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논산훈련소를 떠나 새벽에 도착한 곳은 용산TMO.

옆에 있던 동료들이 쓰리쿼터 트럭에 올라타서 마지막 담배 일발장전을 하던 모습이 선하다. 낙하산에 날개가 달린 문장을 보니 영락없는 공수부대 행. 필터 끝까지 타들어가던 꽁초를 털어 윗호주머니에 넣고 <사나이로 태어나서>를 목 터지게 부르며 새벽 안개속으로 떠나가던 그들.

 

해가 중천에 오를 때까지 나는 용산역 안팎을 샅샅이 청소하면서 날 데려갈 주인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오렌지색 운동복에 슬리퍼를 끌고, 위에는 야전상의를 대충 꿴 상병님이 나타나더니 검지로 까딱까딱 날 불렀다. 그날 나는 검정색 세단 뒷자리에 앉아 헌병의 받들어총 경례를 받으며 쏜살같이 국방부 안으로 들어갔다.

 

대한민국에 딱 세명 있는 국방부 장관실  행정병. 그게 내 보직이었다. 다들 안 믿지만 빽은 없었다. 여하튼 현역병 숫자가 장군 수보다 적다는 곳. 12.12의 주역들이 머릿기름 번질거리며 무시로 들락거리는 곳. 현관에 그 유명한 국방부 시계가 돌고 있는 그 곳에 나는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오도카니 앉아 있게 됐다. 

 

며칠 후 내겐 두 장의 신분증이 지급됐다. 뒤에 문서수발병이라고 적힌 국방부출입증. (휴가때 대학친구들에게 보여줬더니 한 여자애가 깔깔 웃으며 하는 말. <너 거기 가서 문서 수발드는구나. 진급하면 문서 수청병이 되겠네.>쪽 팔렸다. 재수없는 계집애. 그 아이는 모대학 영문과 교수가 됐고 지금도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별 안되는 말을 하고 다니며 물색없이 욕을 먹는다는 소문.)

 

또 한 장은 아주 특이한 노란 색의 <비밀취급 인가증>. 실제론 일급비밀까지 취급하는데 사병이라서 이급 인가증을 준다고 했다. 군대의 특성상 남들에게 없는 신분증은 그 자체로 권력이었다. 일상업무에선 단 한번도 쓴 적 없는 이 신분증은 휴가 때나 외박땐 나의 수호신 노릇을 단단히 했다. 시외버스를 타면 예외없이 무서운 헌병들의 검문을 받게 되는데 나는 이등병 시절부터 결코 휴가증 따위의 종이 쪽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마치 너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쳐다도 안보고 노란색 비취증을 두 손가락으로 척 꺼내주면, 헌병들은 예외없이 워커 뒷꿈치를 딱 소리나게 붙이며 <수고하십니다. 안녕히 가십시오.>하고 경례를 하곤 했다. 간혹 이게 뭔가 싶어 요리조리 구경하는 촌놈 헌병에겐 <너 밤샐래?> 한마디면 족했다. 옆에 애인이라도 앉아있을 양이면 그 으쓱함은 대통령도 안부러웠다.

 

우리 사무실 금고에는 빨간색, 노란색으로 X표시를 한 비밀문서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그때 나는 이미 실미도 사건, 북파공작대, 다대포 사건 등의 극비를 알고 있었지만, 죄다 귀동냥으로 들은 얘기일 뿐. 정작 비밀문서의 내용들은 하나같이 재미도 없고, 뭐 이런게 비밀인가 싶은 것들 천지였다. 하지만 어쩌다 그걸 수발(?)들 때면 엄청 긴장하게 되는 것은 그놈의 X표시 겉장 때문이었다. 이른바 X-파일이었던 것이다.

 

X-파일이란 말이 대중화된 것은 멀더와 스컬리라는 FBI요원이 등장하는 미국 TV드라마가 방영되면서 부터. FBI의 영구미제사건 기록중에 극비로 분류된 것을 X-파일이라고 한다는데 실제로는 그런 게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워낙 뒤가 구리고 암수가 많은 친구들이라 뭔가 그 비슷한게 분명히 있으리라는 심증은 가지만 없다는데야 뭐. 어쨌든 그 드라마 이후 우리 사회엔 X-파일이란 이름의 괴문서들이 심심찮게 출몰했다.

 

최근 버전은 <연예계 X파일>이라고 알려진 연예인 종합평가 어쩌구하는 문건이었다. 그동안 연예가에서 횡행하던 괴문서들은 대개 음해성 루머 또는 믿거나 말거나 수준의 황당무개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번 건은 제일기획이라는 국내 최대 광고대행사가 CF모델 캐스팅자료로 작성한 공식문서라서 쯔나미의 충격을 방불케 한다고 입방아가 대단들하다.

 

나 역시 비밀취급을 해온 남다른 경력으로 그 X-파일이란 걸 들춰보게 됐다. 가나다 순으로 연예인들 이름과 그들의 장단점, 사생활, 성격, 향후 전망, 상품성 등에 대해 정말 되는대로 적어놓은 3류 저급 문서였다. 처음엔 호기심으로 훑어보다가 나중엔 몇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번째 생각. 이러니까 우리나라 광고업계가 요모양 요꼴이군. 그 똘똘한 것들이 앞다투어 들어간 광고업계가 십년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게 없는 이유를 궁금하게 생각했었다. 이런 류의 문건을 자료랍시고 돌려보면서 광고의 핵심인 모델을 선정한다니 한심한 노릇 아닌가. 너희들도 많이 힘들겠구나.  

 

두번째 생각, 그 문건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기자, 매니저, 리포터 등도 답답한 인사들이긴 매 한가지. 그래도 그 동네 마당발이요, 전문가랍시고 자문을 해줬을텐데, 어디 단 한구석도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분석이 없이 <그 놈 싸가지 없어><걘 안돼> 수준의 인상비평으로 일관하고 있다.

 

세번째 생각, 그걸 갖고 호들갑을 떠는 매체들의 경박함도 그냥 넘어가기 아깝다. 내가 아는 한 그걸 본 사람들은 대부분 시큰둥한 반응이다. 군대 비밀처럼 별 재미도 없고 그저 그런 정도다. 지금은 기억조차 안난다. 그런데 인터넷 매체 등에선 마치 대단한 사고라도 터진 양 연일 <연예계 X-파일>관련 선정성 기사들을 쏟아내며 대목 만난 듯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 기사들도 하나같이 함량 미달에, 독자 농락 수준인 건 말할 나위 없다. 

결국 연예계 X파일도 내용은 별 볼일 없는데 겉장만 씨뻘겋게 X자를 그어놓은 꼴이다.

 

살다보면 <이 세상에 비밀은 없다>라는 말에 공감하게 된다. 집단과 사회에 영향을 미칠 만한 정보 중에 영원한 비밀이란 있을 수 없다. 인간에겐 <대답 본능>이란게 있다. 물어보면 제 발등 찍을 줄 알면서 자꾸 대답하려고 한다. 그래서 묵비권이 있어도 사람들은 그 권리를 행사하는 걸 몹시 힘들어한다. 덕분에 먹고 사는 사람들이 기자, 검사, 선생님, 임성훈(퀴즈가 좋다) 그리고 코치들이다. 어쨌든 누군가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 눈치채면 그 비밀이 무장해제되는 건 시간문제다. 

 

그 비밀을 숨기거나 덮으려 할 때 항상 큰 사단이 난다. 워터게이트가 그랬고 광주와 각종 ~풍 사건, 대통령의 아들 사건들이 모두 그랬다. 반대로 르윈스키 스캔들을 비롯해 온갖 비리의 옴니버스였던 클린턴 일가는 영리하게도 뻔한 비밀을 고집하지 않고 적절한 고백을 통해 면죄부를 받아내지 않았던가. 대단한 클린턴에 더 대단한 힐러리가 아닐 수 없다.

 

비밀이 없는 나라, 싸구려 X파일이 없는 사회가 돼야 한다. 

지하철에 3류 주간지가 안팔리는 나라가 돼야한다.

비록 감춰진 카리스마는 없을 지언정

투명하고 올바른 사람들이 서푼짜리 비밀 따위에 허투루 눈 돌리지 않고 사는,

그런 세상을 원한다.    

 

엊그제 대학 동창회에 나가서

<내가 입 벌리면 여럿 다쳐>라고 한 마디 했더니

어라 분위기 희한해지데.

학교 다니면서 과 커플로 소소한 염문을 일으켰던 것들이

죄다 내 눈치를 슬슬 보며 비위를 맞추는데,

거 기분 좋더구만.

 

얘들아 나 사실 아무것도 모르거든.

내 X-파일은 달랑 겉장만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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