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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갑이다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평점 :
작가 미야베 미유키는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 순위에서 요시모토 바나나와 에쿠니 가오리를 물리치고 무려 7년째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 그녀는 수상경력도 화려한데, 87년에 데뷔작『우리들 이웃의 범죄』로 요미모노 추리소설 신인상을 받았고, 89년『마술은 속삭인다』로 일본추리 서스펜스 대상, 92년『용은 잠들다』로 일본 추리작가 협회 상, 93년『화차』로 야마모토 슈고로 상, 97년『가모저택 살인사건』으로 일본 SF 대상, 99년『이유』로 제120회 나오키 상, 2001년『모방범』으로 마이니치 출판 대상 특별상, 2007년『이름없는 독』으로 요시가와 에이지 문학 상을 수상했다. (책 날개 참고)
내가 그녀와 처음 만난 작품은『스텝파터 스텝(Stepfather Step)』이었다. 프로 도둑이라 자부하는 화자보다 복합언어를 구사하는 쌍둥이의 캐릭터가 더 기억에 남았고, 귀엽고 발랄하고 유쾌한 느낌이 강하게 남았다. 그런데 그런 느낌은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에서 익히 느꼈기에 그닥 끌리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보다 '온다 리쿠'의 작품을 먼저 읽기 시작했다. 거기다『모방범』의 방대한 양으로 인해 중도 포기하게 되고, 그 후에는 딱히 그녀의 작품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나는 지갑이다』의 원제는「기나긴 살인 長い長い殺人」으로, 내용은 원제에 어울리게 1년 6개월간 벌어진 보험금을 노린 네 건의 연쇄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각 파트의 화자는 사건과 관계된 어떤 인물의 지갑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것은 형사가 되고, 탐정이 되고, 목격자가 되고, 증인이 되고, 범인이 된다. 지갑은 그 인물의 가장 가까운 소유물이다. 범인의 지갑처럼 서랍에 방치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지갑을 소지하고 다닌다. 그러나 지갑은 단순히 관찰하는 입장에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몰입도를 높이지 않았나 싶다. 독자가 등장 인물에게 개입할 수 없듯이, 이야기를 전해주는 지갑 역시 인물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목소리를 높일 수 없고, 위험한 순간에 그 인물에게 경고등을 켤 수도 없다. 그래서 독자는 단지 전해주는 이야기를 편하게 들을 수 있다. 지갑의 수만큼이나 많은 인물이 다양한 성격으로 그려지는데, 재미있는 것은 지갑들조차 그 주인의 성격과 동일하거나 유사하지 않고 각자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버스 안내양의 지갑은 그녀를 보호하려 하고, 탐정의 지갑은 아예 그를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주장한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소년의 지갑'과 '탐정의 지갑'이었다. 두 사람은 힘이 없거나 너무 늦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지 못했고, 그녀를 가슴에 묻고 살아갈 남은 사람들이기에 가슴이 저리고 안타까웠다. 10개의 지갑이 전해주는 이야기가 연작 단편의 형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빠른 전개와 몰입도를 높여줬다. 읽다 보니 내가 지갑을 너무 홀대한 건 아닌가, 미안한 생각이 든다. 돈이 들어온다고 해서 빨간 지갑을 샀는데, 나가는 돈이 더 많아진 게 홀대한 이유랄까. 내 지갑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요즘 출판계는 과거로 회귀한 듯 보인다. 이미 많은 팬층을 확보한 일본작가의 데뷔작이나 초기작으로 방향을 돌린 것 같다. 아니, 이미 많은 작품이 쏟아진 탓에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런 방향을 환영하고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이왕이면 출간시기 순으로 만나보고 싶은 맘도 있지만, 아예 안 나오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시류에 휩쓸려 나온다 쳐도 '천재 작가'를 탄생시킨 작품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팬의 마음이다. 그리고 그 탄생이 언제나 범상치 않았음을 기억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발전하고 변화하고 전환점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흐뭇하다. 작가의 성장 과정이랄까.