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장은 PR업계에선 실력을 인정받는 베테랑이다. 아침부터 고객과 언성을 높였더니 종일 되는 일이 없다. "빌어먹을. 돌대가리같은 놈이 고객은 무슨.  홍보하다 혈압 터져 내가 먼저 죽겠다."  뻑뻑한 뒷 목을 연신 주무르고 있는데 오실장이 두툼한 파일을 안고 들어왔다. "사장님. 내일 D사에 들어갈 PT(프리젠테이션)인데 한번 봐주시죠." 김사장은 손짓으로 놓고 나가라고 하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광고나 PR 매니저들이 가장 당황할 때가 있다. 고객이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고 무조건 잘해달라고 할 때다. 기업 이미지를 홍보해달라는 건지, 신제품을 프로모션하자는 건지, 아니면 수많은 컨셉중에 무엇을 앞세울 것인지 전혀 판단 못하는 고객. "그런 건 당신들이 전문가 아냐? 멋있게 한번 해봐"라고 거들먹거리는 고객. 그런 사람들일 수록 나중에 말바꿀 확률은 100%에 가깝다. "내가 언제 그걸로 하라고 그랬어? 이 사람들 보게. 내 얘긴 그게 아니었다구." 너무 황당해서 할 말을 잃는다. 김사장이 오늘 아침 뚜껑 열렸던 것도 바로 이런 고객 때문이었다.

 광고 PR 업계 사람들은 자신들을 비하할 때 <앵벌이>라고 말한다. 무슨 일이 하나 둘 쌓이면서 좀 편해지는게 아니라 맨날 뒤집어 새로 만들어야 하고, 가면 갈수록 일은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결국 내일의 기약없이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꼴이 앵벌이와 뭐가 다르냐는 것이다.

 고객들이 오해하는 게 있다. 홍보나 광고는 기본적으로 고객들이 해야 하는 일이다. 이른바 전문가들은 그 고객이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비용 대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열심히 도와줄 뿐이다. 전문가들이 얘기할 수 없는 것은 고객이 결정해야 할 몫이다. 그걸 모른 척하는 건 직무태만이요, 책임회피다. <PR매니저를 두지 말고 밖의 에이전시한테 맡기지 뭐.> 이렇게 생각하는 CEO는 아마 영원히 PR때문에 속을 썩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PR회사들은 아직 멀었어>라고 한 말씀 하시지만, 실제로 갈길이 먼 쪽은 그 CEO다.

 물론 전문가들에게도 문제는 있다. 처음부터 고객에게 설명하려고 달려든다. 마치 고객은 가만히 계시고 저희들이 모두 알아서 할 터이니 저희에게 맡겨만 달라는 식으로 접근한다. 수백 쪽짜리 PT도 모자라 아래부터 위까지 쫓아다니며 시시콜콜하게 설명하고 또 설명한다. 이렇게만 하면 분명히 성공할 거라고, 믿어달라고 호언장담한다. 액션플랜에 맞춰 짜여진 예산을 고객이 별 생각없이 뭉텅 깎아도 <그냥 한번 맞춰보지요 뭐.>한다.

 마르고 닳도록 설명하고 일주일 뒤에 고객사에 들어가 <이제 다 결정하셨습니까>라고 물으면 뻥한 눈으로 쳐다본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잘 생각이 안나서 그러니 다시 한번 설명해달라고 한다. <아 네. 이차장 뭐해. 지난번 거 빨리 꺼내.> 심지어 고객사 담당자의 기안까지 엽렵하게 준비해주기도 한다.

 광고가 나가고 보도자료가 뿌려진 뒤 고객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윗분들이 난리가 났어요. 어떻해요. 빨리 들어와서 수습하셔야지요." "아니 왜 그러시는데요?" "누가 회장님께 우리 광고가 후지다고 한 말씀 하신 모양이에요. 광고 컨셉을 왜 그렇게 잡았느냐고 담당 이사가 작살 났어요. 그러게 잘 좀 하라니까." "아니 몇번씩 PT하고 시안까지 다 보여드려서 결재까지 났던 것 아닙니까?" "이것 보세요. 당신들은 전문가 아네요? 마땅히 일이 잘못됐으면 책임을 져야지 이제와서 발뺌하잔 건가요? 이거 어디 믿고 일할 수 있겠나. 다음 경쟁PT땐 들어올 생각도 마세요."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결정하지 않은 것은 결코 기억하지 않는다. 바쁜 세상에 사흘이면 까맣게 잊어버린다. 수업시간에 집중해서 들은 내용은 그날 방과후엔 80% 기억하지만, 한달 후엔 5% 이하로 떨어진다. 고객이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게 만들지 않는 한, 광고나 홍보업계의 앞날은 내내 가시밭길일게 분명하다. 고객은 자기 판단으로 결정한 사항에 대해선 기꺼이 책임을 진다. 전문가들의 역할도 분명하게 규정된다. 프로젝트의 성과 역시 지속적으로 업그래이드할 수 있다. 당연히 성공률도 높아진다. 그래서 처음에 까다롭게 구는 고객일 수록 뒤가 편하고 성과도 좋게 마련이다. 

 고객에게 설명하지 말라. 만일 당신이 고객을 성공시키고, 자신도 성공하고 싶다면. 그 대신 코칭을 해야 한다. 코칭을 통해 고객의 마음 속에 숨어있는 진짜 목표와 가능성을 발견해내고, 실현가능한 계획을 세운 후에, 걸림돌을 찾아서 제거하면 된다. 이 과정에서 당신은 자신의 경험과 이론을 설명하지 말고 고객에게 계속 질문을 던져보라. 이는 고객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각종 변수와 상황조건들을 다시 반추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잊지 마라. 열 시간의 설명보다 적절한 한두가지 질문이 훨씬 더 큰 각성과 깨달음을 준다.

 

광고 PR전문가 뿐만 아니다. 변호사, 의사, 회계사, 부동산, 건축, 인테리어 등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은 반드시 코칭에 귀기울여야 한다. 더 이상 호시절은 없다. 예전 같으면 고객만족이니, 서비스니 하는 건 안중에도 없던 고급직군들도 차별성 없이는 경쟁에서 배겨날 재간이 없다. 뚜껑 열린 고객이 소송을 걸겠다면 "그러시든지"하고 아무 생각없이 소송절차를 밟는 변호사는 "만에 하나 소송에서 질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라고 질문하는 코치 변호사에게 당할 수가 없다. 이런 추세를 반영하듯 요즘 미국에서 코치 자격증을 가진 변호사들이 급격히 늘고 있다.   

 SK텔레콤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라는 컨셉의 광고로 공전의 히트를 칠 때, 그 캠페인을 담당했던 이용찬씨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광고 PT의 동방불패라며 부러워 하는데 무슨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뭐 비결이랄 건 없고, 고객사 CEO가 내게 물어볼 만한 질문을, 내가 먼저 물어보는 겁니다. 그렇게 두 세 가지 질문하면 고객이 스스로 컨셉을 찾아냅니다. 난 아무 것도 안했는데 고객은 그 컨셉을 내가 제안했다고 생각하더군요. 어쨌든 거기서 성패는 끝납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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