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교회마다 자주 총동원주일이나 총력전도주일’, ‘전교인전도주일등의 타이틀을 걸고 시작되는 전도에 대한 구호나 문구를 볼 때마다 참으로 눈에 가시처럼 보여졌다. 그것은 너무나 구태의연하게 보이기도 하고 글귀 자체가 너무나 군대식’-억압적인 방식의 전형-으로 보여졌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은 교회마다 이런 불신자에 대한 접근방식이 이전보다는 많이 세련되고 거부감을 주지 않다는 것에 대해 참 다행스럽다고 생각한다.

 

 

이런 집회, 더 나아가서 좀더 색다른 전도집회에서 흔히 있는 볼 수 있는 전도방식이 바로 영접’, ‘초청등의 순서이다. 이러한 현대적 전도 방식의 원조는, 제임스 패커에 의하면, 19세기 초의 찰스 피니다. 현대의 복음 전도는 피니의 방식을 따른 것이요 피니의 인간론의 산물이다. “오늘날 수많은 복음 전도를 특징짓는 것은 수정되고 응용된 피니의 방법이다.” 그런데 패커는 피니가 명백한 펠라기안주의자라고 단언한다. 피니는 일단 사람이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확신되기만 하면 누구나 타고난 능력에 의해 전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다는 것을 힘주어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피니는 어거스틴-개혁주의-청교도적 전적 무능력의 교리를 비웃었다는 것이다. 패커는 피니식의 전도방식을 상당히 부정하면서도 나중에는 절충안, 타협안을 내놓는 다소 약삭빠른 전략(?)을 내놓는다.

 

 

피니식의 전도방식과는 사뭇 다른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도방식은 어떤 것인가? 그 중심부에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철저한 회심론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 만큼 회심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설교자도 없었지만 그의 설교는 전도의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이 대목을 보면 에드워즈에게 있어 회심이란 것은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고 부패하였으므로 하나님께 도저히 나아갈 수 없기에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전적인 주권에 의해서만 회심되어지며 중생할 수 있다는 전통적인 칼빈주의 노선에 서 있다. 하지만 에드워즈의 논리는 그와는 색깔이 조금 다르다. 칼빈주의는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믿으면 되는 줄 알지만 인간 스스로는 믿을 수 없다. , 자신이 택정된 자라면 하나님이 자기 때자기 방식으로 구원하실 것이다. 그리고 인간으로서는 구원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주된 논지이다. 하지만 이것은 칼빈주의의 하나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보탬이 될만한 공로는 존재치 않는다 할지라도 자신의 영혼에 대한 어떠한 방도조차 강구할 수 없단 말인가? 극단적으로 몰아붙이자면 그냥 말 그대로 누워서 떡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그런 구원이 바로 칼빈주의식의 구원인가?

 

 

조나단 에드워즈의 구도론은 이러한 칼빈주의의 딜레마를 해소시켜 준다. 에드워즈는 구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즉 각성된 구도자들에게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면서 회심의 은혜를 찾으라고 말한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질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지정하신 수단들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이 회심의 은혜를 주시기까지 추구하고 몸부림칠 수 있다는 것이다. 패커가 청교도 전도론에 대해 지적한 것처럼, 에드워즈는 회심하지 않는 자들에게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로 결단하는 것 대신 그리스도를 찾을의무를 강조했다. 에드워즈는 인간의 전적 무능력의 교리를 믿는 칼빈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수단을 사용할 힘은 자연인에게 있다고 믿었다. 에드워즈는 이 구도론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를 댄다. 이것은 에드워즈의 준비론이다. 철저한 칼빈주의자로서 에드워즈는 인간이 행위에 의해 구원 얻는 것은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함이 없이 구원 얻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하나님은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 우리가 선한 일을 함이 없이는 최종적 구원을 받을 수 없도록 정하셨다는 것이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 윤리적 의무 수행도 구도의 일환이며, 자선 또한 은혜의 방편임을 성경적인 근거들을 들어 설명한다. 나는 여기서 에드워즈가 성경해석의 근거를 잘못 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물론 에드워즈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자비를 많이 베풀며 자선과 구제를 많이 하고 남들보다 더 특출나고 깊은 인품과 인격을 겸비하고 야무진 행동거지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인물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은 더 강력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에드워즈가 근거를 대는 대목은 다소 의미부여의 측면이 강한 것이 아닌가하고 대단한 용기(?)를 내어 꼬집어 본다.

 

 

에드워즈는 물론, 그는 그것(은혜의 방편)이 하나님 앞에 인간의 공로가 되어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하나님이 영적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못을 박는다. 자선의 행위는 어떤 식으로든 신령한 은혜의 유익을 구입하기 위해 하나님께 값을 치르는것은 아니다. “영적 발견과 하나님의 현현의 축복은 너무나 무한히 위대한 것이어서 우리가 가진 어떤 것을 주고 구입할 수 없다고 그는 강조한다.’ 그는 절대 'give and take'식으로 구도론에 접근하면 안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의 이러한 논리는 마치 선행이 구원에 기여한다고 가르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교리적으로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노아가 방주짓는 일에 헌신되었듯이, ‘그 크고 어렵고 경비가 많이 드는 일을 계속하기를 방주가 완성되어 홍수가 올 때까지 했듯이 에드워즈는 여러분의 노력을 무제한적으로 사용하여 추구하기를 계속하시오.”라고 말하는 에드워즈의 이러한 사상에는 그 배경이 있다. 그것은 종교개혁가들이 이신칭의의 교리를 강조한 나머지 행함이 없는 믿음혹은 야고보가 비난한 죽은 믿음으로 구원 얻을 수 있다는 오해를 했을 가능성 때문이다. 에드워즈의 이러한 사상들을 모조리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가 이러한 사상을 내게 된 그 저의는 대단히 고무적이다. 또한 에드워즈의 인생의 우선순위를 엿보자면 ‘20세 무렵에 자기 뉴잉글랜드 조상들과 같은 단계와 방식을 따른 회심을 체험하는 데 평생의 주안점을 두기로 결심했다. , 단순히 교리를 수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것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의 철학은 그의 회심론에서도 드러난다.

 

 

청교도적 회심론이 현대의 견해와 구별되는 결정적인 지점은 죄에 대한 깨달음과 관련되어 있다. 청교도들은 죄에 대한 확신이 믿음에 선행해야 한다고 믿었다. 청교도들은 자신의 죄들에 대해 정확히 중세적 의미의 통회가 절대 필요함을 알았다. 그러한 통회 없이는 아무도 죄의 형벌로부터만 아니라 죄의 능력으로부터도 구원받기 위해 참으로, 신실하게, 그리고 전심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조나단 에드워즈 또한 자연인이 믿음을 얻기 전에 먼저 자신의 죄성에 대하 깊은 자각이 있어야 함을 힘주어 강조했고 그 결과로 그의 사상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에 대해 구도론은 공덕 사상, 또는 행위 구원 사상의 발로가 아닌가하는 반론도 등장한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알미니안주의적 교리를 누구보다도 더 열렬히 비판하고 비난하였던 인물이다. 또한 에드워즈의 이론에 따르면 구원이 구도적인 노력에 전적으로 좌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 없이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로 인한 파장은 첫째, 구원을 얻는 것이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한다. 둘째, 구도가 자연적 능력에 속한 일인가 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 능력에 속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셋째, 부분적으로 에드워즈의 구도론은 행위를 구원에 관련시키는 인상을 줄 우려가 있는 것이 사실인 듯하다. 그의 사상은 구원이 다소 인간의 선행에 의존한다고 믿는 견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런데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은 에드워즈에게 있어 그의 모든 신학과 철학과 저술들은 자신 깊은 영적 체험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그가 곤욕스럽고도 고통스럽게 구도자의 생을 보내면서 종교적인 의무와 항목들을 준수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아무런 종교적 감흥도, 감동도 없이 사변적이고도 이성적인 논리의 뼈대만을 내세웠다면 그 가운데 특이할만한 것은 없었을 것이다. 단지 그는 또 하나의 알미니안주의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부흥과 체험의 신학자였다. 그는 청교도들 중의 청교도이었으며, 지성과 감성을 두루 겸비한 탁월하고도 깊이 있는 신학자였다. 그의 구도론은 오해와 편견의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진실하고도 심각한 하나님을 향한 열망과 추구는 우리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진정한 갈망thirsty인지도 모른다. 포스트 모더니즘과 상대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한현 시대는 죄가 죄인지도 모르고 모든 것이 혼탁하기 그지없는 시대이다. 이러한 무질서와 혼돈의 시대에 인간의 죄와 죄성, 죄의 자질에 대한 깊은 성찰과 통감함이 하나님 앞에서 필요함을 조나단 에드워즈를 통해 절실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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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8-11-18 16: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쪽 분야는 완전 젬병입니다.ㅠ

페크(pek0501) 2018-11-18 1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프리쿠키 님의 댓글이 웃겨 웃었습니다. 저를 구원해 주신 댓글이기도 합니다.

페크도 완전 젬병 2입니다.

그냥 가기 섭섭해서 파스칼의 <팡세>에서 본 구절을 옮기고 가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세계는 존속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는 이미 파괴되었거나 아니면 지옥으로 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 민음사, 38쪽. - 이것에 동의하는 것은 아님. 정확히 모르겠음.
저는 이 책이 흥미로워서 옆에 끼고 삽니다. 명언처럼 느껴지는 구절도 많답니다.


카알벨루치 2018-11-18 19:57   좋아요 1 | URL
솔직한 댓글 감사드려요 ㅎㅎ 북프리쿠키님도 페크님도 감솨 이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