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5.

0. 자, 이제 모든 독후감은 감상 형식이 아니라 잡담 형식으로, 완전 무질서하게 쓰는 걸로. 블로그 감상 카테고리에 있던 글을 모두 독서 카테고리로 옮겼다. 완전 자유분방한, 무형식적인 글을 써야지.

0-1. 물론 이건 조르바 때문은 아니야.

1. 페이스북에 한참 빠졌을 때, 한 페친분께서 그렇게 조르바, 조르바를 외치셨다. 일도 열심, 운동도 열심, 독서도 열심, 인간관계에도 열심, 뭐든지 엄청 열성적이고 멋있는 분이셨다. 그런 분이 조르바를 그렇게 애타게 찾으셨다니, 과연 조르바는 어떤 인물일까 궁금증이 들었더랬다. 자유인 조르바를 향한 열망과 박수갈채는, 척하기의 귀재인 내게 솔깃한 인물이었다.

2. 독서기록을 검색해보니 이 책을 처음 편 건 2011년이다. 대학 졸업반일 때다. 페이스북 일도 일이지만, 글자가 작고 줄간격이 좁으며, 무엇보다도 양장본이어서 뭔가 있어 보이는 열린책들 세계문학을 대표하는 책(도스토예프스키 책과 더불어)이 이 책이기도 해서 한번 욕심내봤다. 무려 내 생애 처음 편 열린책들 세계문학 도서이다.

3. '11년엔 무슨 책을 읽었나. 대부분이 일본 엔터테인먼트 소설이고, 지금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해리포터 7부 죽음의 성물, 라이트 노벨, <솔로부대 탈출매뉴얼>... 음? 분명 읽었다고 쓰였는데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 책들도 많다. 앵무새 죽이기,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신화, 곰스크로 가는 열차, 캐치-22, 인간 실격, 차가운 밤... 그러니까, 결국 하고픈 말은, 나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을 깜냥이 안됐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열린책들 판형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지금도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 이걸 읽었다고 표시해놨으니, 잘난척하고픈 마음은 진짜 엄청났다. 더 뒤지다보니 '13에도 '또' 읽었다고 돼있다. 아아, 나는 거짓말쟁이야.

4. 요새는 열린책들 판형에 좀 적응이 됐다. 지금 읽는 책은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책세상, 2014)인데 너무 큰 줄간격에 맥을 못 추고 있다. 내용이 너무 널찍널찍하니 한눈에 글이 들어오지 않아 산만하다. 판형에 적응은 했다 쳐도, 이 책을 처음 편 게 7월 초인데 마지막 장은 9월 중순에 덮었으니, 2개월이나 붙잡고 있던 건가. 오호 통재라. 그나마 이 책을 읽을 수 있던 계기는 직전에 읽은 <위험한 독서의 해>(앤디 밀러, 책세상, 2015)다. 재미없고 읽기 힘들어도 끝까지 읽으면 뭔가 배울거리가 생긴다는 말에 꾹 참고 읽었다.

5.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인 조르바>는 재미없다. 정말이다. 중반까지는 흥미를 끄는 이야기가 전혀 없다. 주인공인 '나'가 자유인 조르바를 만나 탄광에서 일하는 이야기뿐이다. 하는 일이라곤 낮에 탄광에서 일하고 밤엔 술을 마시고 자고 일어나 다시 일하고 먹고 일하고 먹고... 이야기는 눈꼽만큼씩만 흐른다. 책을 다 읽고 빨간 책방을 들었는데 김중혁 작가도 1/3까지는 정말 재미가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작가가 소설의 틀을 짜고 쓴 게 아니라 되는대로 쓰다가 마무리한 것 같다고 추측한다. 아, 공감, 대공감. 그나마 뒷부분은 많은 이야기가 있어 읽기에 재밌어서 다행이었다.

6. 매일 책만 읽고 붓다에 대한 글을 쓰던 '나'는 세상 어느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조르바에게 감탄한다. 대체 왜 그렇게 감탄하고 경이롭게 쳐다보는지 공감할 시간도 주지 않고 혼자 우와, 최고, 이러면서 치켜새운다. 대체 그렇게 감탄하는 이유 좀 알려주지 그래, 혼자만 깨닫지 말고. 내가 주인공인 '나'보다 펜대 굴리며 책상에 앉아 엉덩이가 문드러지고 허리가 아플 때까지 앉아만 있어서일까.

7. 조르바에게 공감할 수 없었던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그의 마초적 기질이 너무 세기 때문이다. 바람둥이인 그에게 여자란 즐기기 위해 있는 존재고, 남성이 항상 여성보다 위에 있다고 말한다. 읽다보면 은근히 여성비하적인 발언도 많다. 허나 이 책이 출간된 당시(1947년)를 생각하면 당연한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에 와서 조르바처럼 거칠게 말하고 여자를 탐해 오입질(!!!)을 좋아하면 그건 천하의 샹놈이 되는 거여. 그나마 조르바가 로맨티스트여서 다행이지.

8. 굳이 여성을 비하할 마음은 없지만, 조르바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 바로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고, 그는 여자를 좋아하니 그렇게 환장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당장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을 즐겨라. 어정쩡하다 보면 아무 짓도 못한다. 이것이 조르바가 주는 가장 큰 교훈이다.

9. '나'와 조르바의 다른 점이 있다면 육신을 대하는 점이다. '나'는 육신의 쾌락을 업신여긴다. 심지어 먹는 것조차 부끄러운 짓이라도 하는 것처럼 은밀하게 먹어 치웠다. 조르바는 완전 딴판이다. 육신을 부끄러워하고 정신적인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던 '나'에게 가장 인상 깊은 건 춤추고 노래할 때의 조르바일 것이다. 조르바가 환희에 차 노래부를 때, '나'가 책상머리에 앉아 수없이 읽고 고민하던 시, 음악, 사상- 이것들이 아크! 아크! 따위의 절규로 터져나온다. 한글을 처음 배우신 할머니들께서 쓰신 시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너무 영롱할 때, 책을 보고 거듭한 연구 따위가 뭐가 필요한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온전히 행동만으로 이루어진 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와 춤으로 소통했다는 조르바의 이야기는 어떤 종류의 '정신'이 중요한가에 대한 작가의 답변일 것이다. 그래서 뒷부분에서 '나'가 조르바에게 춤을 가르쳐달라는 문단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10. 조르바는 책과 친하지 않았지만 대지 위에 두발로 서서 바람, 땅, 물, 생명 만물의 영혼을 느끼며 살아왔다. 반면 '나'는 책상에만 앉아 온갖 책을 읽으며 쓰기만 했다. 조르바는 죽음은 무엇일까 하는 말에 '나'가 읽은 책에 뭐라고 쓰였냐고 묻는다. 줄창 묻는 게 그거다. 백날 책만 잡고 있어봐야 알 수 있는 게 무어냐고. 작가가 직접 겪은 일을 엮어 쓴 책이어서 그런지 '나'에게는 작가의 모습과 사상이 투영되어 있다. 글이나 쓰던 작가에게 자유로운 영혼 조르바(실제로 만난 이의 이름도 조르바란다)의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허나 지식과 경험은 같이 이루어져야 빛을 발하는 법이다. 너무나도 다른 모습의 두 인물을 전면에 등장시키고, 종국에는 자신의 모습을 지키면서도 조르바에게 조금은 감화된 '나'가 보기 좋아보이는 이유는 뭘까. 단순히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11. 나만의 상상인데, 현대 사회에 조르바처럼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무작정 자유분방하게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그게 과연 최선일까. 내가 보기엔 적어도 조르바는 능력 있는 남자다. 그것도 매우 출중한 능력. 일을 해도 탄광을 캐는 잡일이 아니라 일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심지어 케이블카도 세울줄 안다.(물론 결과는...) 산투르도 칠줄 알고 열정적으로 춤도 출줄 안다. '나'와 헤어진 뒤로 또 땅을 파서 한몫 잡은 듯하다. 그렇다. 엄청 좁고 빈약한 시야로 판단하건데 우울하게도, 조르바처럼 살기 위해선 특출난 능력을 가져야만 한다. 덤으로 계약직으로 일하면서도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어야 한다. 결론은 특별한 능력이 없으면 월급쟁이로 살아라? 뭐야 이거.

12. 하지만 마음만은 그렇게 먹지 말지언저. 비록 일과 돈에 매인 우리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데 믿음이 있어야 한다. 조르바 말마따나, 만사는 마음먹기 나름이니까. 믿음이 있느냐- 곧 낡은 문설주에서 떼어 낸 나뭇조각이 성물이 될 수 있다. 믿음이 없다면- 거룩한 십자가도 그런 사람에겐 문설주나 다름이 없다. 믿음이 있는 자에게 자유가 있을진저.

13. 인생. 변화무쌍하고, 요령부득이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그러나 마음대로 안 되는... 무자비한 인생. 그런 인생 속에서 젊음이란 일과 술과 사랑에 자신을 던져 넣고, 하느님과 악마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고, 조르바는 말한다. 흐음, 발췌문을 써놓고도 이제서야 깨달았는데 이 책을 조금 오독한 것 같다. 인생을 무조건 즐기라는 게 아니라, 자신의 앞에 있는 모든 것들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구나. 이 책에서 유명한 대사도 아래와 같다.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일하고 있네.>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 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14. 마지막으로 과부의 대사을 인용하면서 성급히 마무리한다. 오독을 감추고자 과감히 발췌문으로 가득 채운다.

⎡와요, 어서 와요. 인생은 한줄기 빛처럼 지나가는 것. 어서 와요, 와요, 와요, 너무 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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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독서의 해 - 내 인생을 구한 걸작 50권 (그리고 그저 그런 2권)
앤디 밀러 지음, 신소희 옮김 / 책세상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2015-046.


0. 여러번 생각하지만, 책세상 출판사의 메타북(첵에 관한 책) 표지 디자인은 복고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촌스럽다. 이는 데이비드 실즈의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표지평과도 정확히 일치하는데,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실즈의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가 멋진 디자인인 것과 완전 반대이다.


1. 촌스런 표지에 촌스런 폰트의 표지지만 부제가 걸작이다. '내 인생을 구한 걸작 50권 그리고 그저 그런 2권'. 물론 장정일의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만큼 인상적이진 않지만 걸작 50권과 영 아니었던 2권의 대비가 강렬하다. 걸작이야 남들이 손꼽는 책을 골랐을턴데, 과연 그저 그런 2권의 책은 무엇일까. 제목에는 왜 위험하다는 단어가 들어갔을까? 표지부터 호기심을 자아낸다.


2. 저자 앤디 밀러는 작가이자 출판 편집자이다. 젊었을 적엔 책과 글을 좋아했지만 시간이 지나 일에 치여 살 수록 책에서 멀어져간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퇴근하면 아내와 아이에게 시간을 쏟는다. 읽는 거라곤 이메일뿐이고 지하철에선 스도쿠에 머리를 싸맨다. 다시 예전처럼 책을 읽겠다고 다짐하지만 쉽지 않다.


3. 그는 아들과 산책을 하던 중 비가 와서 잠시 들른 서점에서 우연히 미하일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집어든다. 오랜만에 어려운 독서를 해서일까, 난해한 스토리와 수많은 상징으로 가득찬 이 책을 쉽게 읽지 못했다. 동시에 읽기에 대한 열망을 다시 불태운다. 닷새만에 읽은 이 책이 그의 시간을 조금씩 뒤바꿨다.


4. 저자는 아내와 함께 책 목록을 작성한다. 지금까지 읽지 않았다는 게 정말 창피하게 느껴지는 책들을 쭉 적는다. 목록에는 <공산당 선언>이 있고, <모비 딕>도 있으며 <오만과 편견>도 있다. 악평(!!!)이 자자한 <소립자>, <전쟁과 평화>, 다른 책들과 다른 부류의 <실버 서퍼 에센셜>(마블의 그래픽노블)도 있다. 그리고 하루에 50쪽씩이라도 읽어 책을 꼭 끝내기 위해 노력한다.


5. <위험한 독서의 해>는 엄밀히 말하면 책보다는 독서에 대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책의 이야기를 온전히 담지 않고 철저하게 분석해 평론형식으로 끌어가지 않는다. 앤디 밀러의 회고록이자 고백록이다. 자신이 책을 읽을 때 어떤 상황이었는지, 솔직한 소감은 어땠는지(그는 <인간의 굴레>를 읽고 쓰레기라 평한 바 있다), 책을 읽은 후 자신의 시간을 생각하는 방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말한다.


6. 저자는 아내와 함께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었는데, 자신은 시큰둥한 반면 아내는 큰 감명을 받았다. 재밌는 것은 이후로 책을 그리 많이 사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보다 더 많이 읽고 다양한 주제의 책을 읽었지만 책 자체에 대한 욕심, 더 많은 책을 쌓아두고 싶다는 욕구를 잃은 것이다. 아내는 어째서 자신들에게 저렇게 많은 다른 책들이 필요한 것인지 반문한다.


7.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책을 사는 것은 좋은 일일터이다. 책을 읽을 시간도 함께 살 수만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흔히 책을 사는 행위 자체와 책의 내용 습득을 혼동한다.


8. 이는 중요한 쟁점이다. 독서가 유익하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시간은 짧고 읽을 거리는 많아서 많은 책을 욕심낸다. 다독이 미덕이 돼고 속독은 물론이거니와 한번에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 초의식 독서법이 유행한다. 허나 저자가 생각하는 바로는, 유행에 따라 열광적으로 책을 읽으려는 최근 우리의 욕구로 인해 독서의 가장 큰 두 요소인 인내와 고독이 위기에 처했다. 천천히 읽고 생각의 진화가 느려도 안에서부터 벅차오르는 독서를 권한다.


9. 덧붙여, 감흥은 어디서부터 올지 모르므로 책이 어려워도 끝까지 붙들고 읽어보라고 말한다. 이는 '재미없으면 덮어라, 어차피 읽을 거리는 많다'라는 독서법과 정확히 반대다. 허나 영 진도가 나가지 않아 던져버리고만 싶은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하나가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것이 깊은 사유가 되든 쓸데없는 생각이 되든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다. 오랜 기간 읽힌 책이라면 분명 순간순간 뭔가 거대하고 나은 존재에 대한 인식을 보여줄 것이다. 아, 그런데도 아니다 싶으면 그때 가서 덮어버리면 되지 뭐.


10. 그는 본격적으로 책을 읽으면서부터 블로그도 그만두었다. 블로그에 감상을 쓰고자 하면 책을 전체적으로 조망하지 못하고 초반에 떠올린 개념과 이미지를 책의 나머지, 즉 대부분에 끼워맞추게 된다. 페이지를 아무리 넘겨도 이러한 발상을 블로그에 그럴싸하게 적을 방법에만 몰두해서 진짜 책읽기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그에게 독서는 의견표명이 아니라 생각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읽고나서 뭔가 길고 그럴 듯하게 감상을 남길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마치 이 글을 쓰는 나에게 말하는 것 같지만 가볍게 무시하기로 한다.


11. 목록의 책을 모두 읽은 저자는 독서의 목표가 있다면 지금 당장 시작하길 권한다. 목표를 당장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내일의 일이 될 것이고 결국 올해, 내년, 언젠가가 될 것이고, 아마 절대로 목표를 이룰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부끄러워하지 말고 우선 책을 꺼내보자. 


12. 위험한 독서의 한 해를 지낸 뒤에 앤디 밀러라는 사람이 어떻게 변했을까. 뻔뻔하게도(!) 그는 자신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더 나은 사람, 더 관대하고 온화하며 지식과 교양이 넘치고 빈정대지 않는 독자가 된 척할 수도 있지만 그건 <위험한 독서의 해>의 에필로그를 교훈이 넘치게 만들 뿐이다. 책을 읽은 후 그에게 온 변화는 적어도 더 이상 책에 대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13. 저자는 책에서 소개한 책을 모두 읽으라고 강권하지 않는다. 그가 만든 목록은 그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부록에서 그가 만든 인생 개선 도서 목록을 소개한다. 독자가 완전히 초짜일 때 읽기 시작하기에 가장 쉬울 항목이라고 별표를 친 책 중에 <거장과 마르가리타>와 <소립자>(미셸 우엘벡)가 있다. 이것만 봐도 저자의 독서 내공이 평균 이상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제시한 목록을 참고하되 목록에 매달릴 필요는 전혀 없다. 이 책을 읽은 후 강렬한 독서의지가 불타오르고 우리 마음속 어딘가의 목록을 불러일으키면 된다. 전부터 정말 보고 싶었던 책, 어려워서 중간에 덮어버렸던 책, 남들은 다 읽었다지만 자신은 아직 읽지 못해 부끄럽고 죄책감이 든 책. 어떤 책이든 우선 펴보자. 이후에 우리의 삶과 시간이 어떻게 변하리라고는 예측할 수 없다. 허나 생각하고 깨닫는 독서는 어떻게든 우리에게 경험을 주기에 항상 이롭다. 계속 읽겠다. 죽이 되는 밥이 되든 먹을 수는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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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의 론도 오리하라 이치 도착 시리즈 1
오리하라 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031. 도착의 론도, 오리하라 이치


0. 언제나 그랬듯이, 어디서 누구에게 추천받은지 모르는 책이다. (산 건 분명 알라딘 중고서점이렸다) 한참 우타노 쇼고의 서술트릭에 빠졌던 때, 서술트릭을 이용한 걸출한 작품으로 추천받은 책이렸다. 거진 2년 전에 사둔 책인데 책꽂이에 박혀만 있다 이번 책정리에서 팔려고 놔둔 책이다. 그러다 요즘 책이 잘 안 읽혀 오랜만에 가볍게 읽으려고 편 엔터테인먼트 소설.


1. 흔히들 할 수 있는 착각일 것 같은데, 도착은 어떤 장소에 다다르다는 뜻이 아니다. 뒤바뀌어 거꾸로 된다는 뜻을 가진 단어다. 제목만 보고 무슨 모험소설인가 싶지만, 실은 서술트릭의 거장이 쓴 도착 시리즈의 첫 권이란 말씀.


2. 이야기는 작가 지망생 야마모토 야스오가 월간추리 신인상에 도전할 원고를 쓰면서 시작한다. 고생 끝에 야스오는 원고를 끝내지만 친구 기도 아키라가 중간에 원고를 잃어버린다. 이 작품은 신인상 수상작이 되지만 당연하게도 수상자는 야스오가 아니다. 상금과 명예를 모두 뺴앗긴 야스오는 분노에 차 수상자를 찾고자 한다. 원작자와 도작자를 둘러싼 진실의 공방. 그 사이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3. 1989년 작품임에도 전체적으로 깔끔한 소설이다. 일본의 엔터테인먼트 소설은 예전부터 발전해왔기에 전혀 촌티가 나지 않는 장점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툭툭 끊기며 빠른 서술과 전개가 강점이다. 서술트릭으로서 그 반전도 매우 충실한 편이다.


4. 서술트릭의 최대 단점은 호불호가 매우 갈린다는 점이다. 단 몇 줄만으로 앞의 수많은 페이지를 단숨에 뒤집어버린다는 점에서 쾌감을 몇배로 느끼는 이가 있는 반면, 단순하고 저열한 속임수로 치부해버리는 이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트릭은 모든 내용을 엎어버리지만 개연성이 부족하게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랬기 때문에 그랬답니다, 후훗.


5. 몇은 서술 트릭을 힌트가 없고 바로 답이 나오기 때문에 싸구려 트릭이라고 치부하지만, 근래 추리 소설 대부분이 그렇다. 특히 소년 탐정 김전일 같은 본격 추리가 등장하면서 독자가 추리에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줄어들었다. 독자가 끼어들 만한 틈이 없다고 서술트릭을 비하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6. 어쩌다보니 서술트릭에 관한 이야기만 주저리댔는데, 어쨌든 책은 재밌다. 복수에 미쳐 광기로 물들어가는 인물들을 보면 뒤에는 어떤 일과 사건이 벌어질까 기대감에 부풀어 책을 덮을 수 없다.(실제로 하루만에 읽었다) 어떤 트릭이든 추리소설을- 특히 일본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면 강력히 추천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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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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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9.


0. 원체 읽는 행위에 강박에 가까운 감정을 가졌기에, 박웅현이 말하는 도끼로 머리를 쪼개는 듯한 느낌은 커녕, 재독에 욕심을 전혀 두지 않는다. 척 하기에 능한 나이기에 이미 읽은 책은 그 가치를 잃고 책장에 장식이 되거나 중고서점에 팔리기 일쑤다. 그런 나에게 재독한 책이 생겼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어마무시한 일이다.


1. 이 책을 읽은 건 '12년이다. 책 때문에 한참 친해진 친구에게, 강력 추천을 받아 빌려 읽기 시작했다. 그 친구는 이 책을 읽고 정말 경탄해 마지않았다고 했지만 나에겐 쏘쏘. 생각보다 읽기 힘든 책이었다. 게다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니.  단순히 제목만 보면 책읽는 척하고 단순히 위기상황을 모면하려는 법을 말하는 책 같다. 축약본, 요약본을 극도로 싫어하기에 첫인상이 좋지는 않았다.


2. 저자 피에르 바야르는 파리 8대학 프랑스문학 교수이자 정신분석가이다. 문학 교수라고 해서 엄청난 문학적 지식을 가지고  문학과 독서를 정통으로 파고들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자신조차 강의 중에 가열차에 언급하는 프루스트의 작품들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 그는 문학 비평을 통해 충격적인 논리와 상식에 반하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3. 책에서 저자는 비독서를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책에 아예 무관심하며 독서를 쓸데없는 행동으로 여기는 것이다. 책을 읽지 않는다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비독서의 뜻 그대로다. 다른 하나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에서 알 수 있다. '나는 내가 평문을 써야 하는 책은 절대 읽지 않는다. 너무 많은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4. 저자는 눈앞에 있는 책을 너무 많이 읽지 않음으로써 책에 완전히 파묻히지 않는 것을 강조한다. 한 책을 읽고 거기에 너무 빠져버리면 독자의 가치관은 넓어지지 않고 그 책에 국한될 뿐이다. 그는 무수히 많은 책에 침몰되지 않고 자신 안에 책들의 체계적인 관계를 만들어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책을 깊이 읽고 탐독하되 그 책의 위치를 정하지 못하는 사람과, 어떤 책 속으로 들어가지도 않으면서 모든 책 속을 돌아다니는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나은 독자인지 자문해볼 수 있다.


5. 이는 교양으로도 이어진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열풍에서도 알 수 있듯 교양이란 무엇보다 오리엔테이션의 문제다. 독자에게 교양을 쌓았다는 것은 이런 저런 책을 깊숙히 읽고 내용을 명확히 파악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줄 안다는 것이다. 책 사이의 관계를 파악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주장이다.


6.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책을 읽지 않았다는 것이나 대충 읽어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뚜렷한 내용은 잊었어도 책에서 느낀 감정이 기억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그 기억과 의미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만 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가치가 있다.


7. 3부에서는 모르는 책에 대해 얘기할 때 대처 요령을 말하는데,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자기 얘기를 할 것을 권한다. 어차피 독서는 절대로 객관적이 될 수 없고 개개인마다 받아들이는 내용이 다르다. 자기와 다른 감상이나 느낌을 말한다 해도 뭐라 할 수 없다. 여러 상황에 있어 중요한 것은 자기 얘기를 하는 것 혹은 책을 통해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이다.


8. 저자는 오스카 와일드를 언급하며 책을 대한 적절한 독서시간은 6분이고 독서에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한다. 또한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책이 있기에 상대적으로 적은 양의 책을 깊게 읽고 푹 빠져 독선적인 시선을 가지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독서는 재밌을 뿐이다. 어차피 저자가 말하는대로 읽는다 해도 세상에는 너무 많은 책이 존재한다.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은 남들에게서 얻으면 된다. 경계심과 자만을 줄이고 조금 열린 마음만 가진다면 이 문제는 모두 해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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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글쓰기 특강 - 생각 정리의 기술
김민영.황선애 지음 / 북바이북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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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

  신입사원 시절, 기흥에서 근무하던 나는 큰마음을 먹고 신촌 한겨레 문화센터에 방문했다. 가는 데만 한 시간 반이 넘는 거리였다. 수요일 저녁 8시 수업을 듣기 위해 5시가 되면 칼 같이 사무실을 나섰지만 2주만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때 그 강의를 들었다면 이 감상도 서평의 형태일텐데. 강의는 김민영 강사의 '서평쓰기'였다.

  신문 지면의 책 서평 시대는 지난 지 한참 됐고, 블로그가 성행하면서 인터넷에서 개인이 간단한 감상을 올리는 일이 많아졌다. 평범한 사람들이 미디어가 된 시대에, 독자는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쓰기를 원했다. 글을 쓰는 데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다들 글을 잘 쓰기를 바랐다. 그런 의중을 파악한 책이 바로 이 책이라 할 수 있다.

  저자인 김민영은 취미로 쓴 서평, 영화 비평, 드라마 리뷰로 네이버 파워블로거가 됐고 도서관, 한겨레문화센터 등에서 서평 쓰기 강의를 하고 있다. <첫 문장의 두려움을 없애라>(청림출판, 2011)이라는 글 쓰기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다른 저자인 황선애는 숭례문학당에서 독서토론에서 시작하여 꾸준히 코칭과 강의를 해왔으며 김민영과 마찬가지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서평 입문 강의를 하고 있다.

   책은 서문에서 서평을 책을 가장 잘 기억하는 방법이라고 규정한다. 책을 읽어도 남는 게 없고 뭔가 달라진 것도 없으며 그저 쪽수만 넘기는 독서는 우리 삶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마음 굳게 먹고 글을 써보려 노력하지만 정리조차 되지 않고 자신의 글이 괜히 부끄러워진다.

 감상이 아닌 답을 쓰는 것을 배워온 우리나라에서는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간단히 감명깊었던 구절을 하나라도 옮겨적어보라고 조언한다. 거기에 감상 하나를 덧붙이면 금상첨화. 발췌문과 감상이 쌓이다보면 어느새 그럴듯한 독후감이 된다.

  그런데 독후감과 서평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저자는 전자를 책 읽은 소감으로 나의 느낌을 표현하는 글로, 후자를 객관적인 정보나 책 내용이 주가 되는 글이라고 구분하였다. 물론 서평도 자신의 생각이 들어가나 전체의 1/3 정도만 주관적 평가가 들어간다고 말한다. 이 책은 책을 읽고 나서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은 이들을 위해 간단한 로드맵과 일정한 틀을 소개한다.

  시중에는 글 자체나 소설, 산문 쓰는 법을 말한 책은 많으나 서평쓰기를 다룬 책은 처음 보는 듯하다.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소개한 이 책이 보물같은 이유 중 하나다. 책에서 보여준 몇 가지 틀을 이용해 글을 써보니 이전보다 글쓰기가 훨씬 편해졌다. 저자가 쓴 좋은 서평도 몇 편 소개되어 어떻게 써야 매력적인 글이 되는지 알 수 있다. 특히 6장에서 초보부터 시작해 어엿한 서평가가 된 여섯 명의 인터뷰는 첫 글자를 쓰기 힘든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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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9 11: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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