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해선 놀랄 게 없는 나이다. 워낙 험한 세상을 살다보니, 남의 나라에서 몇 만명 죽었다 해도 그저 남의 얘기로 들린다. 그럴만도 하지 않나. 백년동안 전쟁이 없었던 날이 며칠 밖에 안된다는 개판 5분전의 20세기를 40년이나 경험했다. 죽음과 공포, 빈곤, 질병에는 이력이 났다. 지식 빅뱅의 시대를 사는 덕분에 어지간한 정보는 한번씩은 다 들어봤다. 이러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고, 특별히 놀라울 일도 없는 무덤덤 무감각인이 되고 말았다. 하물며 책 따위에 놀랜대서야 체면이 서지 않는다.

 놀라운 게 한두가지가 아닌 책을 봤다. 핸드릭 빌램 반 룬의 <코끼리에 관한 짧은 우화>. 평소 저자에 관심이 없는 나로선 이름조차 생소한 그가 요즘 미국에서 잘나가는 성인동화 작가 정도 되는 줄 알았다. 잘 봐주면 내동갑 쯤 됐겠다. 근데 어쩌면 이렇게 감각이 모던한거야. 그런 분이 알고보니 1882년에 태어나서 1942년에 세상을 떠난, 증조 할아버지 뻘 되는 양반이었던 것이다.

 내가 글을 잘 쓰는지 아닌지는 당장은 모른다. 묵혀놨다가 일년뒤에 꺼내 읽어보면 안다. 쓸 때는 마치 등단이라도 할 것 처럼 자신만만했던 문장이 고작 일년만에 유치찬란한 연애편지 꼴로 변했기 십상이다. 생각이 깊지 않았던 것이 첫째요, 문체가 바로 서질 않아 난삽한 것이 둘째이며, 쓸데없는 치장과 겉멋으로 분냄새만 요란한 것이 마지막 이유일 것이다.

 핸드릭 빌램 반 룬의 백년 가까운 문장과 일러스트에는 단호한 절제가 있다. 사람세상에 대한 통찰력이 있고, 나름의 확고한 문장스타일이 있다. 도입부터 재미있다. <코끼리들이 인간의 방식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그냥 코끼리로 남아 있을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인간 세상으로 특사 '존 경'을 파견한다. 무수한 직업들이 등장하고 모든 고난극복은 저자의 동화적 상상력으로 훌쩍 뛰어넘는다. 

그다음 놀라운 것은 인간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정신. 다음은 코끼리 특사 존 경이 천신만고 끝에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와서 가족들에게 제출한 보고서의 끝부분이다.

 <인간의 문명은 훌륭하고 장대하며 화려하고 놀랍다. 그것은 정신이 단순한 무생물위에 이른 가장 위대한 승리이다. 현실적인 거의 모든 면에서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방식보다 우월하다. 그러나 깊이 연구한 끝에 나는 인간의 방식에 무언가가 결핍돼있으며 , 그들의 영광스러운 승리 한복판에 조만간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패배를 가져올 재앙의 요소가 있다는 유감스러운 결론에 도달했다. ..... 인간이 오래 전에 잊어버린 무언가를 우리들은 알고 있다. 그건 진실하고 도리에 맞는 삶은 존재의 궁극적 실체(자연의 기본질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때만 실현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족의 코멘크가 붙을 대목도, 붙을 이유도 없이 깔끔하다. 자주 동물이나 외계인의 눈으로 인간의 모순을 들여다 보는 베르베르도 이만큼 간단명료하진 못하다. 찬찬히 다음 문장을 읽어보자.

 "우리의 세계는 변치 않을 오래된 가치, 사랑, 관용을 지닌 것들이 이리도 많은데, 왜 결코 풀리지도 않을 그런 문제들에 대해 신경을 쓴다지? 아내에 대한 사랑과 존경, 친구와의 우정, 우리의 아이들이 훌륭한 후계자가 되도록 키우는 즐겁고 감사한 일, 태양이 먼 바다로부터 다시 떠오르는 이른 아침의 아름다움, 보람있게 보낸 하루의 끝에서 어둠이 언덕과 골짜기에 내려앉을 때, 우리의 수많은 실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존재의 영원한 실체에 충실했음을 느낄 때, 그때 우리를 찾아오는 만족감. "

 마지막으로 윗 문장이 나오기 직전 나를 매료시켰던 대목이 있다.

 "우리 코끼리들은 살아온 대로 조용하고 행복한 삶을 계속할 것이다. 숲속엔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먹이가 있다. 혹시 우리에게 패기가 부족한게 아닐까?" "우리도 백인들이 서로를 부추기는 것처럼 <무언가를 해내기 위해 좀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것 일까물론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지만.)" 

 아마 노인장은 이 소설을 대공황이나 1차 세계대전같은 사건 전후에 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유토피아를 향한 생산력 무한 경쟁, 결국 디스토피아로 치달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그 첨예한 갈등으로서 전쟁과 공황. 인간들은 무언가를 해내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당대에 거의 없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서로 죽고 죽이고, 뺏고 빼앗기는, 어리둥절한 광경을 코끼리들에게 보여주고 만 것이다. 그런 맹목과 이기심에서 모든 비극이 싹튼다는 걸 백년이 지난 후에도 감을 못잡고 있으니 용렬한 인류의 후손들은 노인 앞에 고개를 떨굴 뿐이다.

 동화를 별로 안좋아하는 분은 맨 끝의 스무 페이지만 정독을 해도 좋다. 하지만 내내 재미있었고 흥미진진했으며 무엇보다 신이 났다. 코끼리들을 우습게 보면 안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