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광균의 <은수저>란 시다
산이 저문다
노을이 잠긴다
저녁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기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37p)
‘저녁밥상에 애기가 없다’는 현실은 ‘한 쌍의 은수저’로 그리고 그것은 ‘은수저 끝에 눈물’로 도드라진다 애기가 없은 슬픔이 느껴진다 문득 이기주의 <글의 품격>에서 본 이야기가 생각난다 헤밍웨이에게 누군가가 6단어로 구성된 소설을 쓴다면 당신의 필력을 인정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헤밍웨이는 이렇게 썼다고 한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김광균 보다 더 압축시킨 아이를 잃은 상실의 슬픔이 느껴진다 ‘한번도 신지 않은 아이의 신발’을 덩그러니 내놓은 그 풍경, 그 샷이 주는 슬픔의 미는 어떠한가!
역시 헤밍웨이의 “빙산이론(생략이론)”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글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삶 자체, 나의 삶이 다른 이에게 보여지는 것은 삶의 전부가 아니라 파편일 수 있다 소위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너’일 수 없기에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타인을 100% 판독하고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우린 우리의 눈으로 ‘타인의 삶의 빙산의 일각’을 보면서 판단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현실이고 노릇이다
2
이윤기가 말한다
‘나는 이미 많은 정보를 내 기억의 창고에다 우겨넣었다 더 우겨넣는 수고가 망설여진다 그래서 가만히 기다리면서 구정물이 맑아질 때를 기다리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자주 나 자신에게 묻는다 더 알아야 하는가? 우겨넣은 짓 이제 그만하고 가만히 되새김질해 볼 때가 된 것 같은데, 아닌가?’(68p)
이미 고인이 된 작가가 스스로 질문하는 내용이다 “더 알아야 하는가?” 구약성경 전도서의 저자, 솔로몬 왕은 이런 말을 했다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전도서 12:12)
배움에는 끝이 없고 이 세상엔 수많은 공부의 요소들이 있다 수많은 책들이 존재한다 자연의 풍광도 공부의 요소가 될 수 있겠다 자연은 언제나 우리에게 팔색조보다 더한 풍경을 보여주지 않는가! 100년이란 시간 안에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책이 얼마일까? limit가 없는 것이리라 이윤기는 ‘우겨넣는 수고가 망설여진다’고 했다 나는 아직 조금 시간이 있으니 더 우겨넣는 수고가 있어야겠다 근데 오늘 이 페이퍼는 정말 읽기를 쉬기 위한 pause time이다 계속 우겨넣음 머리에 쥐가 날 듯 해서다
3
그리스로마 신화학자로 알려진 그가, 딸(번역가이다)의 말을 빌면 이윤기는 늘 ‘소설가’로 불려지고 싶어했다고 한다 도서관에 꽂힌 1000쪽이 넘는 이윤기의 우람한 양장본 소설책이 떠오른다 목차를 보고 책쪽수를 보고 얼른 덮었다는 기억이 있다 우린 이윤기를 소설가보다는 그리스로마학자로 잘 알고 있다 거기서 대박을 터트렸으니.
근데 이윤기가 그리스로마 신화의 전문가가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고 한다
‘터키의 흐린 주점에서, 나의 흑해를 건너야 한다고 결심하지 않았으면 나는 어찌 되었을꼬! 나의 신화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좌절해있는 젊은이들을 위해서 쓴다 흑해는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 흑해를 건너야 한다’(81p)
인생의 기회는 한 순간에 포착되는 듯 하다 나는 얼마나 많은 흑해를 피하였던가? 지금은 그 흑해를 건너고 있는가? 그렇다고 자위해 본다
4
‘어머니는 한 번도 날 무시하지 않았다(151p)’
‘지진아였던 내가 지금은 작가가 되었다 때로는 전세계를 누비기도 한다 내 분야에서는 실수도 별로 없다 어머니가 나를 무시하고 능멸했다면 나는 진작에 자멸했을 것이다 내 아들 딸도 부모로부터 무시당하거나 능멸당한 적이 거의 없다 지금 잘 자라 있다 사람은 남으로부터 무시당하거나 능멸당한 경험이 없다면 남을 무시하거나 능멸하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154p)
나는?
그냥 이 대목이 울컥했다 이윤기가 학창시절에 학교 1년 쉰다고 했을 때도, 1년 쉬다 다시 학교간다고 했을 때도 이윤기의 어머니는 그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줬다고 한다 근데 그건 정말 쉬운게 아닌 듯 하다 능멸당한다는 것은 존재가 쪼그라드는 경험이다 그 경험이 진짜 비극적인 체험이다
나는?
그리고 나는 자녀들에게 무시하지 않는 아버지인가? 자신이 없다 나도 그렇게 잘나지 않았고 잘 나게 커 온 것도 아닌데 이것도 트라우마이자 컴플렉스인 것 같다 괜히 애들에게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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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 10년 뒤에 온다”
이 말은 프랑스 속담이다 작가가 죽은 뒤 10년이 지났는데도 책이 서점에, 서가에 꽂혀 있고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다면 그 작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 이란 의미이다 우리의 존재가 싸늘한 시체로 변한 후에도 영향력을 미치려면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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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 rosa pristine nomine, nomina nuda tenemus.
지난 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 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 없는 이름뿐.(176p)
역시 흑해를 건너는 수많은 여행에서 온 이윤기의 ‘빙산의 일각’이 보여주는 풍광이 글로 스치고 가는 느낌이 멋쩍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일지라도 나의 삶은 그래도....감사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