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paper는 로렌스의 "Why the novel matter"이란 에세이를 참고하여 적은 글인 듯 합니다. 텍스트가 안 보이네요. 어디있는건지...ㅜㅜ
D. H. Lawrence...(1885-1930)
Lawrence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라는 책으로 말미암아 ‘외설작가’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더 나아가 그는 20세기 영문학사상 가장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첫째, 남근숭배(Phallicism)사상을 주장했다는 것이며, 둘째, 성(性)의 신비를 작품을 통하여 추구했다는 것이다. Lawrence는 끊임없는 창작열을 불태웠는데, 그는 시, 소설, 평론, 에세이 등 다방면의 재능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림에까지 자신의 손을 뻗쳤던 것이다. 그는 회화전을 내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글의 불타는 생명력의 어떤 에너지원을 나름대로 추측해 보면 그의 인생의 세 가지 축으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그가 살아오면서 교제하였던 연인들과의 관계이다.
그는 제시 챔버스, 헬렌 코크, 루이 버로우즈, 그리고 4살 연상의 프리다와의 관계를 소재로 그의 소설의 실타래를 풀어 헤쳤던 것이다. 더 나아가 Lawrence는 자신의 어머니인 리디아 비어올즈(lydia Beardsall)와는 ‘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정신적인 연인’과도 같은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후에 그는 자신의 이러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Oedipus complex)를 벗어나고자 ‘아들과 연인’이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던 것이다.
둘째는 지병(持病)으로 인한 곤욕이었다.
그는 평생 허약 체질로 고생하였고 그로 인해 얻은 폐병으로 인한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의 사인(死因)은 폐병이었다. Lawrence는 이러한 질병을 치유책으로 평생 전세계적으로 공기가 좋고 건강의 회복에 도움이 되는 지방을 찾아 요양생활을 해야 했다. 어쩌면 이러한 자연적 배경의 잦은 이동이 그의 글쓰기의 자극제로 작용했을 법도 하다.
셋째는 계속된 방랑생활이었다.
“Why the novel Matter"
그의 에세이 ‘소설은 왜 중요한가?’는 대단한 철학적 상상력을 발휘해야하는 지적 부담감이 요구된다. 어쩌면 Text를 대하는 우리는 고도의 Sensibility를 수반해야할 것이다. Lawrence의 아버지는 광부였다. 금광에서 금을, 석탄을 캐내는 것이 그의 아버지의 직업이었다. 우리는 또 하나의 다른 금광, Lawrence라는 금광을 캐내는 채벌꾼으로 둔갑해야 할 것이다.
Stephen Spencer는 Lawrence를 일컫어 ‘가장 희망에 찬 현대작가’라고 하였고, 리비스(F. R. Leavis)는 ‘위대한 작가이고 예술가이다’라고 극찬했다.
1.철학과 기독교에 대한 로렌스의 비판 요지
그 당시의 서구문화는 지나친 지성의 편중, 과학 숭상, 기계와 정신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였다. 그래서 Text의 첫 부분에서 Lawrence는 Mens sana in corpora sano(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이 말 속에서 이미 육체에 대한 그 시대의 간과함에 대해 비판하면서 글을 전개시키고 있다. 그는 그 시대의 지성인들이라 자부하는 이들이 육체(flesh)를 경시하는 경향이 바로 육체는 어떠한 플러스 알파적인 요소가 덧붙여져야만 의미를 가지는 정도로밖에 생각치 않았다는 것이다. 육체는 기본적인 토대, 베이스이며 그 위에 정신이라든가 영혼이라든가 지성이라든가 이러한 플러스 알파적인 요소들이 덧붙여져야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Lawrence는 근원적인 육체, 생명의 우위성을 강조하였고 ‘혈과 육(Blood and Flesh)’의 철학을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남근숭배 사상을 선호하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철학자들이나 성직자들이나 과학자들은 언제나 형이상학적인 영역에 몰두하였지 형이하학적인 ‘몸’, ‘육체’에 대해선 아무런 안중도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철학자들을 위한 비판의 근거, 요지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Lawrence는 철저한 사후 세계에 대해선 전혀 관심도 열정도 없었다. 그는 어떤 면에서 현세중심적인 인물이었다. 이것은 바로 그 당시 기독교에 대한 Lawrence의 비판의 요지요, 출발점이요, 준거점인 것이다.
Lawrence는 그 당시의 철학과 기독교가 주장하는 시대적인 분위기를 비유하기를 그것은 ‘마치 저녁식사에서 감자만이 가장 중요하다’고 외치는 우스광스러운 작태라는 것이다. 성직자가 ‘천국에 있는 영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도 ‘뜬구름 잡는 소리’라는 것이다. 삶, 즉 살아있는 육체(Living Body...p.2146)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Lawrence는 육체의 중요성을 ‘My hand’라는 글쓰는 하나의 기관(Organ)-육체의 한 부분(a part of body)으로-을 비유적으로, 상징적으로 그러나 더 현실적으로 말해주고 있기도 하다.
Lawrence는 초기에 어머니-그의 어머니는 청교도주의(Purtanism)을 신봉했고 철저한 금주주의자였으며, 그녀의 고매한 성격은 남편과 대조적으로 ‘지적이며 철학적’이었다-를 아주 강하게 의지했다. 그에게 있어 어머니는 ‘정신적인 기둥이요 지주’였다. 그러나 그가 만년에 이르러서는 가치관의 변화로 인하여 어머니가 그렇게 멸시했던 아버지-그의 아버지는 ‘육체적이며 관능적’이었다-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며 말 그대로 ‘육체’를 중시하게 되어지며, 더 나아가 ‘원시적 성(性)’을 주창하게 된다. 그의 원시적 성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Lady Chatterley's Lover)’을 데이쉬즈(David Daiches)는 평하기를 ‘남자의 육체에 대한 묘사와 기술이 잘 표현되었다고 평’했다. 그는 그만큼 육체(Body)에 대하여 강한 강조점을 두었던 것이다.
2.Me alive,change,wholeness개념 이해
2.1.Me alive
이 개념은 다소 애매하고 난해한 개념이기도 하다. 그래서 프로이드(G. Freud)의 심리학을 빌어와서 한 번 설명해 보고자 한다. Freud에게 있어 인간의 자아는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ego, 또 하나는 superego, 또 다른 하나는 id이다. ego는 말 그대로 ego 즉 자아이고, superego는 초(超)자아이며, id는 인간의 무의식(unconsciousness)을 말한다. Lawrence에게 있어 id는 크게 두 가지의 중심된 축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앞에서 말한 <어머니>라는 하나의 축과 <아버지>라는 하나의 축이다. Lawrence의 무의식 속에는 언제나 부모님의 그림자가 따라다녔던 것이다. 특히, 어머니의 무의식적 영향력은 끊임없이 그를 따라다녔고, 그로 인해 그는 여자친구를 만날 때조차도 어머니의 무의식적, 정신적인 지배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 해 이별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죽고 난 후, Lawrence는 새로운 연인 프리다-자기 대학시절의 스승의 아내였다-를 만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이로 인해 그는 자기의 무의식 속에 뿌리 내리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상처와 과거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글쓰기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물이 바로 ‘아들과 연인’이라는 소설이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Me alive의 첫 번째 개념정의를 ‘글쓰는 능력, 힘, 기관(organ)’으로 보고 싶다. text의 앞부분에 언급된 ‘my pen’(p.2145)이라는 그 개념 자체가 바로 ‘살아있는 글쓰기’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두 번째 개념정의는 말 그대로 ‘살아 숨쉬는 역동성(dynamite)’ 으로 볼 수 있겠다. 육체의 건재함, 말 그대로 살아 있음, Me의 살아있음 등의 이러한 설명으로 덧붙일 수 있겠다. 이러한 역동성은 ‘my hand’를 이야기하면서 ‘피를 흘린다(...the blood that flows...p.2145)'는 그 말속에서 육체가 살아있음은, 생명체가 생명력이 있음은 증거 하는 그것은 바로 ‘피를 흘리는’ 것임을 말해준다. 또한 ‘불 속으로 손가락을 넣는 그런 행위(p.2145)’를 통해서 ‘그 손가락은 당연히 타 들어가는’ 결과는 바로 육체의 진정한 현실이요, Me alive의 리얼리티인 것이다.
2.change
Lawrence는 한 방향 혹은 특정한 방향으로만 향하거나, 흘러가는 것에 대한 강한 혐오와 반대가 있다. 그 예로 성경 속에 나오는 말씀-"The grass withereth, the flower fadeth, but the Word of the Lord shall stand for ever."-속에서 ‘풀과 꽃’을 ‘주의 말씀’과 대조시키고 있다. 풀과 꽃은 ‘시들고 지’지만 주의 말씀은 풀과 꽃은 시듦과 짊이라는 그러한 변화도 없이 그대로 있음으로 해서 ‘케케묵음과 지루함’으로 남겨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해서 주의 말씀은 변화 없이 결국 ‘존재(함)의 정지’라는 비극을 맞게 된다.
또한 Lawrence에게 있어 절대적 선(善)이나 절대적인 악(惡)은 없다. 절대적이란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 ‘절대’ 대신에 ‘변화(change)’와 ‘넘침(overflow)’이란 개념이 대신 들어섰고 그러한 변화라는 것, 그 자체도 절대가 아니라는 전제를 달고 있다.
변화를 설명하면서 Lawrence는 사랑하는 남녀관계조차도 변화가 없다면 그는 차라리 ‘성급한 사람(pepper pot)’을 사랑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한다.
Lawrence는 더 나아가서 ‘A certain integrity’조차도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변화하지 않는다면 ‘내게 재앙이 있으라(woe betide me!)’라는 말을 했다. 변화가 없는, 그대로 머물러 안주하고 고정되어 있는 것을 Lawrence는 극도로 싫어했다. 그 불변하는 고정성의 예로, 그는 그러한 것을 가등주-'lamp-post'-에 비유했다. 그는 변화를 방해하거나 훼방하는 그 걸림돌을, Living body의 장애물로 어떤 정형적인 틀(pattern)을 거부했다.
결론적으로 Lawrence에게 있어 변화라는 것은 ‘끊임없는 쇄신(Renewal), 움직임(動), 요동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측면에서 Lawrence의 방랑생활과 요양생활로 인한 잦은 주거지 이동, 프리다와의 잦은 갈등을 긍정적으로 사상적인 측면에서 승화시킨 것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겠다.
3.wholeness
철학자는 사상을 배설하고, 과학자는 현미경위에 놓여져 있는 생명체의 조각과 파편-그것은 이미 죽은 생물체이다-을 관찰한다. 이러한 전문가들의 부분적인 측면에 비해 Lawrence는 온전한 통합성, 전체성(Wholeness)를 주장한다.
-(I am a very curious assembly of incongruous parts)
그러기에 과학자에게 있어 심장이나 간이나 위나 뇌나 신경이나 땀샘 등과 같은 육체의 한 부분을 ‘자기(me)’라고 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영혼, 육체, 지성, 두뇌, 신경조직, 땀샘조직, 그 밖의 나머지 모든 것들도 ‘Me’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단지 ‘Me’의 한 부분(as a part of Me)일뿐 온전하게 ‘Me’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떠한 파편, 부분, 조각, 토막들도 ‘I’, ‘Me’가 되어질 순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통합된 ‘I’, 개체들의 집합인 ‘I’, 이것이 바로 Lawrence의 wholeness의 실체인 것이다.
3.로렌스가 말하는 소설쟝르의 중요성 이해
T. S. Eliot, Aldous Leonardo Huxley, James Joyce등의 현대 시인과 작가들이 현대사회에 불만을 품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모색했다. 또한 그들은 작품을 ‘예술의 완성’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러나, Lawrence는 ‘예술의 완성’보다는 ‘예언자로서 전하고 싶은 사명’이 더욱 중요하다고 느꼈다. Lawrence는 이러한 자신의 취지의 타켓으로 잡은 것이 바로 ‘소설’이었다. 그는 시, 소설, 에세이, 평론 등의 다방면의 작품활동을 하였지만 그는 자신을 어디까지나 <소설가>로 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Lawrence의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남다른 어떤 애착과 열정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Lawrence는 ‘인간의 각기 다른 토막들의 훌륭한 대가’들인 성인, 철학자, 과학자, 시인들을 비판하면서 그들은 단지 ‘조각’이나 ‘토막’을 다루는 부분적인 사람일뿐이며 그 ‘전부, 전체’는 건드리지 못한다라고 했다.
Lawrence는 소설을 ‘단 하나의 빛나는 생명책’이라고 했다. 책은 삶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소설은 살아있는 인간 전체를 떨리게 만드는 공기에 와 닿는 떨림”이라고 말한다. 이에 비해 시나 과학이나 철학 또한 그 어떠한 책도 이러한 떨림을 가능케 하지 못한다라고 못 박는다.
Lawrence는 성경(The Bible)조차도 하나의 인생의 책-거대하게 혼란을 야기 시키는 소설-이라 말한다. 성경을 Homer의 글이나 Shakespeare의 소설, 그 외에 무수한 고전(古典)들과 대등한 위치에 두고 있다. 그러기에 성경은 신(神)의 이야기 아니라 인간들에 대한, Man alive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심지어 Jesus조차도 단지 Man alive의 한 유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거친 혼돈 속에서 우리는 가이드를 필요하게 되는데 이 가이드 역할을 바로 ‘소설’이 감당할 수 있다. 또한 소설이 삶 속에서 죽은-변화되지 않는, 고정되어 있는, Man alive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지지 않도록 도와 줄 수 있다. 예전에는 성경의 단순한 명령이나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규범들-예를 든다면, Thou Shalt Nots!(도둑질하지 말지어다)-은 더 이상 인간의 인생에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고 오직 ‘소설’만이 그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삶의 여러 가지 정황들과 인격들과 태도들을 보면서, 일종의 ‘보여주기’를 통해서 인간을 인도하며 Guide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가 다른 어떤 장르들, 이를테면 시나 수필이나 희곡이나 시나리오 같은 것에 비해 인간의 삶을 조명하는데 훨씬 더 자유롭고 제한이 없다는 것이 Lawrence가 소설을 선택한 이유라 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소설이란 장르의 유용함을 통해서 자신의 사상과 글을 전개시켰다.
D. H. Lawrence
....“소설은 모든 예술 형태 중에서 가장 인간적이기 때문에 좋아한다.”
*갑자기 추억이 소름 돋네요! 추억이 뭉게뭉게 몰려왔던 시절의 페이퍼입니다. 도움 되시면 좋을까 싶어 올립니다. ^^
<미국고전문학연구>가 드디어 번역이 되어 나왔군요!
로렌스가 '외설작가'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아야 할 이유를 밝힌 명저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미국고전문학계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던 분위기였는데,
로렌스의 이 저서로 인해 미국문학에도 눈을 돌리게 되었다고 하는군요.
이 책을 집에 있는가 찾아봤는데....사라졌는지, 버렸는지...아 갑자기 이 책의 흔적을 훑고 싶은데, 없다는....
하지만, 멋진책이 번역본으로 나왔으니 참고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로렌스의 '미국고전문학강의' 저 책이 굉장히 좋았다는 기억이 있습니다. 비평강의때 텍스트였는데, 그때 제가 로렌스란 작가에게 빠졌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