먹을 판이다. 그렇다면 나는 코치라는 이름을 내걸기도 민망한 처지임에 분명하다. 

 사실 작년말에 소원 하나를 열심히 빌었다. <부디 내년엔 한달에 한번씩만 강의를 하게 해주소서.> 언감생심 강의료는 바랄 엄두도 못냈다. 코칭을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러면서 나도 훌륭한 코칭 전도사로 역량을 쌓고 싶었다. 아무나 불러주기만 하면 한사람도 좋고 두사람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다. 감사하게도 그 소원을 들어주셨다. 그렇게 읍소하며 간구하던 놈이 시간당 10만원 주겠다니까 발딱 일어나 주둥일 댓발이나 내밀고 있는 것이다. 

 "꼭 그렇게 생각할 건 아냐. 너보다 못한 사람도 그보다 많이 받어. 몸값이란게 시장에서 결정되는 거잖아. 괜히 맘좋은 척 하지 말고 네 친구처럼 당당히 요구하라구. 아니면 말 심 대구."  어떤 모임에서 우연히 이 문제를 꺼냈더니 다들 한마디씩 한다. 여보시오. 내가 못믿는 것은 시장 기능이 아니라 내 실력이올시다. 여태 이십년 가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고 살았지만, 단 한번도 그게 많다 여긴 적 없었다. 그만큼 노력도 했고, 적어도 밥 값의 몇 배는 한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코치로서 나는 아직 그만한 수준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옷깃을 여미는 것 뿐이다.

 한시간에 백만원을 받는 프로 코치가 되려면 어느 정도 수련을 해야 될까? 국제코치연맹(International Coach Federation)의 예를 찾아보았다. 전문코치는 가장 등급이 낮은 어소시에이트 코치(Associate Certified Coach), 그 위가 프로페셔널 코치(Professional Certified Coach), 맨 위 고수가 마스터 코치(Master Certified Coach). 이렇게 3단계로 나뉘어져 있다. 어소시에이트 코치는 60시간 교육을 받고 실제 250시간 코칭을 해야 응시자격이 주어진다. 코치라고 명함이라도 내밀 수 있는 프로페셔널 코치는 자격 시험 보는데만 125시간 교육에 750시간 코칭경험이 필수다. 750시간 중에 유료코칭이 90%이상이라 하니 프로가 아니면 엄두를 낼 수 없는 조건이다. 

 프로가 그 정도인데 최고수 마스터 코치는 말해 무엇하랴. 200시간 교육받고 실제 코칭을 2,500시간해야 마스터 코치 응시자격이 주어진다. 어소시에트 코치가 마스터가 되려면 최소 3,000시간 코칭을 해야 한다는 계산이다. 그 정도 되니까 포춘 500대 기업 CEO들이 전세기를 보내 코치를 모셔온다는 얘기가 나올 만 하다.

 프로페셔널 코치와 마스터 코치의 가치는 고객의 생산성으로 바로 입증된다. CEO나 고급임원의 경우, 업무상 또는 업무 이외의 요인에 의해 받는 스트레스는 해당 기업의 생산성을 급격히 추락시킨다. 골치 썩히는 자녀들 때문에 CEO가 며칠동안 회사 일에서 손을 놓으면 위기적 상황에서는 기업이 치명상을 입게 될 수도 있다. 이때 훌륭한 코치 덕분에 로스 타임을 최소화할 수 있다면 백지수표를 준다한들 아깝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마스터들의 몸값은 어마어마하단 얘긴 들려도 정확히 공개된 바 없다.  

 훌륭한 고수들이 그랬듯이 훌륭한 코치라면 시간당 몸값을 계산하느라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진 않을 것이다.  오늘 받은 몸값이 어제보다 올랐다고 기뻐하지도 않고, 떨어졌다고 낙담하지 않을 게다. 코치로서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만족을 줄 수 있는지 그것에만 몰두할 것이다.

 비록 내 일년짜리 뱁새 코치일망정 생각만큼은 황새다리로 해볼 작정이니,

불초 소생을 믿고 십만원을 주신 고객께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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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1-26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왕자 그림까지...
제목도 끝내주고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